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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 다시 생각한다.
손석태(철학박사, 개신대학원대 명예총장)
서 론
성령세례는 신학자들 사이에 항상 살아있는 논쟁거리 중 하나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논쟁과 논쟁 사이, 이론과 경험 사이에서 혼란에 빠져 떠밀려 다닌다. 지금까지의 어떤 이론도 설득력 있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령 세례 그 정체가 정확하게 밝혀지지도 않았고, 그 정체를 밝히기 위한 시도도 대개의 경우 학자들은 학자들 대로, 성도들은 성도들대로 자기들의 전제와 경험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우리는 오순절 성령세례에 너무 많은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따라서 본 저자는 지금까지의 연구와는 다른 접근 방법을 통하여 본 주 제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그것은 말씀과 성령의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다. 성령과 말씀은 서로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면서도 그동안 우리는 이 두 주제를 항상 별개로 분리해서 생각해왔다. 창조와 타락과 구원이 말씀 중심으로 이루어진 구속사라면 당연히 말씀은 성령과 더불어 취급되었어야 할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주제는 신약 중심의 연구가 아니라 모든 성경의 주제가 그렇듯이 구약과 신약을 통일적으로 연계해서 다루어야 할 주제이지만 지금까지는 신약성경 중심의 연구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오순절의 성령세례를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말씀과 연계하여 통일적인 주석 방법을 통하여 오순절 성령세례가 새언약의 선지자를 세우는 위임식이었음을 증명하고 이에 연관된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논하고자 한다.
1.오순절의 성령 세례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한 곳에 모여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여러 날이 지나지 않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행 1:5)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한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의 부활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성경을 통하여 증명하여 주시며, 심지어 구운 생선까지도 제자들과 같이 잡수셨다(눅 24:42). 그리고 이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위한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너희는 이것들에 대한 증인이다. 보아라, 내가 내 아버지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니 너희는 하늘로부터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읍에 머물러 있어라.”(눅 24:48-49)고 명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것들을 위한) 증인”으로 세우시며 그가 아버지께 약속하신 것을 받아 능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리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분명 제자들을 그동안 이루어진 일에 대한 전 세계적인 증인으로 세우시며, 이들이 이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성령을 통한 능력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이다. 사도행전 1:5은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면에 이어 예수께서 그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요한으로부터 받은 물 세례와 제자들이 얼마 후 성령으로 받게 될 세례를 연계하고 있다. 말하자면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님의 성령세례를 비교하고 연계한 것이다. 같다면 세례라는 것이고, 다르다면 물과 성령, 그리고 세례를 베푸는 주체가 요한과 예수님이다. 예수께서는 1:5에 이어 8절에서도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행 1:8)라고 말씀하신다. 성령의 오심을 기정 사실로 말씀하시며, 성령을 통해서 능력을 받고 증인이 되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누가 24:48-49에 제자들을 증인으로 세우시며,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명령은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증인이 되기 위하여 필요한 능력을 성령이 임하시면 받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사건은 제자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한 능력을 부여받은 사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들기같이 그에게 임하였는 데(막 1:10), 이제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점이다. 예수께서 메시야로서의 복음 사역을 시작하시며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셨는데, 이제 제자들도 증인으로서 복음 사역을 시작하며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복음 사역을 시작함에 있어서 위로부터 성령이 임하시고 제자들은 그것을 받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이 사건을 특별히 “세례”라고 칭하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받게 되는 이 성령의 세례는 분명 제자들이 복음 사역의 일꾼이 되는 데 갖추어야 할 필수 요건임에 틀림없고, 성령세례는 본질적으로 제자들의 복음 사역과 관련된 사건이다.
1.1. 성령의 임함
오순절이 되어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에서 우리는 세 가지 특이한 현상을 보게 된다.
첫째는 귀로 들을 수 있는 현상으로 하늘로부터 갑자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소리가 났다.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분 것이 아니고 급한 강한 바람 소리가 들린 것이다. 이 소리는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위로 끌어 주의를 끌게 하기 위한 신호와 같은 역할을 했으리라 추측도 된다. 구약성경의 “루아흐”(jwr),나 신약 성경의 “프뉴마”(pneuma)라는 말은 “영”과 “바람”이라는 이중 의미를 가졌고, 예수께서도 성령의 역사를 바람에 비유하신 일이 있기 때문에 (요 3:8) 사람들은 바람 소리만으로도 성령의 출현이나 임재를 감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열왕기상 19:11 이나 이사야 66:15 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급하고 강한 바람을 동반한 가운데 나타나신다. 에스겔 37:9-14에서는 바람, 여호와의 입김, 하나님의 영이 마른 뼈에 임하여 생명을 살리는 환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강하고 세찬 바람 소리는 하나님의 현현이나 임재를 알리는 팡파르(fanfare)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1]
둘째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으로 불과 같이 갈라진 혀들이 제자들 위에 머문 것이 보인것이다. 본문 “kai« w‡fqhsan aujtoi√ß diamerizo/menai glw◊ssai wJsei« puro\ß ¡kai« e˙ka¿qisen⁄ e˙f∆ eºna eºkaston aujtw◊n” 을 번역하면 “그리고 그들 위에 불의 그것 (혀)과 같이 갈라진 혀들이 보였고, 그들 각 사람 위에 머물렀다.” 이다. 좀더 매끄럽게 번역한다면 “그리고 불과 같이 갈라진 혀들이 보였으며, 그들 각 사람 위에 머물렀다.”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 위에 머문 것은 “불” 아니라 “혀들”이다. 한국의 여러 역본들은 개역 성경에서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들”이라고 번역해놓았기 때문에 마치 오순절에 불이 임한 것이라고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 위에 내려와 앉은 것은 불이 아니라 갈라진 혀들이다. 혀들의 모양이 마치 타오르는 불길처럼 갈라졌다는 것이다.[2]
셋째는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현상으로 제자들이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과 같이 갈라진 혀들이 그들 위에 머물자 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 시작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방언으로 말했지만 천하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각각 자신들의 본국 말로 들었다(행 2:4). 혀는 우리 사람들이 말하는 신체 기관이다. 머리에서 명하는 대로 혀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자기들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대로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을 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영이신 여호와의 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자들이다. 구약성경에는 선지자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입”이라고 지칭했다. 그렇다면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임한 혀들과 구약성경의 여호와의 입으로서의 선지자들과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 지, 또한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부여받은 제자들에게 이 혀들이 임하고 방언을 하게 된 이유와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2. 여호와의 입, 선지자
구약성경에서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들을 그의 대언자로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이 대언자가 바로 선지자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yhlah vya)[3], 혹은 “여호와의 입” (hwhy yp)[4]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피 아도나이” (hwhy yp)는 주로 오경에서는 “여호와의 명령”(the commandment of the Lord, 민 3:16,39: 4:37,41; 9:23; 신 1:26), 혹은 “여호와의 말씀”(the Word of God, 민 3:16,17, 51; 신 34:5; 왕상 13:21,26)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의 입(말씀)” (yhla hwhy yp,민 22:18), “여호와 너의 하나님의 입”(<kyhla hwhy yp, 신1:26; 9:23 ) 등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를 부르시고 그에게 그의 말씀을 주어 대언하게 하신다.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가 자기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디기 때문에 여호와의 종이 되기 어렵다고 부르심을 사양할 때 여호와께서는 “내가 네 입과 함께 하며 네게 말할 것을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출 4:12)라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자 여호와께서는 그의 형 아론과 함께 가라고 명하신다. “네가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할 말을 주어라. 내가 너의 입과 그의 입에 함께 하여 너희가 해야할 것을 가르치겠다.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너의 입이 되고 너는 그에게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출 4:15-16). 계속하여 7:1에서는 “보아라,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과 같이 되게 하였으니 네 형 아론이 네 대언자(aybn)가 될 것이다.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너는 너의 형 아론에게 말하고 아론은 바로에게 말하여,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의 땅에서 내보내게 하라.” 이 말씀을 살펴보면 여호와와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혹은 바로 왕) 사이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바로의 신으로, 아론을 모세의 대언자로 지명하시는 데 “대언자”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나비”(aybn)는 “선지자”(prophet)라는 말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언자(Spokesman of God)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지자와 함께 하시며, 그가 전할 말씀을 그의 입에 넣어주시는 것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전해주는 말을 바로 왕이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야 할 아론은 모세의 선지자가 되고, 모세는 아론에게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으로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를 그의 선지자로 임명하시고, 그의 입에 그의 말씀을 넣어 주셔서 대언하게 하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선지자 제도를 말씀하시며, “내가 그들의 형제 가운데 그들을 위하여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우고 내 말을 그의 입에 두겠다. 그러면 내가 명령한 모든 것을 그가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신 18:18)라고 약속하신다.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모세 이후에도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셔서 그를 통하여 계속 말씀하시겠다는 것이고, 모세와 같은 선지자란 모세 이후 하나님의 대언자 노릇을 할 그의 종들은 물론 대선지자 (Great Prophet)이신 그리스도를 주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이다.[5] 이상을 종합해보면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를 세워 그의 말씀을 그들의 입에 넣어 주어 그를 위하여 대언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를 어떻게 세우시는가?
