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책을 많이 읽던 박지원은 우연히 청나라에서 들어 온 책을 읽고 청나라에 가서 서양 문물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중 팔촌 형 박명원이 청나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형님을 졸랐다.
" 형님,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저는 아무런 벼슬이 없으니 무슨 일이든 시켜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마부로라도 청나라에 따라가고 싶습니다. "
간곡한 부탁에 형은 박지원을 졸개 군사로 삼아 청나라에 데려 가기로 하였다.
이 때 박지원의 나이가 44세, 청나라에 가는 사람들 중에 가장 낮은 지위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지원은 낮은 지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나라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청나라에 도착한 박지원은 그 곳에서 보고 느낀 것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이 스물 여섯 편의 일기가 바로 <열하일기>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 속에 청나라에서 배운 농부들의 새로운 농사법, 세계 여러 나라의 소식과 편리한 기계들에 대해서도 썼다.
이 일기의 이름이 '열하'인 것은 열하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열하에서 박지원은 중국의 이름난 학자 왕민호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박지원이 쓴 글을 보고 크게 놀라, 박지원을 중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로 인해 박지원의 이름은 청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박지원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가 놀랐다.
조선에서 박지원은 이름 없는 한 선비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도 그럴 것이 박지원은 장가를 가고 나서도 글을 읽을 줄 모를 정도로 무식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이름 있는 양반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몸이 약해 일찍 죽자,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노는 것밖에 몰랐다.
열여섯 살이나 되었지만 글자도 몰랐다.
그러다가 장가를 간 박지원은 아내가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자 자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깨닫고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3년이 지나자 그는 그 마을에서 글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학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박지원은 늙어서까지 항상 공부하는 자세를 가졌다.
이상 네이버 지식에서 옮겨 온 내용입니다.
열하일기(熱河日記)..
연암 박지원(1737 ~1805)의 작품입니다.
한마디로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중국 기행문집(紀行文集)인 것이지요.
여기서 잠깐 고미숙 작가의 열하일기 책소개에서 밝힌 내용을 보면..
『열하일기』는 조선이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한 사행단에 연암 박지원이 공식임무가 없는 수행원 자격으로 5개월 간 동행하면서 남긴 연행 기록이다.
조선의 연행사들이 남긴 500권에 이르는 연행록 중에서도 『열하일기』는 백미로 손꼽힌다. 그러나 고종 재위 기간에 우의정까지 지낸 손자 박규수도 조부의 문집을 간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정도로 『열하일기』는 문제작이었다.
만주족 오랑캐가 명을 몰락시키고 청을 건국한 이래 조선은 명에 대한 존숭과 의리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소중화 사상과 북벌론을 지배적인 이념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허망한 논리인지 그 근원부터 근거가 빈약하고 한 톨의 실리조차 건질 게 없음을 꿰뚫어보고, 도도한 논리와 장대한 비전으로 이를 공략한 사상가이자 문장가가 연암 박지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과 문장의 진수를 보여주는 텍스트가 바로 『열하일기』이다.
[출처]고미숙 작가의 열하일기 책소개에서..
그리고, 이제 고미숙 작가 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란 책을 소개합니다.
[책소개]
그린비에서 내놓은 '리-라이팅' 시리즈는 눈에 띄는 기획물이다.
이 시리즈는 책을 깊이 있게 연구한(혹은 재미있게 읽은) 가이드를 내세워, 그의 삶과 경험을 통하여 원전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 속에서 텍스트를 읽고, 해체·분석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디자인하여 간직한다. 이렇게되면 고전 읽기가 철저하게 현재적인 작업이 될 수 있다.
이 책은 시리즈 1번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다시 읽고 재구성한 것이다.
저자 고미숙은 박지원에 대한 열렬한 애정과 자신만의 발랄하고 경쾌한 문체로 <고미숙표『열하일기』>를 선보인다.
그녀의 문체는 그 자체로 유쾌하기 짝이 없지만, 『열하일기』와 만나서 더욱 빛을 발한다. 한 시대의 사유체계에 대한 도전은 문체로 드러난다고 믿는 저자가, 고문(古文)에 반대하고 살아있는 생생한 문장을 추구하여 문체 반정의 원인이 되었던 박지원을 만났으니 얼마나 신이 나겠는가.
한편 이 책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디즘에 기대어 『열하일기』를 읽는다.
