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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임재기도)에 대한 한국 교계의 견해는 찬반 양론으로 갈라진다. 예장통합,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예장백석 등은 수용적이지만 예장합동, 합신은 비판적이고, 고신은 내부에서 찬반 논쟁 중이다. 예장통합은 은성수도원의 영향인지 일찌감치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영성에 관심을 가지면서 영성신학 전공자도 많고 영성신학 과정을 신학교에서 강의하고 있고, 감리교와 성결교에서도 신학자들이 영성을 전공하고 저서도 출간한 상태이다. 침례교는 이동원 목사가 통해 관상기도 보급에 힘써왔다. 그러나 한국에서 비판자들의 목소리가 워낙 거세고 시끄러워서인지 현재 관상기도 운동도 물밑에서 조용히 관상기도를 펼쳐가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관상기도의 핵심은 간직하면서 부족한 부분은 신학적 수정 작업을 하여 신자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개신교 관상기도(임재기도)’를 보급하려는 의도에서 이 글을 쓴다. |
관상기도(임재기도)란 무엇인가?
관상기도는 일부 반대자와 미경험자를 제외하면 많은 교파, 목회자, 신자들에게 폭넓게 알려진 기도의 한 가지 방법이다. 그러나 한두 교파에서 극렬한 반대 주장을 펼치다 보니 관상기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잠시 수면 아래로 잠복한 것 같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관상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설명과 이해가 잘못된 것이다. 필자는 한국 교회에 어떤 새로운 사역이 소개될 때 마다, 소개하는 사람들의 설명 부족, 반대자들의 체험 결핍과 편견적 성경해석이 충돌을 일으켜 하나님이 하시는 좋은 일들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홍역을 치르는 모습을 자주 목격해 왔다. 지금은 교회의 중요한 사역으로 인정되어 가고 있는 찬양과 경배, 제자 훈련, 은사 사역 등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정착해왔다. 관상기도도 이런 과정을 거쳐 조만간 정착될 것으로 필자는 기대한다.
관상기도는 특정인이 일부러 만들어낸 기도가 아니다.
기도를 어느 정도 오래하고 깊게 하다 보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기도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미안한 말이지만, 관상기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기도를 별로 하지 않고 책을 많이 보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2~3시간 이상의 기도를 정기적으로 하면 성경에 기록된 어지간한 초자연적 은사(들)는 모두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매일 2~3시간 정도 이상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도 모르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도의 삼매경에 들어가는데 이것이 곧 관상기도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간구기도에 익숙해 있고 좀 더 기도를 하는 사람은 타인을 위한 중보기도를 한다. 그러나 기도에 재미를 붙이고 기도의 시간이 늘어나다 보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간구기도(나, 이웃), 감사기도, 회개기도에 이어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기도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관상기도(임재기도)이다.
본인이 실제로 이런 기도를 체험해 보면 어떻게 되는가?
“아, 이게 진짜 기도구나. 나는 이런 것도 모르고 ‘다고, 더 다고’(Give me, give me more!) 기도만 해왔구나.”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말은 들었지만 어떻게 하는 것인 줄 몰랐는데 이게 바로 진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구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진다고 했는데(딤전 4:5), 정말 기도를 통해 거룩해 질 수 있구나!”
필자가 인도하는 임재연습 세미나에서-필자는 관상기도 보다 ‘임재기도’라는 말을 선호한다-임재기도의 맛을 본 목회자나 신자는 하나 같이 “이런 기도도 있었구나”면서 감격한다. 나이 든 어떤 권사는 ‘더 늦기 전에 임재기도를 배워야겠다’고 세미나에 참석 한 후, ‘이제 새벽기도 시간에 더 이상 간구기도는 하지 않고 임재기도만 한다’면서 기뻐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간구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간구기도와 임재기도 등 다양한 목적과 형태의 기도의 균형을 이루자는 것이다.
왜 관상기도(임재기도)가 성행하는가?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서구나 북미에서는 이제 동양 문화가 서구 문화를 접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 힌두교 및 뉴에이지 운동의 초월명상과 기(氣) 훈련 및 요가 등이 성행하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에는 아직도 소외 계층이 있지만 ‘구매력 평가지수’로 본 소득 수준은 이미 선진국 수준에 올라섰다. 사람은 생존의 기본욕구가 채워지면 영적·정신적 욕구를 추구하기 마련인데 범신론적 종교나 뉴에이지 운동의 명상과 초월적 체험이 사람들의 이런 욕구를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치열한 경쟁이 주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삭막한 물질문명이 주는 정신적 공허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음훈련이나 명상훈련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또한 학생이나 기업은 정신집중, 창의력 개발을 위해 각종 명상훈련이 성행하고 한국 단월드의 뇌호흡이나 마음수련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천주교와 불교는 이미 이런 추세에 발 맞추어 정규프로그램이나 피정(避靜. Retreat. 피세정념[避世靜念]의 약자. 세상을 피하여 생각이나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훈련이란 뜻)과 템플 스테이(Temple Stay) 등을 통해 각종 마음훈련, 명상훈련을 제공하고 있다.
