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말기 진명여학교(현재의 진명여고)와 명신여학교(숙명여고와 숙명여대)의 설립 배경에는 고종의 순헌황귀비 엄씨의 절대적인 지원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원에는 일찍이 일본의 야욕을 알아챈 엄황귀비의 기민한 판단과 여성 교육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지요.
진명여학교는 1906년 4월, 사촌동생이었으나 입양되어 엄황귀비와 남매가 된 엄준원이 설립하였습니다. 엄황귀비는 소유하고 있던 조선황실 별궁인 창성궁(현재의 종로구 창성동 소재) 의 땅 1,300평을 하사하고, 주변 주택을 추가로 구입·수리하여 교사로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전국에 산재한 황실 소유의 토지·전답·임야 중 일부를 제공하여 운영비용으로 충당하게끔 하였습니다.
한편, 명신여학교는 1906년 5월 엄황귀비로부터 조선황실 별궁인 용동궁(현재의 종로구 수송동)의 땅과 경비 보조를 받아 설립되었습니다. 초대 교장으로는 정경부인 이정숙여사가 취임하였는데 여사는 고종을 양자로 받아들여 왕통을 잇게 한 신정왕후 조씨의 친정 조카인 조영하의 부인입니다. 학교 이름인 명신은 당시 황태자 영친왕의 당호인 명신재와 겹친다는 이유로 1909년 숙명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사립 명문인 숙명여고 숙명여대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통감부는 1907년 궁내부 산하에 제실재산정리국을 설치해 황실 재산을 국유화하려고 시도합니다. 이 과정에서 순헌황귀비는 그 움직임을 사전에 미리 간파하고 황실 재산을 일제에 빼앗기기 전에 이를 여성교육에 투자하자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창성궁과 용동궁이 황실의 공적 재산으로 분류되어 국유화 조치가 되었다면 1910년 국권 상실로 인하여 학교 설립은 무산되었을 것이 자명합니다.
진명과 숙명여학교의 설립 시점이 모두 1906년이라는 사실은 바로 그 때의 긴박한 사정을 잘 설명하여 줍니다. 그렇다고 두 사립 명문 여학교의 설립을 순헌황귀비의 공덕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망국에 절대적인 책임이 있는 황실, 백성들의 피폐한 삶과는 달리 수많은 별궁과 토지 등을 소유하면서도 친일 행각을 벌이며 호의호식한 왕공족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창성궁은 영조의 딸 화유공주와 부마 황인점이 살았었는데, 황인점의 후손이 살다가 대가 끊겨 왕실 소유가 되었습니다. 주인 없는 궁은 상황에 따라 왕비의 소유가 되는데, 고종 때 창성궁은 명성왕후의 시해 뒤 엄황귀비의 소유가 되었어요.
용동궁은 명종의 세자빈인 공희빈의 경제생활을 관리해 주던 곳인데 혜경궁 홍씨, 명성왕후 민씨,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를 거쳐 영친왕의 어머니인 엄황귀비의 소유가 되었던 내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