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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신앙생활을
2020년 11월 1일 / 히브리서 11:8-16
히11:8-16 /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향을 떠나 약속해 준 먼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고향을 떠났습니다. 9)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훗날 하나님께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처럼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10)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진 하늘의 도성으로 그를 데려다 주시리라는 확신 속에서 기다리고 산 것입니다. 그 하늘의 도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설계하고 건설하신 곳입니다. … 13) 지금 내가 열거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얻은 뒤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그 약속이 자기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참 고향이 아니고 다만 자신들은 잠시 이 땅에 나그네로 와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4)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아 하늘에 있는 참 고향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달콤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면 언제든지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16)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그들을 위해 하늘의 도성을 만들어 두셨습니다.
■ 엘리자 에드먼드 히윗 여사가 작사한 찬송가 370장 ‘주안에 있는 나에게’는 그녀가 가장 고통의 시간을 지날 때 쓴 자신의 신앙 고백이다. 그녀는 소년원에 있는 불량소년들을 교화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을 하였다. 어느 날 한 소년과 상담하며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한 다른 소년이 벽돌로 그녀의 등을 내리쳤다. 상상할 수 없는 갑작스런 공격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그때부터 장장 7개월이라는 시간동안 꼼짝도 못하고 누워서 척추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녀는 원래 건강하고 신앙이 강하였지만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서 대소변까지도 받아내야 하는 투병생활에 지칠대로 지쳐 신경은 날카로워져 갔다. 그것도 결혼조차 하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대소변을 받아 내는 신세가 되었으니 얼마나 앞날이 암담했겠는가. 원수를 은혜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음속에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날이 갈수로 자신에게 이러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하는 그 소년을 생각하면 할수록 증오와 미움이 더해가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화사한 봄날 아침, 그녀는 병상에 누워서 창밖을 내려다보면서 따뜻한 봄날 꼼짝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여 더욱 더 우울한 마음으로 누워 있을 때, 그녀의 방을 청소하는 흑인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빗자루 질을 하면서 흥얼거리며 즐거워하는 그 흑인 청소부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청소부 주제에 뭐가 그리 좋아서 웃으면서 노래를 부르나요?” 그러자 흑인 청소부 여자는 미소를 띠며 대답을 하였다. “좋지 않다니요? 나에게 닥친 모든 형편과 처지를 찬송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우리 주님이 주셨는데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나요?” 히윗 여사는 갑자기 감전된듯한 충격에 빠졌다. “‘평생 남에 집에 청소만 하고 사는 흑인 여자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찬송할 수 있다니!, 나는 평생 주님의 일을 해온 나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다니!!’하며 원망만 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심령 깊은 곳에서 회개와 애통의 말들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참회의 마음을 원고지에 적어 내려갔고 이렇게 하여 찬송가 370장이 작사된 것이다. 그녀는 그 시간 이후 병상의 시간이 기쁨의 시간이 되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척추가 완전히 치료되었다. 그 후 그녀는 그 소년을 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어 다시 공립학교의 교편을 잡았고, 나머지 인생을 청소년들을 교화하는데 바쳤다.
♬ 370장 ❶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집을 풀었네
<후렴>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 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❷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❸ 내 주는 자비 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 주시네
❹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찬송가 370장은 천국을 소망으로 하여금 좁은 길을 가는 성도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세히 기록했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세상을 광야의 길을 걷는 것과 같다면 나그네인 성도가 목적지로 삼고 가야할 곳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천국이다. 천국에 가기까지에는 1절에서 4절까지에서 계속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이 누구에게나 있어야 한다. 그렇다.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는 무거운 근심과 죄의 짐을 십자가 밑에 나와야 벗어버려야 한다. 때때로 두려움과 더불어 깊은 한숨을 쉬기도 하지만 주님 안에서 기도하며 극복해 나가야 한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선한 목자로서 가야할 길을 인도하실 것이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지켜주시며 언제나 순례자인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약속하신 하늘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이다.
히 4:14-16 / 그러나 하늘로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바로 우리를 도우실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신앙을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15)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가 당하는 이 시련을 몸소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단 한 번도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하신 일이 없습니다. 16) 그러니 우리도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자비를 입고 필요에 따라 주시는 은혜와 도우심을 받읍시다.
● 누군가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의 믿음은 그 사람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소개되고 있는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 같이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증거하며 살았던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다.
4절에서 아벨은 아담의 둘째 아들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어서 그런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5절에서 에녹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7절에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갔다.
