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장(石榴杖) / 윤오영
그는 처음부터 나를 유혹했다. 내가 충무로 고물상 앞을 천천히 걷고 있을 때, 먼지를 뒤집어 쓰고 용춤 항아리에 꽂혀 있으면서 유리창으로 내게 손짓을 했다. 그래서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다가, 상점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손을 덥석 잡고 말았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는 지금까지 십오 년을 같이 살아왔다. 그는 잠시도 나와 떨어져 있은 적이 없다. 잘 때도 내 방 구석에 꼭 지켜 서 있다. 그는 필시 남쪽 지방의 출생일 것이다. 그는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입을 열은 적이 없다. 그도 한 때는 붉게 타는 꽃을 피워 사람의 사랑을 받았을 것이요, 그 보석을 간직한 열매로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혹은 그 보석 같은 붉은 알이 하얀 식혜 위에 동동 떠서, 귀한 댁 아가씨 사시 위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너무 강직하고 모양이 우툴두툴해서 괴기하기 때문에 호사자의 손어 꺾이어 단장이 돼 버리고만 것이다. 그런데 누구 손에서 옮겨 어디서 유랑하다가 고물상까지 팔려 왔는지 말이 없으니 알 길이 없다.
그와 그럭저럭 지내는 동안에 그는 완전히 내 의지를 지배하고 말았다. 나는 이제 그의 그림자가 돼 버리고 말았다.
그 후 나는 어느 때나 그와 더불어 산책을 한다. 그는 이제 하나밖에 없는 좋은 친구다. 가끔 나를 끌어낸다.
나의 거취는 어느덧 그에게 맡기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가끔 나를 말꾼들이 잘 모이는 이웃집 사랑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문앞까지 가서는 슬쩍 돌아서 오기도 한다. 나는 그의 변덕에 아무 이의도 없어야 한다. 그가 가다가 주춤 섰을 때는, 먼 산에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가다가 걸음을 가만히 멈추고 무엇을 듣는가 하면, 발밑에서 맑은 물소리에, 이름 모를 꽃송이에 그는 항상 예민했다. 그가 공중에 원을 그리면, 나는 맑은 하늘에 새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가 발길을 가볍게 옮길 때 나는 경쾌했고 그가 무겁게 땅을 밟을 때 나는 침울했다. 그가 내 뒤에 비스듬히 누워서 끌여올 때 나는 솜같이 피로했고 그가 내 무릎에 누워서 떠가는 구름을 읊조릴 때 나는 애상과 추억에 잠기어야 했다.
그가 한 허리를 중심으로 널뛰기를 흉내 낼 때 나는 출근 시간이 십 분밖에 안남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오만한 신사를 만나면 그는 너도 배를 내밀고 버티어야 된다고 내 뒤에 가서 허리를 버티어 준다.
그는 나를 영화관으로 끌고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변덕스럽게도 대합실 의자에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누웠다가 오기도 했다.
가장 그가 분개한 때는 내가 어느 연회에 초청을 받아가서 부득이 그를 현관에서 개 패 같은 패가 달린 오래기로 얽어서 구두와 함께 문간에 맡기고 들어갔을 때의 일일 것이다. 나도 그의 분노한 감정을 느낀 관계인지 노래와 춤과 질펀한 음식과, 오고 가는 화제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술은 받아 놓은 첫잔을 잠깐 입술에 댄 채 그대로 연회를 마치고 말았다. 빨리 나와 그를 찾았다. 그는 신발들 틈에서 곤욕을 당했다.
해방이나 된 듯이 와락 내 앞에서 내달았다.
그는 나를 천병으로 끌고 갔다. 시원한 바람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희미한 밤하늘의 별빛이 약간 슬펐다.
그는 어느 헙수룩한 술집으로 나를 끌었다. 궤짝 같은 걸상 위에 걸터앉아 나는 대폿잔을 들이켜야 했다.
그는 내가 몽롱하게 취한 뒤에야 서울의 밤 거리를 휘저으며 걸어왔다.
그의 울퉁불퉁한 굵은 선은 꽤 험상스러워 보이지만 한 번도 사람을 때려 본 적은 없다. 역시 신사도를 아는 친구다. 그러나 그는 또 젊은 혈기를 보여 주는 때도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언덕에서 소릴치며 눈앞에 잔디를 힘껏 내리치고는 껄껄 웃는 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