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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25일 성탄절 메시지
1장 성탄 마당
1. 성탄절의 의미
성탄이란 거룩한 탄생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킵니다.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엇비슷한 설교를 반복하게 됩니다. 성탄에 대한 기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어서 주로 이 두권의 첫 부분에서 설교 본문을 정하게 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로 동방박사의 방문을 설교 소재로 삼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와서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리고 세 가지 선물을 드렸다는 내용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주로 여관에 빈방이 없어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는 대목을 많이 채택합니다.
이 탄생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인데 세간에 잘못 회자된 오해 때문에 본문에서 강조하지 않은 것들을 쓸데없이 강조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2. 잘못 알려진 부분들
1) 동방박사는 현자들이 아니었다
동방박사들을 보통 현자, 박사, 왕 등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동방이란 바벨론, 페르시아 즉 지금의 이란 이라크 지역을 의미합니다. 그 지역들에서 온 박사들이란 오늘날의 박사학위를 받은 박사가 아니라 점쟁이, 마술사 등 전문가가 아닌 별볼일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가 이들을 등장시킨 이유는 기존의 학자들과 대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기존의 성서 학자들은 메시아에 대해 자세한 지식이 있었지만 메시아의 오심에 무관심했다, 그런데 동방의 보잘것 없는 뜨내기들은 그런 지식이 아닌 막연한 별빛을 보고 온 사람들이었지만 메시아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그러니 안다고 자부하는 교만을 버리고 진정한 관심을 갖고 진리를 사모해야 한다... 이런 의도에서 그들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만일 동방의 현자들은 별을 보고도 메시아를 알아볼 정도로 현명했다고 본다면 성경이 아닌 천문학을 통해서도 계시를 알 수 있다는 이상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천문학은 일반계시여서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알려줄 수는 없습니다.
3) 동방박사는 세 사람이 아니었다.
보통 동방박사를 세 사람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데 마태복음 본문에는 ‘박사들’이라고만 나옵니다.(마2:1) 선물을 세 가지를 드렸다는 이유에서 세 사람으로 보는 듯한데 선물 갯수와 사람수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3) 현대식 여관은 없었다.
당시에는 여행하다가 날이 저물면 주로 민가에서 잠자리 신세를 졌습니다. 당시에는 겨울이 되면 가축을 집 안에 들이는 경우가 보편적이었습니다. 가축을 들여놓으면 그 체온으로 실내 온도가 올라가니 추위를 견디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한 민가에서 방 안에 들여놓은 말구유에 눕히셨을 것입니다.
이러한 곁가지들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곁가지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방을 내주지 않은 여관 주인을 아주 못된 인간으로 정죄하는 등 불필요하게 오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주님이시므로 설사 상가에서 태어나셨더라도 누추한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니 아기 예수님을 과도히 불쌍하게 묘사해서 감상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3. 성탄설교에서 간과되는 족보
흔히 성탄 설교에서는 극화하기 좋은 부분을 다루다보니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족보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를 보면 우리에게 공감될만한 부분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르호보암, 아하스, 므낫세 등은 아주 못된 왕들이었습니다. 르호보암 때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아하스는 하나님을 거역했고 므낫세는 온갖 악행을 자행했습니다.
게다가 여자들이 5명이나 등장하는데 다말은 시아버지와 동침했고 라합은 기생이며 룻은 모압 족속의 여인이었고 밧세바는 이미 남편이 있는 몸으로 다윗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족사가 온갖 역기능과 죄악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 중에는 어릴 때부터 부모의 불화와 학대 등 온갖 역기능으로 트라우마를 십자가처럼 지고 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온갖 트라우마와 상처로 얼룩진 가족사를 마다않고 예수님은 그 혈통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조상들의 온갖 죄악과 끔찍한 역기능의 악순환을 이제는 내가 종결짓겠다! 이런 선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한 가족의 구원에 그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인류 전체의 죄를 굴복시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습니다.
4. 죄는 과연 해결되었는가?
