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훈 베드로 자료 모아보기
‘하느님의종’
1. 신앙 선조의 불꽃 같은 삶: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
2017년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대한 시복자료집 제1집을 간행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종’ 133위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자발적 신앙 공동체를 세운 한국교회 초기 신자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 평신도에게는 언제나 모범 중에 모범입니다. 이에 자료집의 내용을 발췌 · 정리하여 게재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공부하고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남아 있는 프랑스 선교사 피숑(Pichon, 1893~1945년) 신부의 원고에는 이승훈이 서소문밖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구경나온 사람들에게 “수확의 때가 왔다. 잘 깨어있어야 할 때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한국 교회의 첫 세례자”
1784년 이승훈(李承薰, 1751~1801년)이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세례자가 된 ‘사건’에 대한 첫 기록은 당시 북경에 있던 예수회 소속 방타봉(Ventavon, 1733~1787년) 신부가 고향의 동료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1784. 11. 25)이다.
방타봉 신부는 “천주께서는 아마 그로 하여금 아직 어떤 선교사도 들어가지 못한 나라를 복음의 빛으로 비추게 하실 것입니다. 그 나라는 중국 동편에 있는 반도 조선입니다. 이 조선 사신들이 작년 말에 왔는데, 그들과 그들의 수행원들이 우리 성당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종교 서적을 주었습니다. 이 양반 중 한 분의 아들은 나이 27세인데 박학하여 그 서적들을 열심히 읽어,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하였고, 또 천주의 은총이 그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교리를 깊이 연구한 다음, 입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에게 성세(聖洗)를 주기 전에 그에게 많은 문제를 물어보았는데, 그는 모두 잘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만일 왕이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결심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서슴지 않고, ‘이 종교를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형벌과 죽음까지도 감수하겠다’고 했습니다.”라고 썼다.
유교만이 정학(正學)인 줄 알고 유교적 예식과 풍속을 실천해 온 이승훈이 세례를 받기까지 즉, 개종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북경에 체류하던 단 2개월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교리에 대한 이해와 통회는 강렬하게 진행되었다. 만일 이승훈이 천주 신앙의 문 앞에 섰으나 성령의 은총이 개입하여 그를 문 안으로 들여 놓지 않았다면, 이승훈은 천주학(서학)을 학문으로 인식할 뿐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훈에 대한 기록은 다른 이들에 비해 많다. 시복 자료집에 따르면, 교회 기록이 12건이고 정부에서 편찬한 관찬 기록이 26건, 이만채 등 개인기록이 7건이다. 그 밖에 『평창 이씨 족보』와 『사마방목』(1790년, 생원시와 진사시 합격자 명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겼다고 하는 「유시(遺詩)」가 있다. 그에 대한 교회 측 기록은 편지들이 많은데 이승훈이 북당 선교사들에게 쓴 2통의 편지도 있다(프랑스어 번역본으로 원본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 편지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깊이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했으며 성사의 은총을 받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다.
사제품을 받지 않은 채 성사를 행한 것을 ‘하느님의 은총을 완전히 저버린 채 마귀의 종이 되어’라고 표현했으며, ‘세례를 받을 당시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교리를 피상적으로밖에 알지 못하여 잘못을 저질렀다.’며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또한 ‘세상의 모든 나라는 구속의 은혜를 받아 신부와 주교가 가득 찼는데 어찌하여 우리만 제외되었는가?’라며 탄식하기도 했다.
나아감과 망설임이 교차하던 삶… 그것도 그분의 뜻
1790년 7월 11일에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승훈은 어쩌면 자신이 앞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행보를 예감한 듯하다. “저의 집안이 아직 박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지이지만 그래도 저 힘닿는 대로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당연한 의무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천주교 신자들을 돌보는 일을 책임지는 것은 현재 제가 처한 상황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감히 청하오니, 부디 이 의무에서 저를 벗어나게 해주길 바랍니다.”
이 편지를 쓴 이후 이승훈은 관직의 길로 나아간다. 1790년 10월에 의금부 도사, 1791년 2월에 서부도사(西部都事), 그해 6월에는 평택(平澤) 현감이 되었다. 하지만 5개월 후 파직당한다. 이후 이승훈의 삶은 가시밭길이었다. 예산현(禮山縣)으로 유배를 당하고 1796년 봄에 풀려나 유교 경전이 아닌 것은 책상에 두지 않아 친척과 벗들에게 자신이 교회를 떠났음을 보여주려 하였으나 1801년 2월 9일(양력 3월 22일) 사학도의 원흉으로 체포되었다. 그날부터 2월 18일(양력 3월 31일)까지 총 여섯 차례의 신문을 받았다. 그리고 2월 26일(양력 4월 8일)에 이승훈은 정약종, 최창현, 홍교만과 함께 자신이 살던 염초청다리(현 서울시 중구 순화동의 염천교) 근처 서소문밖 네거리 형장에서 사형당했다. 이로써 조선의 첫 세례자는 서소문밖 네거리 형장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월락재천(月落在天) : 달은 졌다고 해도 여전히 하늘에 있지만
수상지진(水上池盡) : 물이 증발해 버리면 연못은 마르고 만다.
