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이후 노상에서 본 바로는, 가까운 산은 구련성의 송골산(松鶻山)과 금석산(金石山), 봉황성의 봉황산, 계주(薊州)의 공동산(崆峒山)과 반룡산(盤龍山)인데, 이 8산은 모두 돌산이고, 그 먼 산은 창려현(昌黎縣)의 문필봉(文筆峯), 요동의 천산(千山)이 가장 빼어나고, 서북변 장성(長城) 일대에도 기이한 봉우리가 많았으나 이름을 알 수 없다.
각산(角山)은 산해관 북쪽에 있는데, 기세가 웅혼(雄渾)하고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연접해 있다. 돌아올 때 시험삼아 올라가 보았더니, 바다를 내리누르고 요동 벌판이 또 동쪽으로 트이어 가가 없으니, 또한 하나의 큰 산이었다.
창려현의 문필봉은 뾰족하게 하늘에 접해 있고 그 옆에 또한 기이한 봉우리와 우뚝한 절벽이 많이 있다. 무령현 서남쪽에도 또한 기이하게 솟은 산이 있는데, 행인들은 혹 그 봉우리를 ‘태자봉(太子峯)’이라 일컫고, 또 ‘토이산(兎耳山)’이란 이름으로도 부르니, 그 생김새가 토끼 귀와 같기 때문이다.
십삼산(十三山)은 큰 들판에 우뚝 솟아 있어 사방 근맥(根脈)이 서로 연결됨이 없는데도 어떤 이는 의무려산의 여맥(餘脈)이라 한다. 그 봉우리 수효를 따라 십삼산이라 부르고 석산참(石山站)이라고도 하니, 중국 음[華音]이 와전되었기 때문이다. 또 봉산(蜂山)ㆍ나산(螺山)ㆍ오산(鰲山)ㆍ제자산(梯子山)은 모두 물건 생김새와 서로 같아서 이름 붙여진 것이다. 소흑산(小黑山)은 넓은 들판 가운데의 언덕이다.
명월산(明月山)은 준화현(遵化縣) 서남 10여 리 지점에 있는데 높이는 100길[仞] 남짓하다. 산 위에 돌구멍이 있는데 남북으로 상통되었고, 구멍 어귀는 바라보면 밝은 달처럼 생겼다. 준화현 남쪽에 또 청풍산(淸風山)이 있는데 높이는 300길 남짓하다. 오봉산(五峯山)은 현 동북쪽 25리 지점에 있는데 다섯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으니, 동쪽은 쾌목(快目), 남쪽은 서운(瑞雲), 북쪽은 호암(虎巖), 서쪽은 홍취(紅翠), 중앙은 자개(紫蓋)라 한다. 그 위에 옛날에는 선림사(禪林寺)가 있었다. 《일통지(一統志)》에 ‘준화주에 돌산이 많다.’고 한 것이 참으로 믿을 만하다. 그러나 그 지경을 지나면서 정확히 가리킬 수 없어 여러 개의 산으로 잘못 봄을 면치 못하였다.
진궁산(陳宮山)은 풍윤현(豐潤縣) 북쪽에 있다. 수십 리를 둘러싸 동쪽으로는 환향하(還鄕河)에 임해 있고 서쪽으로는 황토령(黃土嶺)과 연접해 있다. 산 남쪽에 봉우리가 있어 그 빛이 푸르르니 이름이 화산(華山)이다. 마두산(馬頭山)은 풍윤현 동쪽에 있는데, 몇 개 봉우리가 내닫는 듯하고 그중에 최고봉 하나가 말머리처럼 생겼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것이라 한다.
연산(燕山)은 옥전현(玉田縣) 서북쪽 25리 지점에 있으니, 서산으로부터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내려와 수백 리에 퍼져서 해안에 곧바로 닿았다. 돌북[石鼓]이 벼랑[縣崖] 곁에 있는데 지면과는 100길[丈] 남짓 떨어졌고 크기는 수백 아름이나 되는 듯하였다. 그 곁에 돌대들보[石梁]가 있어 북을 꿰고 있고, 동남쪽에 돌사람[石人]이 있어 북채를 잡고 두드리는 듯한 형상이다. 속담에, 돌북이 울면 전쟁이 일어난다고 전해 온다.
송골산ㆍ금석산은 2개의 산인데, 어떤 이는, 송골산 역시 금석산이라 부른다. 중강(中江) 왼편에도 마이(馬耳)라는 산이 있고, 책문 밖에도 상룡산(上龍山)이 있는데 봉우리가 모두 웅장하고 빼어났다. 대개 중강을 지나 두 참(중강과 책문) 사이에서 노숙할 때, 산은 수려하고 시냇물 역시 맑아서 즐거웠는데, 사람들은 혹 평양 강산에 견주기도 하였다.
봉황산은, 멀리서 바라보면 다만 여러 개의 봉우리가 우뚝하게 빼어났을 뿐이더니, 산 아래 와서 보니, 100개, 1000개 바위 봉우리가 마치 창을 벌여 세우고 병풍을 둘러친 듯, 층층 겹겹 기이하고 험한 것은 도봉산(道峯山)ㆍ수락산(水落山)과 흡사하나 기세는 못 미쳤다. 안시성(
安市城)은 봉황산의 동남 기슭에 있는데, 봉우리가 철옹산성처럼 둘러싸고 있으니, 그 천연 요새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까닭이 있다.
회령령(會寧嶺)이 가장 높고 험악하며 상하가 거의 20리나 된다. 들어갈 때에는 얼음과 눈이 쌓인 차가운 길이라 그 험함을 보지 못하였더니, 돌아올 때에는 땅이 풀리고 산길이 높고 험해서 여행이 매우 고생스러웠는데, 어떤 이는 우리나라의 조령(鳥嶺) 및 마천령(摩天嶺)에 견주었다. 청석령(靑石嶺)이 그다음이며, 청석령의 서쪽 소석령(小石嶺)이 또 그다음이다. 그러나 청석령은 우뚝하게 높고 험준한 것이 도리어 회령령만 못하지 않다.