한번 생각해 보시라. 노아라고 하는 사람은 에녹의 아들인 라멕의 아들로서 창세기 4장과 6장의 말씀을 읽어보면, 노아 당시의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과 상관없는 세상의 문화와 가치를 창조하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었겠는가? 그런 상황 가운데서 홍수 심판에 대한 말씀과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그것도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방주를 만들었으니 그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해 보일까?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도 귀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묵묵히 그 일을 수행했으니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8절과 11절에 소개되고 있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의 경우에는 그들의 상황에서는 대단한 믿음을 보여준 사람이다. 우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믿음으로 그 부르심에 순종하였으며,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다. 또한 그의 아내 사라는 창세기 11장의 말씀에 의하면 원래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였을 뿐만 아니라 나이가 많아서 단산한 상황에서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으므로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어서 이삭을 출산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서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을 보는 복을 받았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본문 말씀은 이제까지 말씀드린 이 사람들이 하나같이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음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이 세상에서의 본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 곧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한 성인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살았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부지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면서 살았다고 본문 말씀은 강조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들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우리 모두가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 세상의 것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그것을 얻으려고 쫒아가는 삶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그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기쁨으로 뵈올 준비를 하며 살아가는 삶에 더 많은 열정을 쏟아 부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살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제1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이다. 이곳에 본토, 친척, 아비집이 있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떠나라고 하셨다. 아브람은 그곳에 미련을 두지않고 떠났다. 그날부터 아브람은 나그네가 되었다. 아브람의 제2고향은 가나안 땅 헤브론이다. 이곳에 정착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떠돌았다. 애굽, 그랄, 블레셋을 떠돌다 결국 헤브론에 정착하였고 이곳에서 사라도 죽고 아브람도 죽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제3의 고향, 아니 본향(本鄕)인 하늘을 사모하며 나그네로 평생을 살았다.
이스라엘은 본래 유목민 출신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디아스포라로 흩어지면서 유목민 성향은 더 커졌다. 아브라함은 당시 비옥한 초승달지대라고 하는 중동의 목초지를 찾아 떠돌던 유목민이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함께 하셨는데,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고 도착해보니 그곳은 가나안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약속(창 12:2-3)을 믿고 나름대로 믿음 안에서 살아갔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그리고 이삭의 아들 야곱도 다 이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 언저리에 살았다. 결국 모세와 여호수아 때에 이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된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다시 바벨론과 그 후에 로마에게 땅을 빼앗기게 되었고 디아스포라 상태로 흩어졌다. 그러다 다시 1948년에 팔레스틴 땅을 회복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약속이 실현된 것일까?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니다’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가나안 땅이라는 것은 하나의 모형(模型)이고 그림자일 뿐이다. 진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약속의 땅이 있다고 하였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10)고 하였다. 믿음의 후손들도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15-16)고 하였다. 그들 모두가 바랐던 것은 세상에 있는 땅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있었는데 하늘에 있는 본향이었다. 가나안 땅을 떠나서 살 때도 있었고, 가나안 땅에 살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다 고향이 아니었다. 그림자일 뿐이고 스쳐지나가는 오아시스 또는 여관이었을 뿐이다.
아브라함, 모세도 예언자들, 베드로도 사도 바울, 신앙의 모든 선진들도 그래서 이 땅에서 외국인처럼 나그네처럼 살았다. 한국 땅에 살지만 시민권이 하늘나라에 있는 사람은 이 땅에 미련두지 않는다. 세상에 재물을 쌓아두지 않는다. 땅의 일에 매이지 않는다. 여차 하면 떠날 준비를 하며 산다. 그것이 신앙인이요 거듭난 사람이다. 그래서 신앙인들을 일컬어 나그네라고 하고 이들 역시 그렇게 불리어지는 것을 당연시하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돌아갈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만일 이 땅이 그들의 목적지요 멈추었어야 할 고향이었다면 수많은 순교자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을 읽을 때마다 늘 감동을 받는 말씀이 있어 잠시 소개한다. 이를 소개하는 것은 누구든지 하늘소망을 가지면 저들과 같이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이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도 감동적이지만 그보다 특별한 은혜는커녕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여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히 11:33-40 / 이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이웃 나라들을 정복하였으며 자기 백성들을 정의로 다스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았습니다. 또한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해를 받지 않았고 34) 맹렬히 타는 불구덩이에 던져졌으나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죽음의 칼날을 피해서 위험을 면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들고 연약하였으나 믿음으로 다시 건강하게 되었고, 또 어떤 사람은 전쟁터에서 믿음으로 큰 힘을 얻어 적군을 전부 격퇴시키고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35) 그리고 어떤 여자들은 믿음이 있었으므로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장차 더 나은 생명의 부활을 얻으려고 감옥에서 풀려나는 대신 매 맞고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유의 몸이 되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36) 어떤 사람들은 조소당하고 매 맞고, 다른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37-38) 어떤 사람들은 돌에 맞아 죽고, 어떤 사람은 톱에 두 동강으로 잘려 죽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버리고 풀려나기 보다는 칼에 맞아 죽는 편을 택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이나 염소의 가죽으로 변장을 하고 광야와 산을 방황하였고 동굴이나 토굴에서 숨어 살며 굶주림과 병과 학대에 시달려야 하였습니다. 39) 이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것을 전부 다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4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보다 더 좋은 것을 준비해 두신 것을 그들에게도 주시려고 기다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들의 모습을 마음에 떠올리며 나도 순례자의 길을 걷다가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산순교자로 남기를 소원하며 기도를 올린다.
