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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시간, 인간의 시간
두말 할 것 없이 '시간'은 시가 맹금의 눈으로 노려보고 탐구해야 할 유력한 화두 중 하나다. 인간의 실존 자체가 시간이라는 조건 속에서만 성립되는 까닭이다. 우주의 시간은 사물들을 살아 있는 것들을, 제 안으로 빨아들여 부패와 변형을 일으키는 강력한 동
력이다. 꽃은 피고 지고, 달은 야위었다가 차오르고, 파도는 왔다 간다. 사람은 초, 분, 시, 날, 주, 달, 해, 계절 들로 삶을 쪼개고 분절하면서 그것을 겪어낸다. 우리가 혼재된 시간 속에서 겪어내는 경험들, 의미화되거나 의미화가 되지 못한 채 유산되어버리는 것들, 삶의 모든 찰나와 여정들, 이게 모든 시간의 일이다. 우리는 저마다 시간이라는 우주적 규모의 도서관에 꽂힐 책을 쓰고 있다.
시간은 그 모든 것들의 정수를 파먹고 공허한 껍데기만 남기는 포식자이거나, 짓밟고 파괴해버리는 무시무시한 거인이다. 그것은 비애와 쾌락의 원천이자, 동시에 기억을 삼켜버리는 블랙홀이다. 삶이라는 건 그 시간과의 뜨거운 투쟁이면서, 거꾸로 뒤집어보면 우리 안에 있는 시간이 우리 몸통을 찢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신비한 그 무엇이다. 인간이란 세계를 향해 뻗어 있는 신경다발로 시간을 촉지하고, 세계와 경계를 이룬 자아가 그것과 부딪치고 비비
면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가 개별자로서 나고 죽는 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며 핏줄을 이어가는,것도 시간 속에서 겪는 통과의례들이다. 젊은 날에 난해하기 짝이
없는 하이데거 철학을 기웃거렸던 것도 시간에 대해 나름대로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내 작품 얘기를 해보자. 1979년 신춘문예 당선시 제목이 '날아라, 시간의 포충망에 붙잡힌 우울한 몽상이여'이다. 20대 초반 등단 무렵부터 시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건진 이미지들을 시로 써왔다. 과거는 흘러가버린 시간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연결된다. 과거는 미래의 일부고, 현재는 과거라는 몸통을 포함하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것들이란 발상 자체는 그다지 새로운 건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시간이 키운 열매이
고, 때가 되면 그 열매들을 다 떨어뜨리는 것도 시간이다. 우리는 그 시간에서 촉발되는 상상이나 사유를 멈출 수가 없다. 그런 맥락에서 시간은 늘 시적 영감의 촉매제다. 시간과 시간 사이에 걸쳐져 있는 숨은 오차들은 항상 시를 낳는 태(胎)다. 사람도, 동물도 시간을 산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사람의 시간과 동물의 시간은 어떻게 다른가?
한 유명한 철학자는 동물을 가리켜 "세계의 가난"이라고 말한다. 동물들이 이성을 배제한 채 힘과 본성의 세계에 갇혀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말은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다. 동물들은 왜 태어나는지 모른 채 태어나서 힘껏 먹이를 구하고 짝짓기를 하고 때가 되면 죽는다. 동물은 '몽롱한 욕망'이고, 애초에 자기실현이라는 목적이 배제된 '얼빠져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 세계 안에 있지만 그 있음은 어리둥절한 가운데의 있음이다. 동물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죽는 것이다. 동물의 삶은 불완전한 것이고, 그런 까닭에 동물은 인류보다 열등한 형제들이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하이데거가 말한바 "실존 일반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의 죽음, 그리고 고독을 인지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동물들은 죽음도, 고독도 인지하지 못한 채 피동적으로 수납한다. 그로 인해 동물들의 내적인 가능성은 한계에 처해진다. 그게 철학자가 동물들을 "세계의 가난"이라고 말하는 이
유다. 동물과 인간이 유한한 생명의 시간을 살아낸 뒤 죽는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동물의 죽음은 인간과는 다른 죽음이다. “우리가 죽어감이라는 말을 인간에게 서술하는 한, 동물의 본질에는 '얼빠져 있음'이 속해 있기 때문에, 동물은 죽어갈 수는 없고 다만 끝나버릴 뿐이다." " 인간은 먹고 짝짓기를 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닮았지만 말과 이성의 세계에 산다. 또 하나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가르는 건
'상징'이다. 동물은 '상징'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연히 '상징체계'라는 것도 없다. 인간은 '상징'을 알고 다루면서 '상징체계'를 불가해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쓴다. 언어는 기호이자 상징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소통의 수단이다. 시와 철학은 보다 정교한 상징체계를 기반으로 삼는다. 사람에게 시와 철학은 가능한 영역이지만 동물에게는 불가능한 영역이다.
