* 아편전쟁 후에도 아편외엔 공산품 수출이 별거 없다는 이유로 불만이던 영국
- 아편전쟁 후 14년동안 상호 불만, 혐오가 게속되다
- 추가 개항 요구와 교역 강화 요청
* 남중국해에서 국적을 초월한 무법자 범죄연대(해적)가 만개하고 있었다
* 1856.10월 황푸항에 영국 선박 애로호가 정박하자 해적 색출을 위해 중국 관헌들이 수색
- 중국인 선원 12명 연행
- 영국 깃발을 끄집어 내렸다는 설도 있음
- 케네디 선장이 광저우 영국 공사관으로 가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에게 고자잘
- 영국에서 요청한 꼬투리가 될 거 같다고 판단한 파크스가 광저우 총독 아문에 난입
- 선원들 석방 및 사과 요청하며 따지다가 따귀를 맞는 등 충돌
- 파크스가 판을 키워 홍콩의 보우링 총독에게 보고
- 보우링이 엽명침에게 최후 통첩
- 엽명침이 묵살하자 함선 3척과 병력 수백으로 광저우 공격
(태평천국의 난으로 인해 대응 여력이 없을 것으로 판단)
- 사태가 지속되자 백성들의 배외감정이 폭발
* 1856.12월 광저우 민중의 반영 봉기
- 황푸항과 13행가가 불타고 외국인들은 전부 홍콩으로 도주
* 1857.1월 초 군, 민 2만여명의 중국측 반격으로 영국 함선들은 좌초위기를 겪으며 주강 탈출
- 지상병력도 모두 철수
- 본토 뿐 아니라 홍콩의 중국인들 동향도 의심스럽던 차에 영국인들이 이용하던 빵집 밀가루에 독이 섞인 사건이 발생
(보우링 총독 부부도 독 밀가루 피해, 보우링 부인이 비소중독으로 이듬해 사망)
- 광동에서의 사태로 베이징에선 낙관, 강령론이 우세
* 1857.3월 영국의회에서 전쟁에 대한 투표
- 휘그당 정권의 전쟁안이 부결되었으나 파머스턴이 의회 해산 후 총선 실시
- 1857.4월 총선 실시 결과 하원 654석중 377석을 휘그당이 차지하는 압승
(5천 병력이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
* 1857.5월. 그러나 인도에서 세포이 항쟁 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