▶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이라는 순례자의 모습은 신앙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우화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주인공 ‘크리스천’은 성경 말씀을 읽다가 자기가 사는 이 땅이 장차 망할 성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가족을 떠나 순례 길에 오른다. 중간에 많은 유혹과 시험을 만난다. 골고다 십자가 아래서 자기 등에 달려 있던 짐이 풀어지는 경험도 한다. 좋은 믿음의 친구도 만나고 유혹하는 자들도 만난다. 세상 유혹에 넘어가는 자도 만나고 고난에도 믿음을 지키다 순교하는 ‘믿음’이라는 친구도 만났다. 그 중 ‘허영의 도시’라는 곳을 지난다. 허영의 도시는 세상의 쾌락을 상징하는 도시이다. 이곳의 풍경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집, 토지, 명당자리, 무역물자들, 직위, 명예, 승급, 귀족 칭호들, 국가들, 왕국, 욕정, 향락 등등이 거래되고 또한 모든 종류의 쾌락을 위하여 매춘부들, 포주들, 아내, 남편, 아이들, 주인, 하인, 생명, 피, 육체, 영혼, 은, 금, 진주를 비롯한 각종 보석 등등 온갖 것들이 다 있었다.> 이것들은 세상이 동경하는 것들이었고, 순례자들을 유혹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것들이다. 크리스천은 이 모든 유혹을 이기고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 영원한 천국에 입성하게 된다.
『천로역정』은 17세기 개혁교회 성도들이 즐겨 읽었던 작품이다. 성경 이래로 가장 많이 출판된 책이라고 한다. 천로역정은 성도들이 가야 할 고향이 어디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의 영광과 쾌락이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 땅의 유혹을 이기는 성화(聖化)와 그런 과정을 통해 들어가게 될 천국이었다.
▶ 중세시대도 예외는 아니다. 중세 시대는 단테의 ‘신곡’이 있었다. 14세기 초의 작품이다. 이 책은 지옥과 연옥, 천국 여행담에 대한 기록이다. 지옥은 모두 9층 17개의 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각 원에 해당하는 죄수들이 벌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배교자와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에서 이름이 높았고 권력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많다. 장군, 시인, 황제, 주교, 교황, 사업가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끓는 피가 흐르는 곳에 눈썹까지 잠겨 고통을 겪는다. 이 또한 중세시대에 즐겨 읽던 작품이다. 세상에서 높게 생각했던 권력이나 부가 죽음 저편에서는 오히려 저주의 도구가 되고 있다. 이 작품 또한 우리가 이 땅의 순례자임을 잘 보여준다. 이 땅에 매이고 이 땅에서 영광을 받으면 영원한 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없다.
4세기 무렵에는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로마 멸망기에 기록이 되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왜 로마 제국은 망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한 책이다. 어거스틴은 신앙인이 추구하는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성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신앙인들의 목표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세상 나라의 흥망성쇠와 기독교는 관련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을 향하여 나가는 나그네들이다.
▶ 본문 13절 말씀에서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다(다만 자신들은 잠시 이 땅에 나그네로 와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아브라함 / 사라가 죽었을 때에 장례를 지내야 하는데, 그의 개인 사유지가 하나도 없었다. 사라는 127세를 살고 가나안 땅 헤브론 기럇아르바에서 죽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장막에 들어가 사라를 생각하며 슬퍼하며 애통하였다. 그러나 슬퍼하고 탄식하며 울기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고인을 위한다면 장례를 지내야 했다.
