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남이 성지
'호남의 사도'이며 순교자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생가 터
초남 부락은 호남의 첫 사도요 순교자인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의 고향이자 전라도 천주교회의 발상지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 부부인 유 요한과 이 루갈다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동정 서원을 하며 혼례를 올린 곳이다.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주문모 신부가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유항검은 진산 사건으로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된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거의 절대적인 공헌을 한 초대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1784년 늦은 가을 유항검은 양근의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의 집을 찾아가 그 집에서 권일신을 대부로 하고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전라도에서 체포된 200여 명 대부분이 그가 전교한 사람들이었다.
1786년 봄,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주역이자 가성직 제도를 설정한 이승훈에 의해 권일신, 홍낙민(洪樂敏, 1751~1801, 루카), 최창현(崔昌顯, 호 관천, 1759~1801, 요한),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 등과 함께 신부로 임명되었으나 1787년 그 는 가성직 제도의 부당성을 깨닫고 이승훈에게 시정을 요청하는 한편 북경에 밀사를 보내어 오류를 범한 가성직 제도에 대해 정죄하고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촉구했다. 그리하여 윤유일(尹有一, 1760~1795, 바오로)이 밀사로 파견됐고 유항검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초남이는 또한 1794년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외국인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유항검의 초청으로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사학의 괴수로 낙인찍힌 그는 전라도 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외국인 신부의 입국을 도와 내통했고 사교(邪敎)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청원서를 냈다는 죄목으로 대역부도의 죄를 적용해 능지처참 형을 언도받고 1801년 9월 17일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이에 앞서 유중철(柳重哲, 1779~1801, 요한)은 부친이 체포된 직후에 체포되어 전주 감영의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9월 15일에는 동정 부인 이순이(李順伊, 일명 유희, 1782~1802, 루갈다)와 동생 문철 요한, 사촌 동생 중성 마태오를 비롯하여 모든 가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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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들이 체포되었다. 그중에서 중철과 문철 형제는 10월 9일 전주 감영에서 옥사하였고, 1802년 1월 31일(음 12월 28일)에는 이순이 또한 전주 숲정이로 끌려 나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이곳은 1797년 혼배한 큰아들 유중철 요한과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가 1801년 치명할 때까지 4년간의 동정 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훗날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가 순교자 전기에서 표현한 것처럼, 루갈다의 마지막 증언과 순교 모습은 “모든 조선의 순교자 중에서 우뚝 솟아난 하나의 아름다운 진주”였다.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고유한 성무(聖務)를 집행했던 제도. 한국천주교회 창설기인 1786년부터 1787년경까지 이승훈, 권일신, 유항검, 홍낙민 등 10여 명의 지도급 인물들이 약 2년간 신품(神品)을 안 받은 채 사제(신부)로서 미사성제를 드리고 고해 등 각종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유항검은 신부의 자격과 신부를 임명한 것이 효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하여 큰 의심을 품게 되어 성사를 중단하고 북경 주교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문의하는 편지를 쓰기로 결정하였다. 이 편지는 이승훈과 권일신의 이름으로 씌어져 1789년 10월(음), 권일신의 제자 윤유일을 통해 북경의 북당선교사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 회답에서 선교사들은 성사를 마구 집전한 것을 무지로 돌리고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다.
◆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의 동정생활
1795년에 유항검은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다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는데, 이때 유항검의 장남 유중철이 주 신부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다. 유중철은 이내 훌륭한 하느님의 종이 되었다.
또한 부친에게 허락을 받고 평생을 동정으로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 무렵 서울에서도 한 유명한 신자 집안의 딸이 동정을 맹세하고 있었다. 초기의 신자 이윤하(마태오)의 딸인 이순이(누갈다)가 그녀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주문모 신부의 귀에 들어갔고, 신부의 주선으로 1797년에는 초남리에서 전대 미문의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유 요한과 이 누갈다가 '평생을 오누이처럼 살면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동정 서원을 하면서 혼례를 올린 것이다. 바로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동정 부부였다.
이순이 누갈다는 두 여자 동반자, 특히 세 어린 자식이 귀양간 생각을 하면서 불안과 슬픔에 잠겨 있는 시어머니를 격려하고 권고하였다. 우리의 영웅적인 동정녀는 시어머니가 다시 천주님께 대한 신뢰를 갖도록 하면서 그의 용기를 되살려 주었고, 그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 떼어 내 이제 문이 열리려 하는 천국으로 돌리게 할 줄을 알았다.
망나니가 관례대로 그들의 옷을 벗기려 하자, 누갈다는 매우 정숙하고 품위있는 몇 마디 말로 그를 물리치고 나서 스스로 웃옷을 벗고 손을 묶지 못하게 한 채 맨 먼저 조용히 자신의 머리를 칼날 아래 놓았다.
◆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의 옥중 편지
어머님 전상서
"문안 아뢰옵나이다. 여러 가지 근심되는 중에 생각하오니, 어머님 슬하를 떠나 온지 지금 4년에 허다한 말씀 아뢰고 싶사오나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사옵고, 다만 몇 줄 글자만 아뢰옵나이다."(중략)
"어머님 소녀가 시댁에 들어오는 날 평생에 쌓였던 일만 근심이 완연히 풀린 것은 일찍이 마음에 맺고 결정하였던 원을 한 평생에 어떻게 보존하여 지낼까 염려된바 말 할 수 없어서 근심 걱정이 심중에 구비 구비 맺혀 쌓였더니, 우리 내외 처음 만나던
날에 서로 수절하기로 맹세하니, 평생 근심이 일시에 풀려 4년 동안을 형제같이 살매, 그 사이에 혹독한 유혹이 몇 번 있어 대개 열 번이나 거의 무너질뻔 하였사오나, 공경하올 성혈 공로로 마귀의 계교를 물리쳤나이다.(중략)
“이런 말씀을 하옵는 것은 어머님께서 혹시나 이 일로 걱정 하실까 함이오니, 이 글월을 받으실 때 소녀의 얼굴을 대하심 같이 받으시옵소서. 다시 또 말씀 드리오니 아무쪼록 근심 마옵소서. 이 세상은 헛되고 거짓됨이 옳소이다. 할 말씀 많사오나 더 쓸 수 없사와 그치옵니다."
유중철이 순교한 뒤 그의 옷 속에서는 자기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 순교자 초남이-4
◆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년)
1754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다음해에 순교한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며느리, 유중성(마태오)은 그의 조카이다.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의 인척 권일신이었다. 이내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1786년 봄에 가성직제도하에서 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그는 자신의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그는 전주에서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처형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 복자 김천애 안드레아 (1760∼1801년)
고향을 알 수 없는 김천애 안드레아는 ‘전라도의 사도’로 유명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당시 유항검의 집은 전주의 초남이에 있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고결한 마음으로 신자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전라도에서는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고 그 뒤를 이어 김천애와 유항검의 맏아들인 유중철(요한)이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증거하였다. 그 해 7월경 동료들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전주로 압송되어 1801년 8월 27일(음력 7월 19일) 혹은 2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 복자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1756∼1801년)
한정흠 스타니슬라오는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전주에 살던 먼 친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으로 가서 그 자녀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유항검 때문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유항검과 함께 그 해 3월에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열심한 신자 김천애(안드레아)와 최여겸(마티아)을 동료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와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지만, 그들의 신앙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라는 명에 따라 그는 고향인 김제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1801년 8월 26일(음력 7월 1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