1.3. 선지자의 위임식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불러 세우시는 목적은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게 하려는 데 그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가 만드신 세상에 사람을 그의 대리통치자로 세우시고, 하나님-사람-만물 사이에 위계 질서를 세우셨다. 사람은 하나님을 절대 복종하고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그와 언약적 연대성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함께 멸망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만족해하시던 세상이 이제 하나님의 진멸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시 회복하려고 계획을 세우신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죄가 들어 온 이 세상을 이제는 말씀을 통하여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것이다(사 11:1-9; 2:2-5; 겔 47:1-12; 렘 31:31-34).[6]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충만한 세상을 이루어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려는 종말적인 비전을 실현시키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그의 입, 선지자가 필요했다.
여호와께서는 아담이나 노아에게도 그의 뜻을 말씀하여 주시고 그것을 다른 피조물들에게 알게 하는 선지자적 역할을 하게 하셨지만 명시적으로 선지자라고 칭하시는 경우는 아브라함이 처음이다 (창 20:7).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예고하여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그의 친족 롯에게 알려주어 그들이 사는 성읍으로부터 도망하여 목숨을 구하도록 하신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세워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출하게 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그의 입에 계명과 율법을 주시고 가르치게 하셨다.
모세 이후에도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를 불러 세워 그의 말씀을 그들의 입에 주시고 백성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시는 데, 이 선지자를 부르시는 소명 기사(Call Narrative) 가운데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선지자로서 인정받기까지 거쳐야 할 몇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7] 첫째는 선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세습제를 따르는 제사장과 달리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이름을 부르시거나 초자연적인 이적과 표적을 보여주셔서 그가 사람이 아닌 신적 존재, 곧 하나님을 만났다는 확신을 갖게 하신다. 특히 모세의 경우 여호와께서는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속에서 나타타셔서 모세를 대면하시고 그를 불러 그의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로 모세를 부르신다(출 3:1-6).
둘째로 여호와의 소명을 받은 예비 선지자는 자기의 약점이나 배경를 핑게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선뜻 응하지 않는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그를 달래며 그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시고 앞으로 그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을 설명하며 백성들에게 전할 말씀을 주신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그 예비 선지자의 입에 손을 대신다. 선지자로 인을 치는 일종의 위임식을 행하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술에 손을 대시며, “보아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를 민족과 나라들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무너뜨리며, 멸망시키고, 파괴하며, 세우고 심게 하였다”(렘 1:9-10)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에 손을 대시며 말씀을 그의 입에 넣어 주신다. 그의 입에 손을 대시는 것은 “네 입이 내 입이다”고 인치시는 일종의 위임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를 열방들의 흥망성쇠를 주관하는 그의 종으로 세우셨음을 선언하신다. 말하자면 말씀의 종, 선지자로 세우신 것이다. 이사야는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뭇 천사들의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 마치 모세가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신 여호와를 뵙기가 두려워 그의 얼굴을 가렸던 것과 같은 두려움을 이사야도 가진 것이다. 이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젓가락으로 집어 들고 와서 그의 입술에 대며, “보아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네 부정이 제거되었고 네 죄가 사해졌다.” (사 6:7)고 말했다. 그때에 이사야는 “내가 누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는 응답을 하게 된다. 여기서 천사가 불에 단 숯을 화저로 집어 그의 입술에 댄 일이 단순한 정결예식으로만 볼 수는 없다.[8] 좀 더 넓은 범위에서 본문을 살펴 볼 때 본문은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소명기사이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설 때 먼저 죄를 씻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이다. 더더구나 선지자의 입은 백성들의 입과 같이 부정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야 할 선지자는 그의 입술이 정결해야 한다. 따라서 이사야의 입술에 여호와께서 그의 화저를 댄 것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정결의식과 더불어 “네 입이 내입이다”라고 인침과 위임이다.
셋째로 이제 선지자로서 직분을 위임 받은 자는 성전이나 성문에 나아가 “들으라 이스라엘아,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다”고 외쳐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외침을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이라고 바로 믿지는 않을 것이고, 그 또한 여호와께서 보낸 사람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 경우 그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전한 말씀이 당장 이루어지든지 아니면 그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든지, 병자를 고친다든지, 초자연적인 능력과 이적을 보여 그가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자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때 사람들은 그의 선지자로서의 권위와 능력을 인정하고 그가 전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의 역할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거나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들이 전할 말씀은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트린 반역에 대한 다가올 언약적 저주와 심판, 그리고 심판 후에 이루실 새 이스라엘에 대한 소망이 주된 내용이었다. 여호와께서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충만한 세상을 이루고자 그것을 예고하시고, 준비하신 것이다.
2. 대선지자 예수 그리스도
신약성경은 대 선지자, 그리스도의 오심으로부터 시작된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지식이 충만한 세상을 이루시고자 육신의 몸을 입고 예수님으로 이 땅에 찾아오신 것이다(요 1:1-14).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그가 직접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시고자 한 것이다. 말하자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셨던 선지자적 사명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신 18:18). 예수께서 새벽미명에 그를 찾아온 무리를 뒤로하고 떠나시며 “다른 이웃 마을들로 가자. 내가 거기서도 복음을 선포하리니 이를 위하여 내가 왔다.”(막 1:38)고 하신 말씀을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그의 복음 사역중에서 말씀 전하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올리브산에서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를 하시며, 그의 그동안의 복음 사역을 하나님께 보고하는 데,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고, 그들은 받았습니다.”(요 17:8)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준 선지자적 생애였음을 아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처럼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선지자적 사명을 시작함에 있어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동시에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들기 같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신다. 공관복음에 다같이 기술하고 있는 이 예수님의 세례 사건에 대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이 메시야의 위임식이라고 규정한다.[9]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께서 선지자로서 말씀 사역을 시작함에 있어서 물 세례를 받으시고 이때에 성령이 임하셨다(성령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말씀의 사역자로서 하나님의 인치심과 인증을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누가 복음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후,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가시니, 그분에 대한 소문이 온 주변 지역에 두루 퍼졌다. 예수께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모든 이들로부터 영광을 받았다.” (눅 4:14-15)
라고 기술한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능력을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후, 선지자로서의 사명인 말씀 가르치는 일을 하셨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셨다. 여기서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은 칭찬을 받으셨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선지자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의 세례받으심과 복음 사역은 일련의 연관관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께서도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위로부터 하나님의 인치심과 인증이 필요할 뿐만아니라 백성들의 긍정적인 반응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괴롭혔던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나 의미있는 이적을 보이실 때면 그들이 나타나 예수님의 신분과 능력과 권위의 출처를 물었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것들을 하는 것이오? 누가 당신에게 이것들을 할 권세를 주었소?” (막 11:28; 마 21:21-27; 눅 20:1-8)라고 물어 예수님의 권위의 원천에 대하여 묻든지 아니면 “당신이 이 일들을 행하는 데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보여주겠는가?”(요 2:18)라고 물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자로서의 표적을 요구하였다. 예수께서 복음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그 권위와 능력이 어디로부터 연유한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이들의 요구에 대하여 명확한 답변을 하신적은 없고 다만 사람들이 성경이나 그의 가르침과 하시는 일을 통해서 스스로 깨닫고 믿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제자들의 경우는 달랐다. 예수께서는 그의 복음 사역 초기에 제자들을 선발하여 특별 훈련을 시키셨다. “이는 그들로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한 그들을 보내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악령을 쫓아내는 권위를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다.”(막 3:15). 선지자적 사명을 주시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같은 선지자적 사명을 주시어 (마 29:16-20), 그에게 배운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시려는 일관된 목적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가 올리브 산에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가운데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습니다.”(요 17:18)라고 말씀하신것과 같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훈련시켜 세상에 내보내시려는 것이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세우신 목적이었다.