예수님은 탄생, 공생애, 죽음, 부활, 승천의 순서를 밟아 죄에 대한 승리와 구원의 성취를 완수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왜 아직도 온갖 죄와 악이 판을 치고 있을까요?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관점이 사람마다 엇갈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보기에는 세상이 달라진 것이 없으니 그가 메시아일 리가 없다고 합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우리에게 하늘의 복음을 주셨으니 그는 메시아가 분명하다고 확신합니다.
죄와 악이 여전히 판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세상의 종말 때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악을 심판하고 완전한 해결을 보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5. 장구한 기다림
결국 인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다림’뿐입니다. 유대인은 오실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기독교인은 다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차 오실 분을 기다리는 것은 같지만 한쪽은 아직 한번도 오신 적이 없다고 보고 이쪽은 이미 한번 오셨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그게 그거인 것 같고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언어적인 차원에서 보면 기독교가 훨씬 부요하고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유대교에는 오직, ‘아직’이라는 시제뿐이지만 기독교에는 ‘이미’와 ‘아직’이 공존합니다. 그리고 성탄, 죽음, 부활, 승천이라는 구원의 언어들이 재림이라는 완성을 향해 두달리고 있습니다.
유한성 안에 갇힌 미약한 인간이 우주적 악을 직접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을 만큼 무한한 힘을 가진 구원자가 절실합니다. 그런데 단번에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장구한 역사를 통해 단계적으로 이루어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의 소망은 오직 기다림에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기다리느냐가 문제입니다. 아무런 방향성 없이 마구잡이로 산다면 소망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과학이나 막연한 변화에 기대를 걸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기계의 발달로 조금씩 나아질 수는 있어도 완성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와 아직이라는 시간의 간극 사이에서 완성을 향해 가고 있다고 믿는 관점이 가장 이상적이고 안정된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은 미약하지만 소망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현재를 견디고 감내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 육체의 병과 장애와 마음의 병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 외로움과 온갖 불안 등 남모를 분투로 나날을 지탱하는 사람 이 모두에게 주어진 구원의 밧줄은 ‘기다림’이라는 언어입니다.
2장 언어 마당
1. 모든 것이 언어이다, 태언어
우리의 신앙은 언어의 신앙입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언어는 곧 말이고 말의 높임말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씀이라는 말이 너무 상투적으로 쓰이기 때문에 저는 언어라는 용어로 바꿔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창조되었고 언어를 통해 계시를 받아들이고 육체로 오신 언어님을 통해 구원을 받고 다시 오실 언어님을 기다리며 현재를 감내하는 삶을 사는 언어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언어, 온 세상도 언어, 우리도 언어, 결국 모든 것이 언어입니다.
이것이 제가 박사논문을 쓰면서 정립한 언어신학적인 세계관입니다. 모든 것을 언어로 보았다는 것은 제가 언어장애인으로서 그만큼 언어에 처절하게 목말라 있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언어관을 가지게 된 것을 학문 여정에서 얻은 최고의 수확이라고 자부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언어에 의해 태어났다가 뱀의 언어에 의해 타락했고 인간으로 오신 언어에 의해 구원을 받았으니 이러한 언어관은 성경적으로도 무리없이 부합되는 관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이 험하고 외로운 세상에서 버티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은 언어에 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구원의 언어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니 당신 자신이 구원의 언어로서 오셨습니다. 삶이 힘겨울 때마다 가장 마음에 힘나는 언어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언어로 기도를 해보십시오. 사랑과 진심이 담긴 언어로 서로 소통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 언어들을 통해 오늘을 살아낼 힘과 용기를 얻고 미래를 밝게 열어나갈 원동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언어의 의미를 극대화한 것을 클 태를 써서 태언어(太言語)라고 명명해보았습니다.
2. 하늘언어의 의미 정리
교회 이름을 하늘언어교회라고 짓고나서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이름의 의미가 구체화되고 새롭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언어
우리말로 하늘이란 말에는 하나님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언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하늘에서 내려온 언어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 곧 예수님이라고 진술합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곧 하늘언어입니다.
