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호적 등재
540226-1 주민등록 번호다. 내가 태어난 날이라고 아버님이 호적에 올리셨다. 하지만 나의 진짜 생일은 1955년 乙未生(을미생) 음력 2월 27일이다. 아버님이 무엇인가 매우 바쁜 일이 있으셨나보다 라 생각했다. 아니면 다른 걱정거리가 있으셨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당시에는 아이들이 일찍 죽는 일이 허다하였으니, 혹시 호적을 앞당겨 먼저 정리해 두면 죽지 않을거라 생각되어 미리 출생 날짜를 당겨 놓으셨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1949년생 누나가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결혼한 지 5년이나 지나 겨우 얻었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고 아버지는 징집되었다. 아장아장 걷는 두 살배기 딸을 두고 입대하셨으니, 딸 떼어놓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오가는 전쟁터로 가시는 그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누나는 1953년 7월 종전 직전 병으로 죽었다 한다. 전쟁통에 어린 딸 재롱부리는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제대하기 직전 잃었으니 그 안타까움을 어찌 잊을 수 있으시겠나.
그러니 서른이 넘은 늦은 나이에 나를 보았으니 얼마나 반가웠으랴. 하루라도 빨리 호적에 올리고 싶었으리라. 집 나이를 本(본) 나이로 착각도 하셨을 거라. 그래서 엉겁결에 한 살을 더 당기셨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2월 26일은 어떻게 되어 만들어졌는지 의아스럽다. 그렇게 평생을 실제보다 일 년을 먼저 태어났고, 복 많아서(?) 진짜 나이보다 항상 일 년 더 많이 살고 있다.
물론 손해 본 것도 많다. 고등학교 졸업 때 벌써 나이 20살이라 군에 가야 할 영장이 나와 재수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결국 안전한 대학에 가야 했다. 또한 주민등록에 등재된 생년월일을 기준으로 계산하니 실제보다 1년에 6개월을 먼저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막대한 손해를 본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버님께 감사드린다. 아버님은 아마 내가 육십 넘어 큰 병을 얻으리라는 예감이 있으셨던 것 같다. 호적 생일을 앞당김으로 병으로 힘들게 버티게 될 교직 생활의 마지막 시기를 1년 6개월이나 빨리 벗어나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고맙습니다. 아버님. 지금은 건강을 회복해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億(일억 억) 字가 돌림자다. 문중 항렬 돌림은 均자다. 우리 형제들이 태어났을 때까지는 집안 족보가 정리되지 않았었다. 아버님은 나에게 泰億, 동생들은 생각 깊은 큰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哲億, 큰 시기를 타고 나야 한다며 時億, 아무리 어려워도 언제나 일어설 수 있다며 起億, 거기에다가 여동생 막내에게도 億을 붙여 恩億이라고 지으셨다. 여자는 돌림을 쓰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億자는 받침이 ‘ㄱ’이라 억세게 들려 부르기 쉽지 않은데, 아들 넷을 얻었으니 큰 은혜 많이 받았다고 더 큰 은혜를 갚으라고 恩億이라 지었다 하셨다.
내 이름에 대한 자부심은 크다. 지워주신 이름 때문에 평생 돈 걱정을 안 하고 산다고 누구에게나 큰소리 땅땅 친다.
우선 億이 있다. 모자라면 이(李)億이 있다. 그래도 모자라면 泰(클 태)億이 있다. 더 필요하다면 태억의 두배 이 (태. 억)으로 갚겠다. 그래서 언제나 몇억은 품고 있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인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도, 부자는 아니어도, 큰 어려움 없이 지내왔고 또 돈 걱정하지 않으며 살아왔던 것 같다. 앞으로 남은 생도 큰 어려움없이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두가 아버님의 선견지명 덕분이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엄마 기일에 현충원에서 뵙겠습니다.”
첫댓글 지금 고향집에서 글을 읽고 있습니다. 더 더욱 공감이갑니다^^
이름 풀이를 잘 하셨습니다. 걱정 없이 늘 사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