요동을 지나기 전에는 종일토록 두 산 사이를 가서, 비록 들판 길 개활지일지라도 먼 산이 비쳐 끊어지지 않았으며, 회령령ㆍ청석령에 와서 극히 험하였다. 큰 들판이 펼쳐질라치면 하늘이 험준한 산을 설치하여 쌓아 놓곤 했다.
낭자산(狼子山)은 하나의 작은 봉우리에 불과하나, 그 넓고 평평하며 온자함이 제대로 한 형국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간이(簡易) 최립(崔岦)이 《낭자산기(狼子山記)》를 지어 그 미려함을 성대히 칭송하였던 것이다. 낭자산 서쪽에 당 태종(唐太宗)이 요동을 지날 때에 주필(駐驆)한 마제산(馬蹄山)이 있으나, 역시 구릉(丘陵)으로서 큰 것이었다. 이 밖에 연로에 고개로 이름 붙여진 것이 있기는 하나 대개 실정과는 맞지 않았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요(堯) 임금이 봉한 12산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갈라져 내달아 큰 사막을 가로질러 막았다. 서북으로 7, 8백 리를 가도 산만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의무려산 밖은 옛 흉노(凶奴)의 땅인데, 명 나라에서는 달단(韃靼 타타르)이라 하였고 지금은 몽고라고 일컫고 있으니, 이것이 하늘이 이적과 중화를 한계지어 준 것이다.
무종산(無終山)은 옥전현(玉田縣) 동북 30리 지점에 있으니, 곧 옛날 무종국(無終國)이다. 한(漢) 나라
옹백(雍伯)은 천성이 효성스러웠는데, 부모가 죽자 무종산에 장사 지냈고, 연 소왕(燕昭王)의 무덤도 이 산에 있다고 한다.
반룡산(盤龍山)은 곧 반산(盤山)인데, 계주성(薊州城) 25리 지점에 있다. 산 북쪽에 여러 개의 봉우리가 반룡에 와서 끊어졌는데 상ㆍ중ㆍ하 3반(盤)이라 일컫는다. 그 정수리에 큰 돌이 있는데 흔들면 문득 움직인다. 산 위에는 육룡담(六龍潭)이 있는데 비를 빌면 영검이 많고, 아래에는 조정(潮井) 및 용발천(龍鉢泉)이 있다. 강희(康煕 청 성조)ㆍ건륭(乾隆 청 고종) 두 능이 산 아래에 있고 행궁(行宮)도 있다.
취병산(翠屛山)은 계주에 있고, 우란산(牛欄山)은 순의현(順義縣)에 있는데, 모두 도중에서 지난 곳이다.
서산은 황성 서쪽 40리 지점에 있으니 곧 태항산(太行山)의 따로 떨어져 있는 언덕으로서 만수산(萬壽山)이라고도 한다. 본디부터 명산으로 일컬어졌으나 누대(樓臺)의 승경을 꾸미지 않으면 다만 하나의 평범한 산이 되고 말뿐이다.
옥천산(玉泉山)은 그 동쪽에 있고 산 아래는 곧 명원산(明圓山)인데, 두 산은 모두 마안산(馬鞍山)이 조종이다. 마안산은 곧 거용산(居庸山)의 지맥(支脈)이다. 그 웅대한 형세로 황도(皇都)의 오른쪽을 누르고 있어 북경에서 가장 유명한 명산이다.
경산(景山)은 금원(禁苑)의 북쪽에 있는데 만세산(萬歲山)이라고도 하니 곧 명 나라 때의 매산(媒山)이다. 지금 사람들은 모두 매산을 휘언(諱言)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일명 토아산(兎兒山)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아니라고 한다. 토아산 역시 금중(禁中)의 승경이나, 자세하지 못하다.
압록강 이후 건넌 물 중에 혹 마소 발자국에 괸 물 정도에 불과한 것도 있었으나 모두 하수라 이름 붙여, 명실(名實)이 서로 맞지 않은 것이 많았다.
요동의 태자하(太子河), 심양의 혼하(渾河)ㆍ주류하(周流河), 금주의 대릉하(大凌河), 영평부의 청룡하(靑龍河), 풍윤현의 환향하(還鄕河), 계주의 어양하(漁陽河), 삼하현의 호타하(滹沱河), 통주의 백하(白河) 등 13개의 하수에는 모두 배와 다리가 있다. 그런데 백하ㆍ주류하가 가장 커서 우리나라의 임진강(臨津江)만 하고 그 나머지 8개의 하수는 전주(全州)의 저탄(猪灘)만 할 따름이다.
삼차하(三叉河)는 봉성 6리 지점에 있다. 옹북하(瓮北河)의 수원은 분수령(分水嶺)에서 나오며, 일명 삼가하(三家河)라 한다.
팔도하(八渡河)는 황가장(黃家莊) 5리 지점에 있으니 열명 금계하(金鷄河)라 하며, 수원은 분수령에서 나온다. 한 하수인데도 여덟 번 건너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것이다. 그 하류에는 또 삼강(三江)의 지파가 있다.
첨수하(甜水河)는 회령령 17리 지점에 있다. 요동 들판의 물맛은 흔히 짜지만, 이 하수만은 달고 차가우므로 이름 붙여진 것이다.
삼류하(三流河)는 낭자산(狼子山) 30리 지점에 있고, 동북으로 흘러 태자하에 모인다. 혼하는 심양 1리 지점에 있는데 일명 야리강(耶里江)이라 하고, 수원은 장백산에서 나오며, 서남으로 흘러 태자하에 모여 요하(遼河)로 들어간다.