한국에서 불교, 천주교는 성장하고 선호도도 높은데 개신교는 성장이 답보 상태에 머물고 선호도가 낮은 이유 중의 하나도 불교와 천주교는 명상훈련과 요가를 통해 마음의 안정과 육신적 건강을 주는데 아직도 대부분의 개신교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예배, 물질축복과 건강축복의 보이는 축복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개신 교회가 이런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의 영적·정신적 니즈(needs)를 충족시키기 위해 관상기도를 시도하는 교인과 교회가 늘고 있다.
그렇다면 비판자들의 말처럼 교회에 ‘스며든’(?) 천주교나 범신적 종교의 관상기도가 과연 잘못된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관상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소개자의 설명이 미숙하고 비판자의 오해가 잘못된 것이다.
관상기도 비판자의 견해 비판
필자는 특히 이 글에서 관상기도에 대해 노골적이고 체계적으로 비판을 한 김남준, 라영환 및 정이철의 견해를 비판하고자 한다.
김남준. “관상기도의 신학적 문제점과 목회적 대안.” 『교회와
신앙』(2011.11.02)
라영환.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관상 기도.” 『교회와 신앙』(2011.11.06)
정이철. “영성운동의 바탕은 영지주의-뉴에이지-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내면에 집중하는 영성훈련의 끝은 귀신체험.”
『바른신앙』(2014.12.31).
(1) ‘관상’이라는 단어 사용의 비판에 대한 비판
김남준 :
“관상기도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상(觀想)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관상이란 라틴어 콘템플라치오(contemplatio)의 번역이며, 이에 대한 희랍어 동치어는 테오리아이다. 이 단어는 동사 테오레오에서 왔는데, 이 동사의 의미는 “지속되는 의도를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다” 혹은 “어떤 사물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다”라는 뜻이다. 1) 이것은 일찍이 그리스철학에서 플라톤(Platon)이 인간이 초월적인 세계와 사실들을 인식하는 직관(intuition), 혹은 체관(諦觀)과 같은 것인데, 이는 한편으로는 선험적 지식(a priori knowledge)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믿음에 속하는 것으로써 경험에 기초하여 어떤 사물에 대하여 지식을 획득하는 즉각적인 방식을 가리킨다. 2)
라영환 :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말은 라틴어 콘템플라티오(contemplatio)에서 유래된 것으로 ‘실체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3) 이 단어는 그리스어 테오리아(θεωρια, 관상)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그리스 철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어이다.
그리스철학에 있어서 관상(θεωρια)이란 인간이 자신의 기원과 목적지인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앎을 위해 일자(一者, the one)를 바라보는 행위를 의미한다. 4) 그리스철학자 가운데 관상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플라톤(Platon, B.C. 428~B.C. 347)이다”.
김남준과 라영환은 ‘관상’이란 단어 사용에 대해, 정이철은 명상기도와 관련된 ‘영성’이란 단어 사용부터 비판한다.
이들의 주장대로 하면 성경에서 헬라 신(神)들에게 먼저 사용된 헬라어 ‘데오스’(God, gods)와 예수님에 대해 사용된 스토아 철학파의 ‘로고스’(Logos)를 사용한 것부터 비판 받아야 한다.
만일 비신자라면 그렇게 비판할 수도 있겠다.
- 데오스나 로고스는 원래 헬라 신화와 헬라 철학에서 사용하던 단어이다.
- 성경에서 나중에서 이 단어들을 사용했다.
- 그러므로 성경은 헬라 신화나 헬라 철학의 복제판이다?
사변적인 논리란 것이 원래 이런 것이다. 잘못된 논리에 의해 자기들이 지키고자 하는 성경 진리 마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편, 정이철과 같은 꼴 보수들은 ‘영성’이란 단어 사용에 대해서도 시비를 건다.
정이철 :
“영성이라는 말은 성경으로부터 나온 말이 아니다.