저자는 연암이야말로 머묾과 떠남에 자유로왔던 유목민이었으며, 사물의 '사이'에서 사유할 줄 알았던 경계인이었다고 본다.
☞ 우리말로 유목(遊牧)주의라고 해석되는 노마디즘(nomadism)은 유목민적인 삶과 사유를 뜻하는데,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하일기』는 중심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리좀'이며, 모든 장이 저마다 독립적인 세계를 가진 천의 고원이라고 선언한다.
또 '탈주'와 '재코드화', '재배치'의 대가인 연암은 사물의 어느 한국면에 머물지 않는 강한 호기심과, 풍부한 유머, 그리고 통렬한 패러독스로 『열하일기』를 채우고 있다.
이 책은 <리라이팅 클래식>이라는 기획의 진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전을 '다시 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오늘을 사는 사람이, 오늘날의 코드로 텍스트에 접근하는 것이며, 마침내 그것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 고미숙은 연암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훌륭한 프리즘으로 그것을 이루어냈다. [yes24제공]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 첫 번째. 과거의 어렵고 낡은 책으로 여겨지기 쉬운 고전들을 지금-여기의 시점에 맞추어 새롭게 다시 쓰며 시대를 뛰어 넘는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다.
이 책에서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1장에서는 연암의 생애를 그의 기질과 세계관에 초점을 두고 다루었으며, 2장에서는 <열하일기>를 문제적 텍스트로 지목한 정조의 문체반정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본다. 3장에서는 청나라에 가는 사행단을 따라나선 연암이 잠행을 즐기면서 왕성한 호기심으로 바라본 광경들을 재구성하였다.
4장에서는 연암의 특기인 유머와 패러독스를, 5장에서는 연암의 철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 저자 고미숙
고전평론가. 1960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어문학부에 입학하여 독일문학을 전공하였으나, 대학교 4학년 때 김흥규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고전문학에 매료되어 한국 고전문학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후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 진학하여 마르크스를 공부하면서 역사와 실천, 삶과 혁명, 혁명과 구도 등 인생을 걸 만한 문제들과 대면하게 된다. 19세기 예술사로 논문을 써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잠시 비평활동을 한 적이 있다.
이 때 『비평기계』라는 비평집을 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수유리 강북구청 옆 조그만 사무실을 열어 '수유연구실'이라는 세미나를 조직했다.
처음은 고미숙과 권보드래가 주도한 '계몽기 신문세미나'로 출발했고, 고병권, 이진경 등이 참여해 니체에 관한 강의를 듣고 푸코의 『말과 사물』을 집중 강독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더 많은 친구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지금은 대학로로 자리를 옮겨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www.transs.pe.kr)라는 방대한 '지식인 코뮌'을 꾸리게 되었다.
연구실에서 하는 일은 세미나와 강좌, 토론회 등. 연구실 사람들의 구성도 다채롭다.
전문연구자들부터 시작해서 예비박사들, 석사과정은 물론이고 학부졸업생, 직장인에서 전업주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또한 회원들의 전공 역시 국문학, 철학, 사회학뿐만 아니라 수학, 중문학, 역사학, 여성학, 교육학, 종교학, 산업디자인 등 점차 폭이 넓어지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를 '고전평론가'로 불러주길 바란다.
그녀 스스로 만든 직업이라고 하는데, '고전을 싱싱하게 재구성하여 현대의 독자들과 만나게 해주는 일종의 매니저'라고 이해하면 된다고 한다.
지금까지 쓴 책으로는 『19세기 시조의 예술사적 의미』, 『18세기에서 20세기 초 한국 시가사의 구도』,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나비와 전사 - 근대! 18세기와 탈근대를 만나다』, 『한국고전시가선』, 『18세기에서 20세기초 한국시가사의 구도』 등이 있다. [YES24 제공]
저자의 한마디 말씀..
소박하고도 근원적인 질문들로부터 도망가지 말자. 정녕 사무치게 마주칠 수 있다면, 그것은 다시 세상을 밝히는 촛불이 될 수 있으리라.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것처럼.
[출판사 리뷰]
모든 삶의 질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태는 사람들이 '돈 되는' 분야에 몰리도록 만들어 사회를 기형적인 모습으로 만들고 말았다.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이 단순히 모든 학문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말은 이제 대중들에게 별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인문학이 삶의 질에 관련된 문제임을 제기하고자 하며, 인문학의 위기를 인문학으로 극복해 보려 한다.
