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속에서 진주를 찾다
낙성대 4번 출구 앞에 '흙'이라는 고서점이 있습니다. 책방 주인장이 춘원 이광수 선생을 흠모하여 그의 소설 제목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네요. 근자에 필자는 흙 속의 진주 같은 빛바랜 고서적 한질을 여기에서 발견했습니다. 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857) 선생이 집필한 '지귤이향집(枳橘異香集)'.
탱자(枳)와 귤(橘)은 향내가 다르지만
六堂 선생이 직접 쓴 서문에서 '枳橘異香集'이 의도하는 바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즘 글과는 다소 다르다지만 이해 못할 바 아니기에 원문 그대로 올려 봅니다.
"漢詩와 時調는 香氣를 달리하지마는 바탕을 한가지로 하는 文苑의 花草이다. 다른 點은 서로 다르고 같은 점은 서로 같다고 하면, 그 서로 다르고 서로 같은 所以는 무엇에서 보담도 흙의 운김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이제 이 운김을 뒤섞고 서로 바꿔 본다면 同一한 詩題 詩想 詩境에서 어떠한 빛과 냄새가 나올는지, 이것을 약간 試驗해 본 것이 이 小集이다. (國)內外 詩 一百二十首에 題하되 '枳橘異香集'이라 하니 대개 江南의 橘을 化하여 河南의 枳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橘化爲枳(귤화위지) : 춘추전국시대 孔子님과 동시대를 산 제(齊)나라 명재상 안영(晏嬰)의 고사에서 유래. 안영이 사신으로 남쪽 초(楚)나라에 갔을 때,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제나라 태생 도둑을 잡아 데려온 후, 초왕이 묻기를 '그대 제나라에는 도둑이 많은가 보군?" 이에 "저 안영이 듣기로는 귤이 회수(淮水) 남쪽에서 자라면 귤이 되지만, 회수 북쪽에서 자라면 탱자가 된다고 합디다(嬰聞之 橘生淮南則爲橘 生于淮北爲枳)." 멀쩡한 제나라 사람이 초나라에 와서 도둑이 되었음을 빗댄 멋드러진 반격이지요. 불우한 천재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그는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와 함께 20세기 전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천재 문장가임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시대가 그의 편이 아니었던지, 광풍노도 일제 말기 저들의 강요와 회유에 못이겨 회절하게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후에도 그의 빛나는 자취만은 크게 회손되지 않았으나, 근래 들어 특히 진보를 표방하는 정권이 들어서고 친일파 명단에 오르면서 천하에 죽일 넘(?)이 되지요. 그 시대를 함께 하지 못한 자들이 현재의 잣대로 과거 행적을 함부로 재단하는 일은 결코 옳바른 처사가 못됩니다.
'지귤이향집(枳橘異香集)'은 육당선생이 한시를 우리 고유의 문학형식인 시조로 바꿔놓은 거지요. 해방후 시작하여 6.25 전에 완성한 것으로 보여집니다만, 전란 중에 망실되었다 일부를 되찾아 보완하여 1955년 경 동아일보에 연재하게 됩니다. 그중 널리 알려진 한시와 그 번안 시조를 골라 당시 원문 그대로 올립니다. 60년이란 짧다고도 할 기간이지만 우리말도 상당히 바뀐 듯 하네요.
贈隋大將軍于仲文 / 高句麗 乙支文德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知足願云止。
天文을 까뒤집고 地理까지 웁여패여* 가진꽤 다낸줄을 대강집작 하거니와 한고작 긔써한이때 돌아그만 가소서 (띄어 쓰기는 원문 그대로 옮겨 현대 마춤법과는 차이가 남)
☞도움말 : 첫 구절의 '웁여패여'는 '우벼파다' 를 이르는 말로 '후벼파다' 와 같은 의미로 해석됩니다. 마지막 구절의 '긔써한' 은 '애써 한'으로 짐작됩니다. 전체를 요즘 말로 하면 '천문을 까뒤집고 지리까지 후벼파서, 가진 꾀 다 쏟아 낸 줄 대강 짐작하거니와, 고작 애써 이룬 이 때 그만 돌아가소서' 쯤 되지 않을까요. 육당 선생의 번역이 다소 과격한 맛이 없지 않으나 생동감이 더하네요.