3) 예수님이 전하신 하늘복음, 천국복음
예수님은 천국의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복음도 말씀 즉 언어로 전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늘언어는 복음이란 말의 대체어로도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
4) 하늘나라 즉 천국의 언어
하늘나라에는 세상의 언어와는 다른 고차원의 언어가 통용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신비한 세계의 언어이긴 하지만 그런 언어도 하늘언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5) 성화된 성도들의 거룩한 언어
성도들이 성화되어 간다면 언어도 거룩해져 가야 할 것입니다. 언어가 성화된다는 것은 성도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하늘언어이신 예수님을 닮고 그분이 전해주신 하늘복음과 천국의 언어에 근접해 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 성화된 언어는 거룩함과 사랑과 화평과 공감과 온유와 치유와 배려 등 성령의 열매와 하늘나라의 열매가 가득 배어들게 될 것입니다.
물론 고질적인 죄성 때문에 단번에 그런 언어를 갖게 될 수는 없고 평생 조금씩 성장해 가면서 하늘언어적인 입이 열려야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의 지체중에 가장 길들이기 힘든 부분이 혀라고 야고보가 지적했을 정도로 말의 변화는 어렵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성화의 여정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6) 고차원의 언어
예술언어이든 학문언어이든 꾸준히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면 고차원의 언어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시를 계속해서 다듬어 나가다 보면 하늘나라의 언어처럼 아름답고 깊은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고차원의 언어도 하늘언어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진중한 언어
위의 언어들은 너무 차원이 높아서 당장 삶에서 구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 언어들 중에서 비교적 값지고 진실하다고 여겨지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늘언어에 가까운 언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비록 아직은 투박하고 서툴지만 말 한마디라도 사랑과 진실과 온정을 담아서 하려고 노력하고 예술이나 학문적으로도 보다 탁월한 말을 하려고 노력하면 그 말들은 생명력을 얻고 말하는 이와 듣는 이에게 예술, 학문적 영감과 구원의 힘을 북돋아 주는 살리는 언어가 될 것이고 그런 언어야말로 현재적인 하늘언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하늘언어를 삶의 터전에 파종하고 일구고 수확해서 영육간에 나날이 강건해지고 구원의 능력으로 충만해져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3. 새언어 배우기, 박싱데이
박싱데이란 크리스마스 다음날을 의미합니다. 이 날에는 크리스마스 날에 받은 선물들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날입니다. 예를 들면 우체부, 배달부, 독거노인, 소년 소녀 가장, 장애인 등 크리스마스 날에도 쉬지 못하거나 선물을 줄 사람이 없어서 쓸쓸히 지나가는 이들에게 받은 선물들을 나누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이웃들이라 해도 대충 주는 것은 안 좋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선물을 주실 때 쓰고 남은 것을 주시지 않고 가장 아끼는 아들을 주셨듯이 우리도 박싱데이에 정성껏 선물하는 것이 좋습니다.
3장 선물 마당
1. 선행은 선택이 아닌 필수
개신교에는 구원을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받는다는 교리가 있어서 선행에 소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옳기도 하고 문제가 있기도 한 교리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구원을 성취하셨기에 인간이 할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인간은 엄청난 우주적인 악에 대항할 힘이 없어서 어떤 선행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행이란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하는 일입니다. 주어진 것은 자꾸 활용해서 발전시켜야 합니다. 만일 사용하지 않고 방치하면 받은 은총을 누릴 기회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행은 운동과 같은 것으로 자꾸 해버릇해야 성화와 영성 등 여러모로 유익이 많은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선행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시고 세상에 유익을 끼치며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행을 제대로 실천하면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자기에게 복이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선은 주는 것 자체만으로 마음이 뿌듯해지는 등 심리적으로 행복감을 맛볼 수 있고 받는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덩달아 행복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산가나 기업의 선행은 사회의 복지 수준을 제고하는데도 이바지하게 됩니다.
흔히 하나님께 드릴 때는 아낌없이 드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방법으로 가장 강조하는 것이 십일조와 헌금입니다. 그런데 십일조와 헌금은 가난한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심으로 소자 즉 가난한 이웃에게 베푸는 일이 바로 예수님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을 내야 하는 이유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가난한 이웃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에게 십일조를 준 이유는 그들에게는 땅이 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십일조와 제물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선행과 나눔은 믿는 이들에게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일입니다.