- 이승훈 베드로가 남긴 유시(遺詩)
마카오 주재 교황청 포교성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Marchini) 신부는 1790년에 조선 사신들과 함께 북경에 도착한 신입 교우로부터 들은 이승훈에 대한 소식을 포교성성 장관에게 전한다. “6년 전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던 이 베드로는 자기 나라로 돌아간 후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으며 짧은 시간 내에 여러 학자들을 회개시켰다고 합니다. 그 학자들은 모두 또 다른 복음의 전파자가 되었고, 1,000명도 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받은 사람들 중에서 남자 12명과 여자 12명을 회장(교리교사)으로 선발하였다고 합니다. …”
다블뤼 주교는 ‘이승훈이 조선에 천주교를 도입하였고 열렬히 그것을 전파하였음에도 대중의 눈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했던 수많은 변절과 그에 동반된 글들로 인해 그 빛이 바래지고 말 것’이라 마음 아파했다. 하지만 이기경의 『벽위편』에 실린 「판결문」을 보면 이승훈의 사형 이유는 오직 ‘사교인 천주교를 이 땅에 처음 들여왔으며 사교의 우두머리’라는 죄목이다.
“너는 직접 세례를 받고 만 리 밖에서 그 책을 구해 와서 인척들에게 전파하고 경향 원근에 퍼뜨렸다. …무릇 나라의 금령이 반포되고 사악한 실상이 모두 드러난 후에도 요사하고 추한 무리들이 너를 교구 대부로 삼지 않음이 없었으니 그 범한 죄를 논하자면 천지간에 그대로 두기 어렵다.”
신유년 2월 26일에 죄인 이승훈은 사형에 처해졌다. 3일 뒤 이승훈의 시신은 자기 집으로 옮겨졌다. 아무도 감히 애도의 말을 하려고 그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의 친구이자 인척이었던 심유(沈浟)만이 홀로 상가를 찾아가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평신도, 2019년 봄(계간 63호), 정리 송란희 편집위원]
2.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이승훈 베드로
이승훈(베드로) - 조선의 첫 영세 가톨릭 신자, 1801년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
이승훈(베드로, 1756~1801)은 서울 약현(현 서울 중림동)에서 태어났다. 1868년 순교한 이신규(마티아)와 이재의(토마스)가 그의 아들과 손자이다.
이승훈은 천주 신앙에 대해 알기 전부터 집안에 있던 한역서학서를 읽었고, 특히 서양 수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던 중 1783년 말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됐고, 북당을 찾아가 예수회 그라몽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했다. 조선의 첫 번째 가톨릭 신자로 귀국한 그는 서울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이벽, 권일신, 처남 정약용 등에게 세례를 주고 첫 신앙 공동체를 일구었다.
이승훈은 1785년 봄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1787년에는 성균관 앞 반촌에서 정약용 등과 함께 교회 서적을 연구하다 발각돼 곤욕을 치렀다. 또 1791년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으로 체포돼 문초를 받고 관직을 잃었다.
이승훈은 1786년 동료들과 함께 ‘가성직제도’를 만들어 1년간 신부로 활동하다 잘못을 깨닫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펼쳐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켰다. 1795년 이 사실이 발각돼 그는 충남 예산으로 유배됐다. 그리고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승훈은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3월 23일 체포돼 의금부에서 여섯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고 4월 8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4월 14일, 리길재 기자]
3. 이승훈 관계 서한
시작하는 말
이른 아침 동쪽 바다에 나가 해돋이를 본 적이 있는가? 새벽 어스름이 걷히려 할 때 동녘의 바다는 용통 붉게 물들고 타는 듯한 물비늘이 바다에 일렁인다. 수평선 너머에서 머리를 디민 붉은 해는 문득 물 위에 떠서 찬연한 햇살을 뿌리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 이 해돋이의 장엄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연을 두려워하고 섬기기까지 하였나 보다.
