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119 연중2주간 수 – 133위 034° 손경서 안드레아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133위 034° ‘하느님의 종’ 손경서 안드레아
이름 : 손경서(孫敬瑞) 안드레아
출생 : 1799 홍주(합덕 신리)
순교 : 1839년 12월 26일, 교수, 서울
손경서(孫敬瑞) 안드레아의 본관은 밀양이요 보명(譜名: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경규’(景奎)로, 충청도 홍주 신리(현 충남 당진시 합덕읍 신리)에서 손후대(孫厚大)의 1남 2녀 가운데 외아들로 태어났다.[1][1.1] 그의 집안에서는 일찍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고, 따라서 손경서 안드레아도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 1866년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손자선(孫子善, 토마스) 성인은 그의 당질이고, 1868년 서울에서 순교한 손자중(孫子仲, 바오로)[1.2]은 그의 아들이며, 손여회(孫如會, 필립보)[1.4]와 손여일(孫汝一, 필립보)[1.5]은 그의 손자이다.[2] 이 밖에도 그의 집안에서는 1866년 이후에 많은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손경서 안드레아는 성품이 너그러운 데다가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의 뜻을 어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식사를 손수 장만하여 부모님께 드리곤 하였다. 혼인한 뒤에는 한 번도 아내와 다툰 일이 없을 정도로 집안을 화목하게 이끌었으며, 자녀와 하인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었고,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사업에 능숙하였던 그는 친척과 친구 일까지도 보살펴주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 상황 때문에 온전하게 교리를 실천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손경서 안드레아는 교회의 본분을 깨닫고 가족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으며, 교회 일을 돕거나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청주 출신 송구현(宋龜賢, 도미니코)[2.1]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것도 이때였다. 또 1834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가 입국한 뒤에는 그를 도와 교회에 봉사했으며, 프랑스 선교사 모방(P. Maubant, 나[羅] 베드로) 신부를 모셔다 가족들과 함께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3]
1838년에 손경서 안드레아는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겉으로 배교하고 속량금을 낸 뒤 석방되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또 1839년 기해박해가 발생하자, 그는 자신의 잘못을 보속하려고 앵베르(L. Imbert, 범[范] 라우렌시오) 주교를 위하여 안전한 피난처를 마련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손경서 안드레아는 처남 정화경(안드레아)[3.1]과 함께 수원 상귀(일명 상구, 상게) [☞상괴 3.2]라는 곳에 거처를 마련한 뒤 가족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주하였고, 곧바로 앵베르 주교를 서울에서 모셔와 이곳에 머물게 하였다. 그런 다음 주교의 명에 따라 모방 신부와 샤스탕(J. Chastan, 정[丁] 야고보) 신부를 모셔오려고 신부들이 있는 곳으로 출발했는데, 앵베르 주교는 손경서 안드레아가 집을 떠난 뒤인 8월 초에 밀고자의 책략으로 포교에게 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손경서 안드레아는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포교들은 남은 가족들에게 책임을 씌워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고문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여 포교들에게 자수하였다.
손경서 안드레아는 이내 서울로 압송되어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에게 가해진 형벌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그는 이를 당해 내지 못하고, 또 삶에 대한 약간의 애착 때문에 배교하고 말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이전의 배교를 취소하였다. 그런 다음 1839년 12월 26일(음력 11월 21일)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4]
[註]__________
[1] 『기해일기』, 123면, 손경서; 『밀양 손씨 족보』, 명천공파세보(明泉公派世譜)(1831년)와 명천공파보(明泉公派譜)(김성태, 「신리 교우촌과 밀양 손씨」, 『교회사 연구』 제35호, 2010, 184면).
