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34) 비운의 세 사람
모든 일은 동탁의 뜻대로 되었다.
황제를 새로 모신 뒤에 동탁 자신은 상국(相國)이 되어, 사실상의 국권은 쥐락펴락 하였다.
즉위식이 끝나자, 홍농왕과 당비(唐妃),그리고 하 태후는 영안궁(永安宮)으로 쫓겨낸 뒤에 경비병으로 하여금 궁문을 굳게 잠그게 하여 외인의 출입을 일체 금하여 버렸다.
애닮게도 어린 소년은 사월에 황제위에 올랐다가 구월에 폐함을 당하여, 영안궁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는 진류왕은 허물 뿐이고 한나라는 완전히 동탁의 손에서 놀아났다.
그는 연호(年號)도 초평 원년(初平 元年)으로 고쳐 버리고 천자 아닌 천자 노릇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겨우 열세 살밖에 안 되는 폐제 홍농왕(廢帝 弘農王)은 어머니 하 태후와 함께 영안궁(永安宮) 깊숙히 갇혀서 밤,낮을 눈물과 한숨으로 보내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천하의 황제요 황태후였던 그들이 오늘은 일개 변방(邊方)의 무변(武弁)에 불과한 동탁의 우격다짐으로 인하여 유폐(幽閉)되고 말았으니, 밤,낮을 눈물과 한숨으로 보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느덧 해가 바뀐 이듬해 봄날 밤, 어린 폐제는 떠오르는 달을 우러러보며 자신의 구슬픈 신세를 한탄하며 한 수의 시를 읊은일이 있었다.
잔디는 푸르건만
봄은 오지 아니하고,
중천에 제비만
쌍쌍이 날고 있네.
한 줄기 푸른 물이
감돌아 흐르는 곳,
구름 짙은 저 숲속에
나의 옛 궁전이 있도다.
언덕 위에 오가는
저 사람들아.
가슴에 맺힌 이 원한을
뉘라서 풀어 줄 이 없더냐?
소년 홍농왕은 가슴에 맺힌 원한을 시로서 솔직하게 읊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시가, 동탁의 명령에 의해 엄격한 감시를 하고 있는 감시병의 귀에 들어갔으니, 감시병은 즉각 그 시를 옮겨 적어서 동탁에게 보고하였다.
"음...."
동탁은 그 시를 읽어 보고, 매우 못마땅한 얼굴을 하며 모사 이유를 불렀다.
"이유! 이 시를 읽어 보아라! 폐제가 지었다는 것인데, 그 내용을 보니 그것들을 살려두었다가는 반드시 후환이 되겠다. 네가 영안궁으로 찾아가서 그것들을 죽여 없애는 것이 좋겠다."
"알겠습니다. 제가 곧 없애 버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유는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사 십여 명을 거느리고 영안궁으로 달려갔다.
때마침 홍농왕과 하 태후는 누각(樓閣)위에서 당비와 함께 나란히 앉아 봄빛을 바라보며 탄식에 잠겨 있다가, 돌연 이유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몸서리 치듯 놀란다.
이유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전하! 봄날이 하도 화창하기로, 동 승상(董 丞相)께서 세 분에게 연수주(延壽酒)를 보내시옵디다. 이 술을 한 잔씩 드시옵소서."
하고 말을 하며 미리 가지고 온 독주를 세 사람에게 한 잔씩 따라 주었다.
그러자 폐제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이, 이것이 독주가 아니냐?"
하 태후도 공포와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지며,
"동탁이 우리에게 연수주를 보낼 리가 없다. 그것이 독주가 아니거든 네가 먼저 마셔 보아라!"
하고 이유를 꾸짖었다.
그러자 이유는 크게 성을 내면서,
"좋다! 술을 마시고 싶지 않거든 이 두 물건을 받아라!"
하고 들고 온 비단 보자기를 끌러 내 보이는데, 그것은 단도 한 자루와 비단 한 폭이었다.