영성 사상의 본질적인 문제는 인간이 창조자에 대해 저지른 영원한 죄의 문제를 덮어두고 다른 기만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영혼과 삶을 높은 경지로 끌어돌[올]리는 비법을 얻고자 도모하는 것이다. 인간을 이즈[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무관한 방법응[으]로 영적인 도약을 꿈꾸므로 결국 하나님이 아닌 잡신과 교제하는 사탄과의 교제와 사탄이 주는 거짓된 행복을 추구하는 깊은 미혹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죄을 안고 태어난 인간이 자기의 영적수준을 도약시킬 수 있는 참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많은 학자들이 썩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지만 이미 보편화된 ‘영성’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교보문고 검색란에 [영성]이란 단어를 쳐 넣으면 ‘영성’이란 제목을 포함한 개신교 저서들이 많이 검색되는데 그중에는 개혁주의 신학자나 목회자의 저서들도 더러 있다.
김영한. 『개혁주의 영성의 기초-개혁주의 영성 총서1권』
나용화. 『영성과 경건』
장경철. 『삼색 영성』
알리 맥그라스 지음. 김남준 추천. 『종교개혁시대의 영성』(Roots that refresh: A celebration of reformation spirituality).
하워드 라이스. 『개혁주의 영성』(Reformed Spirituality).
그런데 정이철은 ‘영성’이란 단어는 성경으로부터 나온 말이 아니며 ‘영성훈련’이란 인위적으로 영혼과 삶을 끌어올리는 비법이자 사탄과 교제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사용하는 ‘로고스’나 ‘데오스’에 대한 정이철의 견해는 어떠한지 묻고 싶다. 이에 대한 정이철의 대답이 바로 신자가 명상, 관상, 영성이란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한 이유이다.
만일 정이철이 ‘영성’, ‘중보’, ‘명상’이란 단어를 비판하려면 자신이 속한 교단에서 입만 열면 사용하는 ‘개혁신학’, ‘개혁전통’, ’개혁주의’란 단어 사용부터 중지시키고 벌콥이나 박형룡 조직신학에 있는 각종 ‘전문 용어들’-특별은혜와 일반은혜, 삼위일체, 대표론과 실재론 등-의 사용중지 운동도 벌여라.
왜 성경에도 없는 그런 말을 자기들은 당연한 것처럼 사용하고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생소한 한두 가지 단어에 대해서는 그처럼 부정적으로 비판하는가?
이미 다른 데서 누차 밝혔듯이 단어는 ‘그 자체의 의미’ 보다는 ‘문맥과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가가 더 중요하다. 불교나 타 종교도 ‘구원’을 말하고 기독교도 구원을 말한다. ‘구원’이란 ‘단어’는 동일하고 ‘내용’은 비슷하지만 ‘핵심’이 다르다. 비록 세상이나 유사종교에서 사용하는 관상, 명상, 영성이란 단어를 개신교에서 사용해도 그 의미나 내용이 다르다면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많은 경우 단어 그 자체는 중립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이철은 더 이상 옹졸하고 편협하게 중보, 영성, 관상, 명상 등과 같은 ‘단어’ 갖고 쓸데없고 소모적인 시비를 그만 걸기 바란다.
(2) 관상기도의 ‘기원’과 ‘사상적 배경’에 대한 비판에 대한 비판
김남준 :
“첫째로, 신비주의를 지지하는 뉴에이지(New Age) 사상이다. 관상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도달하는 자아에 대한 의식을 그리스도 의식(Christ consciousness)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자아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그리스도론적 범신론이다.
둘째로, 중세의 신비주의(神秘主義)이다. 많은 학자들은, 관상기도의 뿌리가 중세 초기 중동 지역의 광야에서 생활하던 사막 교부들에게서 기원한다는 판단에 일치를 보고 있다.
셋째로, 유대주의 안에 있던 까발리즘(Kabbalism)의 영향이다. 까발리즘은 스페인과 프랑스 프로방스에서 시작된 중세 유대교의 신비주의를 의미한다.
르네상스 이후에 유대교의 까발리즘은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받아들여져서 기독교의 신비를 설명하는 기독교 까발리즘(Christian Kabbalism)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관상기도는 이러한 신비주의 사상 속에서 실천의 근거를 확고히 해왔다.
넷째로, 종교개혁(宗敎改革) 시대와 근대 이전의 신비주의이다. 르네상스 운동과 함께 또 한편으로는 이성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신비주의운동들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러한 운동들은 이미 13세기에 가톨릭 안에서 일어났던 개혁 운동에서 추구되었던 바들이다.”
라영환 :
“현대 관상기도운동은 동양의 선, 요가, 도가와 같은 수련방식을 차용한다.