나는 동물 중에서 무리짓지 않고 혼자 다니는 호랑이를 좋아한다. 호랑이는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고, 높은 산과 깊은 계곡에서 어슬렁거리는데, 대부분 침묵 속에서 보낸다. 호랑이를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침묵은 생명의 약동을 품은 채 깊고 단단한 형태를 이룬다. 인간도 침묵하지만 동물들의 침묵과는 본질에서 다르다. "동물에게는 침묵이 자연적인 휴식의 상태이지만 인간에게는 내면의 소동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다. 변덕스러운 데다 정신없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속성을 가진 인간동물은 자신의 속성대로 존재하는 데서 놓여나기 위해 침묵에 기대려 한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은 일종의 타고난 권리로 침묵을 즐긴다." " 자, 보라, 여기 침묵의 제왕이
있다.
노란 일몰의 시간까지
나, 얼마나 바라다볼 것인가
철책 안에서
자신의 감옥에 대한 의심조차 없이
주어진 운명의 길을 서성이는
저 권능의 벵갈 호랑이를,
나중에 다른 호랑이들이 올 것인가
블레이크의 불 호랑이가.
그 뒤로 다른 황금들이 올 것인가
제우스였던 사랑스러운 금속이
아홉 일 밤마다 아홉 개를 아홉 개가 아홉 개를
낳는, 그리고 끝없이 낳는
반지가
다른 아름다운 색들은 세월과 함께
나를 두고 떠났느니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공허한 빛과 착잡한 그림자
그리고 처음의 황금뿐이니.
신화와 서사의
오, 일몰이여, 오, 호랑이여, 오, 빛이여,
그 손을 갈망하던 그대의 머리카락이여,
오, 더없이 소중한 황금이여,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호랑이들의 황금 전문
보르헤스가 노래하는 "벵갈 호랑이"는 말할 것도 없이 야생의 존재다. 호랑이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동물은 불변의 야생성을 품고 살아간다. 따지고 보면 이 야생성은 곧 인간의 뿌리이기도 할텐데 인간은 문명세계를 일구며 사는 동안 이 근원적 본성을 잃어 버린다. 인간은 문명화와 야생이라는 두 세계 사이에 걸쳐져 있는,존재다. 보르헤스가 "벵갈 호랑이"에 마음을 빼앗긴 것도 이것이 순수한 야생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야생은 비록 철책 안에 갇혀 있
다 하더라도 빼앗을 수 없는 호랑이의 권능이다. 호랑이는 "자신의 감옥에 대한 의심조차 없이 주어진 운명의 길을 서성이지만, 호랑이는 여전히 저 원초의 "불"과 "황금"을 가진 존재다. 이 “불"은 활발하고 민첩한데, 시학자 바슐라르에 따르면 “변화하는 불은 변화의 욕망을, 시간을 앞당기고자 하는 욕망을, 모든 생명을 그 종말,,그 피안으로 나르고자 하는 욕망을 암시한다. "불"은 무엇보다도 생명의 정수, 그 활력이다. 이것이 꺼지면 존재는 생명의 활기를 잃
은 "공허한 빛과 착잡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은 우리 안의 저 깊은 곳에는 “처음의 황금”, 즉 금속으로 변한 "불"이 빛나고 있음을 안다. 우리 신체 어딘가에 야성이 잠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 시의 시간 배경이 '일몰'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해가 진 뒤 빛이 서서히 사라진다.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오듯이 "벵갈호랑이"는,멸종을 향해 다가간다. 호랑이는 살아 있는 한에서 불이고 황금이다. 이 호랑이가 사라질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오, 일몰이여, 오, 호랑이여, 오, 빛이여"라는 구절은 그런 안타까움에서 솟구치는 외침이다. "벵갈호랑이"가 멸종되면 그것은 "신화와 서사"에서만 만날,수 있을 것이다. 일몰, 호랑이, 빛들은 다 사라질 것들의 목록이다.