불행하게도 '고전'은 과거에만 속할 수 없는 책들이 어느 시대에건 읽히길 바라며 붙여진 이름이지만, 어느새 그 이름은 내용을 떠나 너무 낡은 냄새를 피우게 되었다.
우리는 '고전'이라는 말에 묻어 있는 옛냄새를 지우고 그것에 현재를 담고 싶었다.
'지금-여기의 삶'을 위한 사상을 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전' 자체가 완전히 해체, 재구성되어야 했다.
그간 출판계에서도 독자들이 고전에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여러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고전에 현대적 주석을 다는 데 그쳤을 뿐, '다시 쓰는' 시도는 아직 없었다.
기존의 요리에 양념 몇 가지를 첨가하거나 세팅을 바꾸는 것으로는 오늘의 우리가 먹을 음식이 되기엔 뭔가 부족했다.
우리는 재료는 빌려오되, 젊은 필자들이 과감하게 다시 만든 요리를 내놓고 싶었다.
그 요리를 위해 지금-여기에 있는 저자는 시공간을 넘어서 원저자와 때론 웃으며 때론 논박하며 대화를 나눴다.
시대를 뛰어넘는 그들의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고전에 대한 해설서가 아닌 새로운 책 리라이팅 클래식을 낳았다. 그리고 그 소통은 독자에게로 확장된다.
책을 읽는 독자가 원저자와 만나 소통하고 그 가운데 지금-여기의 저자가 끼여드는 고전, 요컨대 원저자, 저자, 독자가 함께 참여하는 토론과 사유의 장을 지향한다.
한편 '리라이팅 클래식'은 원저자와 대화하며 '지금-여기'를 말하지만 '시대와 불일치'하는 시간을 담은 책이다.
니체를 빌려온다면 시대와 불일치하고 때에 맞지 않는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은 바로 미래가 될 것이다.
'리라이팅 클래식'은 그런 의미에서 시간과 더불어 오는 책이며 미래의 책이다.
시간과 더불어 호흡하는 '리라이팅 클래식'은 늘 변화와 생성을 꿈꾼다.
그래서 저자들이 원저자와의 대화가 다시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그 때가 언제든 개정판을 낼 생각이다.
10년 뒤, 어떤 책은 10번쯤 모습이 바뀌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리라이팅 클래식은 지금까지 고전에 대해 가져온 모든 엄숙주의와 고리타분함, 특정 시대와 공간에 머물기를 거부한다.
동서양의 사유가 만나고, 진지함과 경쾌함이 만나고, 과거의 저자와 오늘의 저자가 만나기를 원한다.
그래서 리라이팅 클래식은 이후 100권, 200권 계속될 시리즈를 쓸 젊은(물리적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다) 학자들을 계속 찾을 것이다.
그가 대학에 있든, 학계 외부의 공동체에 있든, 정치 운동이나 사회 운동의 최전선에 있든, 심지어 그의 골방에 깊숙이 침잠해 있을지라도.
그가 '고전'이라 불릴 수 있는 어느 한 책을 깊이 사랑한다면, 그래서 원저자와 대화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지금-여기의 삶을 위한 사유를 펼쳐 보일 수 있다면 기꺼이 그를 리라이팅 클래식의 필자로 모셔올 것이다.
1차분의 발간과 함께 그린비는 숨어 있는(혹은 우리가 숨게 만들어버린) 젊은 사상가를 찾아 나설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학자들, 연구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독자들에게 리라이팅 클래식이 먼저 다가가고자 한다.
이것이 그린비 리라이팅 클래식의 포부다.
▶리라이팅 클래식001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특징
곳곳에서 분출하는 연암과 저자의 유머. 웃다보면 생을 긍정하고 창조하고 싶어진다.
보론으로 실려 있는 「연암과 다산 : 중세 '외부'를 사유하는 두 가지 경로」.
지금까지 연암과 다산은 둘 다 실학파의 거두이자 중세 조선에서 근대의 맹아를 싹 틔운 인물로 평가받아 왔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미숙은 연암과 다산이 실은 엄청난 차이를 가진 지식인이었음을 보여준다.
연암이 시대와 불화하는 것을 넘어 어느 시대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이라면, 다산은 철저히 근대인이었던 것.