우리 나라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교회가 새롭게 창설되어 가던 역사의 한 장면도 새벽 해돋이처럼 장엄하게 펼쳐졌다. 이땅에 새로운 사회와 질서를 세우려던 우리의 지성인들은 중국에서 한문으로 간행된 많은 가톨릭 서적들을 스스로 구해 읽고 이를 연구했다. 이러한 연구는 이미 17세기 초엽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2세기에 가까운 교리 연구와 비판을 거친 다음 우리 나라는 새 신앙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 한문본 교회 서적들이 한밤의 어둠을 깨려는 새벽녘의 여명처럼 그 빛을 더해 갔고, 드디어는 이땅의 사상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이렇듯 우리 나라의 천주교회는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 없이 우리 겨레의 자발적인 교리 연구로 창설되었다. 이 교회의 창설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다. 그는 새로 태어난 교회를 이끌어 갔다. 우리의 초창기 교회사에서는 이승훈의 업적을 이야기하는 데에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승훈의 업적을 전해 주는 역사적 자료 가운데에는 다섯 편의 ‘이승훈 관계 서한’이 있다. 이 서한들은 이승훈의 생애와 우리 나라 교회의 초창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전해 주고 있다.
서한의 구성
‘이승훈 관계 서한’은 모두 다섯 편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승훈이 중국 북경의 북당(北堂)에 있던 선교사들에게 보낸 두 통의 서한과 이승훈에게 보낸 유항검(柳恒儉, l756~1801)의 서한 한 편이 있다. 그리고 이승훈의 서한을 북당의 선교사에게 전해 준 윤유일(尹有一, 1760~1795)에 관한 두 편의 서한이 있다. 이 두 편의 서한은 당시 북경에서 선교하고 있던 판지(Joseph Panzi, 瀋廷瑋, 1733~c.1812) 수사와 로오(Nicolas Joseph Raux, 羅廣祥) 신부가 본국의 동료 회원들에게 각기 보고한 내용들이다.
여기에서 먼저 이승훈이 북경의 선교사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승훈은 1784년초 북경에서 영세하고 귀국하기에 앞서 그의 영세 신부인 그라몽(Grammont, 梁棟材, 1736~1812) 신부에게 해마다 소식을 전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귀국한 다음해에 그 동안의 소식을 전한 바가 있었다. 그 후 그는 1789년 동지사 편에 소식을 다시 전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펀지에 대한 회답을 받은 후 이승훈은 1790년 7월 11일자로 다시 펀지를 보내고 있다. 이 편지는 한문으로 쓰였을 것이나 현재 그 원문은 전해지지 않고, 프랑스어 번역문이 로마의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유항검의 서한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 유항검이 이승훈에게 보낸 서한은 1787년초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판지 수사의 서한은 1790년 11월 11일자로 작성되었으며 현재 예수회 본부의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판지 수사의 서한과 거의 같은 날 쓰여진 로오 신부의 서한은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이승훈 관계 서한들은 최석우 신부의 노력으로 1961년에 우리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서한은 1989년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지만, 이를 좀더 가다듬어 정리한 자료가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한 “교회사연구” 제6집(1992년)에 수록되어 있다.
이승훈은 누구인가?
‘이승훈 관계 서한’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서한과 관계가 깊은 이승훈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 나라 교회사 초창기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 이승훈은 남인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평창(平昌) 이씨로서 그의 부친은 이동욱(李東郁)이었다. 그는 12세 때에 어머니를 잃었지만 학업을 닦으며 꿋꿋이 살았다.
나이가 차서 그는 정약용의 누이인 나주 정씨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 후 그는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여 선비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6경 중심의 선진(先泰) 유학에 전념하던 남인의 학풍에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에 전래되어 청년 지식인들에게 적지 않은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던 서양의 천문 지리학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지사의 일원으로 중국에 파견되는 아버지를 수행하여 1783년 북경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벽(李檗)은 이승훈에게 선교사를 만나서 천주교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오도록 부탁했다. 이승훈은 이 부탁대로 북경의 북당에 가서 그라몽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784년 3월경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그해 9월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살고 있던 이벽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이땅에도 새로운 교회가 출범되었다. 그들은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이땅의 문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시켜 갔다.
그는 거듭되는 박해의 과정에서 몇 차례 기교(棄敎)하기도 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은 천주교 신앙을 조선에 전파시켰다는 죄목으로 죽음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초기 교회의 창설과 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만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가 세례를 받은 이후 1790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의 교회사는 역동적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우리 교회사가 전개되는 무대의 한가운데에서 기뻐하고 고민했던 사람이었다.
서한의 내용
이승훈은 첫 번째 서한에서 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창설된 직후의 상황을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보고하고 있다. 그는 이땅에 자생적으로 교회가 세워졌음을 말하고, 이미 1천여 명의 신도들이 있음을 보고한다. 그리고 이벽과 김범우가 자신과 함께 신도들에게 세례를 주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는 1785년의 박해로 말미암아 자신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김범우도 체포된 지 일년 뒤에 죽게 되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1786년 봄 이후 신도들 스스로가 고해성사를 집전하게 되었고, 그해 가을부터 미사도 집전하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보고한다. 한편 그는 이와 같은 ‘가성직 제도’내지는 ‘가성무 집행’(假聖務執行)에 대해 유항검이 의문을 제시했음을 밝히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유권적 판단을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이때 그는 자신의 펀지와 함께 유항검이 문제를 제기한 편지도 함께 동봉했다.