[1.1] 손경서 안드레아 가계도
<신리 연고 순교자>
성명 세례명 | 거주출신(나이) | 순교년월일 | 순교지 | 비 고 | |
1 | 손경서 안드레아 | 거더리(41) | 1839.12.20(기해) | 서울 | |
2 | 김 아드리아노 | 거더리 | 1866(병인) | ||
3 | 손사중(안드레아) | 신리(47) | 1866(병인) | 해미 | 손요한 당질·사촌들과 함께 순교 |
4 | 임 프란치스코 | 거더리 | 1866(병인) | 수원 | |
5 | 손복록 | 홍주(18) | 1866(병인?) | 해미 | 손자진의 재당질 |
6 | 정정심 가브리엘 | 신리(51) | 1866.11(병인) | 해미 | |
7 | 손자선 토마스 | 신리(28) | 1866.3.30(병인) | 공주 | 손치황 아들, 손자여 동생 |
8 | 오 오매트르 | 거더리자수(29) | 1866.3.30(병인) | 갈매못 | 프랑스 신부 |
9 | 민 위앵 | 거더리자수(30) | 1866.3.30(병인) | 갈매못 | 프랑스 신부 |
10 | 황석두 루까 | 신리거주(53) | 1866.3.30(병인) | 갈매못 | 안 주교 복사 |
11 | 안 다블뤼 | 신리거주(48) | 1866.3.30(병인) | 갈매못 | 주교, 조선 5대 교구장 |
12 | 성 토마스 | 거더리(28) | 1866.5.18(병인) | 황새바위 | |
13 | 간그레고리오 | 거더리(63) 내포 | 1867(정묘) | 홍주 | |
14 | 손사준 | 신리(37) | 1867(정묘) | 홍주 | 손치호의 조카 |
15 | 신그리산도 | 거더리(51)덕산 | 1867(정묘) | 홍주 | |
16 | 김선행 필립보 | 거더리(40) | 1867(정묘) | 수원 | 김양범의 아들 |
17 | 손조이 | 거더리 | 1867(정묘) | 서울 | 손召史와 동일인 |
18 | 이영여 | 거더리(38) | 1867(정묘) | 서울 | |
19 | 손(세보)말셀리노 | 신리(49) | 1867.11.29(정묘) | 홍주 | |
20 | 김양범 빈첸시오 | 거더리(64) | 1867.9(정묘) | 수원 | |
21 | 송구현 도미니코 | 신리(65) 청주 | 1868(무진) | 서울 | 손자중 부친에게서 배움 |
22 | 박영신 안토니오 | 신리(43) | 1868(무진) | 서울 | |
23 | 손자진 | 거더리(46) | 1868(무진) | 홍주 | 해미에서 순교한 손안드레아 사촌 |
24 | 배성로 안드레아 | 신리(39) | 1868(무진) | 서울 | |
25 | 손여도 | 거더리(32) | 1868(무진) | 홍주 | |
26 | 손치호 니콜라오 | 거더리(56) | 1868.4(무진) | 서울 | 손자선의 당숙, 안 주교 체포 집 주인 |
27 | 오흥여 | 거더리(56) | 1868.4(무진) | 서울 | |
28 | 박 안토니오 | 거더리(45) | 1868.4(무진) | 서울 | 용인 사람 |
29 | 손자중 바오로 | 신리(52) | 1868.4(무진) | 서울 | 손경서의 아들 |
30 | 손여회 필립보 | 신리(21) | 1868.4.19(무진) | 서울 | 손여일 사촌, 손자중 아들 |
31 | 손여일 필립보 | 신리(32) | 1868.4.19(무진) | 서울 | 손경서 손자, 손자선 7촌 조카 |
32 | 손자여 갈리스도 | 신리(36) | 1868.5(무진) | 서울 | 손자선의 형 |
33 | 손치황 요한 | 신리(60) | 1868.5(무진) | 해미 | 손자선의 부친 |
34 | 손치양 요한 | 거더리(50) | 1868.5(무진) | 갈매못 | 손경서의 사촌 |
35 | 손치경 안드레아 | 홍주(52) | 1868.6(무진) | 서울 | 부친에게서 배움 |
36 | 이사성 요한 | 신리(41) | 1868.7(무진) | 홍주 | |
37 | 송 도미니코 | 거더리(71)서울 | 1868.7(무진) | 서울 | 서울의 班名 |
38 | 이 안드레아 | 거더리(28) | 1869(기사) | 공주 | |
39 | 백청여 | 신리(50) | 1869(?) | 서울 | |
40 | 박춘화 | 신리(30) 덕산 | 1870(경오) | 서울 | |
41 | 손 루시아 | 신리(?) | 치명사적23-57 | 병인년에 남편이 잡힘 |
[1.2] 손자중(孫子仲, 바오로) : (김성태 신부, ‘唐津 新里 敎友村의 敎會史的 性格’, 공주대석사논문, 2009)
손자중은 무진년(1868) 포도청의 신문에서 부친이 기해년(1839)에 순교하였다고 한다(『좌포도청등록』 무진 윤 4월 12일). 또 치명일기에는 손여도가 손자중의 장자이고, 기해년 치명한 안드레아의 손자(『치명일기』, 649)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손여회 필립보에 대한 포도청 신문에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손자중이라고 증언하고 있다(『좌포도청등록』 무진 윤 4월 19일). 한편, 손여일 필립보도 기해년 치명자 손 안드레아의 손자이며(『치명일기』 116; 치명사적, 23-16~17), 손자선이 7촌 숙부라고 대답한다.[1.3]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손경서의 아들 손자중과 그 큰아들 손여도, 작은아들 손여회가 희생당하였고, 손경서의 또 다른 아들에게서 난 손여일도 희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족보에 字가 기록되지 않은 세진이 자중이며, 여일의 아버지는 世祐(自天)이라고 할 수 있다.