주류하(周流河)는 고가자(孤家子) 13리 지점에 있는데 거류하(巨流河)라고도 한다. 수원은 북지(北地)에서 나오고 장성(長城)으로 들어가서 남쪽으로 흘러 태자하ㆍ혼하와 모여 바다로 들어간다. 세 하수가 서로 합류하기 때문에 혹 삼차하라고도 하고 또 삼분관(三坌關)이라고도 하니, 곧 옛날의 요수(遼水)이다.
태자하(太子河)는 목창포(木廠鋪) 5리 지점에 있다. 《사기(史記)》에, ‘연 태자 단(燕太子丹)이 연수(衍水)에 달아나 죽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양장하(羊腸河)는 소흑산 5리 지점에 있다. 수원이 변새(邊塞) 밖 백토창(白土廠)에서 나와 이곳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서 사산(蛇山)의 물이 되어 바다로 들어가는데,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하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것이다.
노하(潞河)는 광녕(廣寧) 동쪽에 있고, 주자하(珠子河)는 또 그 동북쪽에 있는데, 하류가 모두 요하(遼河)로 들어간다.
대릉하(大凌河)는 석산참(石山站) 25리에 있다. 하수가 심히 광대하고 바다와는 80리 떨어졌으니, 즉 명 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전사한 곳이다. 소릉하는 쌍양참(雙陽站) 10여 리 지점에 있고, 십리하(十里河)는 또 행산보(杏山堡) 5리 지점에 있는데 모두 다리가 있다.
주사하(朱沙河)는 탑산소(塔山所) 5리 지점에 있다. 연대하(煙臺河)는 연산역(連山驛) 6리에 있으니 일명 오리하(五里河)이다. 장춘하(長春河)는 또 연대하 5리에 있고, 또 곡척하(曲尺河)ㆍ육도하(六渡河)ㆍ구어하(口魚河)ㆍ양수하(亮水河)ㆍ두봉하(頭封河)ㆍ양수호(兩水湖)는 모두 자그마한 강물이다.
심하(深河)는 산해관 1리에 있으니, 즉 요동백(遼東伯)
김응하(金應河)가 크게 무찌른 곳이다. 탕하언(湯河堰)ㆍ석자하(石子河)ㆍ양하(羊河)ㆍ음마하(飮馬河)ㆍ백사하(白沙河)ㆍ청룡하(靑龍河)는 모두 산해관 지역이다. 노정 배참기(路程排站記)에 실려 있다.
난하(灤河)는 청룡하 5리에 있으니 즉 옛날 유수(濡水)다. 수원은 선화부(宣化府) 독석구하(獨石口河)에서 나와 구불구불 1000리를 흘러 변새에 들고, 요정(樂亭)을 거쳐 바다로 들어가는데, 개평(開平)에서부터 현의 경계로 흘러 지나간다. 압자하(鴨子河)는 또 난하 4리에 있고, 소령하(小鈴河)는 우란산(牛欄山) 서쪽 4리에 있는데 혹 송령하(松嶺河)라고도 한다.
환향하(還鄕河)는 풍윤현 10여 리에 있으니 하수가 꽤 널찍하다. 수원은 애아구(崖兒口)에서 나와 풍윤ㆍ옥전현을 지나고 운하(運河)를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모든 물은 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 하수만은 서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환향하라 이른다. 사자하(沙子河)는 고려보(高麗堡) 5리에 있다.
사류하(沙流河)는 풍윤현에서 40리 떨어졌다. 수원은 현 서북 50리 지점에 있는 당곡산(黨谷山) 아래에서 나오는데, 양산구(兩山口)를 지나고 또 서남으로 흘러 환향하(還鄕河)에 모인다. 어양하(漁陽河)는 취병산(翠屛山) 5리에 있다.
호타하(滹沱河)는 단가령(段家嶺) 18리에 있는데 일명 착하교(錯河橋)라 한다. 하수는 어양하에 비해 광대한 듯하다. 어떤 이는 한 광무제(漢光武帝)가 건너간 곳이라고 하나 또한 잘못이다.
징해루(澄海樓)는 앞으로 바다에 임했으니 이름이 발해(渤海)다. 상하 수백여 리를 왼쪽으로 끼고 지나는데, 가까이 혹은 멀리 이따금 눈에 들어왔다. 가없이 잇대어서, 우리나라 해서(海西)와 서로 연접하였는데 4, 5백 리에 불과하다. 옛날 뱃길로 중국에 조회할 적에는 반드시 여기서 유숙하였다. 나는 밤에 홍화점(紅花店)에서 유숙하였는데, 파도가 용솟음쳐서 마치 철기(鐵騎)가 차고 짓밟는 듯이 들려오므로 편히 자지 못하였다.
백하(白河)는 수원이 변새(邊塞) 밖에서 나와, 선화부에서 순천부 경내로 들어오고, 천진(天津)에 와서 위하(衛河)와 합류한다. 그리고 밀운현(密雲縣)에서 우란산에 이르러 조하(潮河)와 합류하고, 통주(通州)에 이르러 직고(直沽)로 들어간다. 일명 백수하(白遂河)이다. 조선(漕船)이 모이는 곳이므로 또한 북운하(北運河)라고 한다. 또 통주강(通州江)이라고도 하며 일명 노하(潞河)라고도 한다. 대개 유(楡)ㆍ하(河)ㆍ혼(渾) 3개 물이 여기 와서 합류한다. 또 이름을 운하(運河)라 하니, 원(元) 나라 곽수경(郭守敬)이 파서 동남의 조로(漕路)를 개통하였던 것이다.
대통하(大通河)는 옛 이름이 통혜하(通惠河)이다. 옥하에서 나와 황성의 동남을 돌아 대통교(大通橋)를 지나 백하(白河)로 흘러 들어간다.