이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면 예수님 승천 후 제자들이 예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들에게도 역시 신적 권위와 능력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필요와 상황의 연속선 상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para¿klhtoß)를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다(요 14:16-17). 이 말은 영역본 에서는 “돕는자” (helper), 혹은 “상담자, 옹호자, 변호사, 대변인” 등의 뜻을 가진 counselor나 advocate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보혜사는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계시는 진리의 영, 곧 성령이다(요 14:16, 26).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분인데, 제자들은 그 안에, 그는 제자들 안에 계실 것이며,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20, 26). 그래서 보혜사는 궁극적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하며, 예수님을 증거하고 대언하는 일을 하신다(29). 보혜사는 제자들이 선지자적 사명을 수행하도록 돕는 자이다. 보혜사는 기본적으로 제자들의 선지자적 사명과 관계가 있다. 보혜사는 제자들의 중생이나 성화와 같은 개개인의 구원 사역보다는 이미 구원받은 제자들이 말씀의 대언자, 혹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활동하는 데 있어서 후원자 혹은 감독자 (supervisor)로서의 역할을 하는 신적 존재(Divine Being)이다.
예수께서는 일찍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이들 72명을 내보내어 전도활동을 하게 하신다. 이들은 나가서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는 알라”는 말씀도 전했다(눅 10:9-10). 칠십이명이 돌아와서 주의 이름으로 악령들이 복종하는 것에 대해 아주 감격스러운 보고를 하자 예수께서는 “내가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압할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결코 헤치지 못할 것이다.”(눅 10:18-19)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들에게 제자들의 복음 사역을 방해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압할 권세를 주셨다는 것이다. 보혜사의 역할을 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들과 함께 하지 못할 그의 죽음 이후에는 “다른 보혜사”가 제자들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는 이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6). 권세 혹은 권위는 대개의 경우 함께 쓰여지는 말로 능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권세가 생긴다. 따라서 권세와 능력은 교환사용되거나 병행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요일 2:3에 “변호사”(바른성경) 혹은 “대언자”로 번역하고 있는 헬라어는 요한 복음에서 “보혜사”로 번역하고 있는 “파라크레토스” (para¿klhtoß)이다. 따라서 “만일 누가 죄를 지으면 아버지 앞에서 보혜사가 계시니 ,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구절에서 예수께서 보혜사이시라면, 예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다른 보혜사” 는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제자들을 선지자로 세우시는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눈과 성경과 마음을 열어 주셨다(dianoi÷gw, 31, 32, 45).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고 제 삼일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할 것과 또 그분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위한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너희는 이것들의 증인이다’.” (눅 24:46-48)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과 죄 용서를 위한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고, 제자들은 이 일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 일의 증인으로 임명하신 것이다. 마태는 이 일을 좀 더 체계적이고 신학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다가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가서 그들을 제자로 삼아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지키도록 가르쳐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 28:18-20).
여기서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하시며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명하신다. 여기서 주동사는 “제자삼으라( maqhteu/sate)는 명령형이며, 이를 수식하는 “가다”(poreuqe÷nteß), “세례를 주다”(bapti÷zonteß), “가르치다”(dida¿skonteß) 라는 세개의 분사형으로 이루어진 문장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침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의 자기 소개, 제자들의 사명,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으로 이루어진 이 명령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불러 사명을 주어 내 보내시는 소명기사(Call Narrative)와 그 양식이 같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시어 그의 제자들을 선지자로 임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를 구언약의 선지자(Old Covenant Prophet)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새 시대의 새언약의 선지자(New Covenant Prophet)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언약의 선지자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구속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역할을 하는 구언약의 선지자들의 역할을 이어받는 계승자들로 세우심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사명을 주시는 이 사건은 새언약의 선지자, 곧 새로운 “하나님의 입”을 임명하고 세우시는 사건이다. 예수께서 선지자를 임명하셨으므로 이들에게는 선지자적 권위와 능력을 동반하는 하나님의 인침이 필요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를 약속하셨고,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여러 날이 지나지 않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행 1:5)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건을 성령세례로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 성령세례를 요한의 물 세례와 비교하신다. 이는 아마도 예수님 자신이 받은 세례와 성격상의 연속성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 같다.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함께 받으시고 복음사역을 시작하셨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복음사역을 시작해야 할 제자들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부르심 받은 선지자들에게 신적 권위와 능력을 부여하고 성령으로 인치시는 예식인 것이다. 일종의 선지자 안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순절에 많은 혀들이 나타나 제자들이 방언한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나 이사야에게 “너는 내 입이다.”라고 손을 그들의 입에 대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입에 “너희는 내 입이다.”고 안수하시고 제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방언을 한 것과 같다. 입은 자의로 말할 수 없다. 입은 소리를 내고 말을 하는 몸의 지체들 중의 하나이다. 혀는 머리에서 명하는 대로 소리를 내고 말을 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나님의 입으로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방언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행 2:3). 여기서 입과 혀를 궂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 다윗은 그의 선지자적 역할을 언급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그분의 말씀이 내 혀에 있다.”
(y`InwøvVl_lAo wäøtD;lIm…w y¡I;b_rR;bî;d h™Dwh◊y Aj…wõr)
이 구절은 성령과 말씀과 혀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10]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신체의 기관으로 입을 대신하여 혀를 언급하고 있다. 입과 혀는 동의어로 사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 베드로는 자기들이 세례받고 성령받은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베드로는 그와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하는 자들을 술취한 자들이라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자기들이 술 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죽인 나사렛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자기들에게 부어주신 성령이라는 것을 설명하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것을 변증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의 행 2:14-41에 이르는 긴 설교의 주제는 엄격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고 자신들이 선지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자기 변증인 것이다. 이를 위하여 베드로는 요엘서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 요엘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영을 부어주시어 예언을 하며, 환상도 보고, 꿈도 꾸게 한다는 것이다(욜 2:28; 행 2:17). 또한 남종과 여종들에게도 그의 영을 부어주신다고 예언하고 있다(욜 28-29). 이 예언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전 세계적인 소망을 기록한 민수기의 말씀을 해석하여 인용한 것이다(민 11:24-3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혼자 돌보기에는 짐이 너무 무겁다고 불평하는 모세에게 70인의 장로들을 그의 동역자로 세우시며 예언을 하게 하시는 데(민 11:14-15, 24), 이 가운데 부르심을 받고도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장막에 머물고 있던 두 사람도 예언하는 것을 보고 이들이 예언하지 못하게 제어하고자 하는 여호수아를 말리며, “네가 나를 위하여 질투하느냐? 여호와께서 그분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모두 선지자가 되게 하셨으면 좋겠다.”(민 11:29)고 말한다. 2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임한 영을 이스라엘 장로들에게도 주시자, “그 영이 그들 위에 머믈 때에 그들이 예언하였으나 다시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예언을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으나 모세에게 주셨던 여호와의 영이 그들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예언을 했다고 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같은 영을 주심으로 그들이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요 모세와 같은 일을 해야 할 동역자임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그들의 예언은 이후 지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여호와의 영이 그들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만 했다. 말하자면 이들의 예언은 일회성의 이었던 특별한 용도로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이때 예언하는 자를 선지자로 칭하고 있으며,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모두 선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의중을 말한다. 모든 백성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총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로서 짐이 무거워 힘들어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동역자들을 세우시고 모세에게 주셨던 그의 영을 그들에게도 보내어 예언을 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세우신 것이다.
요엘 선지자가 말하는 마지막 날에 있을 일도 바로 이 사건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 다만 모세가 말한 “모든 백성”을 요엘은 선민과 비선민은 물론 남종과 여종까지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육체”에게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주셔서 예언하게 할 것임을 말한다. 여기서 모든 육체라는 말은 모든 인종과 계급을 초월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여지고 있다. 따라서 요엘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은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담은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요엘의 예언도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그의 영을 주어 선지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엘의 예언이나 모세의 예언은 다같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 예언하는 선지자들을 세우는 일, 곧 선지자의 임직에 대한 예언적 약속의 말씀이다.