죽음은 불가해한 암흑이며, 거대한 침묵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동물들 하나하나는 어슬렁거리는 침묵의 작은 조각들이다. 그것들은,죽으면서 덧없이 거대한 우주적 침묵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보르헤스는 호랑이에 관한 시 한 편을 더 남겼다. 또 다른 호랑이라는 작품이다. 보르헤스는 이 호랑이가 "수마트라나 벵골을 누비며/사랑과 빈둥거림과 죽음을 일상적으로 행하는/그 치명적인,보석, 그 숙명적인 호랑이는 아니네."라고 쓰는데, 이 호랑이는 "상
징과 허상의 호랑이 / 일련의 문학적 비유,/ 백과사전에서 따온 것일뿐"이다. 보르헤스는 호랑이에 매혹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랬으니 호랑이의 생태에 대해 주의깊이 살펴보고 난 뒤 이 시를 썼을 것이다. 보르헤스는 실제 호랑이가 아니라 호랑이라는 상징에 대해서,쓴다. 이 은유와 상징 속에서 실제 호랑이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이 시의 너머에는 밀림이 있고, 그 밀림과 진흙 위에는 "전율이 일만큼 멋진 가죽에 싸인 골격"을 가진 실제 호랑이가 어슬렁거릴 것이다. 호랑이는 현실과 환상 사이, 금생과 피안 사이에 있다. 이 호랑이는 꿈속의 호랑이, 초월적 몽상 속의 호랑이다. 이 호랑이가 수마트라나 벵골의 밀림에서 걸어나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질러간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시인의 상상 속에서 그런 초현실적 일들은 언제나 가능한 일이다. 보르헤스는 이 시를 두고 "또 다른 호랑이를 결코 찾아내지 못할 테지만 언어의 구조를, 상징의 구조를 은유의 구조를 형용사의 구조를, 심상의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고, 그러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걸 나타내고 있다."고,말한다.
생태주의 시인 게리 스나이더는 야생의 실천』에서 이렇게 쓴다. “고함소리를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재빨리 머리를 돌리고, 절벽을 내려다보면 현기증을 느끼고 위험한 순간에는 심장이 덜컹'하는데, 이것들은 "포유류인 우리의 몸이 갖는 보편적인 반응들이
다. 우리의 “육체는 숨쉬고 심장을 계속 박동시키기 위해 어떤 의식적인 지성의 중재를 요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우리의 정신 속에는, 상상 속에는 '우리'가 놓치지 않고 쫓아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말하자면 생각, 기억, 이미지, 분노, 기쁨 같은 것이 명령 받지 않고도 솟아나고, “마음의 심연, 무의식은 우리의 내적인 야생지대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내적인 야생지대"에는 야생 동물들이 우글거린다. 우리 안의 야생성은 퇴적암에 화석화된 빗방울
자국 같은 것이다. 그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저 철책에 갇힌 "벵갈 호랑이"가 일깨워주는 것도 그 사실이다. 우리가 기르는 개들도 마찬가지다. 개들을 넓은 초원에 풀어놓으면 단 한 마리의 예외도 없이 정신없이 질주한다. 그게 조상 때부터 유전되어온 개들의 본성이다. "개는 우리에게 우아한 운동능력을 지닌 육체의 즐거움, 감각들의 날카로움과 희열, 숲과 바다와 비와 우리 자신의 숨결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모든 인간은 제 안에 시원(始原)으로***서 동물을 품는다.
강정의 시들에는 우리 안에 얼어붙어 있는 수성(性)이 있다.
수성은 껍질과 가죽을 찢고 나오는 동물 내부의 날카로움이다. 둥물은 대상을 잡고 삼키기 위해 공격한다. 공격하기 전에 공격할 대상을 찾아 어슬렁거리고, 대상을 쫓아 달리는 게 동물이다. 동물은 먹잇감을 포획하고 그 살을 찢어 먹는다. 동물의 공격성은 본성의 일부다. 이를테면, “나는 태양과 싸우는 고아/봄의 목전부터 벌써 가을 저녁 빛이 그립다/타오르기도 전에 꺼져가는/핏빛 난리의 뒤편을 보고 싶은 것이다/육식하는 새들이 오래 쪼다가/한 뒷박 엎질러놓은 사람의 내장으로/천지를 다시 발라보고 싶은 거다/뚝뚝 제 몸을 쪼개 강물 위에 써놓은/볕의 마른자리에서/흙속에 묻힌 아이의 유골을 파헤치며/처녀의 눈물로 사라진/여름의 자긍을 헤집
고 싶어라" (미스터 크로우) 같은 구절에서 수성의 징후는 물씬하다. 핏빛 난리, 육식, 내장, 몸, 유골, 자궁 따위 명사는 말할 것도 없고, 쪼다, 쪼개다. 발라보다, 파헤치다, 헤집다 따위 동사는 '동물적인 것' 말고는 떠올릴 게 없다. 동물적인 것의 응집으로서 그 수성이 아무리 징그럽다 해도 동물은 벗어날 길이 없다. 내 안에 숨은 동물성의 발견은 동물과의 구조적 동형성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차라리 동물되기에 더 가깝다. 동물되기란 무엇인가? 이진경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을 해설하는 책 노마디즘에서 "동물의 신체적 감응을 만들어낼 수 있는 속도와 힘을 나의 신체에 부여하는 것", "어떤 동물이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체적 힘과 에너지의 분포를 바꾸고 새로운 분포를 만들어내 그 동물의 감용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고양이의 발톱, 독수리의 눈, 늑대의 이빨, 두더지의 앞발 등등의 동물 기관을 모방해서 제 신체기관의 양태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수영을 하면서 개구리의 영법
을 쓰고, 권투 선수는 벌이 쏘듯 재빠르게 상대에게 잽을 날리고, 무예에 통달한 사람은 사마귀 같은 자세로 상대에게 타격을 입힌다.