옥하(玉河)는 수원이 옥천산(玉泉山)에서 흘러나와 대내(大內)를 지나 도성 동남으로 나와 대통하로 들어간다. 원(元) 나라 마조상(馬祖常)의 시에,
어구의 새벽 봄물 잔잔히 흘러 / 御溝春水曉潺湲.
곧을 젠 긴 무지개, 굽을 젠 고리 같아 / 直似長虹曲似環.
궁성에 흘러들어 겨우 한 자인데 / 流入宮城纔一尺.
천상과 인간 세계 문득 나뉘네 / 便分天上與人間.
하였다. 또한 어하(御河)라고도 하고, 원 나라 때에는 금수하(金水河)라고 했다.
백하, 통혜하는 그 깊이가 한 길[尋丈]도 못 된다. 그러나 곡식을 만 섬이나 실은 배는 물을 두어 길이나 삼키고 가는데도 모래에 좌초되거나 막히는 걱정이 없는 것은 수갑(水閘)을 이용한 효험이다. 그 제도는 다음과 같다. 돌둑을 양쪽 언덕에 쌓고 하수 중앙에 문을 만들되, 그 넓이는 배 두 척이 충분히 드나들 수 있게 한다. 돌을 깎아 문지방을 만들어 하수 바닥에 깔고, 양쪽 둑에 돌기둥[石柱]을 세워 아래로 문지방까지 닿게 한 다음, 큰 나무로써 갑문을 만들어 문지방에 들여 넣되, 폭이 양쪽 돌기둥에서 적당하게 하여 틈이 없도록 이어지게 한다. 그리고 두 고리를 갑문 머리에 달고 도르래[轆轤]를 둑 위에 설치하고서 여닫게 한다. 비록 작은 물은 새어나지만 혼혼(渾渾)한 물은 가로막을 수 있어, 순식간에 4, 5길의 해자를 이루어 배가 지체 없이 다닐 수 있다. 그것은 바람이나 파도 때문에 기울거나 꺾이지 않고 가물거나 장마 때문에 불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으며, 앞 수갑이 새자마자 뒷 수갑이 뒤미쳐 괴어, 한 웅큼의 물로 1000리나 갈 수 있다. 금중(禁中)의 태액지(太液池), 서산의 곤명호(昆明湖)와 옥하성(玉河城)의 해자[濠]의 물은 그 근원이 잔이나 띄울 정도의 작은 물에 불과하지만, 모두 되돌게 하여 큰 못이 되어 배가 마음대로 다닐 수 있으니, 참으로 훌륭한 공인(工人)이 이익을 널리 미치게 했다고 하겠다.
효람(曉嵐) 기균(紀昀)이 일찍이 하수의 근원을 찾아가 보고 《하원기(河源記)》를 지어 바쳤는데, 그 기(記)에는 대략,
“곤륜산(崑崙山)은 즉 지금 화전(和闐)의 남산인데 하수가 나온다. 원 세조(元世祖)가 도십(都什)을 보내어 하수 근원을 찾아보게 하였더니, 겨우 성수해(星宿海)에 이르고 말았었는데, 지금은 발원(發源)한 곳에 곧장 이르러 그곳을 직접 보았다.”
하였다.
장건(張騫)이 이른 곳은 서역(西域) 36개국으로 무릇 연무(延袤)가 2만 리인데, 지금 8개 군현으로 합병하여 신강(新彊)이라 부르니, 지역이 넓기로는 전고에 없던 바다. 서쪽으로는 돌궐(突厥)을 지나고 서남쪽으로는 토번(吐蕃) 바깥 20리 신독(身毒)을 나가니, 곧 인도(印度)이다. 그리고 현도(懸度 국명)는 피산(皮山) 팔첩도(八牒圖)에 있고, 감숙(甘肅)은 오래도록 내지(內地)가 되었으며, 약수(弱水)ㆍ흑수(黑水)도 모두 감숙 내지에 있다.
태액지(太液池) 한 가닥이 대궐 뒤 서북으로부터 들어가, 내궁성(內宮城)을 뚫고 지나서 모든 궁전을 감싸고 구불구불 돌아 흐르고, 무연각(武淵閣)을 지나 협화문(協和門) 곁을 따라 구불구불 태화문(太和門)과 오문(午門) 사이를 흘러나오며, 희화문(煕和門) 곁을 따라 북쪽으로 활처럼 굽어 흘러 문화각(文華閣) 뒤를 나오고, 전성문(前星門)을 지나서야 남쪽으로 흐르니, 대개 태화전(太和殿)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 만곡형(彎曲形 활처럼 굽은 모양)이기 때문이다. 물의 너비는 모두 2칸 남짓하고, 양쪽 옆에는 모두 돌난간을 설치했는데 다리가 있다. 궁성 밖은 모두 성을 의지하여 낭각(廊閣)을 설치하고, 낭각 밖은 호수(濠水)가 또 둘러 있으니, 이런 것은 모두 명 나라의 옛 제도이다.
노구하(盧溝河)는 황성 서쪽 40리에 있다. 손승택(孫承澤)의 《춘명몽여록(春明夢餘錄)》을 상고하면, ‘하수는 태원(太原) 천지(天池)에서 나와 숨어 흘러 삭주(朔州) 마읍(馬邑)에 이르고, 뇌산(雷山) 남쪽으로부터 혼천(渾泉)이 나와 상건하(桑乾河)가 된다. 그리고 안문(鴈門), 응주(應州), 운중(雲中)의 여러 물이 모두 모여 통주에 이른다. 고려장 및 백하(白河), 담하(潭河), 패하(灞河) 등의 물은 곧 그 물줄기이다.’고 하였다.