머튼과 키팅 모두 동양종교의 묵상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실제로 키팅이 제시한 관상기도의 방법론과 마하리시 파운데이션(Marharish Foundation)에서 제공하는 ‘초월적 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에 관한 방법을 보면 키팅이 제시한 향심기도의 방법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68) ”
일반은혜와 문화에 대한 이해
이들의 주장은 얼른 듣기에는 거창하고 심오한 진리가 있는 것 같지만 필자가 누누이 지적한 ‘논리적 오류’ 즉 ‘일반은혜의 혜택에 대한 오류’와 ‘유추의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성경은 기록 당시 ‘언어’나 ‘습관’을 사용하여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이나 교회에서 시행하는 ‘풍습’이나 ‘관습’을 보면 당시 이방 사회에서 시행하던 것을 그대로 차용하여 사용한 것이 많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시행케 한 ‘할례’는 당시 이방인들이 사용하던 풍습이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언약의 형태’는 당시 강대국과 약소국이 맺은 ‘국제 조약’의 형태를 지닌다.
-크리스마스는 원래 ‘태양 신’을 섬기는 날이었으나 기독교화 된 로마당국이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을 섬기는 날로 변경시켰다. ‘날짜’는 유지한 채 ‘내용’을 바꾼 것이다.
‘기독교 문화’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문화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지만 세상 사람이나 마귀가 도적질하여 먼저 사용한 것이 많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자는 ‘문화 개혁’의 입장에서 중립적인 것은 필요하면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비윤리적이고 교리적으로 비성경적인 것-성전 창기, 불교의 108배, 천주교의 성호 그리기 등-은 배격해야 한다. 신자는 영혼도 구원해야 하지만 타락한 문화, 마귀가 도용한 문화도 구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분별이 없이, ‘세상이나 유사 종교에서 먼저 사용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개신교에서 사용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일반은혜를 무시하는 지극히 단세포적이 주장이다. 도대체 기독교만의 독특한 문화가 얼마나 되는가? 교회의 역사를 보면 세상 사람이나 유사 종교가 세상 지혜와 영적 추구도 기독교에 비해 더 앞서가는 것 같다.
-개신교도 불교 신자인 스티브 잡스가 개발한 스마트폰을 잘 사용하고 있다.
-자유신학자들의 비판적 성경 해석의 도전을 받아 보수주의에서도 성서 언어를 배우고 성경시대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면서 ‘문법적 역사적 성경해석’의 기초를 쌓았다. 이전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고 쪼개는 자체를 불경스럽게 여겼다.
-자유주의자들의 사회 복음(Social gospel) 덕분에 개인 영혼 구원에 치중했던 근본주의자들이 사회적 약자 구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구조적인 사회정의 실현에는 좌파와 공산주의 영향인지 색안경을 끼고 보는 자들이 많다.
-오순절 성령운동자들 덕분에 전통적 교회는 성령의 외적 사역에 눈을 떠서 신앙에 역동성과 활력을 불어넣게 되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성경은 기록 당시 ‘언어’나 ‘습관’을 사용하여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이나 교회에서 시행하는 ‘풍습’이나 ‘관습’을 보면 당시 이방 사회에서 시행하던 것을 그대로 차용하여 사용한 것이 많다.
-초대 교회 당시 교부들은 '세상의 술집에서 사용하는 악기를 신성한 교회에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요즈음,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교회가 이상한 교회가 될 정도로 교회에서 악기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한때 교회에서는 오르간 사용을 금지했다. 오르간 소리가 '마귀 소리 같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다가 얼마 후 오르간은 교회의 대표 악기가 되었다.
-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청교도들은 초창기에 멜로디가 있는 찬송을 부인하고 단조로운 창(chanting)만 허락했다. 칼뱅이 교회에서는 시편만 부르게 하고 멜로디가 있는 찬양은 천주교의 찌꺼기라고 경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 창만 하고 멜로디 있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 교회가 이상한 교회가 될 정도로 창을 하는 교회는 없다.
참고로 장로교가 준수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찬양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마음에 은혜로 시편을 노래하는 것과(골3:16; 엡5:19; 약5:13)(singing of psalms with grace in the heart)”(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장.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 즉 신앙고백은 교회에서의 찬송은 시편을 노래하는 것에 국한시켰지만 오늘날 이런 식으로만 찬양을 하는 장로교는 한 곳도 없다.
-1980년대 말경, 일부 앞서가는 교회에서 기타와 북을 치면서 찬양하자 주변 교회들이 난리법석을 벌렸다.
“광란이다.”
“무당굿이다.”
“신성한 교회에서 락앤롤 뮤직의 광란장으로 만드느냐?”
일부 지역에서 교회협의회 명의로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그런 찬양을 하는 교회를 규탄했다.
일부 학자도 들도 동조했다.
“교회의 예배와 찬양은 엄숙하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해야 한다.