그래서 그는 그 땅의 원주민 헷 족속에 나아가 말했다. ‘당신들도 잘 아시다시피 나는 당신들 틈에 끼여 사는 나그네이지 않소? 그러니 내게 땅을 좀 파시오. 그래야 세상을 뜬 내 아내를 그 땅에 장사지낼 수 있지 않겠소?’(창 23:4). 그래서 아브라함은 소할의 아들 에브론이 가지고 있던 밭과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당시에 아주 큰 돈, 은 사백 세겔에 주고 사서 아내 사라를 장사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처지와 인생관을 말하면서,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 당신들한테 몸 붙여, 떠돌이’라고 했다.
야곱 / 130세에 아들 요셉이 재상으로 있는 애굽에 내려가서 왕 바로 앞에 서게 되었다. 바로가 야곱에게 물었다. “어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 야곱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나그네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살다 보니 내 나이 올해로 백 서른 살이 되었습니다. 우리 조상님에 비하면 그리 많이 먹은 것도 아니고 또 우리 조상님들처럼 그리 많이 헤매며 돌아다닌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때껏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 왔습니다.)”(창 47:9). 야곱은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라고 했다.
어떤 학자들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요 고백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13절에서 ‘지금 내가 열거한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 보고 환영하며’라는 번역이 애매모호하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게 되어 있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이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고, 약속한 일이 없는데, 자기 혼자서 기대하고 기뻐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의 뜻은 ‘약속하신 것을 다 받지는 못했지만,’이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의 생애에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었지만, 미래의 하나님이 되심도 믿었다.
열거한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고, 어떤 사람들일까? 8절 이하의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가리키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족장들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가족이며, 믿음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말은 ‘약속의 성취에 대한 기대와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것을 받지는 못하였고, 가시적으로 나타나거나 이루어진 것이 없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다. 바로 이것이 믿음으로 살았다는 증거이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하나님을 믿으며, 큰 자부심을 안고 살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엄청난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는 소중하고 가슴 벅찬 약속을 주셨다.
창 12:1-3 /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너는 어서 고향을 떠나거라. 한데 어울려 사는 네 친척과 네 집안사람들을 떠나 내가 가르쳐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네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또한 네게 복을 내려 이름을 날리게 하리라. 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3) 네게 복빌어 주는 사람에게 나는 복을 내리리라. 네게 저주를 퍼붓는 사람에게는 나 역시 저주를 퍼부으리라. 무릇 땅위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
믿음이란 약속에 대한 확신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다. 땅을 차지하며,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시고, 그는 복의 통로, 근원이 되겠다고 하셨다. 이런 일들은 노아시대에 있었던 일처럼 ‘육신의 자손이 번창한다’는 세상적인 논리보다는 아브라함이 늘 마음에 두었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경건한 자손들이 많아진다’는 약속이기에 무엇보다 기뻐하였을 것이요,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생전에 그런 약속이 성취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고, 믿음을 잃지 않았다. 믿음이란 약속에 대한 확신이다. 약속의 자식 이삭을 주신 것을 보았을 때에 아브라함은 결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장차 자기의 씨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구원받을 것을 내다보면서 기뻐하였다.
이에 예수님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요한복음 8:56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는데, 그는 믿음을 잃지 않았으며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다.
히11:1 /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닙니까?
벧전 1:23 / 여러분은 새 생명(거듭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여러분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생명은 곧 썩어 버리지만 거듭난 이 새 생명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 새 생명은 인간 가운데 영원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지키신다.
민 23:19 /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라. 거짓말을 떡 먹듯하는 사람이 아니시라.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라. 쉽사리 생각을 고쳐먹는 인간이 아니시라. 약속하신 것 무엇이든 기어이 지키시고야 마시는 분. 말씀하신 것 무엇이든 반드시 실천하시고야 마시는 분.