2. 누나에게 케익을, 초라하고 어설펐던 선물의 기억
초딩때 누나 생일에 케익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용돈을 어머니께 드리면서 누나 생일 케익을 사다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어머니는 부탁대로 케익을 사오셨습니다.
그런데 당사자인 누나는 하나도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런가 의아했는데 케익을 먹어보니 누나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무슨 케익이 덩치만 크고 맛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아 선물은 참 어려운 것이구나 싶어서 다시 해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만약 우리 가정이 좀 더 화목하고 풍요한 소통이 가능했다면 누나는 어떤 케익을 좋아하는지를 물어보고 다음 해에 누나가 좋아하는 케익을 선물해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3. 가톨릭의 레지오마리애 단원의 방문
천안에 있는 동안 집주인 사장님을 통해 소개받은 레지오마리애 단원이 매달 방문해서 먹거리를 건네고 봉투를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익숙치 못하면 한번 찾아가기도 어색한데 그분들은 꾸준히 찾아오셨습니다. 그런 면이 참으로 멋있고 부러워 보였습니다.
우리도 가진 것은 없지만 누군가를 꾸준히 찾아가서 나누도록 훈련이 된다면 그것도 귀한 은혜의 통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부러움이 밀려왔습니다.
4. 시각에서 소외된 이들의 문화적 빈곤
세상은 온통 시각중심입니다. 마트에 진열된 거의 모든 물건이 시각중심으로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각에 장애가 있어서 물건을 만지거나 냄새를 맡으면 눈으로 보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빈곤한 면이 있습니다.
촉각으로 즐거움을 얻어보려고 몇년 전부터 열쇠고리와 인형 등을 수집해 왔습니다. 그런데 습관이 안 되어서인지 아니면 촉각으로는 흥미를 얻기 어려워서인지 기껏 고른 물건들을 통에 넣어놓고는 거의 손이 가지를 않게 됩니다.
그걸 보고는 물건들을 통해 즐거움을 맛보려면 무한한 상상력이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만지면서 그것들과 대화도 하고 온갖 재밌는 장면도 상상하면서 만져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어릴 때부터 취미가 생겼다면 모를까 나이 들어서 해보려하니 좀처럼 되지를 않습니다.
5. 최고의 선물은 언어
감각이 빈곤하면 삶 전체가 빈곤하고 고독하고 무미건조하게 됩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통로가 바로 언어를 통한 상상력입니다. 사람은 감각을 잃는 일도 큰 고통이지만 언어를 잃는 일이 가장 큰 고통입니다. 예를 들어 눈이나 귀는 멀쩡한데 아무하고도 다정한 대화가 없이 지낸다면 그런 삶에는 무슨 기쁨이 있을까요? 세상에는 감각에는 장애가 없지만 언어를 잃고 사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제가 어릴 때 누나에게 케익을 선물하려다 실패를 했다면 이렇게 물어봤어야 합니다.
“누나는 무슨 케익을 좋아해?”
“케익을 안좋아 한다면 그럼 무슨 음식을 좋아해?”
그런데 제 기억에는 한번도 그런 물음을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해본 적도 없고 누군가 저에게 물어준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귀가 전혀 안 들리는 것이 아니고 크게 말하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잔존청력이 있었지만 그 청력으로 했던 말들은 주로 화를 내거나 상처받은 마음의 투사였던 것 같습니다.
결국 사람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언어입니다. 서로 사랑과 배려와 치유의 말들을 주고받고 나아가 성경의 언어들을 통해 소통의 질을 높이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으로 이끌어줄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말을 나누는데는 돈이나 큰 희생이 필요 없습니다. 마음에 언어를 준비하고 그것을 다정하게 이웃과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값없이 주어진 언어라는 무한 자원을 통해 많은 사랑과 행복과 기쁨을 나누는 삶을 일구어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메리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