이에 대한 북경 주교의 답변은 물론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북경의 주교는 조선 신도들의 열의에 감복했고 그들의 선의를 인정해 주었다. 그 후 이승훈은 다시 윤유일을 북경으로 보내서 그곳의 선교사들에게 두 번째 편지를 발송했다. 이 편지에서 이승훈은 우선 선교사들의 너그러움에 감사드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새로운 신도 공동체의 책임을 지기가 어려우므로 이를 면제시켜 줄 것을 청하며 성직자의 파견을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이승훈의 편지가 북경에 도착한 1790년을 전후한 시기로 북경 교회의 관심은 조선의 신생 교회에 집중되고 있었던 듯하다. 북경의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교회가 자생적으로 성립되었음을 경이의 눈으로 쳐다보았고, 이 기쁜 소식을 자신의 동료들에게 알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구베아 주교의 조선 교회에 관한 서한이 작성될 수 있었다. 판지 수사나 로오 신부도 자신의 동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판지 수사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였다. 그는 당시 북당에 거처하며 궁중 화가로 활약하고 있었다. 또한 로오 신부는 프랑스 출신 라자리스트 회원이었다. 이들은 이승훈의 서한을 휴대하고 북경에 온 윤유일을 만났다.
맺음말
우리의 역사가 근대를 향해 요동칠 때 그 힘찬 힘은 사상사의 분야에서도 드러난다. 그 대표적 예가 천주교 신앙의 실천이었다. 조선 후기의 민인들은 새로운 신앙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새로운 사상을 형성하고 새 사회를 이루고자 했다. 이때의 천주교 신앙은 마치 아침의 해돋이처럼 이땅의 어둠을 밝혀 주었고 신분제의 압제에 찌들린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가르침을 천주교에서는 뭇사람들에게 선언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승훈 관계 서한’은 바로 우리 나라 천주교회가 시작되던 때의 여러 상황들을 잘 전해 주고 있다. 이 서한에서는 우리 나라 교회의 자생적 탄생과 최초의 박해 상황 그리고 가성직 제도의 성립과 폐지를 전해 주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는 갓 태어난 교회를 이끌어 줄 성직자를 영입하려는 청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담고 있는 이 서한은 당시의 상황을 알려 주는 일급 자료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의 정확한 정황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향잡지, 1994년 1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4. 이승훈의 「벽이문(闢異文)」과 「유혹문(牖惑文)」
한국의 첫 영세자 이승훈, 천당지옥설·위천주론 내세워 배교 선언
「벽이문」 과 천당지옥설
이승훈은 교회사에서 늘 뜨거운 감자였다. 그는 평생 배교 행동을 반복했고, 이를 확인하는 「벽이문(闢異文)」과 「벽이시(闢異詩)」, 그리고 「유혹문((牖惑文)」을 남겼다. 이 글의 진의를 두고도 당시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글에서는 이승훈의 「벽이문」과 「유혹문」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승훈은 1785년 3월, 을사추조 적발 직후 배교를 선언하면서 전향서인 「벽이문」과 「벽이시」를 지었다고 1791년 11월 8일 의금부 공초에서 밝힌 바 있다. 이승훈의 공초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해당 일자 기사에 나온다.
공초에는 당시 진산 사건 직후 홍낙안이 북경에서 서학책을 사온 일과 교리서를 간행한 일, 그리고 반회 모임 등 세 가지 죄목을 걸어 이승훈을 저격하자, 이승훈이 조목별로 해명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세 가지 죄목에 대해 하나하나 해명한 뒤, 이승훈은 자신의 배교가 확정적임을 강조하기 위해, 을사추조 적발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에게 올렸다는 「벽이문(闢異文)」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여 소개했다.
이승훈은 「벽이문」의 전문을 평택 임소에 두고 와서 전체 글을 기억하지 못한다면서 글 속의 세 문장만을 발췌했다.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천하의 학술은 삿되고 바름을 떠나 이로움과 해로움이 있은 뒤라야 사람들이 반드시 마음을 기울인다. 앞서 서학에서 천당과 지옥의 주장을 없게 했더라면 사람들이 이것 보기를 어찌 패관잡설보다 아래로 보지 않았겠는가?” “서양에서 온 학문은 반드시 천당과 지옥을 위주로 삼아 천하의 억만 생령(生靈)을 속인다.” “서학에는 가짜 천주[僞天主]가 횡행한다는 주장이 있다. 요망하고 허탄하며 망녕되기가 이와 같은 것이 없다. 이미 하늘이라고 말해놓고 가짜가 있다 함은 어찌된 것인가? 내가 반드시 그 주장을 가지고 그 주장을 깨뜨려 보겠다.”