베드로는 이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이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베드로가 행 2:18에 여호와께서 남종과 여종에게도 그의 영을 부어 주어 요엘서에는 없는 “그들이 예언할 것이다”는 구절을 덫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종들이 단순히 여호와의 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언하는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을 받아 자기들에게 준 예수라는 분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있다(22-36).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다윗을 통해 말씀하신대로 그를 죽은자들 가운데 살려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본문의 구성상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자기들이 요엘 선지자의 말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을 자기들이 받고 예언하고 있는 선지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긴 연설은 예수님의 부활이 핵심이 아니고, 베드로와 제자들이 모세나 요엘이 성경에 약속했던 그 선지자들이라는 것이다. 이 베드로의 말을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행 2:37)하는 반응을 보이는 데 이는 그들이 베드로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 변증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방인들의 개종이나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선언도 아니다.[11] 예수께서 선지자로 세우신 자기들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인치셨다는 것이다.
이같은 베드로의 변증 본문 구조를 염두에 둔다면 오순절의 성령 세례는 제자들이 새언약의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받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사건이다. 따라서 성령 세례는 본질적으로 우리 죄인들을 위한 중생이나 성화를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땅끝까지 이르러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입, 곧 선지자로 세우시고 이들에게 신적 권위와 능력을 부여하며 인을 치신 사건이다. 여기서 “인치다”는 말은 성경에서 “스프라기조”(sfragi/zw)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사람의 신분이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하여 도장을 찍는다 (to mark [with as a seal] to identify)는 의미로 쓰인 말이다. 따라서 “인자가 이 양식을 너희에게 줄 것이니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인 치셨기 때문이다.”(요 6:27)라는 구절에서 인쳤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그의 백성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곧 말씀을 주는 자로 도장을 찍어 신분을 확정했다는 의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와 함께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기름부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주셨다.” (고후 1:21-22)
여기서 “견고하게 하다”는 말은 헬라어 “베바이온”(bebaiwvn)을 번역한 것으로 “세우다”(establish), 혹은 “확증하다 .... 이 유효함을 증명하다” (confirm)는 의미이다. 기름붓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왕이나 제사장을 세우고 위임할 때에 제사장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의 신분을 확증하는 상징으로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위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고린도 성도들을 그의 종으로 세우셨는 데 이를 보증하는 도장으로 그들의 마음 속에 성령을 주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름을 붓는 행위나 성령의 인침은 다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일꾼을 세우시고, 그의 신분을 확증하고 보증하는 행위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복음의 일꾼들이 행하는 이적이 복음의 일꾼 됨을 확증하는 증거임을 설명하며, “하나님께서도 표적들과 놀라운 일들과 여러가지 기적들로 함께 증언해주셨고 또한 성령께서도 자기의 뜻을 따라 나눠주신 것들로 증언해주셨다.”(히 2:4)고 말한다. 제자들이나 사도들 가운데 일어나는 표적들과 놀라운 일들과 기적들은 다같이 이를 행하는 자가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이요 일꾼임을 인증하는 것이다 (고후 12:12; 롬 15:19). 오순절에 제자들이 방언한 사건도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그의 선지자로 세우시고 쓰시는 일꾼임을 증언하는 것이다.[12]
4. 연관돤 주제들과 적용들
필자는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사도행전 2:3에 대한 새로운 번역과 오순절 성령세례를 새언약의 선지자에 대한 위임식이라는 해석을 제안했다. 이것이 옳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우리는 그동안 붙들고 있던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과 적용에 있어서도 새로운 이해와 교정이 필요하다.
4.1. 성령세례의 단회성
오순절의 성령세례가 새언약의 선지자를 세우고 인치는 위임식이라면 이는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모든 위임식은 항상 단회적이다. 또한 오순절 성령세례의 단회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복잡한 이론을 만들어 낼 필요도 없다.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성령으로 세례받는다는 말은 성경에서 한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는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사용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할 때, 그분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눅 3:16) .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이 세례자 요한의 말을 오순절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오순절에 불이 임하지 않았다. 불과 같이 갈라진 혀들이 임했다. 여기서 불이라는 말은 세례 요한의 이어지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말 가운데 예수님의 심판주 되심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이해해야 옳다. 예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들기같은 형체로 예수님 위에 내려 왔으며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눅 3:22)는 음성이 들려왔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께 그의 본체상의 변화를 일으키도록 성령이 임한 것은 아니고, 다만 예수께서 복음 사역을 시작함에 있어서 대선지자로서의 직분에 대한 위임식이라고 해야 옳다. 말하자면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이 개시됨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성령세례라는 말은 예수님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사용되고 있는데 바로 이 오순절 사건을 지칭한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여러 날이 지나지 않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행 1:5)라고 약속하신다. 제자들의 선지자로서의 위임식에 바로 성령세례라는 말을 쓰고 있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복음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과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해야 할 제자들에게 선지자의 직분을 위임하는 데 사용하는 특별한 어휘이다. 성령세례를 받으시심으로 말씀을 가르치는 선지자적 사명을 개시하신 예수께서 말씀 사역을 시작하는 제자들에게 성령세례를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위임식은 반복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사람들은 성령세례는 반복되고,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령 세례는 방언을 동반했는 데 방언을 동반하는 사건이 사도행전에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베드로의 고넬료 집 사건과 바울의 에베소 사건을 그 예로 들고 있다.
4.1.1.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베드로
베드로는 그가 본 환상과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환상 가운데 본 천사의 지시를 따라 고넬료의 집에 가서 그들의 청하는 대로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물론 고넬료와 그 가속들은 베드로의 신분에 대하여 확실하게 아는 바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방언을 하였다.
“베드로가 아직 이 말을 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그 말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셨다. 베드로와 함께 있던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주어진 것 때문에 모두 놀랐다. 이는 그들이 방언으로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행 10:44-48)
여기서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놀란 것은 이방들에게도 “성령의 선물”(hJ dwrea» touv aJgi÷ou pneu/matoß)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들이“성령의 선물”(hJ dwrea» touv aJgi÷ou pneu/matoß)을 받았다고 했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e˙n pneu/mati bapti/sqhsan aJgi÷wˆ)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분명 오순절 성령세례와는 구별되는 점이다. 베드로가 오순절 날 삼천여명의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성령의 선물”(th\n dwrea»n touv aJgi÷ou pneu/matoß)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행 2:38).[13]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베드로를 보내신 것은 이들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세우시고자 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이제 우리가 주께서 당신께 명령하신 모든 것을 듣고 싶어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행 10:33)라고 말한다. 베드로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선지자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이때에 성령이 임하여 그들이 방언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베드로가 하나님의 사람, 곧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깨닫게 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이 방언의 첫번째 목적은 고넬료와 그 집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베드로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가 그의 종이라는 것을 증거하심으로 그들이 베드로가 전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11장에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사도들을 만나 이 사건을 보고 했을 때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었다.”라고 기술한다. 이방인들이 성령받고 방언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넬료와 그 가족들이 말씀을 받고 성령을 받아 방언하고 세례받은 사건을 오순절과 같은 사건으로 취급하거나 오순절의 반복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 방언하는 이들을 가리켜 “우리가 가진 것과 같은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 (oiºtineß to\ pneuvma to\ a‚gion e¶labon wJß kai« hJmei√ß,행 10:47)이라고 지칭한다. 이 말은 고넬료와 그 가족들이 베드로와 같이 오순절에 받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고넬료와 같은 이방인들, 곧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받은 유대인들과 똑같이 성령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과 같이 세례를 받는 데 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로마 사람들도 유대인들과 같이 말씀을 받으면, 성령받고, 세례 받아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베드로가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사도들의 유대인들 중심의 복음 사역이 이방인에게로 확장되어 가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말씀의 문을 연 사도가 된 것이다.[14]
4.1.2. 에베소에서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한 바울
바울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제 3차 전도여행은 로마 전도를 위한 중간 준비 지역으로 에베소를 택하엿다. 제 2차 전도 여행을 마치면서 그곳을 미리 답사도 했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과 안디옥을 거쳐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볼로, 브리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유능한 성경교사들로 부터 복음을 전해듣고 제자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 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영적 지도력을 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사도로서의 신적 권위와 능력을 보여 줌으로 이 제자들이 자기를 하나님의 종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에베소 복음 사역을 같이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들에게 성령을 받았는지 여부와 이들이 받은 세례의 종류에 대하여 묻고, 이들이 요한의 세례만 받았고, 성령에 대하여 무지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니 성령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었고,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도 하였다(행 19:6). 바울은 이들에게 그의 사도로서의 신적 권위와 능력을 유감없이 과시했고, 이로 말미암아 12명의 제자들이 바울이 시도했던 회당과 두란노 도서관에서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론이 옳다면 에베소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방언을 하게 한 목적은 분명이 이들의 중생과 성화를 위한 것은 아님에 틀림없고, 오히려 사도 바울의 사도로서의 정체성 확인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제자들이 방언한 사건은 바울 이전 성경 교사들의 가르침에 대한 진실성을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확인하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베소 제자들은 바울이 오기 전까지 성령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듣지도 못했다고 했다. 다만 그들은 아볼로, 브리스길라, 아굴라 등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믿어 제자가 되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에베소에 오기 전에 고린도에서 바울과 같이 천막을 만드는 업종에 종사하며 바울의 강론을 들었고, 심지어는 에베소의 성경선생 아볼로의 여러 부족한 점을 지적해주기 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 같다. 성령을 몰라도 믿고 제자가 된 것이다. 성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역사한 때문이다. 말씀과 성령은 서로 분리하여 역사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이 전파될 때에 이미 성령께서 이 제자들 안에서 역사하셨다고 볼 수 있다.[15]
4.1.3. 오순절날의 삼천명, 예루살렘 사람들
오순절 날의 예루살렘에는 두 사건이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첫번째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고, 두번째는 베드로의 성령 세례와 방언에 대한 변증적 설교를 듣고 삼천명이 세례를 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주목되는 점은 불같이 갈라진 혀들이 위로부터 임하여 제자들 위에 머물자 제자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하자 이를 본 천하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새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였다(행 2:13). 이때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이 새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 요엘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임한 것인데, 이것은 그들이 죽인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자기들에게 부어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다고 말했다(행 2:36). 이 말을 들은 유대인은 마음이 찔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이때 베드로는 “회개하라. 그리고 너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각각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행 2:38)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여 그 날에 삼천 여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날에 삼천명이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홰개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방언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들 삼천명은 방언을 하지 않았다고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성령의 선물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방언을 하지 않았을까?