북경 성내의 모든 번화한 거리든 외진 골목이든 길 좌우에 모두 은구(隱溝 땅속에 묻은 수채)를 만들어, 온 성안의 낙숫물과 길바닥의 고인 물이 죄다 그리로 흘러들어 옥하에 모여 성 밖으로 나가게 하고, 또 성내에서 양ㆍ돼지ㆍ거위ㆍ오리 등을 기르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성안에 똥이나 오물이 없고, 수렁이나 개천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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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팔경(皇都八景)1. 경도의 봄 아지랑이[瓊島春陰] : 승광전(承光殿) 북쪽에 있는 외딴 섬인데 북해를 굽어보고 있다. 요(遼)의 경화도(瓊華島)라 전해 온다. 섬 위에 기이한 돌이 많은데, 송(宋)의 간악(艮嶽)을 금(金) 나라 사람이 여기에 파다 옮겼다 한다. 지금은 영안사(永安寺)를 지어 편전(便殿)으로 한다.
1. 태액지의 가을바람[太液秋風] : 서원(西垣) 중앙에 있다. 의장교(宜長橋)에 두 화표(華表)를 벌여 세웠으니, 금오(金鰲)ㆍ옥동(玉蝀)이다. 북쪽은 북해(北海), 남쪽은 영대(瀛臺)이다.
1. 옥천의 뻗친 무지개[玉泉垂虹] : 혹은 작돌(趵突 샘의 이름)ㆍ서산의 샘물이다 땅 밑으로 숨어 흐르다가, 옥천(玉泉)에 이르러 산세의 중앙이 확 트이어 샘물이 용솟음쳐 나오는데, 눈이 용솟음치듯 파도가 뒤집듯 함은 제남(濟南)의 작돌(趵突)도 이보다 더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지개가 뻗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한다.
1. 서산의 갠 눈[西山晴雪] : 봉우리가 층층 첩첩함은 다 기록할 수 없다. 경성의 우편에 위치해 있다. 서산은 대개 높고 춥기 때문에 눈이 쉬 쌓이고 바라보면 옥을 깎아 세운 듯하다. 향산(香山)에 정의원(靜宜園)을 짓고는 푯말을 세워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
1. 계문의 연수[薊門煙樹] : 도성 덕승문(德勝門) 밖 토성관(土城關)에 있으니, 이것이 계성(薊城)의 서북에 있는 계구(薊邱)의 유지(遺趾)이다. 곁에 수목이 무성하게 우거져 푸르르다. 처음에는 비우(飛雨)라 이름 하였는데, 영락(永樂) 연간에 관각(館閣)의 제공이 서로 모여 창화(唱和)할 적에 비우를 연수(煙樹)로 고쳤다.
1. 노구 다리 가의 새벽달[蘆溝曉月] : 즉 상건하(桑乾河)인데 물이 검기 때문에 노(盧)라 한다. 다리는 금(金) 나라 명창(明昌) 초에 세웠는데 길이가 200보 남짓하고, 육로로 해서 연경에 들어가는 자는 이 다리를 거쳐 간다.
1. 거용관의 푸르름[居庸疊翠] :
9새(塞)의 하나다. 《여람(呂覽)》ㆍ《회남자(淮南子)》에 보이는데, 그 형적이 최고이다. 역도원(酈道元 후위(後魏) 사람)이 이르기를,
“높은 담 험준한 벽에 산수(山岫 산 구멍)가 층층나고 깊으며, 길은 겨우 수레가 다닐 만하다.”
했다.
1. 금대의 저녁놀[金臺夕照] :
지승(志乘)에 보이는 것이 셋이니, 하나는 역주(易州)에 있고, 둘은 도성에 있다. 《여지(輿誌)》 명승지(名勝志)에, ‘부(府)의 동남쪽 16리에 있고 또 소금대(小金臺)가 있는데 서로의 거리가 1리이다.’ 하였다. 지금 조양문(朝陽門) 밖 동남쪽에 토부(土阜)가 우뚝히 솟아 있는데 호사자들은 곧 이것을 사실로 삼는다. 전래한 고적이 대개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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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성과 옹성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중국당국은 원래 이 곳은 한나라가 먼저 쌓았다고 주장한다. 내가보기에도 한나라가 먼저 쌓았을 것 같다. 그러나 호태왕때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서진하면서 이 성을 점령했을 것이고 점령하자마자 치성과 옹성을 수축한 것으로 보인다.
치성이 견고하게 남아있는 전형적인 고구려 토성임을 알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치성이 원래 있던 성벽과 같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수 있다. 바로 색깔이 약간 차이나기 때문이다. 원래 한나라가 쌓은후에 고구려가 점령하면서 치성을 보강한 것이다. 지금 한반도에 남아있는 고구려성유적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백제성인데 고구려가 점령하면서 치성을 보강한 것이다.
광개토호태왕비문에 토욕혼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당시에 이곳도 같이 정복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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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쇄양 기본정보 ]
상 품 명: 쇄양
상품성분 : 자연산 쇄양 100%
용 량: 1봉지 500g X 2봉지 = 1kg
판매단위 : 2봉지 1kg
섭 취 량: 1kg 40~60일분
원 산 지: 중국 내몽골 ,감숙성 ,신강 등 지역
주효능효과 : 쇄양(鎖陽)은 육종용의 한 종류인데, 효능은 같으며 쇄양의 약효는 육종용보다 백배나 세다고 한다.음위증, 위궤양, 백대하, 2도 자궁하수, 위통, 위산과다, 보신장양(補腎壯陽), 강요슬(强腰膝), 윤장(潤腸), 양위(陽萎), 활정(滑精), 요퇴산연(腰腿酸軟), 장조변비(腸燥便秘), 혈뇨, 허리와 무릎이 저리고 아픈데, 유정, 신을 보하고 장을 촉촉하게 하는데 특효가 있다.
사용방법 :
1. 차로 마시는 법- 3일분 쇄양을 70~100g 정도를 물에 약 1시간정도 담군 후 약한 불에 20분 정도 달이고 푹 우려서 용기에 담아 냉장보관하고 수시로 따끈하게 데워서 마신다.또는 매일 20~30g 정도를 20분 정도 달이여 수시로 마신다.