[1.3] 『좌포도청등록』 무진 윤 4월 17일 ; 서종태는 손여일이 『치명일기』 116번과 『병인치명사적』 23-16~17에 1866년에 치명했다는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서종태, 「신리·거더리 교우촌 순교자에 대한 연구」, 53쪽).
[1.4] 손여회(孫如會, 필립보) : (김성태 신부, ‘唐津 新里 敎友村의 敎會史的 性格’, 공주대석사논문, 2009)
신리의 순교자들에 대한 신문 중에 박영신과 손여일은 각각 5년 전인 1863년과 을축년(1865)에 손자선의 집에서 서양인 안 주교를 만나 영세와 견진을 하였다고 진술한다(『좌포도청등록』 무진 윤 4월 17일/양 6월 7일; 『좌포도청등록』, 무진 윤 4월19일/양 6월 9일). 그리고 배성로는 황석두의 집에서 안 주교를 만나 영세‧견진을 하였다고 증언하였으며, 손자여 갈리스도(聖 손자선 형)와 손여회 필리보(손여일 사촌, 손자중 아들)는 을축년(1865)에 안 주교를 찾아가서 혹은 서양인 안 주교의 집에서 영세하였다고 말한다(『좌포도청등록』 무진 윤 4월 17일).
······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우선 황석두는 다블뤼 주교의 복사로서 항상 같은 집에 머물면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1863년과 1865년에 다블뤼 주교는 손자선의 집에서 공소를 열었는데, 1865년에 손자여와 손여회는 그 집을 안 주교의 집으로도 여겼다고 볼 수 있다. 즉 안 주교는 적어도 1865년에는 손자선의 집을 자신의 거처로 삼아 황석두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1.5] 손여일(孫汝一, 필립보) : (김성태 신부, ‘唐津 新里 敎友村의 敎會史的 性格’, 공주대석사논문, 2009)
기록상으로는 그가 洪州의 어느 지역 출신인지 알 수 없으나, 훗날 신리 출신 손여일과 손여도에 대한 증언에서 “기해년에 치명한 손 안드레아의 손자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신리 출신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손경서의 가계표’에서 보이는 孫景奎(敬瑞)는 1798년(무오)생인데, 그가 기해박해(1839)에 순교하였다면 41세가 된다. 이는 달레가 다블뤼 문서를 근거로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이 기해박해로 인해 “41세로 12월 21일 絞首刑을 당하였다.”라는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또한 그가 獨子였다는 『기해일기』의 기록 역시 족보와 일치한다. 따라서 1839년 박해 때 순교하였다고 거듭 언급되고 있는 홍주 내포평야의 손 안드레아는 바로 신리 마을 출신 손경규(경서)이며, 그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천주교를 배웠고, 그의 부모가 다 열심히 천주교를 봉행하고 있었다면 신리는 이미 손경서가 태어난 1798년 이전이나 혹은 적어도 1800년대 초반에 그 부모와 삼촌들이 천주교를 수용했다고 할 수 있다.
[2] 『좌포도청등록』, 윤 4월 12.17.19일.