그것은 가슴을 비수로 찔러 죽든지, 목을 매어 죽든지, 맘대로 죽어 달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이제는 죽음을 면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폐제의 당비(唐妃)가 그 처참한 광경을 보다못해,
"첩이 대왕과 태후마마를 대신하여 술을 마시겠사오니, 공은 두 분 모자의 목숨을 보전케 하소서!"
하고 울면서 이유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그러나 이유가 그 소원을 들어 줄 리가 없었다.
"비켜라, 이년아...네가 감히 어느 자리라고 나서느냐! 어서, 선택하지 않고 뭣 하는냐!"
이유는 폭언을 쓰면서 강제로 나왔다.
하 태후가 땅을 치며 한탄한다.
"천하에 어리석은 오래비 하진이 어쩌자고 동탁이라는 도둑놈을 낙양에 끌어들여 가지고 우리 모자를 이꼴로 만든단 말이냐!"
"잠꼬대 같은 넋두리는 그만하고 어서 술이나 마셔라!"
이유가 벼락 같은 소리를 내지른다.
어린 폐제는 미침내 죽음을 면할 길이 없음을 깨닫고 이유에게 말한다.
"이제는 어쩔 수 없으니 황후와 작별의 정이나 나누게 해 다오!"
그리고 비장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아아, 천지는 바뀌고 일월(日月)은 뒤집혔다.
만승에 귀하던 몸이 오늘 신세 웬일인고,
신하에게 핍박받는 오래지 않은 목숨,
대세는 가고 눈물만이 넘치도다.
당비가 그 시를 듣고 목메어 울면서 그 역시 시를 한 수 읊어댄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 또한 꺼지도다.
몸이 제희(帝姬)되어 임 못 뫼시는 이 원한,
생사가 길이 달라 예서 헤어지네.
끝없는 이 내 슬픔을 어찌하리오.
시를 마치자 당비가 폐제를 얼싸안고 울음을 울어 대니 하 태후도 목을 놓아 통곡한다.
"이것들아! 그만 울고 빨리 죽어라!"
이유가 고함을 치자, 하 태후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른다.
"이 역적놈아! 우리를 이렇듯 핍박하고 너희들은 무사할 줄 아느냐! 네놈들도 머지않아 멸문(滅門)의 화를 입을 테니 두고 보아라!"
이유는 그 소리에 화가 동하여, 하 태후를 높은 누각에서 발길로 차서 떨어뜨려 죽이고, 폐제는 강제로 독주를 입에 털어 넣어 죽이고, 당비는 목을 매어 죽여버렸다.
그런 뒤에는 자신의 공을 증명하기 위해 세 사람의 목을 죄다 잘라가지고 의기양양하게 동탁에게로 돌아왔다.
"영안궁에 갔던 일은 어찌 되었느냐?"
때마침 동탁은 수다한 궁녀들을 거느리고 술을 마시고 있다가, 이유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유는 선혈이 뚝뚝 흐르는 세 개의 인두(人頭)를 높이 쳐들어 보였다.
"말씀하신 대로 이렇게 모조리 죽였습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폐제와 당비, 그리고 하 태후의 머리였다.
이 세 사람의 머리는 동탁을 금방이라도 잡아 먹기라도 할 듯이 눈알을 커다랗게 부릅뜨고 있었다.
동탁은 죽은 사람의 그 눈알들을 보자 몸서리를 쳤다.
"보기 싫다! 어서 치워라! "
생전에 원한이 골수에 맺혔기로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원수를 갚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탁은 세 사람의 원한에 사무친 부릅뜬 눈알을 본 다음부터는 웬일인지 까닭 모를 불안이 느껴져서, 그후로부터는 술과 계집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밤마다 궁중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궁녀를 마음대로 범하고, 비위에 거슬리는 자는 가차없이 죽여 가면서, 마치 그 자신이 천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용상(龍床)에서 자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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