그런 식의 찬양은 사탄 숭배적 방법이다.”
그런데 요즈음 이런 식으로 찬양하지 않는 교회가 이상한 교회가 될 정도로 기타 치고 북 치면서 찬양과 경배하는 것은 보편화되었다.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는 도교 출신인 길선주 목사(1869~1935)가 새벽에 도교 수행을 하다가 목사가 된 후 교회에 도입하여 한국 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한국 교회의 대심방은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이 무당의 대심방을 모방한 것이었다.
이제 개신교는 천주교와 범신론적 종교나 뉴에이지 운동의 관상기도 덕분에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사랑의 교제에 눈을 뜨게 되었다.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는 지나치게 강조하고 ‘사랑’과 ‘기쁨’은 무시하거나 소홀히 해 온 전통주의자들에게 관상기도는 새로운 도전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잘 수용하면 한국 교회는 불교와 천주교 성향의 신자나 불신자를 흡수하는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다.
한편, 정이철은 ‘신령한 현상’은 무조건 ‘귀신적 현상’으로 몰고 가는 독특한 은사(?)가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것은 연구하지 않고 귀신 현상만 연구하는 지 궁금할 따름이다.
정이철 :
“대중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세계 도처를 여행하면서 불교인들을 가르치는 법륜의 강의에서 명상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명상은 외부세계로 향하고, 늘 외부에서 들어오는 요인에 의해 영향 받는 인간을 자기 내부로 향하게 만드는 수련이라고 법륜은 가르친다.
…………………..
세상 종교들의 명상수련이 어떻게 지행되는지? 명상수행의 궁극적인 결말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깊이 알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동학을 창시한 최수운(1824∼1863)의 일생을 연구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도울 김용옥 박사가 동학운동에 대해 강의한 영상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동학을 이해하기 위한 참 좋은 자료라고 생각된다. 천도교, 증산교의 뿌리가 되는 동학은 나름대로 심오한 체계를 가진 철학이며 종교이다.
최수운이 친척의 생일잔치에 초대받아 식사를 하는 도중에 몸에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몸이 떨리고 중심을 잡을 수가 없어 넘어지고 구르고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그에게 신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무속에서 신이 내림이라고 부르는 현상이고, 요즘 도처에서 홍수를 이루는 사이비 기독교 집단들에서 성령운동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일어나는 현상과 같은 모습니다.”
책이나 매체는 저자의 영적 상태를 반영하기 때문에 이런 책들을 잘못 읽으면 정이철 말 대로 정말 귀신 들리기 쉽다. 실제로 정이철처럼 연구하다가 귀신들린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정이철은 제발 이런 책들은 그만 보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유사한 체험을 하여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연구해 보라.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과 세상 사람들의 영적 체험이 외형적으로 유사하므로 동일하다고 착각하는 ‘잘못된 유추의 오류’에서 제발 벗어나기 바란다.
정이철의 논리적 오류는 이렇다.
-모르몬교에서는 찬양하고 기도하고 강해하고 헌금한다. 구제하고 봉사하고 전도도 한다.
-정이철 교회에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정이철 교회는 모로몬교다?
-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장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자비로 우리 인민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 정이철 교회에서도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할 것이다.
- 그러므로 정이철 교회는 김정은 공산주의 집단이다?
정이철은 늘 이런 논리로 관상기도나 성령으로 인한 영적 현상을 공격하고 있다.
‘신접한 현상’이나 ‘성령의 현상’이나 외양은 비슷한 경우가 많다. 마귀도 하나님의 일을 흉내낼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는 ‘현상’이나 ‘체험’의 유사성이 아니라 그런 체험으로 인한 ‘열매’가 중요하다.
단월드의 이승헌도 정이철이 말한 동학의 최수운과 비슷한 체험을 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을 만난 사울이 예언을 하고 하루 종일 벌거벗고 드러누운 일(삼상 10:10-19: 23-24), 사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음성을 듣고 말에서 떨어진 일(행 9:3-9)이 기록되어 있다. 음성을 듣고, 예언하고 신체적 현상이 일어난 것은 비슷하다. 그러나 전자 둘은 마귀를 만난 것이고 후자 둘은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비판자들은 더 이상 제발 이런 유치한 논리로 하나님의 일을 폄하하지 말기 바란다. 그 대신,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이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조나선 에드워즈가 제시한 5가지로 분별해 보기 바란다.
-그 사역이 진정한 그리스도를 높이는가?
-그것이 세상적인 것을 대적하는가?
-그것이 사람들은 성경으로 이끄는가?
-그것이 (성경적) 진리를 향상시키는가?
-그것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야기시키는가?