2. 술로 마시는 법- 일반적으로 쇄양 500g과 소주 1.8리터 정도의 비율로 담구는데,적당히 술을 더 추가할수 있다 .약 보름 정도 지나면 알콜성분과 육종용의 깊은 약효가 어우러져 은은한 향이 우러나며 명품 쇄양술이 된다. 아침 저녁으로 한두잔 마신다.
3. 환으로 드시는 법- 쇄양을 가루내어 꿀이나 찹쌀가루로 환을 짓는다.1일 2~3회,1회당 20g--30g을 섭취한다. 많이 드셔도 부작용이 없고 섭취량 만큼 효과 좋을수 있고 개인에 따라 섭취량은 조절 가능하다. 장기간 복용해도 부작용이 없다.특히 쇄양과 육종용은 천연 정력제로서 찰딱궁합이여서 함께 쓰면 효과을 극대화 할수 있다 .
주의사항 - 차나 술을 만들 때 구기자, 대추 등 한약재를 조금씩 넣거나,벌꿀을 약간 가미하면 마시기 쉽고 맛도 좋다.
보관방법 : 직사광선을 피해 서늘한 곳에 건냉보관한다.
제조 및 판매원 : 백두넷 성산약초
[ 쇄양 상세설명 ]
쇄양은 건조한 모래땅 지대에서 자라고 대부분 백자(白刺: 남가새과 식물 Nitraria sibirica Pall)의 뿌리에서 기생한다.
쇄양은 한국에 없다.중국의 신강(新疆), 감숙(甘肅), 청해(靑海), 내몽고(內蒙古), 영하(寧夏)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채취 및 제법]
봄과 가을에 채취하는데 봄에 채취한 것이 더 좋다. 파내어 꽃차례를 버리고 모래땅에 절반 정도 파묻고 햇볕에 말린다. 일부 지역에서는 신선할 때에 얇게 썰어 햇볕에 말린다.흙이나 이물질을 버리고 씻어 속에 물이 들어가게 하고 썰어 햇볕에 말린다.
1, <본초비요>: "수(酥)를 발라 굽는다."
2, <본초술구원>: "굳고 굵은 것을 7번 소주에 담가서 7번 약한 불에 쬐어 말린다."
[성분]
anthocyanin, triterpenoid saponin, tannin을 함유한다.
[성미]
맛은 달고 성질은 따뜻하다.
1, <본초연의보유>: "맛은 달다."
2, <본초강목>: "맛은 달며 성질은 따뜻하고 독이 없다."
3, <본초구신>: "맛은 달고 짜며 성질은 따뜻하다."
4, <영하주초약수책>: "맛은 달고 떫으며 성질은 따뜻하다."
[귀경]
간(肝), 신경(腎經)에 작용한다.
1, <뇌공포제약성해>: "신경(腎經)에 들어간다."
2, <옥추약해>: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에 들어간다."
3, <본초구진>: "신(腎), 대장경(大腸經)에 들어간다."
[약효와 주치]
신(腎)을 보하고 장(腸)을 촉촉하게 하는 효능이 있다.위, 혈뇨, 혈고(血枯)에 의한 변비, 요슬위약(腰膝痿弱)을 치료한다.
1, <본초연의보유>: "음기(陰氣)를 보양한다. 허(虛)로 인한 대변 조결(燥結)을 치료한다."
2, <본초강목>: "윤조양근(潤燥養筋)하며 위약(痿弱)을 치료한다."
3, <본초원시>: "음혈허화(陰血虛火)를 보양하며 성기능을 강하게 하고 정(精)을 수렴하며 음정(陰精)을 돋우고 수(髓: 골수)를 보익한다."
4, <내몽고중초약>: "음위, 유정, 요퇴산연(腰腿酸軟), 신경 쇠약, 노년 변비를 치료한다."
[용법과 용량]
내복: 6~12g을 물로 달이거나 환을 짓거나 가루내어 졸여서 약엿으로 하여 복용한다.
[배합과 금기]
1, <본초종신>: "설사, 발기는 쉽게 하지만 정(精)이 고(固)하지 않는 사람은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
2, <득배본초>: "대변이 활(滑)하며 정(精)이 고(固)하지 않는 사람, 화기(火氣)가 성(盛)하여 변비가 있는 사람, 쉽게 발기하는 사람, 심허기창(心虛氣脹)한 사람은 모두 금해야 한다."쇄양에 대해서 중국에서 펴낸 <중국본초도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쇄양(鎖陽)]
기원: 쇄양과(鎖陽科: Cynomoriaceae)식물인 쇄양(鎖陽: Cynomorium songaricum Rupr.)의 육질(肉質) 지상(地上) 부분(部分)이다.
형태: 다년생의 육질이며 기생(寄生)하는 초본으로 높이는 15∼100cm이다. 줄기는 원주상(圓柱狀)으로 어두운 홍자색(紅紫色)이며 기부(基部)는 팽대되어 있다. 잎은 작고 인편(麟片)모양이며 흩어져서 난다. 수상화서(穗狀花序)는 정생(頂生)하고 막대기 모양이며, 어두운 자색(紫色)의 작은 꽃이 조밀하게 나고, 인편상(麟片狀)의 포편(苞片)이 덮어 씌워져 있으며, 수꽃의 꽃잎은 1∼6개로 선상(線狀)이고 길이는 3∼5mm이며, 수술은 1개이고, 암꽃의 꽃잎은 막대기 모양이다. 열매는 견과(堅果)로 구형(球形)이고 매우 작다.
분포: 건조한 밭과 소금을 함유한 모래 지역에서 난다.중국의 내몽고(內蒙古), 영하(寧夏), 신강(新疆), 감숙(甘肅), 청해(靑海)에 분포한다.