동물되기는 동물의 신체적 감응으로 내 몸을 감염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포악과 갈증의 무늬를 잠시 여민 채
세상 그늘진 곳에서
순간을 영원 삼아 쉬어가던 몸
잠든 털 올들 사이
부대끼는 바람결에 꽃을 매달고 울대를 움켜쥔 이것은
제 살을 쥐어뜯는 몽매 같기도,
더 큰 울음을 내성케 하는 먼 과거의 엄명 같기도 하다
나는 응당 그래야 하는 심장의 지령에 따라
사위를 둘러본다.
다만, 갑자기 어두울 뿐이다
이제 몸안의 빛을 꺼내 나를 죽이고
죽인 나를 채찍질해 몸의 이끌림에 투신해야 할 때,
숨겼던 발톱과 이빨이 저만의 생기를 시위라도 하듯
점점 끄무러져가는 노을 아래 더 붉은 촉광으로 망막의 혈기를 끌어올리고
위장은 무슨 쓰다 만 비문(碑文)처럼 정직하게 비어간다
자신을 죽여 다른 이를 살리는 것이나
자신의 호기로 다른 것을 죽여야 하는 사명이
이토록 뜨겁게 부딪친 적 또 있었을까
- 강정, '호랑이 감정' 부분
시에 동물들이 나올 때 대개 동물 생태보다는 동물에 빙의된 자아의 감응들을 보여준다. 강정의 시도 마찬가지다. 시집 『귀신』(2014)에는 동물 시편으로 호랑이 감정」과 「사슴의 뜨거운 맹점」
을 꼽을 만한데, 이들 시편이 '호랑이'와 '사슴'을 노래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것들은 실재가 아니라 우리 안의 추상과 상상, 혹은 동물이 아니라 동물적인 것이다. '동물성'은 우리 안의 바깥이다.
이때 안과 바깥은 서로를 비춘다. 그러니까 동물은 우리 자아를 비춰주는 일종의 '거울'인 셈이다. 이를테면 「사슴의 뜨거운 맹점」에서 "사슴은 오래도록 불탄다"라는 구절은 사슴의 생태와 실재와는
무관한 시인의 판타지를 보여준다. 사슴은 "목이 말라 어둠 저편의 물길을 찾는 소리"와 짝을 이루는 어떤 사유의 표상이거나, 삶의 탕진을 암시하는 기미(機微)로서의 자연이다.
보르헤스의 호랑이들의 황금이 외부자의 시선을 보여준다면「호랑이 감정」은 내부자의 시선을 보여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꿈인지 생시인지 / 내가 사람인지 짐승인지 혼돈에 빠진 자의 시선이다. 사람-짐승의 시선으로 자기 내부를 훑어가는데, 이때 이 내부는 "호랑이"의 것이 아니라 "호랑이 감정"에 빠진 자의 내부다. 자기 관찰자의 시선이 훑어내는 것은 "호탕과 소심의 사이, 혹은 "참음과 굶주림" 을 헤쳐 돌아온 지점이다. 그사이 몸의 성분적 요소는 호랑이의 강밀도로 바뀌어 감응한다. 호랑이는 "호랑이 감정"이라는 강밀도를 가로질러서 온다. 이 호랑이는 정확하게 '몸매'와 '내성 사이에 위치한다. "포악과 갈증의 무늬가 가리키는 것은 호랑
이의 외관이다. 외관이 사물 안쪽의 형질을 반영한다면, 안쪽은 사물 외관을 결정한다. '나'는 호랑이의 골격과 무늬를 뒤집어쓴 채 호랑이처럼 포효한다. 호랑이 되기란 무엇인가. 이것은 야생동물의 본성과 생태를 흉내내고 차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 몽상 안에서 호랑이를 살아내는 것이다. 또한 "자기 삶을 꽁꽁 싸맨 언어에서 벗어남이고, 그 방편으로 시, 종교, 자연 세계에 빠져듦이다. 그 결과로 "자신의 호기로 다른 것을 죽여야 하는 사명", 즉 사냥 본성을 풀
무질하며 제 안에 은닉한 발톱과 이빨들을 드러낸다. 이것은 새로운 내면의 생성이다. 이 시의 대담성은 자기 안을 쪼개고 그 틈에 숨은 동물성을 드러내면서 '침묵의 시'들을 불러낸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