詠井中月 / 高麗 李奎報(고려 이규보)
山僧貪月色。井汲一甁中。 到寺方應覺。甁傾月亦空。
月色을 탐하여 우물물을 기렀더니 한甁이 그득하게 분명담아 왔건마는 돌아와 쏟아부을적에 남은무엇 있든가
우물 속에 비친 달을 읊은(詠井中月) 시인데, 별로 사족을 붙일 게 없네요.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고려조의 문신으로 경서와 역사에 통달하고 한시에 능했답니다. 무신정권 시기를 견뎌온 노회한 정치가라 그런지는 몰라도 특히 희화화 된 문장이나 자조적인 시구가 자주 눈에 띕니다. 무신정권에 빌붙어 사는 걸 비난하는 벗들에게 '그래야 자네들에게 술 한잔이라도 사줄 게 아니냐' 고 되받아쳤다나.
春興 / 高麗 鄭夢周(고려 정몽주)
春雨細不滴。夜中細有聲。 →微 雪盡南溪漲。草芽多少生。
실같이 오는봄비 밤들게야 소리있네 눈녹은 앞시내에 물은얼마 불었는지 푸새로 볕바른곳*에 싹터올가 하노라
대학자 六堂선생도 실수할 때가 있네요. 위 시 두번째 구 셋째 자는 가늘 細가 아니고 작을 微 자가 맞습니다. 뜻에는 별 차이가 없으나 원본에 그리 나왔을 뿐더러, 20자에 불과한 5언절구에 같은 자를 중복해서 쓰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시조 마지막 줄 '푸새'는 국어사전에 '산과 들에 저절로 자라는 풀을 통털어 이르는 말'이라 되어 있는데, 필자는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저 채소 정도로 알고 있었으니.. 그리고 '볕바른곳'은 원 한시에는 없는 걸 선생께서 친절하게 덧대어 넣으신 거네요.
寄君實 / 李朝 月山大君 李婷(조선 월산대군 이정)
旅館殘燈曉。孤城細雨秋。 恩君意不盡。千里大江流。 →思 가을밤 나그네집 새벽녘에 가는비를 임그린 내회포는 어떻다할 길없는데 千里에 흐르는大江 쉬는틈도 없오라
시제가 '寄君實' 인데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이 사랑했던 정인 君實에 부치는 시입니다. 이 한시의 셋째 구 첫 자는 은혜 恩 자가 아니고 생각할 思로 사료되는데, 아마도 교정을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습니다. 번안된 시조에도 '임그린'으로 되어 있는 바 당연히 '思君'이 맞겠지요. 아시겠지만 월산대군은 성종의 친 형님으로 장자지만 임금이 되지 못한 불우한 왕자입니다. 그의 대군 명칭에 달 月 자가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호 또한 풍월정(風月亭)이라 했듯이 음풍농월(吟風弄月)에 일가견이 있었지요. 당대의 내노라하는 문인 서거정, 강희맹, 이승소 등과 함께 당시 한양의 명승지 10곳을 엄선하여 읊은 연작시집 '한도십영(漢都十詠)'을 내기도 하지요. 성종도 일찍 승하했다지만 월산대군은 35의 젊디젊은 나이에 죽습니다. 가인(佳人)은 박명(薄命)인가.
월산대군이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망원정(望遠亭) ; 양화대교 북단 서편에 위치. 원래 세종대왕의 형님인 효령대군이 지어 희우정(喜雨亭)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성종대에 역시 형님인 월산대군에게 하사하였음. 그리고 '먼 경치도 잘 볼 수 있다'는 뜻으로 망원정(望遠亭)이라 고쳐 부릅니다. 성종(成宗)은 세종 때의 전례에 따라 매년 봄과 가을에 망원정에 행차해 농사의 형편을 살피고 군사훈련을 관람하였으나, 월산대군이 죽은 후에는 다시 찾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의 망원정은 1925년 대홍수로 소실된 것을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형식의 건물로 1989년 다시 지었으며, 건물 밖에는 망원정(望遠亭) 현판이 안쪽에는 희우정(喜雨亭)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