저자가 연암의 「양반전」과 다산의 「애절양」을 대비시켜 보여주는 부분에서는 일반 독자의 눈에도 연암과 다산의 차이가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
저자는 이 차이를 "'표현기계'와 '혁명시인'의 거리"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이 책 p.365~375 참고).
다산이 시에 혁명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면, 연암은 시라는 틀 자체로부터 탈주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산이 최대한 글자 한 자 한 자의 명징성을 추구했다면, 연암은 하나의 기표로 환원되지 않는 수많은 의미들, 다층적 표상을 찾고자 했던 데서도 볼 수 있듯, 연암과 다산의 철학적 사유는 결코 '실학파'라는 하나의 틀로 묶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산이 중세를 떠나 근대에 도달한 여행가였다면(그에겐 도달해야 할 곳이 있었으며, 오직 그곳만이 중요했다), 연암은 중세에도 근대에도 머물지 않고 시대와 공간을 떠도는 유목민이었던 것이다(그에겐 모든 곳이 집이었으며, 또 집이 아니었다).
♣ 본문소개
1장은 연암의 생애를 그의 기질과 세계관에 초점을 두고 다룬 부분이며, 2장은 [열하일기]를 문제적 텍스트로 지목한 정조의 문체반정의 배경과 의미를 다루었다.
[열하일기]에 대한 저자의 본격적인 '다시 쓰기'는 3장부터 5장까지다.
3장에서는 청나라에 가는 사행단을 따라나선 연암이 잠행을 즐기면서 왕성한 호기심으로 바라본 광경들을 재구성하며, 4장에서는 연암의 특기라 할 수 있는 유머와 패러독스를, 5장에서는 연암의 철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부록에서는 연암의 여정을 지도로 간략하게 보여주며, [열하일기]에서 만날 수 있는 주인공 같은 조연들의 간략한 캐리커처를 통해 [열하일기]를 맛볼 수 있게 배려했다.
그 뒤에 덧붙여진 [열하일기]와 함께 읽어야 할 책들도 연암의 [열하일기]와 만나고 싶은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책속의 글들]
연암은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그(민옹)를 불러들인다.
'나는 특히 음식먹기를 싫어할 뿐더러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게 병이 디었나봐요' 하자, 민옹은 곧 몸을 일으켜 치하를 올린다.
당황하는 연암. 민옹의 진단은 이렇다.
"당신은 집이 가난한데 다행히 음식을 싫어하신다니 그렇다면 살림살이가 여유있지 않겠우. 그리고 졸음이 없으시다니 낮밤을 겸해서 나이를 곱절 사시는 게 아니우.
살림살이가 늘어가고 나이를 곱절 사신다면 그야말로 수와 부를 함께 누리는게 아니시우"
- 병을 고통이 아니라, 삶의 능력 혹은 행운으로 변환시키는 역설 혹은 아이러니! --- p. 36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씩 물들인다면, 50일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마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 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은 수 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자익하고 고옥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 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 p. 58
우정론
연암에게 있어서도 우정론은 윤리학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이미 [방격각외전]의 [마장전]서에서 "벗이 오륜의 끝에 자리 잡은 것은 결코 낮은 위치여서가 아니라, 마치 흙이 오행중에서 끝에 있으나, 실은 사시의 어느 것에 흙이 해당치 않음이 없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부자가 친함이 있고, 군신이 정의를 지니고, 부부가 분별이 있고, 장유가 차례가 있다더라도 붕우의 믿음이 없다면 아니될 것이다.
그러므로 벗의 위치가 비록 오륜의 끝에 있으나 실은 그 넷을 통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연암 특유의 우정론을 펼친 바 있다.
이 우정론은 단순한 우정예찬이 아니라, 우도를 중심으로 나머지 사륜의 윅계를 전복한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이후 그의 우정론은 한결 깊고 넓어진다.
한 에세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벗이란 '제2의 나'다. 벗이 없다면 대체 누구와 더불어 보는 것을 함께 하며, 누구와 더불어 듣는 것을 함께 하며, 누구와 더불어 냄새 맡는 것을 함께 하며, 장차 누구과 더불어 질혜와 깨달음을 나눌수 있겠는가?
아내는 잃어도 다시 구할 수 있지만 친구는 한 번 잃으면 결코 다시 구할 수 없는 법, 그것은 존재의 기반이 소?리째 무너지는 절대적 비극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정의 성리학적 표상인 '천고의 옛날을 벗삼는다'는 말을 조문하고, '아득한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이를 기다린다'는 형이상학적 명제를 비웃는다.