채취 및 제법: 봄에 채취한 후 화서(花序)를 제거하고 햇볕에 말리거나 절단하여 햇볕에 말린다.
성분: 줄기는 anthocyanin, triterpenoid saponins, tannin, proline.
기미: 맛은 달고 성질은 따뜻하다.
효능: 보신장양(補腎壯陽), 강요슬(强腰膝), 윤장(潤腸).
주치: 양위(陽萎), 활정(滑精), 요퇴산연(腰腿酸軟), 장
조변비(腸燥便秘).
용량: 하루 4.5∼15g을 물로 달여서 먹는다.참고문헌: 회편(滙編), 하권 633면.]
쇄양의 전설에 대해서 이풍원씨가 쓴 <이야기 본초강목>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쟁과 남편]
- 쇄양(鎖陽)
중국의 변방 몽고 지방에 쇄양(鎖陽)이라는 약초가 있다.
이 약초는 말에서 떨어진 정액과 땅의 정기를 받아서 생긴다고 생각하였다.몽고 지방에서 말은 중요한 생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중국 변방에는 항상 전쟁이 끊이지 않아 남편들이 전쟁터로 나가거나 장사를 하러 멀리 말을 타고 나갔다. 집에 홀로 남은 부인들은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봄, 가을에 자라는 쇄양을 움켜지고 밤을 지새운다고 한다.
자물쇠 같은 단단한 양물(陽物)과 비슷하다고 해서 쇄양(鎖陽)이라고 불리는 이 약초는 모양과 크기가 꼭 남자의 성기를 닮았다.쇄양(鎖陽)은 성 기능이 약한 양위증, 조루증, 유정(遺精) 등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성욕을 높여주고, 정수를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특히 노인의 허리가 아프거나 시린 데 효과가 있고, 변비에도 좋다. 또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해준다. 면역 기능을 높여 주며 불임증에도 유효하다.
쇄양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아래와 같다.
1, 위(痿) 주초(酒炒)한 황백 300g, 술고 구운 구판(龜板) 150g, 주초(酒炒)한 지모(知母) 75g, 숙지황(熟地黃), 진피(陳皮), 백작약(白芍藥) 각 75g, 쇄양 56g, 구운 호골(虎骨) 37.5g, 건강(乾薑) 19g을 모두 가루내어 술로 개어 환을 짓거나 죽으로 개어 환을 짓는다. [단계심법(丹溪心法), 호잠환(虎潛丸)]
2, 양약정허(陽弱精虛),음쇠혈갈(陰衰血竭), 대장조학(大腸燥涸 ), 변비불운(便秘不運)쇄양 1.8kg을 맑은 물 5말로 달여 농즙을 두 번 취하여 합해서 질그릇에 담고 졸여 고(膏)로 한다. 여기에 연밀(煉蜜) 300g을 넣고 도자기 병에 넣어서 저장한다. 1일 3회씩 아침, 낮, 저녁 식전에 10여 숟가락씩 더운 술에 풀어서 복용한다. [본초절요(本草切要)]
3, 신허유정(腎虛遺精),음위증(陰痿症)쇄양, 용골(龍骨), 종용(蓯蓉), 상표소(桑螵蛸), 복령(茯苓) 각 같은 양을 갈아 정제한 벌꿀로 개어서 환제를 만들어 1회 11g씩 아침 저녁에 한 번 복용한다. [영하중초약수책(寧夏中草藥手冊)]
4, 음위증(陰痿症), 조설(早泄) 쇄양 19g, 당삼(黨蔘), 산약(山藥) 각 15g, 복분자(覆盆子) 11g을 달여 복용한다. [합감녕청중초약선(陜甘寧靑中草藥選)]
5, 노년기의 기(氣)가 약하고 음허(陰虛)하며 대변 조결(燥結) 쇄양, 상심자(桑椹子: 오디) 각 19g을 물로 달여 농즙을 취하여 백봉밀(白蜂蜜) 37.5g을 가하여 두 번으로 나누어 복용한다. [영하중초약수책(寧夏中草藥手冊)]
6, 비뇨기계의 감염에 의한 혈뇨 쇄양, 인동덩굴 각 19g, 띠뿌리 37.5g을 물로 달여서 복용한다. [영하중초약수책(寧夏中草藥手冊)]
7, 위궤양 쇄양, 주아료(珠芽蓼) 각 11g을 물로 달여서 복용한다. [합감녕청중초약선(陜甘寧靑中草藥選)]
8, 소화불량 쇄양 19g을 물로 달여서 복용한다. [합감녕청중초약선(陜甘寧靑中草藥選)]
9, 백대하 쇄양 19g, 사조수피(沙棗樹皮) 11g을 물로 달여서 복용한다. [합감녕청중초약선(陜甘寧靑中草藥選)]
10, 2도 자궁 하수 쇄양 19g, 목통(木通) 11g, 차전자(車前子) 11g, 감초(甘草) 11g, 오미자(五味子) 11g, 대추 3개를 물로 달여서 복용한다. [중국사막지구약용식물(中國沙漠地區藥用植物)]
11, 위통, 위산과다 쇄양 150g, 센 불에 태운 한수석(寒水石) 188g, 홍염(紅鹽) 3.75g, 용담초(龍膽草) 37.5g, 빙당(氷糖) 375g을 곱게 가루내어 1회 11g씩 복용한다. [중국사막지구약용식물(中國沙漠地區藥用植物)]
12, 심장병 쇄양을 겨울에 채취하여 돼지기름 혹은 버터로 튀겨서 보통 차에 넣어 복용한다. 20일을 1치료 기간으로 한다. [중국사막지구약용식물(中國沙漠地區藥用植物)]
쇄양의 효능에 대해서 중국의 철경록(輟耕錄)에서는 "쇄양은 발아함이 죽순과 같으며 위가 풍부하고 아래는 풍부하지 않다. 인갑(鱗甲)이 빗살처럼 빼곡하고 근맥이 연결되어 있다. 그 고장 사람들은 파내어 씻고 껍질을 버리고 얇게 썰어 말려서 약재로 한다. 효력은 종용(蓯蓉)의 100배이다."라고 기록한다.