(3) 관상기도의 ‘목표’에 대한 비판에 대한 비판
비판자들은 범신론적 종교나 천주교에서 ‘관상기도’를 하기 때문에 개신교에서 하는 관상기도의 ‘목표’도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와 유사하거나 ‘동일’할 거라는 착각을 한다. 물론 개신교 관상기도자들이 개신교적 관점에서 용어나 신학을 다듬지 않은 잘못도 있지만 비판자들의 주장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다. 자기 눈에 보이고 자기가 아는 수준으로 비판하고 있다. 제대로 된 개신교 신자라면 ‘관상기도’를 통해 자아 실현과 자력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된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는 아무도 없다.
여기서는 비판자들의 개별 주장을 하나하나 거론할 생각은 없다.
많은 경우, 비판자들은 주제에 대해 성경적 연구를 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인지 비교종교학을 연구하여 유사 종교를 전파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하나님과 성경 보다는 비판의 주제-‘관상기도’-를 쓸데없이 더 깊이 연구하는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불신자나 자유주의 신학자가 요한복음이 말하는 ‘로고스’-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해 연구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로고스’가 아니라 헬라 철학이 말하는 ‘로고스’를 더 깊이 연구한 후, 성경이 말하는 ‘로고스’가 바로 헬라 철학이 말하는 ‘로고스’의 재탕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성경적 관상기도(임재기도)란?
비판자와는 달리 필자가 이해하는 ‘성경적이고 개신교적인 관상기도’는 어떤 것인가?
관상기도(contemplation. contemplative prayer)는 임재기도, 내적기도, 침묵기도, 사귐의기도, 깊은기도, 친밀한 기도, 세상에서는 명상기도(Meditation)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필자는 처음부터 천주교적 냄새를 풍기는 ‘관상기도’라는 단어 대신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임재기도(Presence prayer)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관상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관상기도란 말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관상기도와 임재기도를 병행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기도의 한 가지 방법이다
관상기도는 크리스천이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세상의 관상기도는 사람의 힘으로 범신론적 신(神)과의 존재론적 합일(합일)을 추구하는 기도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관상기도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능력으로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성령 안에서 교제를 통해 영적으로 하나됨을 추구하는 기도이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그래서 관상기도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 63:1-2).
어떻게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가?
전통적인 교인들에게는 이런 표현조차 어색해 할 것이다. 말씀 중심으로 말씀 묵상에 익숙한 전통적인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하면 그게 무슨 뜻이며 어떻게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필자도 제자훈련과 QT(Quiet Time. 고요한 시간. 말씀 묵상)를 통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까지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것은 잘 몰랐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섭리적 연단의 일환으로 오랫동안 광야훈련을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하루라도 빨리 광야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고 기약도 없이 캄캄하고 답답한 침묵 속에 갇히게 되었다. 눈물의 간구도 소용이 없었고 응답의 기다림도 무의미하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자신도 모르게 눈만 뜨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만 응시하게 되었다.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간단했다.
말을 하지 않고 간절하게 사모하는 심정으로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주님을 응시할 뿐이었다. 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바라보았다.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고백처럼 가끔 “주님, 언제까지니이까?”라고 나지막하게 읍조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말로 하는 기도보다 주님께 집중이 더 잘되고 시간도 더 잘 가는 것 같았다.
이러기를 어느 정도 하다가 우연히 십자가의 요한이 쓴 ‘영혼의 어두운 밤(Dark night of the soul)’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신자가 신앙의 여정에서 만나는 광야훈련을 ‘영혼의 어두운 밤’ 이라고 불렀다.
사실 필자가 광야훈련을 받는 동안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힘든 영적 상태에 대해 도움을 받으려고 개신교 서적들을 뒤졌지만 별로 도움이 될만한 것들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된 십자가의 요한의 저서는 필자의 영적 상태를 맞춤 진단하는 것처럼 너무나 구체적이고 자세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은가?
필자는 너무나 감격하여 가톨릭의 영성에 관한 책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신학교 다닐 때 교수들이 가톨릭의 수도원 영성이나 사막 교부들의 영성에 대해 너무나 부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그들의 저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는데 십자가의 요한을 통해 마담 귀용, 아빌라의 테레사 등의 저서를 보면서 “또 한 번 속았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첫 번째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는 사도시대에 사라졌다’는 기적중지론에 속은 것이고 두 번째는 ‘종교 개혁 이전의 수도원 영성은 신비주의와 사막교부의 자력 구원의 금욕적 영성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는 주장에 속은 것이다.
물론 가톨릭적 영성에는 신학적 오류도 있다.