그 내용은 천주교의 천당지옥설과 가짜 천주가 횡행한다는 위천주론의 주장에 관한 비판으로 요약된다. 처음 두 문장에서는 사학(邪學)에 사람들의 마음이 쏠린 이유를 천당과 지옥에 대한 주장으로 그들을 현혹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승훈은 글에서 천주교가 천당지옥설로 혹세무민한다며 그 주장의 허망함을 설파하려 했던 듯하다. 천주교의 이단성이 바로 천당지옥설에 있고,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천당지옥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식의 논리를 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서학의 천당지옥설은 전래 이래 중국에서 천주교를 불교의 아류로 보아 배척하게 만든 중요한 근거였다. 「칠극」의 제7장에서 천당지옥설에 대한 논의를 자세히 변증하여 불교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킨 것도 사실은 이 때문이다.
위천주의 실체
세 번째 문장에 나오는 위천주(僞天主), 즉 가짜 천주가 횡행한다는 주장도 논란거리다. 위천주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나? 이승훈의 위 언술만 보면 진짜 천주와 가짜 천주가 있고, 세상에 가짜가 횡행하니 현혹되면 안 된다는 서학의 교리 주장이 이치상 모순된다는 비판을 담고 있다. 「벽이문」에서 이승훈은 이 가짜 천주에 대한 서학의 허황된 주장을 서학의 논리로 격파한 내용을 담았다고 말했다.
위천주란 용어는 안정복의 「천학문답」 30번째 문답에 그대로 나온다. 근래에 어떤 상사생(上舍生)이 공자에게 올리는 석전(釋奠)에 참석하려 하자, 천주학을 하는 그의 벗이 이를 말리면서, 형상을 꾸며놓고 제사를 올리면 마귀가 와서 먹지 공자의 귀신이 와서 흠향하지 않는다며,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한 말을 인용했다. 안정복의 글 속에 나오는 천주학을 하는 벗은 홍낙안이 다른 글에서 쓴 것처럼 이승훈을 특정한 것이 분명하다.
안정복은 서학에서 천주상을 걸어놓고 예배 드리는 것은 형상을 본뜬 것으로 일종의 마귀라 하면서, “마귀의 변환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또한 선을 꾸며 세상을 미혹시켜 낮은 백성을 어리석게 만듦이 있다. 서사(西士)가 여기에 미혹되어 높이 떠받드니 어찌 가소롭지 않겠는가?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거짓 천주가 있다고 한다. 이 또한 마귀의 장난이다. 가짜로 거짓 천주라 일컫는다면, 가짜 형상에 기대어 부칠 수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위천주에 대한 언급이 워낙 짧아 위천주의 실체는 여전히 모호하다. 위천주는 적(敵) 그리스도(Antichrist)인가? 아니면 성경에 나오는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나 악마의 우두머리 베엘제불인가? 이승훈이 1785년 당시의 수준에서 위천주에 대한 논의를 펼쳤다면 그것은 당시 기본 서학서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태오 리치의 「천주실의」 중 [4.7]에 나오는 다음 단락이 주목된다. “예전 천주께서 천지를 만드실 때에 여러 신의 무리를 만드셨는데, 그 가운데 하나의 큰 신이 있어 이름을 노제불아(輅齊拂兒), 즉 루시퍼(Lucifer)라 하였다. 자기가 이처럼 영명한 것을 보고는 문득 오만해져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천주와 더불어 동등하다고 말할 만하다.’ 천주께서 노하시어 그를 따르는 수만의 신과 나란히 변화시켜 마귀가 되게 하고, 내려보내 지옥에 두었다. 이로부터 천지의 사이에 처음으로 마귀와 지옥이 있게 되었다.”
이 루시퍼의 이야기가 정약종의 「주교요지」 하편 1장에는 ‘누지불이’로, 명도회장을 지낸 김기호 요한이 1879년에 쓴 「구령요의(救靈要義)」에는 ‘누지뿌리’란 이름으로 똑같이 나온다. 루시퍼는 9품 천신 중 상품 천신이었다가 스스로 천주와 동등하다고 여기는 교만으로 인해 지옥에 떨어져 마귀 집단의 리더가 되어, 독살 많은 배암의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이승훈이 위천주의 개념을 천당지옥설과 묶어서 말했으니, 위천주란 바로 이 루시퍼처럼 천주의 권능을 참칭한 마귀를 가리킨 것으로 본다.