예전 성경에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 않으시고’라고 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다. 사람은 거짓말을 잘하고 자기가 한 말을 잊어버리지만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 천지는 없어질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히 11:14 /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으로 보아 하늘에 있는 참 고향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같이 말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우리는 길손이며 나그네’라고 말한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강한 열망으로 고향을 사모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언제나 고향을 마음에 두고 있으니, 지금 이곳에서는 길손이며 나그네라고 강조하는 것이었다. 믿음의 조상들이 이 땅에 살면서도 마치 외국인과 나그네인 것처럼 살고 또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진정으로 고향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땅을 고향으로 생각하면서 가나안 땅을 떠나지 않았다. 14절의 ‘본향(하늘에 있는 참 고향) 찾는 자’라는 말씀은 16절의 ‘더 나은 본향(하늘의 도성)’과 연결되는 말씀이다. 15절에서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만일 그들이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달콤한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면 언제든지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물론 아브라함도 육신의 고향인 메소포타미아의 갈대아 우르라는 곳이 있었다. 갈대아의 우르는 아주 번성한 도시였다. 이곳은 지금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있는 그곳은 문명이 발달했고, 성읍이 있어서 치안이 발달한 곳이다. 웬만한 외부의 침입 정도는 넉넉히 막아낼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 사는 한 그들의 삶은 수백 년을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가나안에서의 삶은 결코 편안한 곳이 아니었다. 흉년을 비롯하여 외부의 침입으로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는 것을 구출해 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위로하시며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따를 것을 종용(慫慂)하셨다. 아브라함이 그의 본향, 조상의 땅,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하면 몇 번이라도 돌아갈 수 있었다. 아무리 양떼와 소떼를 데리고 간다고 해도 가능한 일이었다. 야곱과 같이 매일같이 조금씩 움직이면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면 재산과 소유를 이끌고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떠한 시련이 와도 가나안 땅을 떠나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갈대아 우르는 우상의 도시였다. 그 곳에는 우상을 섬기다 죽은 조상들의 무덤들이 잔뜩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더욱 그 곳에 미련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잃고 나이가 찬 아들 이삭 – 약속의 자식을 결혼시키는 중요한 일이 남았다(창 24장). 이에 충성스럽고 나이가 많은 그것도 후사로까지 생각했던 종 엘리에셀을 시켜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가라고 하지 않고 혼자 하란 땅으로 가서 며느리 될 여자를 찾아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다고 믿고 종을 보냈다. 며느리 될 여자를 찾지 못하였어도 아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지는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어떻게 남편될 사람의 얼굴도 보지 않고 종의 말만 듣고 어떤 여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겠는가? 종의 말만 듣고 따라온 리브가 또한 참 믿음이 있는 여성이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육에 속한 땅이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가족의 매장지로 헷족속 에브론에게서 은 사백 세겔을 주고 밭과 굴을 사들였다. 그리고 자기도 그곳에 묻히는데, 후손들이 두고두고 생각하며 어디에 살든지 돌아가야 할 곳, 지키고 싶은 성지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삭도 가나안을 떠나지 않았다. 야곱도 가나안 땅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묻힌 그곳에 자기도 장사를 지내라고 했다. 요셉이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부탁한 말도 그렇다.
창 50:24-26 / 요셉은 `이제 나는 세상을 떠나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을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 할아버지와 이삭 할아버지 또 아버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약속하신 대로 이 땅을 떠나 너희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이끌어 내실 것이다.' 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였다. 25) 그러면서 요셉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맹세를 시켰다. `나하고 약속하자.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실 때 이 몸도 꼭 함께 데리고 가겠다고 말이다.' 26) 요셉은 세상을 떠났다.
▶ 본문으로 돌아간다.
히 11:16 /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 않고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역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그들을 위해 하늘의 도성을 만들어 두셨습니다(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더 나은 본향’이라는 말씀이 가슴이 와 닿는다. 이 세상, 이 땅, 이곳 서울, 여의도에서 살기 좋고 여기서 꿈을 키웠고, 이곳에서 사랑하고 이곳에 가정을 이루고 이곳이 우리의 고향이라고 해도 성도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준비해주신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야 한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좁은 길을 걸어가면서 하늘나라를 사모하고, 그곳에 들어갈 것을 멀리서 바로보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셨듯이 성도들의 하나님이심을 수치로 여기지 않으신다. 이 말씀을 그대로 나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은 곧 나의 하나님이시다’는 말이다. 이것이 나의 고백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하며 나의 하나님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 되어야 하며 나를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예비한 하늘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던 길, 이삭이 가고 이삭이 가던 길, 야곱이 가고 야곱이 가던 길 요셉이 가고, 모세가 가던 길 여호수아 가고....... 엘리야가 가던 길, 엘리사가 가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 12사도들과 바울이 걸었고 … . 그렇다면 이제 ○○○가 간 길 내가 가고, 내가 간 길 ○○○가 걸었고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지금 우리 모두는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시대에 맡겨진 임무를 다하여야 한다. 분명히 우리 모두의 차례이다. 하나님께서 ‘○○○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아니하시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 욥도 그랬다. 욥기의 주인공 욥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욥 1:8 / ‘그래, 내 종 욥도 유심히 보고 왔느냐? 온 땅을 살펴보아도 욥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진실하고 올곧은 사람은 없다. 그는 나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며 사는 사람이라 못된 짓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단 말이야.’ 하고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말씀하셨다.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욥을 자랑스럽게 사단에게 또 말씀하셨다.