그러나 신학적 오류가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만일 신학적 오류가 있기 때문에 부인해야 한다면 ‘기적중지론적 개혁신학’이야 말로 지금 당장 없어져야 할 백해무익한 신학이다. 수도원의 영성과 사막교부의 영성은 신학적으로 현대의 발전된 개신교 신학의 관점에서 조금만 손질하면 현대의 신자들에게 꼭 필요한 영적 보물이다.
또한, 필자는 이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면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상상의 힘이 신앙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도 알게 되었다. 계몽주의와 이성주의의 영향을 받은 전통적 개신교는 이성을 강조하고 감성과 상상의 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좌뇌 중심의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기록된 내용 보다는 우뇌 중심의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비유와 상징 같은 ‘그림 언어’로 기록된 것이 더 많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실 많은 자손을 하늘의 뭇별에 비유하셨다.
창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히브리서는 믿음의 주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권면한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의 각종 비유-씨뿌리는 자, 그물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등-듣는 자의 기억과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필자는 기도 중에, 죄를 회개할 때는 내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상상하면서 보혈-‘보혈의 피’가 아니다-로 죄를 씻고, 십자가에 죄를 못 박는 모습을 상상한다. 다음에는 만면에 웃음을 띄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사랑, 기쁨, 생명으로 채운다. 그러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 지고 속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특히 요즈음은 뇌 과학과 심신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기능 중에서 상상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속속 밝혀내고 있다. 스포츠, 기업, 예술 등에서는 상상의 힘을 동원하는 심상훈련 즉 ‘이미지 트레이닝’(Image training)을 통해 기록을 획기적으로 갱신하고 창의력 개발을 통해 뛰어난 실적을 올리고 있다. 상상의 능력은 이성이나 감성과 함께 종교나 배경에 관계 없이 하나님이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주신 값진 선물이다.
불교, 힌두교 및 뉴에이지 운동은 오래 전부터 사람에게 내재된 상상의 능력을 발견하여 명상훈련에 잘 활용하고 있고, 세상도 잘 활용하고 있는데 유독 이성주의와 계몽주의 영향에서 탈피하지 못한 전통적 개신교만이 상상력을 활용하기는커녕 아직도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필자는, 막연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해 온 주님을 바라보는 훈련, 가톨릭적 관상기도, 이야기체나 ‘그림 언어’로 기록된 성경의 인물과 사건에 대한 상상들, 세상의 ‘이미지 트레이닝’ 방법 덕분에 마음의 눈으로 주님을 사모하는 기도에 날개를 달게 되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마음의 눈으로 응시하다 보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과 하나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하나님과 하나되는 체험을 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새 힘과 용기가 솟아나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그런데 예장 고신의 정태홍은 내적치유가 구상화(Visualization)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라고 한다.
간구기도가 소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어 구하는 기도라면 관상기도는 하나님과 개인적, 인격적으로 교제하면서 하나님으로 채우는 기도 즉 성령충만을 추구하는 기도이다.
간구기도가 기도자의 내면의 상태-상처, 분노, 욕망, 정욕 등 죄악이 지배하는 상태-와는 별 상관없이 하나님의 능력을 기도자에게 끌어들이는 기도라면 관상기도는 기도자가 하나님께로 나가는 기도이기 때문에 내면의 상태가 정화되지 않으면 하기가 쉽지 않다.
간구기도에 익숙해 지다 보면 외적인 사역이나 소원 성취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나의 내면의 상태를 점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나 교제를 누리는 시간이 드물다. 그 결과 심령이 답답하고, 생동감이 결여되고, 변화에 무디어지기 쉽다.
관상기도는 이런 결점을 보완해 준다.
많은 신자들이 관상기도를 어려워하는데, 내면의 상태가 정화되지 않으면 온갖 잡생각,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아픔, 죄로 인한 완악하고 혼미한 마음 등으로 인해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돕는 여러 가지 예비 과정이나 훈련이 필요한데 이런 것을 ‘집중기도’(Centering prayer) 또는 ‘마음의 평정’(Recollection)이라고 한다.
관상기도(임재기도)는 전체기도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필자가 기도의 시간에 관상기도(임재기도)를 하는 순서는 대충 이렇다.
-찬양기도
하나님께 찬양한다.
-묵상기도
주어진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한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지속적으로 묵상한다.
-용서기도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고 미워한 죄를 회개한다.
-회개기도
깨달은 죄를 회개한다.
마음으로 지은 죄, 입술로 지은 죄, 행동으로 지은 죄를 회개한다.
-간구기도와 중보기도
나의 필요를 간구하고 타인과 나라와 열방을 위한 중보기도를 한다. 필요하면 영적 전쟁을 하는 전투기도도 한다.