또 마태오복음 24장 5절과 루카복음 21장 8절 등에 말세의 징조로 “장차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서 ‘내가 그리스도다!’ 하고 떠들어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라고 한 대목이 있는데, 이 거짓 그리스도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 중에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자리에 올라있는 자를 가리킨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2장 4절에도 “하느님의 성전에 자리 잡고 앉아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가짜 악의 세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또한 위천주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에 대한 깊은 논의는 신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여서 필자가 다룰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한편 척사파의 선두에 섰던 홍낙안은 「노암집(魯巖集)」 제4책에 실린, 1791년 11월 11일에 쓴 「이승훈의 무고로 인해 변명하여 진술한 상소(因李承薰誣供陳卞疏)」에서 이승훈의 「벽이문」이 당시 아비와 아우가 부르는 대로 받아적은 글이라 진정성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더 나아가 “글 가운데서 천당과 지옥을 배척한 것은 과연 불교의 천당과 지옥이 아니었던가? 이른바 위천주란 것은 혹 저들의 학문 중에서 배척하는 마귀가 아니었던가? 이것을 고집하여 주장한다면 그가 말하는 진짜 천주와 진짜 천당지옥은 진실로 그대로 있는 셈이다. 어찌 더욱 흉악하고 교활하지 않은가?”라고까지 말했다. 어쨌거나 홍낙안 또한 위천주를 마귀로 본 것은 같다.
또 하나의 배교 선언 「유혹문」
1785년에 썼다고 한 「벽이문」 이후, 1795년에도 이승훈은 서학이 이단임을 밝히는 또 한편의 배교문인 「유혹문((牖惑文)」을 지었다. 유혹이란 미혹됨을 깨우친다는 뜻이다. 「유혹문」에 관한 내용은 신유박해 당시 「추안급국안」 1801년 2월 10일 자 기록에 한번 나온다. “을묘년(1795)에 예산에서 귀양살이할 때 사학 중 지극히 요사스럽고 참혹한 말을 세 단락으로 나눠서 쪼개고 격파하여 「유혹문」을 지었습니다. 그 글 가운데 하늘이 사람이 되어 내려왔다는 말은 지극히 요망하고 너무도 허탄하니, 어찌 빠져 미혹될 이치이겠습니까? 조금 문자를 아는 자는 역상(曆象)의 방법이 교묘함을 가지고 미혹되었고, 어리석은 부류는 천당지옥설로 미혹되었으므로, 이를 쪼개어 부수려는 뜻으로 수천백 언의 글을 지었던 것입니다.”
이 진술에 따르면 「유혹문」은 천주교 교리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허구성을 밝힌 글이었다. 그중 하나가 예수 강생(降生)의 신비에 관한 부분이었다. 이는 대단히 요망한 논리인데도 식자층은 그네들의 역상(曆象) 즉 역법과 천문학에 대한 지식 때문에 빠져들었고, 일반 백성들은 천당지옥설에 이끌려 현혹되었으므로, 자신이 수천 마디의 글로 이를 논파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승훈의 「유혹문」이 앞선 「벽이문」의 골격을 바탕으로 더 자세히 부연하여 서학을 배격한 장문의 논설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승훈은 최초의 영세자였지만, 1785년 을사추조 적발 직후 배교를 선언하며 「벽이문」과 「벽이시」를 지었고, 두 해 뒤인 1787년의 정미반회 사건과 1791년 평택 현감 당시 공자 사당에 배례를 거부한 일로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러다 1795년 주문모 실포 사건 직후 예산에 귀양 가서는 또다시 전향서인 「유혹문」을 써서 배교의 최전선에 섰다. 그가 쓴 「벽이시」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따로 쓰겠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6월 13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5. 한국천주교 창설주역 가운데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에 대한 순교 사실과...
[수원교구 주최 제3차 한국순교자 시복시성을 위한 세미나]
한국천주교 창설주역 가운데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에 대한 순교 사실과 그 평판에 관하여
세 사람의 신앙과 공적 등에 대한 새롭고 폭넓은 시각 필요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가 주최한 제3차 한국순교자 시복시성을 위한 세미나가 19일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가운데 권일신ㆍ권철신ㆍ이승훈에 대한 순교사실과 그 평판에 관하여'를 주제로 열렸다.
발제자과 논평자들은 세 사람에 대한 신앙과 순교평판에 대해 폭넓게 논의했다. 순교ㆍ배교 여부에 관심을 집중하기보다는 그들의 신앙에 대해 좀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심상태 몬시뇰 등 6명의 사제ㆍ학자가 발제를, 여진천(배론성지 주임)ㆍ장동하(가톨릭대학교)ㆍ배달하(원주교구 대하본당 주임)ㆍ김성태(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신부,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박사, 조광(고려대) 교수가 논평을 담당했다. 다음은 발제문과 논평 요약이다.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 활동과 신앙고백
순교 여부와 관련하여 - 원재연 박사(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이승훈(베드로)은 교회창립의 원공(原功)과 신앙부인의 원죄(原罪)를 동시에 덮어쓴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이승훈이 1785년, 1791년 두 차례 공개적으로 배교를 선언했지만 일시적인 박해 위협에서 벗어나려는 '거짓 배교 선언'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승훈이 신앙 때문에 죽었으나 배교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평가와 달리 박해자와 척사론자들은 그가 "스스로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외형적으로 입증해주는 결안(結案)을 남겼다고 말한다. 그의 후손은 유시(遺詩)를 구전으로 전하며 순교사실을 확신했다.