비록 우리나라에는 자라고 있지 않지만, 쇄양은 실로 그 효능에 있어서 실로 대단한 기생식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비의 약초 쇄양 鎖陽
쇄양은 유일하게 중국의 내 몽고 지방에서 자생한다 .
쇄양은 말에서 떨어진 정액과 땅의 정기를 받아서 생긴다고 한다.
옛날부터 중국 남편들이 전쟁터로 나가거나 장사를 하러 멀리 말을 타고 나갔다 .
그러면 홀로 남은 부인들은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봄, 가을에 자라는 쇄양을 움켜지고 밤을 지새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
쇠사슬 쇄( 鎖 )같이 양 (陽)기가 단단해서 쇄양(鎖陽)이라 불리는 약초 ,
자물쇠 같은 단단한 양물(陽物)과 비슷하다고 해서 쇄양(鎖陽)이라고 불리는 이 약 초의 모양과 크기가 꼭 남자의 성기를 닮았다.
쇄양(鎖陽)은 성 기능이 약한 양위증, 조루증, 유정(遺精) 등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성욕을 높여주고, 정수를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첫댓글 발전을 하신 것 같습니다. 고구려는 안시성을 넘어 더 서쪽으로 갔을 때 "서토"란 말을 썼지요. 안시는 요동지방에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요서 침략을 자주 해 연과 진, 수의 분노를 샀다고 합니다. 결과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기록에서 찾는다면 금상첨화가 되겠군요. 님의 발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북부여,고구려&돌궐의 시원은...그래도 항애산(항가이산)이 있는 외몽골에서 찾겠습니다.
일글랜드섬에서 시작한 대영제국의 지명이 북아메리카에 모두 이식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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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진출한 고구려 분국 돌궐(투르키)...이래 이식됐다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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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신장)을 먹으면...자연적으로 요서인 카자흐 전체에 대한 지배권이 들어온단 것이지요...
문무님 말씀 맞다나...문헌적인 증거는 하여간 더 많이 보충해야 할 겁니다.
궐한님 건승을 비옵니다...흐믓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감사합니다...단구리님.
여기에 논할 일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의 파면결정이 잘못되었다는 판결이 났고, 최피디는 한직으로 밀려나고 한피디는 아프리카로 유배간 걸로 보니, 세상이 돌고 돈다는 말이 맞네요.
밀어 냈다기 보단...담 정권엔 어찌 밝혀질지 모르니...미리 도피시키는것 아닐까요...?
누가 파면이 잘못됐다 결정이 난 걸까요?..제가 요즘 거기엔 관심이 없어서요...
지금 서안을 고구려로 보시는건가요????????
연(거란조상)과 합세한 고구려가 위나라를 제압해...그 황하유역을 지배했다 보이고...
그 위나라란 자체도...위례성벡제,우태백제(구태백제)=위구르...라고 전 봅니다.
다음부터 역사의 남북조는 북부여(고구려)와 남부여(백제)의 남북조시대라 전 봅니다.
고구려(북부여)의 발원점은 전 글에도 썼듯...돌궐과 같은 외몽골 아르항가이(항애산맥) 중심이라 봅니다.
문제는 고구려 백제의 서부영토인데...고구려 고죽국은 현 카자크(코작)...고구려 졸본땅은 현 타클라마칸 투르판...
남부여(백제) 중 한성 중심은 환하하류와 티벳...사천성 동남아...
그 중 비류백제는...그 서쪽 페르샤...전 요렇게 예상합니다.
실라도 그 발원은 알타이 인근 북부여 쪽이라 보이나...그건 돌궐및 여진도 다 같고 당나라도 같은 것이니 의미는없고...
당대의 신라는 사로(사라센)으로서...아랍계 스키타이인 스키탕(수,당)에 적극 협력한 세력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접경인 티벳일대 라사 정도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예상합니다.
이후 한성백제 구역을 다 먹어 버리는 것이고...
비류백제(페르샤)구역은 수당(스키탕)에게 먹힌것시라 예상합니다.
이를 역사는 사라센(사로)의 폐르샤 인수라 표기했을 겁니다.
전 실라의 근원도...몽올 실위 할 때의 그 실위에 기원했다 봅니다.
알타이 출신 삼국중 젤 힘없는부족으로 출발한건데...스키탕(서 키타이족)에 합세해 성공을 이룬 경우라 봅니다.
실위는 상당히 북쪽에서 활동하던 족속 아닌가요..?
내, 알타이 동부 셀렝게강 정도가 실위의 발원점으로 보이고...이후 나타나는 실위의 여타 강역은 이들의 축소확대에 따른 그때 그때늬 이동때문으로 보입니다.
프랑스,독일,러시아,일글랜드가 극서의 조그만 동내에서 대 제국으로 성장했듯...
알타이를 시원으로한 부여제국이후...돌궐과 거란 고구려 신라 백제...모두는 부여나 한의 지배력에서 자유로운
산악형&초원지형인 이 아르항가이 일대를 것점으로 성장의 초석을 다지다가 남하하여 세계의 지배자들로 성장했다 보입니다.
조선인들은 물과 산을 깃점으로 모여살며 어쩌고도...
모든 인류문명이 강을 중심으로 발전함을 보건데 그 특징이라 볼수없는 것인데...그리 기록했다 함은...
유독히 산악으로 나눠진 초원분지의 내륙호와 강줄기가 많은 아르항가이 지형을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의 시원점은...중원기준 동북이라기 보단 정북이나 북서일수 있단 제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