방언은 고넬료 집에서나 에베소에서와 같이 말씀을 전하는 사도나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의 종임을 증거하는 표였다. 그것은 불신자들의 구원을 위한 표가 아니었다. 예루살렘의 베드로와 사도들은 성령이 임한 가운데 방언을 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증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베드로의 선지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말씀을 받고 순종한 것이다. 제자들을 위해서나 유대인들 자신들의 구원을 위하여 이 시점에서 유대인 삼천명이 방언을 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이상을 종합해볼 때 오순절 성령 세례는 새언약의 선지자를 세우고 인치는 위임식이기 때문에 반복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단회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개혁주의자들은 오순절 사건을 그리스도의 사역이라는 면에서 보아야지 그리스도의 사역과 분리된 성령의 사건으로 봐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시편 2:2-8에 약속된 메시야의 대관식이 성취된 사건으로 해석한다. 말하자면 오순절 날의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은 영광의 주이시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로서 요청하신 성령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이 세상에 공식적으로 밝혀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사건은 메시야적 예언이 성취된 가시적인 그리스도의 대관식(the visible manifestation of a coronation)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으심에 대한 증거이듯이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의 메시야로서의 왕위에 오르심에 대한 증거라고 가르친다(Pentecost, like visitble manfestation of every coronation, is the very nature sui generis).[16] 그러므로 오순절 사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죽음이나 부활, 그리고 승천과 마찬가지로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다. 그것은 구속사적 역사(an event in redemptive history, historia salutis)이므로 구원의 적용(the application of redemption, ordo salutis) 문제와 뒤섞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17]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이어진 성령의 보내심 등은 그 자체로서 우리 기독교의 핵심적 주제이며 교리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통하여 성령세례의 단회성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무리가 많고, 명쾌하지도 않다.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 이미 메시야로서 왕위에 오르셔서 왕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셨으며, 제자들로부터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받으셨다(마 16:16; 막 8:29; 눅 9:20).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전에 이미 자신이 왕이심을 선언하시고, 십자가상에서는 왕이란 명패가 붙은 가시나무 왕관을 쓰셨다. 그리고 그의 부활을 통하여 이 사실이 증명이 되었다 (행 2:24, 32, 36).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오순절 성령세례 이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선지자적 사명을 부여하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으니 ...”(마 28:16)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세례는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로 세우고 위임하는 의식이다. 성령세례는 본질적으로 제자들을 위한 것이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미 이루셨고, 증명되었다. 성령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이를 통한 죄용서를 증거하고 가르칠 선지자들을 세우고 인치는 위임식이다. 위임식이라는 점에서 단회 사건이다.
4.2. 성령세례와 중생
개혁주의자들은 우리가 개인 구원의 경험을 설명하며 “성령세례”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개인이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그의 구주로 영접함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중생과 일치하며 고린도전서 12:13은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18] 퍼거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오순절 성령의 퍼부음의 효과에 참여한다고 가르친다.[19]심지어 던과 같은 학자는 오순절이 믿음의 개시(the inception of faith)라고 말하며 오순절의 120명 제자들의 영적 상태는 성령을 받기 전의 고넬료 가속들의 영적 상태와 정확히 같다고 말한다. 따라서 오순절 이전의 120명 제자들의 생활을 오늘날 우리 신자자들도 그러한 양식(paradigm)의 경험을 해야한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활은 기독교인 되기 이전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순절은 그 자체가 2차적인 축복의 예가 아니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예라는 것이다.[20]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령세례에 대한 본문 행 2:3에 대한 번역의 오류와 성령세례의 본질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성령세례는 이미 중생한 사람들을 새언약의 선지자들로 세우고 인치는 위임식이다. 따라서 오순절에 중생한다거나 오순절에 불신자들이 믿음을 갖게 되고 신자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의 이해와 성도들의 생활 가운데 많은 혼란을 가져온다. 중생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위로부터 나는 것이다” (gennhqhØv a‡nwqen, 요 3:3). 이것은 성령이 하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3:8). 손또한 예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물”은 요한 15:3, 엡 5:26, 디도서 3:5, 겔 36:25-26, 겔 47 등에 비추어 볼 때 씻음의 요소가 있는 “말씀”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물과 성령이란 말씀과 성령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aÓnagegennhme÷noi)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곧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다.” (벧전 1:22)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살아계시는 동안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고백한 사람들이다(요 6:68-69; 마 16:16; 막 8:29; 눅 9:20). 예수께서는 이들을 가리켜 그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셨다(막 3:34-35). 이들은 이미 목욕하였기 때문에 온 몸이 깨끗하며(요 13:10), 이들은 예수께서 주신 말씀으로 깨끗하여 졌기 때문에 이제 주님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다 (요 15:3-4). 오순절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족들이다. 바울은 분명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말할 수 없다”(고전12:3)라고 가르치며,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롬 8:9)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한 제자들의 고백은 모두 성령의 역사로 된 것이며,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의 역사가 그들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수께서 이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계시하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마 16:17)라고 복을 주신다. 이는 이미 베드로 속에 성령으로 말마암은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음을 일깨워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가리켜 아직 중생하지 못한 자이며, 오순절 성령 세례를 통하여 중생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면 그동안의 예수님의 복음 사역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구약 성경에 비록 “중생”이라는 말은 없을지라도 구약의 신자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거듭나는 것”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을 통해서 볼 때(요 3:6)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는 새 생명의 회복에 대한 지식과 역사가 있었음을 반증하며, 겔 37장, 신 30:6, 렘 31:33, 겔 36:26에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 영, 새로운 영을 통한 “마음의 할례,” “돌같은 마음”을 “살같은 마음”으로 바꿈 등의 개념은 실상 신약의 중생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의 학자들 가운데는 구약의 이러한 중생의 역사는 일시적이어서 성령의 내주와 같은 신약의 성령의 역사와는 서로 구분되는 점이 있다고 주장한다.[21] 그러나 John Murray는 구약의 새출생에 대한 은유가 마음의 할례(신 10:16, 30:6)라고 해석하며, John Goldingay, Thomas Goodwin, John Owen, B.B. Warfield, Sinclare Ferguson 등은 구약의 성도들이 성령으로 중생했을 뿐만 아니라 항상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22]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통하여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일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있었던 일이다.