욥 2:3 / 그래, 내 종 욥도 유심히 보고 왔느냐? 온 땅을 살펴보아도 욥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건실하고 올곧은 사람은 없다. 그는 나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며 사는 사람이라 못된 짓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단 말이야. 네가 욥이 아무런 까닭 없이 하나님을 모시며 사느냐고 하기에 그를 내리쳐 보라고 하였다만, 그래, 어떻더냐? 욥은 여전히 건실히 믿음을 지켜 가며 살고 있지 않느냐?
다윗도 그러했다. 다윗 왕의 고백은 어떤가? 아들 솔로몬에게 사명으로 주어진 성전을 짓기 위해 다윗이 백성들과 함께 성전 건축에 필요한 물질을 하나님께 모아 드린 후 감격에 겨워 하나님께 찬송을 하였다. 다윗은 그 찬송 중에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조상과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입니다.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습니다.’(대상 29:15) 일국의 왕이요 부귀영화를 한 손에 쥐고 있던 다윗은 왕중의 왕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었다.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입니다. 영광도 주권도 부귀와 능력이 다 주의 손에 있다. 우리는 다만 주의 손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입니다’
다윗도 그랬다. 다윗은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정확히 알고 고백하였으며,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의 진정한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고백하였다. 지나온 날들도 하나님의 손에 있었고, 지금 풍성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음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였다. 자신이 죽은 후에 아들 솔로몬을 통해 이루실 일들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손에 내일을 맡기는 믿음의 사람 다윗 역시 분명한 나그네 정신으로 살았다. 나그네 의식은 적당히, 대충 머물다 떠난다는 것은 아니다. 다윗의 찬송처럼 내 나그네 삶 전체 속에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늘나라를 사모해야 한다. 어느 곳에 여행을 가서 한 주간이 지나기만 하면 생각나는 것은 집에 가고 싶다는 것이다. 여행 중에 화려하고 멋있고, 볼 것 많고 먹을 것이 많다 하여도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돌아갈 집이 없는 떠돌이가 아니며 방랑자도 아니다. 이 땅에 순례자로 왔다가 나를 위하여 예비해주신 영원한 하늘나라,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 할 사람이다.
사람들이 공기 좋고, 물 좋고, 산세가 수려하여 풍경 좋고, 인심 좋은 도회지 근교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영원히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속한 성도는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이요, 믿음으로 죽는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 역시 머지않아 영원한 도성, 새 예루살렘, 아버지의 집에 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도 성도처럼 이미 시작된 천국,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천국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천국, 궁극적인 본향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때가 되면 ‘감사합니다. 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감격스럽게 하나님의 품에 안기어야 한다.
■ 천로역정의 저자 요한 번연은 죽을힘을 다하여 전도하고 설교하다가 폐렴을 앓게 되었고, 고열로 쓰러지고 말았다. 한 열흘 정도 온 교우들의 정성어린 간호와 기도에도 호전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번연이 깨어났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성도들이 물었다. ‘되었습니다. 이제는 저의 치유보다는 주님의 집에 가도록 기도해주십시오. 형제 여러분!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제게는 더 좋은 일입니다.’라고 했다. 잠시 후 새벽에 날이 밝아오는데, ‘주님, 저를 받아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믿음의 사람 번연이 부럽다. 나도 죽을 때 ‘주님! 저를 받아주옵소서’ 기도하며 천국에 들어갔으면 한다.
믿음이란 미완성의 건너편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을 완성할 수는 없다. 누구나 중간에 끝내야 하고 내려놓아야 한다. 세상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왔고, 많은 것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루지 못한 것만 생각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미완성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곳이 우리가 영원히 안주할 고향이 아니며 우리가 영원히 거할 본향은 하늘나라,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라는 사실이다.
▶ 이제 실제적인 몇 가지 방안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히 11:1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게 아닙니까?)
실상이란 말은 실체이다. 증거는 소유권 증서를 말한다.
히 11:6 / 여러분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진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는 이는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거룩하며 빛과 소금을 해야 하는 성도들의 삶은 결코 허비도 아니며 소멸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억하시며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 마음껏 봉사충성하자.
♬ 해 같이 빛나리 / 1절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 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2절 당신의 그 순종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사랑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찬송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헌신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 하시면 족하리 불타는 사명으로 가득찬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 빌 3:19-20 / 그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기다릴 뿐입니다. 그들은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수치스러운 것을 대단한 것인 양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이 세상 일에만 마음을 씁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고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구세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대망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려면 오직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주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기다리고 있기에 가고 싶은 나라이다. 그러므로 천국 가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워지지 않도록 과도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벧전 2:11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하늘에 고향을 둔 이 땅의 나그네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영혼에 싸움을 걸어오는 세상의 악한 쾌락을 멀리하십시오.