즉 그가 말하는 바'우도'란초월적 원리에 종속된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생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자 '나'의 경계를 넘어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변이되는 능력의 다른 이름이다. --- p.
64
돈키호테와 연암
...
마치 돈키호테가 시종 산초 판사와 애마 로시난테만을 데리고 천하를 주유하듯, 그 또한 '두 뒤가 쫑긋'하고 '정강이가 날씬한' 말과 우직한 하인 창대, 장복이만을 동반한다.
돈키호테는 머릿속에 온갖 '기사담'을 다 집어 넣고서 길을 나서지만, 연암은 이제 마주체게 될 미지의 세계를 낱낱이 담기 위해 붓과 먹, 공책 등을 들고서 여행을 떠난다.
전자는 텍스트를 구현하기 위해 떠나지만, 후자는 텍스트를 채우기 위해 떠난다.
전자의 여행이 이미 완결된 세계를 현실에서 확인하고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면, 후자의 혀앵은 예정도, 목적도 없이 낯설과 이질적인 모험 속으로 무작정 몸을 날리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연암이 더 '돈키호테적'인게 아닐까.
하긴, 그렇기도 하다. '돈키호테팀'과 '연암팀'이 겉보기에는 유사해 보이지만, 사실 이들은 매우 상이한 배치로 이루어져 있다.
전자의 경우, 돈키호테는 기사담의 세계에 푹 빠져 현실을 도통 보려 하지 않는 데 반해 산초 판사가 온갖 재치오 익살로 돈키호테의 엄숙주의를 깨뜨리는 구조라면, 후자의 경우 오히려 장복이나 창대가 철저한 소중화주의에 물들어 있고 연암이 그 경직된 선분을 라고지르며 온갖 '해프닝'을 일으키는 식이다.
기묘한 대칭!
그러나 아무리 몸이 가볍고 경쾌하다 해도 먼길을 떠나는 자의 심정은 착잡하다. 두려움 혹은 설레임이 어찌 없으랴.........
--- p. 149
이별론
사람과 말을 점고해 보니, 사람은 발이 모두 부르트고, 말은 여위고 병들어서 실로 대어갈 것 같지가 않다.
이에 일행이 모두 마두를 없애고 견마잡이만 데리고 가기로 하여, 연암도 하는 수 없이 장복이를 떨어뜨리고 창대만 데려가기로 했다. '환상의 2인조'가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고지식학 융통성이 없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기는 하나, 그래도 산전수전을 함께 겪어왔는데, 막상 떼어놓으려니 연암의 가슴이 미어진다.
장복이는 또 어떤가. 머나먼 이국땅에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두 사람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창자가 끊어질 듯이 서러워한다.
"장복은 말 등자를 붙잡고 흐느껴 울며 차마 헤어지기 어려워한다. 내가 돌아가라 타이른즉 또 창대의 손목을 잡고 서로 슬피 우는데 눈물이 마치 비내리듯 한다."
연암은 문득 말 위에서 생각한다.
"인간의 가장 괴로운 일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서도 생이별보다 괴로운 것으 없을 것"이라고.
하나는 살고 또 하나는 죽는 그 순간이 이별이야 구태여 괴로움이라 할 것이 못 된다.
그거야 사람마다 겪는 것이고, 천하의 순리가 아니가. 또 죽은 이에겐 괴로움이 없을 터.
그러나 하나는 가고 하나는 떨어지는 때, 그것도 흘러가는 물을 사잉에 두고 헤어질 때의 그 애닯음을 무엇에 비할 것이가.
이런 식으로 연암의 '이별론'은 시작된다.
어떤 소재든 그에 알맞은 리듬과 악센트를 부여하는 것이 연암의 장기 아니던가. --- p.
180 [알라딘 제공]
[독자 리뷰]
자유로운 사유의 출발은 얽매이지 않는 생활에서 나온다.
박지원이 돈과 권력 혹은 명예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까?