성령은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가운데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중생하는 때와 장소를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중생함으로 우리는 영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이 오순절 성령 세례의 효과에 우리가 동참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순절 성령세례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선지자로 임명하시고 인치시는 사건으로 역사상에 단 한 번 있었던 일이다. 우리가 중생하는 것은 성령세례 이전에 일어난 일로 성령세례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4.3. 성령세례와 교회
많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오순절의 성령세례를 가리켜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대전환점을 이루는 역사적 사건(epoch making envent)이라고 말한다. 오순절 성령세례로부터 중생한 새로운 백성을 중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고, 새언약의 시대가 열였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 세계로 나아가 선민 유대인들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증거하는 새로운 복음 역사가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속사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고 약속하며, 약속대로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그분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오심이 새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해야 옳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오순절 성령 세례 사건 본문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필요함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Dunn을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은 오순절 사건이 교회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Dunn은 행 10:36; 롬 10:9; 고전 12:3을 근거하여 기독 교회란 고백 교회 (Confessional Church)이며,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이라고 전제한다. 그런데 이 고백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인 만큼,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여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고(행 2:36),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제자들에게 주시기 전까지는 사실상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적 사명을 가진 것인데 성령의 부으심이 없이는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행 2:21)라는 선교적 초청을 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실제적으로 제자들이 신자가 되고 교회를 이루는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는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선언한다.[23] Dunn의 말대로라면 오순절 이전에 다락방에 모인 120 여명의 제자들은 아직 신자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이 제자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사람들이다(마 16:16; 막 8:29; 눅 9:20). 이 고백을 한 베드로를 축복하시며, 예수께서는 “이를 네게 계시한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다(마 16:17)고 말씀하셨다. 이미 성령을 통한 계시의 역사가 제자들 가운데 역사하고 계심을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그의 복음 사역 초기에 열 두 제자를 부르신 후, 그를 찾아온 육신의 형제를 향하여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고 물으시고, 그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내 형제, 내 누이”라고 선언하셨다. 그의 가족으로 받아 들이신 것이다(막 3:31-35). 신약성경에서 “교회”라고 사용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ejkklhsi/a)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 “카할”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카할”(lhq)은 불러낸 회중이라는 의미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 스테반은 그의 설교 가운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자기에게 말한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thØv e˙kklhsi÷aˆ e˙n thØv e˙rh/mwˆ)에 있었으며, 또 살아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었다.”(행 7:38)고 말한다. Dunn이 초대교회라고 주장하던 예루살렘 교회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며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행 6:8, 10)이 교회는 광야 시절부터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교회가 출애굽이후 시내산 언약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데, Dunn을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은 교회의 정의를 새롭게 만들어 오순절 사건으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출하여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그 이스라엘 백성이 교회이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들과 연속성을 가진다. 따라서 오순절로부터 교회가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4.4. 성령세레와 새언약
Dunn이나 보수 개혁주의자들은 오순절 사건이 새언약의 시작, 혹은 새 언약시대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이 새언약의 시작이라는 주장도 옳지 않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출하여 시내산에 데려와 언약을 맺었다. 언약이란 선택에 법적 구속력을 갖도록하기 위한 장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는 관계를 맺으시고, 이 관계에 법적 구속력을 갖게 하기 위하여 피차 생명을 담보하고 짐승의 피를 뿌려 언약을 맺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계명과 율법을 주셔서 지키도록 하셨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백성이 되었고, 언약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 시내산 언약 사건을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결혼예식으로 그리며, 이 언약관계를 부부관계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언약관계를 깨트렸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새언약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렘 31:31-34). 여호와께서는 그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약속을 새롭게 주셨다. 변치 않고 깨어지지 않는 관계를 갖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심는 일을 하시다가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빵을 주시며 그것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속하여 포도주 잔을 주시며 “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눅 22:20: 마 26:28; 막 15:24)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흘린 짐승의 피를 대신하여 제자들과 생명을 담보하는 새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요 13:34). 옛언약의 십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이었듯이 예수께서도 새언약에서 사랑의 계명을 주신다. 따라서 언약은 본질적으로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이나 관계가 그 중심이다. 옛 언약이 법률 관계를 명시하는 결혼 계약이라면 새 언약은 법을 초월한 인격적이고 내면적인 부부간의 사랑의 관계를 격려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내 안에 거하여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요 15:4)고 말씀하시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모두 하나가 되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 (요 17:21)라고 기도하신다.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께서 내 안에, 그리고 우리 모두가 서로 안에 있는 “페리코레시스,” 곧 상호동거를 이루는 것이다. 단지 호적상의 부부로서 동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뗄려야 뗄 수 없는 부부 관계를 이루고 피차 없어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새언약을 맺으시고, 새계명을 주시고,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를 흘려 새언약을 종결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새언약식이라고 할 수 있고, 성전의 휘장이 갈라진 것은 (눅 23:45) 이미 이 언약이 발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언약은 오순절의 성령세례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시작된 것이다. Dunn에 의하면 시내산 언약의 요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율법을 주신 날이 출애굽으로부터 50일 째 되는 날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 날을 기념해서 오순절을 명절로 삼았다는것이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새언약을 주시고, 율법을 사람의 마음 속에 새겨 주신다고 했는 데 바로 그 오순절에 성령이 오셔서 이 일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순절은 새언약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24] 그래서 오순절은 새언약의 출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내산 사건과 오순절의 관계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4.5. 성령세례와 물세례
개혁주의자들에게 성령세례라는 일반적으로 개인이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처음 영접함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령세례는 중생과 일치하며 고전 12:13은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자들은 성령세례를 받는 그 순간에 중생이 일어나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지체가 된다고 가르치며, 이러한 일은 우리 신자들이 믿는 그 순간에 오순절 성령의 퍼부음의 효과에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at the moment of faith we participate individually in the effect of the outpouring of the Spirit at Pentecost). [25] 심지어 MacArthur는 오순절에 성령이 옴으로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고, 그때부터 성령은 믿음의 순간에 모든 신자들에게 들어와 영원히 거하며 내주하는 관계에 들어간다고 말한다.[26]
이같은 주장을 하는 자들은 고린도전서 12:13의 말씀을 오순절 성령 사건에 무리하게 적용하고, 성령세례의 단회성에 대하여 지나치게 신학적 무게를 실어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과 부활 등의 사건과 동일시하며, 심지어는 오순절 성령세례야말로 구속사에 있어서 신기원을 이루는 사건(Epoch-making event)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13,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kai« ga»r e˙n e˚ni« pneu/mati hJmei√ß pa¿nteß ei˙ß e≠n sw◊ma e˙bapti÷sqhmen,)를 오순절의 성령세례로 번역하거나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순절에 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은 성령 세례가 임하기 전에 이미 성령께서 그 안에서 역사하셨고, 그들은 성령을 통하여 중생한 자들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며 제자가 된 자들이다. 중생을 통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말은 우리 모두가 역사의 한 순간에 함께 성령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른 (different) 성령이 아니라 같은 (same) 성령을 통하여 하나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의 중생은 오순절 성령세례와는 별개의 일이다. 그렇다면 오순절 이후의 성도들은 언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인가?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물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제안한다. 물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세례에 대한 가시적이고 상징적인 의식(visible and symbolic rite)이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이 비들기같이 그 위 에 내리심을 보았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기뻐한다.” 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신다(마 3:13-17). 이것은 분명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대관식 내지 취임식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후 바로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 가운데,
“주님의 영이 내게 임하였으니,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들에게 자유를, 맹인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자들을 자유롭게 하며,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사 61:1-2; 58:6)
라는 말씀을 읽으시며 “오늘 이 성경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셨다 (눅 4:16-22). 이사야 선지서의 이 구절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예수님 자신에 대한 예언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받은 물 세례는 메시야로서 기름을 부음을 받은 것을 상징하며, 성령께서는 이를 인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비들기 같이 힘하시는 성령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하나님께서 인증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물 세례를 받으며 자신의 메시야적 사명을 사람들에게 공포하지 않고, 선지자 이사야의 책을 펴서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기록된 곳을 읽고, 그것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세례로부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시대가 그를 통하여 열림을 선언하신 것이다.