우리는 본향에 마음을 기울이고 투자하면서 사모해야 한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다.
마 11:12 /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사람은 그가 마음을 두고 사모하고 투자하는 곳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 모든 것을 이 땅에서 다 보상받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을 보면 이 땅에서 다 보상을 받아 누린 사람으로 보인다. 영광 받을 것 다 받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세상에서 누리겠다고 하여 미리 다 주었고, 이 하늘나라에서는 들어온 것만으로 감사하라.’고 하실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가서 칭찬 들으면 그것이 더 값지다고 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의 보상을 포기해야 좋다.
■ 20세기 초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헨리 모리슨(Henry C. Morrison) 선교사는 40년 동안의 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고향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모리슨이 40년간 선교사역하는 동안 가족을 잃었고, 건강도 잃고 이젠 더 이상 사역할 수 없는 늙은이가 되어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뉴욕항구에 도착하고 보니, 엄청난 팡파르와 함께 수많은 군중이 나와 환영하고 있었다. 자기를 환영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탄 배에는 때마침 약간의 정치적 일과 함께 사냥을 하고 돌아가는 데오도르 루스벨트대통령이 타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레드카펫을 밟고 항구를 빠져 나갔다. 대통령이 사라지자 팡파르 소리도 그쳤다. 레드카펫도 치워졌다. 군중도 흩어졌다. 모리슨 선교사는 항구를 혼자 쓸쓸히 빠져 나오면서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 이것이 저의 40년간의 헌신의 결과란 말입니까?’ 바로 그 순간, 아름다운 저녁노을 너머로 들려오는 하늘의 음성이 있었다.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팡파르가 아닌 천군 천사의 나팔소리로, 레드카펫이 나닌 황금길을 깔아 놓고, 내가 마중 나가마!’라는 따뜻한 음성이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길손과 나그네이다. 더 나은 본향, 주님이 예비해놓으신 하늘나라를 사모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다가 주님 앞에 신실한 모습으로 서시기 바란다.
▶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을 한 번 비교해보자.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들과 롯의 가축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조카 롯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창 13:8-9 / 그래서 아브람이 롯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서로 한 핏줄이 아니냐? 그러니 네 가축 떼를 치는 목자들과 내 가축 떼를 치는 목자들이 서로 싸워서야 되겠느냐? 9) 그러니 우리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무 쪽이든 네가 원하는 곳을 골라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겠고 또 네가 오른쪽으로 간다면 내가 왼쪽으로 가마'
아브라함은 땅의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롯은 땅의 것에 집착해서 소돔으로 갔다. 결과는 비극이었다.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실 때 롯은 그 곳을 떠나야 했다. 그 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 두 딸로 인하여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되는 흔적도 남겼다.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다. 우리는 이 땅에 그저 잠시 살다 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해야 한다. 언제나 외국인과 나그네의 의식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자.
사도 바울은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많은 교육을 받았다. 사회적인 지위도 높았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사도가 된 뒤에는 과거의 육신적인 자랑거리들을 모두 더럽고 냄새나는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자랑하며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두 번 다시 그것들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오직 앞에 있는 푯대만을 바라보면서 날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삶을 살았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죽을 때는 다 반납하고,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땅에 쌓아 두지 말자. 예수님의 말씀대로,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는 하늘에 쌓아 두기를 바란다.
결 론
두 사람의 예를 들며 교훈을 삼고자 한다.
■ 1965년 크게 유행했던 고 최희준(1936.5.30.~2018.8.24. 서울법대, 제15대 국회의원)의 노래 ‘하숙생’의 가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❶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❷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과연 인생은 하숙생의 가사처럼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구름이나 바람과 같은 것일까? 하긴 세상 사람들에겐 그럴 수밖에 없다. 이 땅이 그들에게는 전부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그네 인생이란 낙엽처럼 떠돌다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돌아갈 본향이 있는 자임을 의미한다(히 11:14).