이승훈은 조선교회 창설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던 수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져와서 교리를 보급하고 신앙공동체를 확산시킨 '원죄' 때문에 박해자들의 칼날을 피해 살아날 가능성이 없었고 어떤 변명을 해도 박해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배교자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단죄하는 것은 성급하고 안이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천주교 수용과 전파의 토대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
- 서종태 박사(호남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권철신은 천주교를 수용하는 데 필요한 사상적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천주교의 수용 및 전파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를 전파할 때 천주교를 수용해 한국 교회를 창설하고 지방 각지에 신앙공동체 설립을 주도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권철신의 제자이거나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은 1784년 겨울에 입교, 그의 가족들에게 천주교를 믿도록 권유했다. 이후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흔들림 없이 교회에 남아 교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슬기롭게 난국을 헤쳐 나갔다.
1785년 추조적발사건과 1791년 제사를 금지하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으로 이벽과 이승훈이 교회를 멀리할 때도 흔들림 없이 교회에 남았다. 권일신은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고 안정적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한 공로가 크다.
사료를 통한 권철신ㆍ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 박광용 교수(가톨릭대학교)
권일신은 조상제사 문제 발생 이후, 반대파들에 의해 '교주'라고 고발될 당시까지도 사대부로서 거의 유일하게 남았던 초기 교회 지도자로서, 당시 교회의 기둥이었다는 평판은 사실로 인정된다. 그가 작성한 회오문(悔悟文)으로는 진정한 배교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니 그의 심복제자들이 이후 교회의 기둥으로서 성직자 영입을 달성했다는 사실들을 더 적극적으로 평가해야할 것이다.
권철신의 경우 저명한 서학 교우라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적극 벗어버리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권철신은 네 번째 문초에서 윤유일의 북경 왕래 및 주문모 신부 영입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관에 고하지 않았다는 지정불고를 인정하고 받아들였고 2차 심문 후에는 노령과 지병으로 형이 정지됐지만 그 당일에는 심문하는 장의 한도인 30도를 맞고 나흘 뒤에 후유증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이는 곧 '주재자에 대한 올바를 흠숭' 문제인 성직자 영입 문제에서 자신의 죽을 자리를 찾았다는 의미로서, 그 이전 언사에 관계없이 이 자세가 시종일관된 것임을 말해준다.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의 생애와 순교사실과 그 평판에 관한 연구
- 류한영 신부(양업교회사 연구소 소장)
문초기록에 의하면 권일신은 1791년 11월 8일 형조에 투옥되어 일곱 차례 신문을 당하면서 신앙을 용감하게 증거하고 제주도 유배에 처해졌다. 권일신은 정조 임금의 회유 지시로 15일에 회오문(悔悟文)을 썼고 유배지는 예산으로 바뀌었다. 그는 죽음 직전에 순교사실을 의심하게 하는 일시적 허물을 남겼지만 일관된 그의 활동과 신앙의 증거는 하느님의 은총 속에 생을 마감했다고 볼 수 있다.
권철신은 직접 전도는 하지 않았으나 그가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대중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다블뤼 주교는 그의 평소 삶과 덕행, 구전에 전해지는 순교에 대한 의지 등을 고려해 그의 죽음을 순교로 판단했다.
이승훈은 1785년 추조적발 사건 이후 집안의 박해에 굴복, 자기 변호문인 벽이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후 집안과 친구들의 박해 속에서도 인내하며 신앙을 지켰다. 이승훈은 인간적 연약함과 보유론적 입장의 유지로 인해 신앙을 배반하고 회개하기를 반복하다 끝내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치게 됐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창설주역에 대한 시복시성을 위한 교회법적 구성요건
- 최인각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권철신ㆍ권일신ㆍ이승훈은 조선 사회 최고의 지성인이자 지도자들이었으며 조선 교회 최고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이 자신만 살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가성직제도, 북경에 서신 전달, 성직자 영입, 그리고 한국교회 전체를 위한 고민 등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 사람의 신문내용과 결의안을 보면 표면상으로 신앙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그들이 신앙을 부정하고 배교했는가?'를 반문하면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박해자들이 세 사람에 대해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겉으로만 그렇게 한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조선에 하느님 백성을 돌보고 보호하며, 교회를 충실하게 유지하는 평신도 사목자로서 본분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세 사람이 보여준 태도는 이들이 갖고 있던 천주에 대한 신앙, 나라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그리고 사목자로서 하느님 백성에 대한 사랑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를 살리고자 하는 상생의 철학과 영성을 갖고 있던 이들이었다.