따라서 물세례는 성령세례와 병행하며 성령세례의 가시적인 상징(symbol)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이때 그의 직분을 받고 직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권위를 인증받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제자 삼으라는 명령 가운데 “세례”를 주라는 말씀도 이 직분의 수여와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제자를 삼아 선지자로서의 직임을 주라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물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롬 6:1-11),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의 지체가 된다.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새로운 신분과 정체성를 갖게 되는 것이다.[27]
사도행전 9장에서 예수께서는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사울을 부르셨다. 사도행전 9장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시는 소명기사이다. 예수께서는 눈이 감긴 사울에게 자신이 예수이심을 밝히시고, 아나니아를 통하여 그를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전하도록 그가 택한 그의 그룻으로 쓰시기 위하여 세례를 주시고 안수하신다. 사울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오순절 이후에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을 통하여 말씀의 종, 곧 선지자로 세우심을 받고 물세례와 더불어 성령세례를 받은 예이다. 18절의 “즉시” (εὐθέως)라는 말은 바로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나타내며,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울을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하시려 했다(행9:17)는 표현은 예수께서는 사울에게 선지자로서의 직임을 주시려했다는 의미이다. 사울에게는 중생과 물세례와 성령 세례가 동시에 이루지고 있는 예이다.[28]
이상을 종합해보면 우리의 경우는 새생명을 얻었음으로 물세례는 중생을 의미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함께 죽었다가 장사지내고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 생명을 갖게 된 일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이다. 따라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신 것이다.” (갈 2:20)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우리는 물세례를 받을 때 중생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우리는 물세례를 받음으로 성령 세례를 받는다. 곧 새언약의 선지자로서의 직분과 권위를 부여받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의 복음 사역을 시작하시고, 제자들에게 성령세례를 주시고 세례를 명하심으로 그의 사역을 끝맺고 있다.
4.6.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새언약의 선지자로서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권위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 따라서 이들이 말씀을 전할 때 방언 현상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 사운데 나타남으로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임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제자들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말씀을 전했다는 기록이 함께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말씀이 전파되는곳에 성령이 강하게 임하시고 역사하심을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사도행전 3-4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의 앉은뱅이를 고쳐줌으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고 감옥에 갖힌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이들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슨 능력과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하느냐?” (행 4:7)고 물었을 때,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했다고 했다(4:8). 예수께서는 바로 이런한 상황을 대비하여 성령세례를 주셨고, 다른 보혜사를 약속하셨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온 교회는 “주님 이제 그들의 위협을 살피시고 주님의 종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말하도록 하소서.” (행 4:29)라고 기도하였다. 그들이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있던 장소가 진동하였고,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였다.”(행 4:31)고 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사람으로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는데 그들은 스데반이 말하는 “지혜와 성령”을 당해낼 수 없었다.”( καὶ οὐκ ἴσχυον ἀντιστῆναι τῇ σοφίᾳ καὶ τῷ πνεύματι ᾧ ἐλάλει.행 6:10)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제자들이 말씀을 담대하게 증거하도록 기도했고 이때 그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증거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증거와 성령 충만의 관계를 보여주는 점이다. 말씀이 전파되는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말씀을 증거했다는 것이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성령이 충만하게 된 것이 아니라 말씀 전하는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사울은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한 예수님의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고, 능력있게 말씀을 증거했다. 그가 파포스에 이르러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말씀을 전하려고 할 때 마술사 엘루마가 대적하자 사울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ὁ καὶ Παῦλος, πλησθεὶς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행 13:9) 그를 주목하여 보고” 그를 물리치고 제압하였다. 말씀을 증거하려 할 때 놀라운 성령충만의 현상을 경험한 것이다. 이후 바울은 바나바와 더불어 키프로스, 바사다어 안디옥 등에서 말씀을 전하였는 데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였다”(13:52)고 했다.
이상의 예를 통해서 볼 때,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주의 제자들 가운데 일어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성령 충만은 이미 오순절에 성령세례를 받아 새언약의 선지자로 위임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어난 일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성령 충만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과 성령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오시게 할 수도 없고, 우리의 뜻대로 일하게 할 수도 없지만 말씀이 가는 곳에는 성령이 함께 가시며, 말씀이 있는 곳에서 그의 능력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따라서 성령이 충만하려면 말씀이 충만하면 된다. 말씀이 충만한 곳에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일과 교제하는 일과 빵을 떼는 것과 기도에 전념했다.”(행 2:42)고 했으며, 사도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음식봉사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행 6:2)고 말하며 일곱 집사를 세웠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는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겠다”(행 6:4)고 말한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으며 많은 제사장의 무리도 이 믿음에 순종하였다.”( 행 6:7).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의 놀라운 성장은 바로 말씀의 역사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말씀이 전해졌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했기 때문에 말씀의 역사가 흥왕하였다는 것이 아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의 전 역사를 사도들의 말씀사역으로 서술하고 있다(1:8; 2:42; 6:7; 12:24; 13:1-3; 17:11; 19:20; 28: 23. 30-31).[29] 따라서 엄격하게 말하면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 아니라 “말씀행전”이라고 해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개개인의 성화와 교회에 대한 봉사를 다루는 문맥 속에서 성령 충만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5:18에서 “너희는 술에 취하지 마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니 도리어 너희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라.”고 권면한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능동형이 아니라 “충만하게 되어라”(ἀλλὰ πληροῦσθε ἐν πνεύματι)는 수동형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 나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령충만은 분명 성례세례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중생과 관계 없는 것이지만 우리 성도들이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우리 속에 성령이 내주하시고, 성령이 내 속에서 역사해야 한다. 그렇다면 성령이 어떻게 하면 우리는 안에 머무시며 우리의 삶을 활성화하며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는가?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말씀과 성령이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임을 가르쳐왔다.[30] 바울은 골 3:16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히 머물게 하여라 (Ὁ λόγος τοῦ Χριστοῦ ἐνοικείτω ἐν ὑμῖν πλουσίως)”고 명한다. 헬라어 “에노이케오” (ἐνοικε/ω)라는 말은 “거하다” 혹은 “머물다”(to dwell in)라는 뜻으로 딤후 1:14, “우리 안에 계시는 (머무시는) 성령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τοῦ ἐνοικοῦντος ἐν ἡμῖν)을 힘입어 너에게 맡겨진 선한 것을 지켜라.” 에서와 같이 성령의 내주함에 대하여 사용되는 어휘이다. 따라서 말씀의 내주함과 성령의 내주함은 병행적으로 사용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말씀과 성령이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라면 성령의 충만과 내주함은 결국 우리 안에 말씀이 충만히 머물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레이몬드는 이 두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거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부터 분리하거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령으로부터 분리해서도 안된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한, 말씀과 함께 한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령에 의하여 성령과 함께 하신다.”[31]
따라서 성령 충만은 성도들이 일생동안 추구하고 힘써야 할 일이다. 마치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우리 뱃 속에 말씀을 목이 차도록 채우면 되는 것이다 (겔 3:2). 성령 충만은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이 그들의 직분을 수행하도록 위로부터 공급받은 권위와 능력이며, 신자들이 그의 개인적인 성화와 교회에 대한 봉사를 위하여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일컬으며 각각 개개인의 속에 말씀이 머므르게 함으로 경험한다.
결론
이상 우리는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사건의 본문 가운데 성령이 임하는 모습에 대한 오역을 교정함으로 그동안의 신학적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한 제안을 생각해보았다. 신약의 사건은 구약의 연속성 가운데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오순절 성령세례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말씀 사역을 위한 대선지자로 오셔서, 그의 제자들을 말씀 사역을 위한 새언약의 선지자들로 임명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신 위임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순절 사건은 단회적이며, 중생이나 성화와는 무관한 것이며, 심지어는 구속사 가운데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는 새언약이나 교회의 시작도 아니다. 오순절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세례를 받음으로 새언약의 선지자들로 세움을 받고 성령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증되는 것이다.
[1] Simon J. Kistemaker, Baker’s New Testament Commentary: Acts 75-76.