[2.1] 송구현(宋龜賢, 도미니코) : 聖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福者 이성례 마리아에게 아들 여섯이 있었다. ①최양업 토마스 신부, ②최희정 야고보, ③최선정 안드레아(목천 서덕골 큰아버지 댁 거주), ④최우정 바실리오(용인 한덕골 작은아버지 댁 거주), ⑤최신정 델레시포르(진천 동골에 있는 친척 집 거주), ⑥최 스테파노(2세에 옥중사). 부모가 모두 순교한 후에 맏이 최양업은 1849년 용인 한덕골 작은아버지 집에서 동생 4형제를 만났다. 몇 년 후 최양업 신부는 청주의 신심이 깊은 송구현 도미니코(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의 장녀는 송 막달레나는 셋째 동생 최선정과 차녀 송 아가타[2.2]는 넷째 최신정과 혼인시켰다.
[2.2] ‘송아가다 이력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넷째 동생인 최신정(崔信鼎, 델레신포로)의 아내 송 아가타(1838-1930)의 전기(傳記)다. 작자 미상이며, 15×16㎝ 크기의 한지 76쪽에 달하는 한글 필사본이다. 책 끝에 “1927년 정유(丁酉), 1933년 계유년 종(癸酉年終)”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27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933년에 완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전체 문맥으로나 1930년에 송 아가다가 직접 집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 대필하였을 것이다. 내용은 송 아가타의 집안 내력에서부터 출생, 유년 시절, 최신정과의 결혼, 그리고 사망하기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책 끝부분에 <뒷날에 덧붙임>에서는 송 아가타의 증언으로 자신의 시아버지인 성인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의 묘가 안양(安養) 수리산에서 발굴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송 아가다는 1838년에 순교자 송구현(宋九鉉)의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16세 때인 1853년에 최선정과 결혼하여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살던 중,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를 당하여 자녀들과 함께 각지로 피신하였다. 그러다가 포졸들에게 재산을 모두 약탈당하여 걸식에 나서게 되었다. 어느 날 춘천 ‘물은다미’(무른더미, 옥산포) 마을에 도착한 송 아가다 일가는 그곳에 사는 우씨의 도움으로 정착하였으나, 남의 돈으로 장사를 하던 남편이 빚만 진 채 가출하자 아가다가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약 8년이 지난 뒤 자녀들도 성장하고 더부살이도 면하게 되자, 아가다는 집안사람들이 살고 있던 인근 ‘물이울’이라는 교우촌으로 이주하였다. 한편 큰딸은 어려서 잃었고, 남은 3남매 중 장남 최태종(崔台鍾, 루카)이 사제가 되기를 갈망하여 페낭(Pinang) 신학교에 유학까지 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둘째 딸 안나의 외아들 김휘중(金輝重, 요셉, 1887-1918)은 1917년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송 아가다는 93세 때인 1930년 3월 24일 사망하여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3리에 소재한 풍수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송 아가다 이력서’는 비록 평범한 여교우의 일생을 다룬 기록이지만, 박해 시대를 이겨낸 굳건한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 줌과 동시에 신자들의 어려운 생활상을 짐작하게 한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양업 신부 집안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점에서 적잖은 의의가 있다.
[3]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393-394; 『좌포도청등록』, 1868년 윤4월 12일, 6월 20일.
[3.1] 성 정화경 안드레아(1807-1840) : 충청도 정산(定山)의 부유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정화경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을 뿐더러 장성해서는 더욱 자유스러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수원 근처로 이사해 살았다. 거기서 회장 일을 맡아보며 자기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또 서울을 왕래하며 힘 자라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정화경은 매일같이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시켰고, 박해를 피해 내려온 범 라우렌시오 주교를 위해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 해 8월 주교를 찾고 있던 밀고자 김순성(일명 여상)에게 속아 주교의 은신처를 알려주었다. 서양 신부를 잡으려던 김순성 일당은 정화경을 이용하여 신부들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챈 정화경은 도망하여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았다. 그러나 9월 체포된 정화경은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1840년 1월 23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3.2] 상괴 :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 남양방조제 부근으로 比定.
☞ 원재연, 『앵베르 주교의 기해박해 피신지 ‘상괴’에 대하여』 참조.
[4] A. Daveluy, Ibid., ff. 394-395, 445-446, 4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