다시 말해 믿음의 선조들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말한 이유는 돌아갈 하늘나라,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영생의 나라가 있음을 믿고 살았다는 의미이다. 결국 믿음의 조상들은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선한 사역에 힘썼음을 증거한다. 우리 역시 바보가 아니라면 육체만 따라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인생길이 나그네 길임을 알고 돌아갈 본향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 토마스 라우손 테일러(Thomas Rawson Taylor 1807∼1835)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친다. 테일러 목사는 19세기 영국의 회중교회에서 사역하였는데 건강이 대단히 약했다. 목회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형편이 허락하는 대로 전도에 힘썼다.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힘써 일했다. 1835년 3월 6일 저녁, 테일러 목사는 한 집회에서 '나는 죽을 때 말씀을 들고 죽을 것입니다'라고 설교했다. 자기의 죽음을 예감한 것 같은 설교였다. 사람들은 그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다음날 아침, 테일러 목사는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이 지나도 기척이 없어 가족들이 그의 방문을 열어보니 잠자는 모습으로 하늘나라로 갔다. 그 때 테일러 목사의 나이 27살이었다. 테일러 목사는 하늘나라를 돌아갈 고향으로 삼고 살았기 때문에 병약한 몸으로 짧은 생애를 살았으면서도 감동적인 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테일러 목사가 우리에게 남겨준 찬송가가 있다. 4790장 ‘괴로운 인생 길 가는 몸이’라는 제목의 찬송이다. 이 찬송가는 3절로 되어 있는데 모두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라는 말로 끝난다.
❶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히 쉴 곳이 아주 없네 걱정과 고생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❷ 광야에 찬바람 불더라도 앞으로 남은 길 멀지 않네 산 넘어 눈보라 세차게 불어도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❸ 날 구원하신 주 모시옵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리라 그리던 성도들 한자리 만나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눅 18:24-30 / 예수께서는 그가 가는 것을 지켜보시다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매우 어렵다. 25)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26)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말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2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저희는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주님만을 따라왔습니다.' 2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리는 사람은 30)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보상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영성가 C. S. 루이는 말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세상을 위해 가장 일을 많이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천국을 생각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천국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을 때 교회는 세상에서 힘을 잃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마음을 향하면 천국도, 세상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천국을 사모하면 천국도 세상도 얻을 것이다.”
END를 하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강변교회 원로목사님의 설교 중 일부분으로 마감을 하려고 한다.
[김명혁 목사 설교]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 / 결론의 마지막 부분에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성향이 있다. 한 가지 성향은 땅에 집착하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 성향은 하늘에 오르려는 것이다. 사람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영혼은 위로 올라가려고 하고 육체는 땅으로 내려가려고 한다. 그래서 솔로몬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흙으로 지음 받은 몸은 땅으로 돌아간다’라고 기록했다. ‘육은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성향이 있다. 육체와 세상일에 집착하려는 성향과 영혼과 하늘 일에 집착하려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땅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라고 권면했다.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 즉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 분부했다. 땅의 것들은 음란한 것, 부정한 것, 악한 것, 정욕적인 것, 탐욕적인 것들인데 이와 같은 것들을 바라보거나 생각하지 말라고 분부했다.
골 3:1-4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여러분도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니 하늘에 있는 풍부한 보화와 기쁨에 눈을 돌리십시오. 그곳에는 그리스도께서 영예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시 110:1). 2) 하늘나라의 것으로 여러분의 생각을 채우십시오. 이 세상일을 염려하느라고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3) 마치 죽
은 사람이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도 이 세상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참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4) 우리들의 참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빛나며 그분의 모든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땅엣 것들만 생각하면 마음이 더러워지고, 복잡해지고, 무거워지고, 어두워지고, 악해지고, 근심과 걱정 그리고 원망과 불평이 쌓인다. 신경 쇠약에 걸리게도 되고 여러 가지 병에 걸리게 된다. 그 대신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의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선해지고, 단순해지고, 가벼워지고, 밝아지고, 평안해지고,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으로 채워지게 된다. 마음과 몸이 건강해진다. 땅을 바라보면 비관주의자가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낙관주의자가 된다. 땅을 바라보면 우울한 사람이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즐거운 사람이 된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사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 하늘은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기 때문이다. 하늘은 우리들이 돌아갈 본향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하늘을 바라보면 하나님과 천국을 친밀하게 느끼게 된다. 하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된다. 우리들은 하늘과 가까워지고 하늘은 우리들과 가까워지게 된다. 하늘을 바라보면 천국이 그리워지고 천국이 가까워진다. 그러면 우리들은 하늘의 뜻을 이루는 하늘의 심부름꾼들이 된다.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의 모습이 하늘처럼 아름다워지고 신비로워진다. 하늘을 바라보았던 스데반의 모습이 하늘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워졌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자. 땅에 집착하면 망한다. 롯의 처는 자기 집과 재산에 집착하다가 망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 재물과 돈에 집착하다가 망했다. 데마는 세상에 집착하다가 망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주님 품에 안겼다. 사도 바울, 사도 요한도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도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다가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겼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하늘과 연결된 삶을 살도록 노력하자.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아름답고 멋지게 살다가 죽자.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와 사랑하는 성도들 모두에게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가득가득 베풀어주셔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아름답고 멋지게 살다가 죽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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