당시의 사회적 조건과 상황들을 온전히 수용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박지원처럼 다양하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대상을 포착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시대를 앞서간 자유로운 영혼 박지원을 보면서 유쾌하고 통쾌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문학사를 통틀어 박지원만큼 즐거운 작가를 찾아내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웃음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박지원이 보여준, 특별한 웃음을 우리는 '풍자'라고 부른다. 세상에 대한 통쾌하고 신랄한 비판이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러나 박지원의 그 많은 저작들을 다 읽어가면서 박지원을 제대로 이해하고 깊은 울림을 찾아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이런 수고를 덜어줄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갖고 노는 책이다.
유형화된 텍스트로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와 노마디즘(nomadism)을 사유의 근거로 하여 텍스트를 종횡무진 가로지른다.
유머가 범람하고 열정의 패러독스가 곳곳에 숨어있는 <열하일기>를 신선하고 즐거운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내부와 외부가 하나가 되는, 철학적 사유로 접근하는 방식은 독자들에게 참신함을 넘어 충격적인 독법을 선사한다.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아는 분들은 고미숙의 시선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카데미즘에 갇힌, 틀에 박힌 사고와 고답적인 텍스트 연구가 아니라 철학과 문학을 가로지르며 <열하일기>를 난도질한다.
저자 특유의 통찰력과 날카로운 비판 정신은 이 책에서 빛을 발한다.
이처럼 자유로운 사유를 통해 박지원을 만나는 일은 저자에게 커다란 기쁨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사유의 결과물이다.
박지원을 통해 고미숙의 생각을 들여다본다. 그가 안내하는 박지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유혹적이며 넓고도 화려하다.
우리는 주저없이 그 문턱을 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그를 직접 만나는 일은 다음 순서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읽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한 매력적인 <열하일기>에 대한 풍성한 수사와 다양한 독법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
심장이 왼쪽에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책만 보는 바보. http://blog.naver.com/cognize
[책속의 밑줄 긋기]
이국땅의 한 점포에서 벽에 쓰여진 <호질>을 촛불아래 '열나게' 베껴 쓰자 주인이 묻는다.
그걸 대체 무엇에 쓰려느냐구.
조선에 돌아가 친구들에게 보여줘 한바탕 배꼽잡고 웃게 만들려 한다는 게 연암의 답변이었다.
<호질>보다 연암의 행동이 더 배꼽 잡을 일 아닌가? (6쪽)
<열하일기>는 일회적이고 분석적인 독서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읽을 때마다 계속 다른 장을 펼쳐 보인다.
계속 다르게 사유하도록 독자들을 부추긴다.
그래서 <열하일기>를 읽을 때마다 내 지적 편력기에는 계속 새로운 이정표들이 그려진다.
나도 이제 편력이 아니라, 유목을 하고 싶다! 내 글쓰기도 유목적 지도가 되었으면! 삶과 지식의 경계가 사라져, 삶이 글이 되고 글이 삶이 되는 '노마드(nomad)'가 되기를!
어느덧 내 욕망의 배치는 이렇게 바뀌고 말았다. 열하일기가 준 가장 큰 선물! (26쪽)
고문과 소품, 사실과 허구, 주체와 대상의 경계까지를 모호하게 흐려버리는 이 괴상한 '책기계'를 수목이 아닌 리좀이 되게 하는 배치, 그 스릴 넘치는 장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134쪽)
그의 패러독스는 이렇듯 신랄하다.
명분과 실리의 사이, 내부와 외부의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고, 그 줄타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사뿐히 외부에 '착지'하게 된다.
심연으로 거슬러 올라가 지반을 뒤흔들거나 아니면 돌연 '지금, 여기'의 표면으로 솟구쳐 표면장력을 일으키거나. (291쪽)
유목은 단순한 편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랑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면서 머무르는 것이고, 떠돌아다니면서 들러붙는 것이다.
'지금, 여기'와 온몸으로 교감하지만, 결코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어디서든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하고,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그것은 세상 모두를 친숙하게 느끼는 것이지만, 마침내는 세상 모든 것들을 낯설게 느끼는 것이다.
<열하일기>가 발산하는 강렬도는 바로 '이름'의 중력에서 벗어나 무상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성할 수 있는 '노마드'적 여정의 산물일 터, 이제 그 '천의 고원'을 나오면서 나는 다시 묻는다.
대체 연암은 누구인가? 물론 나는 아직도 그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미래의 포말(泡沫)'인 나에게 그의 묘비명을 쓸 자격이 주어진다면, 나는 다만 이렇게 쓰리라.
"살았노라. 그리고 <열하일기>를 썼노라."