[2] 서양의 주요 역본들은 거의 다 “불(의 혀)같이 갈라진 혀들”이라고 번역한다. ESV (divided tongues as of fire), KJV (cloven tongues like as of fire), NAS (tongues as of fire distributing themselves), NET (tongues spreading out like as fire) 등 참조. 그러나 NIV는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갈라진 불의 혀)라고 번역하고 있는 데 이는 불이 임한 것을 의미한다. R. B. Gaffin도 그의 저서에서 성령 세례에 대하여 설명하며 예루살렘의 제자들 위에 “혀의 형태의 불” (The presence of the fire in the form of tongue)이 임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Perspective on Pentecost (Philipsburg: P&R, 1978), 17-18.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옳지 않다. 여기서 언급된 불은 혀를 수식하는 그림언어이다. 혀들이 임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타오르는 불과 같았다는 의미이다. 오순절에는 불이 임하지 않았다. <개신논집> 10(2010) 11-50. 참조.
[3]레 24:12; 신 8:3; 33:1; 삼상 9:7-8; 왕상 12:22; 13장; 14:21,26,31; 17:18; 왕하 1:12, 13; 4:7,16,21,22, 25,27,40,42; 5:8,14,15,20; 6:6,9; .... 렘 35:5; 스3:2.
[4]레 24:12;사 1:20; 6:7; 40:5; 58:14; 62:2; 렘5:11; 미4:4.
[5] E. J. Young, My Servants The Prophets (Grand Rapids: Eerdmans, 1952), 29-35.
[6] 손석태 <말씀과 구속사> (서울: RTS, 2011), 37-52.
[7] 구약성경에 나타난 전형적인 소명기사는 (1) 하나님과의 만남, (2) 하나님의 사명 부여, (3) 선지자의 거절, (4) 하나님의 설득과 소명의 증거, (5) 하나님의 동행 약속 등으로 되어 있다. Peter Enns, Exodus: The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2000), 113-20. N. Habel, “The Forms and Significance of the Call Narrative,” ZAW 77(1965)292-333. James Plastara, The God of Exodus: The Theology of Exodus: Theology of Exodus Narrative (Milwaukee: Bruce, 1966), 77-82. quoted in 손석태 <목회를 위한 구약신학> 서울: CLC, 135n.18.
[8] 존 왓츠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주재하시는 어전회의에서 말할 자격을 부여하는 정화의식이며,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제사 의식들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어전회의에서 말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서의 자격을 부여하고 인증하며파송하는 의식으로 요사이 같으면 대통령이 임지로 떠자는 대사에게 임명장을 주는 것과 같다. 이 점에 대하여 H. Horst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행해지는 토론이나 결정 과정을 환상을 통해 경험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게 되고 비범하고 저항할 수 없는 선포를 하라는 요구의 권능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는 데 오히려 타당한 주장이다. <이사야 1-33> Word Biblical Commentary 24. 강칠성 옮김(서울:솔로몬, 2002), 176. John N. Oswalt, Isaiah.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2003), 129-30. Alec Motyer, The Prophecy of Isaiah: An Introduction & Commentary (Downers Grove: IVP, 1993), 77-78. F. Horst, “Die Visionschilderungen altestamentlichen Propheten,” EvT 20(1960)173. quoted in 손석태 <말씀과 구속사> 120-121.
[9] Craig L. Bloomberg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마 2:15의 예수께서 세례받고 성령받은 사건을 시편 2편의 왕의 대관식과 같은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위임식 혹은 취임식 (as in the royal enthronement context of Ps 2, what appears here is a formal installation and commissioning)으로 이해하고 있다. The New American Commentary: Matthew, 82. Cf. Donald A. Hagner, Word Biblical Commentary: Matthew 1-13, 58.
[10] Robert D. Bergen, The New American Commentary: 1,2 Samuel. 465-66.
[11] Robert P. Menzies, The Development of Early Christian Pneumatology (JSNT 54. Sherffield: JSOT Press, 1991), 224-229. William P. Atkinson, Baptism in the Spirit: Luke-Acts and the Dunn Debate (Eugene: Pickwick Publication, 2011), 52-53.
[12] Vern Pothress,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What does it mean?”in Torch and Trumpet 19/2(Feb, 1969): 8-10; 19/3(mar. 1969):18-19; 19/4 (Apr. 1969): 7-9 by Reformed Fellowship, Inc.
[13] 한글 개역성경은th\n dwrea»n touv aJgi÷ou pneu/matoß을 “성령을 선물로”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같은 번역은 어느 사본이나 역본에서도 그와같이 읽고 있지 않다. 오역이다. “성령의 선물”은 성령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의 하나이다.
[14] John F. MacArther, Jr. Charismatic Chaos (Grand Rapids: Zondervan, 1992), 180-81. John B. Polhill, The New Amerian Commentary: Acts, 264.
[15] 요한 칼빈 <기독교강요> I. 9.3.
[16] Sinclair Ferguson, The Holy Spirit. Contures of Christian Theology (Leicster: Inter-Varsity, 1996), 86.
[17] Ferguson, 84-86. 레이몬드 (Reymond)는 중생과 성령세례의 관계를 설명하며 전통적인 개혁주의 가르침과 같이 오순절 성령세례의 단회성을 주장하지만 그 이유로 사도행전에 기록된 방언이 동반되는 성령세례의 경우(2장의 유대인, 8장의 사마리아인, 그리고 10장의 이방인 고넬료와 19장의 에베소)는 에베소서 4:4-6의 말씀과 같이 우리 신자들 모두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몸과 한 영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R. I.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Nashville: Thomas Nelson Publication, 1998), 764-65).
[18] Sinclair Ferguson, The Holy Spirit. Contures of Christian Theology , 85. Hyung Yong Park, The Holy Spirit and Church (Suwon: Hapdong Theological Seminary Press, 2011), 106.
[19] “at the point of faith we participate individually in the effect of outpouring of the Spirit at Pentecost.” Ferguson, 85.
[20] William P. Atkinson, Baptism in the Spirit: Luke-Acts and the Dunn Debate (Eugene: Pickwick Publication, 2011), 11, 14-15. James D. G. Dunn, Baptism in the Holy Spirit (Philadelphia: Westminster, 1970), 51, 53.
[21] Graham A. Cole, He Who Gives Life: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Wheaton: Crossway, 2007), 144-45.
[22] Graham A. Cole, 143-144.
[23] James D. G. Dunn, Baptism in the Holy Spirit, 49-51.
[24] James D.G. Dunn, 47-49. Atkinson, 10-11, 52-54.
[25] Ferguson, The Holy Spirit: Contours of Christian Theology, 85. Hyung Yong Park, The Holy Spirit and the Church (Suwon: Hapdong Theological Seminary Press, 2011), 106.
[26] “When the Holy Spirit came at the Pentecost a new order was established. From then on the Holy Spirit came to every believer at the moment of faith and indwelt the believer in permanent, abiding relationship.” John MacArthur, Jr.178.
[27] James V. Brownson, The Promise of Baptism: An Introduction to Baptism in Scripture and the Reformed Tradition (Grand Rapids: Eerdmans, 2007), 52.
[28] 학자들 간에 사도행전 9장의 주제가 사울의 회심인가? 소명인가? 아니면 회심과 소명의 두 주제를 동시에 다루는가? 하는 논난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소명 기사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구약의 선지자의 소명 기사와의 병행점을 말하고 있다(사 6:1-13; 렘 1:4-10 등). 그러나 본문은 오순절 사건 이후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부르심으로 중생하고 변화되어 물세례를 통하여 성령세례 (성령 충만)을 통해 하나님의 선지자자로 부르심을 받게 되는 정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C.K Barrett,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Acts of the Apostles, Vol.1. (Edinburgh: T&T Clark, 2004), 439-445.
[29] 손석태 <말씀과 구속사>
[30] 요한 칼빈 <기독교강요> I. 9.3. Sinclare Ferguson, “John Owen and the Doctrine of the Holy Spirit,” The Martin Lloyd Jones Memorial Lecture 2000 in John Owen: The Man and His Theology (Philipsburg: P&R, 2002), 105-106. W.H. Goold, ed. The Works of John Owen (Edingburgh, 1850-53), vol 3, 192.
[31] Robert I.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2nd ed. (Nashville: Thomas Nelson, 1998), 7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