이승훈ㆍ권철신ㆍ권일신의 죽음과 순교 문제 재조명
- 심상태 몬시뇰(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장)
한국교회 창설 주역인 이승훈ㆍ권철신ㆍ권일신이 신앙을 부인하고 교회를 멀리했다고 전해지는 당시 관변 기록을 근거로 단칼에 무 베듯 그들의 처신을 나약하고 부끄러운 배교로 규정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1791년 이래 처하게 된 상황의 심각성에 주목해야 한다. 북경에 밀사를 파견해 한국교회 사정을 보고하고 성직자 파견을 간청해 낭보를 기대하던 이들에게 조상제사 금지 훈령이 떨어진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망연자실했을지 헤아릴 필요가 있다. 그들은 다른 신도들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대역무도한 죄인으로 곧바로 참수형에 처해지고 50살에 장 100도에 해당하는 엄형을 받은 끝에 삶을 마쳐야 했다. 모두 그리스도 신앙 때문에 그들이 겪어야 했던 일이었다.
한국교회 창설 주역인 세 사람의 치열했던 구도적 도정을 뒤밟아 따르며 그분들의 고결한 삶과 장렬한 죽음에 부합하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마련하는 일에 우리 후손 모두 적극 동참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논 평
교회 역사에 나타나는 사건과 인물은 역사적 연구와 함께 신학적 판단이 한데 이뤄져야 한다.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의 죽음이 배교와 순교의 범위로만 한정돼 논의되고 있는 느낌이다. 한 쪽에서 배교로 이해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신앙 증거자의 죽음(순교)으로 대응한다. 배교와 순교의 범위를 벗어나 창립주역 세 명이 오늘날 한국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모델이 될 수 있는 점을 밝혀보았으면 한다.
권철신, 권일신의 죽음은 조상제사문제와 직결돼 있으며 당시 교회가 조선의 전통문화와 효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는 문제점의 결과이기도 하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 탄생을 기적적 사실로 인식했으므로 권철신과 권일신은 기적의 주인공이다.
시복ㆍ시성을 논의할 때는 불가피하게 순교여부에 관한 문제가 부각될 수밖에 없다. 순교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 실제로 죽음을 당해야 하고 △ 그 죽음이 신앙을 반대하던 사람들에 의해 초래돼야 하며 △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권철신과 권일신의 죽음을 검토해 보면 첫 번째, 두 번째 조건은 부합하지만 마지막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평화신문, 2009년 9월 27일, 정리=임영선 기자]
6. 한국 첫 세례자 이승훈 7대손 이태석 신부
"바래가는 순교정신 되살려야“
서울대교구 잠실7동 보좌 이태석(아우구스티노) 신부는 매년 순교자 성월이 되면 서랍 깊은 곳에 소중하게 보관해둔 족보를 꺼내본다.
1784년 이벽의 권유로 중국 북경에 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교리를 배운 후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1736~1812) 신부로 부터 세례를 받은 한국 교회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1756~1801)의 7대 직계 후손.
외아들에서 외아들로 어렵게 이어온 이승훈 가계에서, 그것도 종손이 사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지난해 사제 서품자 면담과정을 통해 드러나기 이전에는 가장 가까운 동료사제들조차 그가 이승훈의 직계자손임을 몰랐을 정도. 그만큼 이 신부는 자신이 이승훈의 자손임을 드러내길 꺼렸다.
물론 마음속으로야 제가 한국교회 최초 세례자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이 자랑스럽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가 지금 여기서 열심히 신앙안에서 사는 것만이 순교자들의 신앙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교회의 처음과 직선으로 맞닿아있는 그로서는 요즘 순교자성월이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비록 세 번의 배교와 자료부족 등 여러 이유 때문에 이승훈이 성인품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결국에는 신앙을 위해 순교했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서도 교회의 반석이 된 것처럼 이승훈도 비록 세 번의 배교를 했지만 마지막 순교하기 전에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시로 남길 정도로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일매일 배교하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너무나 인간적인 순교자 이승훈의 영성이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이 신부는 또 그늘에 가려진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며 잊혀져가는 순교영성을 안타까워했다.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선조들의 깊은 순교신앙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분들의 잊혀져가는 순교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신부는 오늘도 먼지 쌓인 족보속에 담겨진 신앙의 흔적들을 묵상한다.
【우광호 기자】 <평화신문 제544호 99년 9월 5일자>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