-임재기도와 관상기도
이 정도 과정을 거친 후 예수님을 마음으로 응시하며 기도하다 보면 생각 보다 쉽게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감사, 평강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즐긴다. 때로는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문제 해결도 받는다.
이 정도 풀 코스로 기도하려면 최소 2시간 정도는 소요되고 때로는 서너 시간은 물론 5~6시간 기도도 하게 된다. 그런데 성령님이 인도하심에 따라 어느 한 부분에 강조점을 두다 보면 다른 부분은 짧아지기 쉽다. 예를 들어,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기도를 많이 하다 보면 다른 부분의 기도는 상대적으로 길이가 짧아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왜 이런 토탈기도(Total prayer)가 필요한가?
물론 특정한 한 가지 기도를 제대로 하기 위한 훈련을 할 때에는 한두 가지 기도만 집중적으로 할 수도 있지만 평시에는 토탈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한 가지 방법의 기도에 치중하다 보면 다른 기도가 소홀히 되어 균형을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간구기도와 통성기도에 치중하다 보면 영적으로 강하지만 사람이 거칠어 지기 쉽고 침묵기도와 관상기도만 많이 하다 보면 영적으로 깊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역동성과 추진력이 결여되기 쉽다.
여기서 말하는 찬양기도, 회개기도, 관상기도는 ‘목적’을 중심으로 분류한 기도이다. 이런 기도를 하면서 필요에 따라 말로 하는 구송기도, 통성기도, 방언기도, 침묵기도, 상상기도 등 다양한 ‘방법’에 의한 기도를 할 수 있다.
‘침묵기도’는 말 그대로 말을 하지 않고 마음으로 하는 기도이고 ‘상상기도’는 마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모습이나 하나님이 하신 일 또는 하실 일을 상상하면서 하는 기도이다. 어떻게 보면 관상기도는 곧 상상기도이다. ‘관상하다’는 말 자체가 “지속되는 의도를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다”는 뜻인데 개신교가 말하는 관상기도는 “지속되는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모하면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고 말씀 하신 후, 몇 수 차례에 걸쳐 그 약속을 상기시키시면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약속이 성취된 모습을 비유적으로 상상하게 하게 하신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 13:16).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상상의 힘은 위대하다.
그림과 영상이 가미된 시청각 교육이 단순히 듣는 교육 보다 더 효과적인 것도 상상의 힘, 그림의 힘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의 뇌는 상상과 실제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성령의 도우심으로 상상력을 발휘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더욱 쉬워진다.
상상의 세계는 우뇌의 세계이고 논리의 세계는 좌뇌의 세계이다.
좌뇌의 논리와 교리는 튼튼한 뼈대는 제공하지만 우뇌의 상상과 직관은 영적 풍성함과 생동력을 제공한다. 필자는 오늘날 신자들에게 이런 영적 풍성함과 생동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지식은 많고 똑똑하기는 하지만 영적 깊이와 행위가 결여된 냉랭하고 메마른 ‘죽은 정통’으로 치닫고 있다고 본다.
개신교는 말씀 없이 사람이 상상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고 체험하는 것은 ‘신비주의’라고 경계하면서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강조한다. 명상기도나 관상기도를 할 때, 유사종교나 뉴에이지 운동은 물론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이나 현대의 토머스 머튼과 헨리 나우웬 및 심지어는 복음주의자인 리차드 포스터의 기록을 보아도 회개, 십자가, 보혈, 성령의 능력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따라서 성경적 교리에 민감한 일부 개혁주의자들이 신비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영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면 성령의 역사인지 악령의 역사인지 마음의 역사인지 구분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계시의 와중 속에서 사도 요한도 천사를 경배하다가 책망 받지 않았는가?(계 22:8-9). 이 때문에 영적 체험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분별한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필자는 관상기도(임재기도)를 할 때나 훈련할 때 의도적으로 회개, 십자가, 보혈 및 예수 이름과 성령의 도우심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에 의한 하나님 체험을 모두 불건전하고 위험한 신비주의라고 낙인 찍고 부인하는 것은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우는 것과 같다. 성경 말씀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고(요 5:39),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분이 아닌가?(요 14:26; 15:26)
또한, 위험하다 해서 모든 것을 금지한다면 위험한 오지의 선교, 위험한 자동차 운전, 위험한 가스 사용도 금지해야 하는가? 위험하지만 유용성이 더 크기 때문에 안전을 강화해서 잘 하고 있지 않는가?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최선의 방법은 새로운 시도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지만 그 대신 발전은 없다.
전통적 개신교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이단이나 사이비를 대적하면서 변증에 지나치게 치우치다 보니 역동성을 잃어버렸다’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지적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