[출처]
http://book.naver.com/bookdb/today_book.nhn?bid=122010
또 다른 '열하일기'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책소개]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교양도서
-대한출판문화협회 선정 올해의 청소년도서
-‘책읽는청주’ 대표도서
-‘행복한아침독서’ 추천도서
저자가 5년 전 청소년 독자들에게도 열하일기의 진수를 선물하고자 썼던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의 개정판이다.
한성에서 연경으로, 연경에서 열하로, 다시 연경으로 돌아와 한양에 이르는 장장 5개월 간의 장대한 여행기가 한 장의 지도 위에 펼쳐지듯 선명하게 그려진다.
이처럼 '열하일기' 26편의 전모가 한 편의 로드무비이자 길 위에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모험, 그리고 사유의 대여정으로 생생히 되살아난 것은 오래도록 연암과, 또한 '열하일기'와 ‘찐한’ 우정을 나누어온 저자 고미숙의 애정과 편력이 살아 숨쉬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번 개정판을 통해 230여 년 전 연암의 여행길에 동행하는 행운을 누리시길 바란다.
[출판사 리뷰]
유목적 여정이 탄생시킨 "오천 년래 최고의 문장"
조선 후기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연암의 글들은 1900년이 되어서야 창강 김택영에 의해 '연암집'으로 묶여 간행되었다.
김택영은 '열하일기'에 수록된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를 삼국사기의 [온달전]과 더불어 "오천 년래 최고의 문장"이라 평했다.
이 같은 평가의 근거는 무엇인가.
반드시 한문으로 쓰인 원전을 읽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때 그 자리의 연암이 되어 보는 것이다.
상현달마저 고개 너머로 떨어져 천지가 괴괴한 때, 곁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한 필의 말에 의지하여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장성을 넘어간다.
아, 슬프다! 여기는 예로부터 수많은 전쟁이 벌어진 곳이다. ... 그토록 길길이 날뛰며 싸우던 전쟁터건만 지금은 온 천하가 태평하여 군대를 일으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고 있어 수많은 골짜기들이 쓸쓸하고 적막하기만 하다. ... 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이 싸늘하다.
숲과 골짜기가 함께 운다.
짐승같이 가파른 산과 귀신같이 음산한 봉우리들은 창과 방패를 벌여 놓은 듯하고, 두 산 사이에서 쏟아지는 강물은 사납게 울부짖어 철갑으로 무장한 말들이 날뛰며 쇠북을 울리는 듯하다. -- 본문 174~175쪽
고북구가 어떤 곳인가.
연경에서 열하로 가는 길목이자, 새외로 통하는 관문 가운데 험하기로는 고북구만한 요새가 없다.
이곳을 통과하면 산천의 풍경과 지세, 풍속 따위가 자못 달라지는 북방 오랑캐의 땅이기도 한 터, 고북구는 중국 역사 내내 치열한 전쟁터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스러져간 전쟁의 원혼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짙은 어둠과 기괴한 기운이 어우러진 가운데 "연암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회에 휩싸"여, 남은 술에 먹을 갈아 천고의 명문장을 써 내려간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찌 보면, 그것은 연암의 것이라기보다 장성에 깃든 원혼들이 연암을 통해 말을 건넨 것인지도 모른다."고.
비단 [야출고북구기]만 그렇게 탄생한 게 아니다.
'열하일기'를 장식하는 명문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연암을 통해 세상으로 흘러나왔다.
동쪽 변방 조선의 지식인 연암은 조선을 규정하는 어떠한 주류적 가치와 통념에도 걸림이 없었던 인물이다. 그랬기에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사되는 청문명의 정수를 다각도로 포착할 수 있었다.
그중 단연 으뜸은 "청 문명의 장관은 기와 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는 명제이다.
"기와 조각과 똥오줌, 가장 낮고 천한 것에서 가장 깊고 근원적인 것을 찾아내는" 연암의 통찰력이 구축한 "탁월한 문명론"이기 때문이다.
연경을 유람하고 돌아온 선비들이 요동의 백탑, 산해관, 유리창 따위를 제일 장관이라며 열거하고, 일류 선비들은 왕후장상, 서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머리를 깎았다는 이유로 개돼지와 마찬가지 취급을 한다.
이에 연암은 삼류 선비를 자처하며 깨진 기와 조각을 모아 천하의 그림을 그려내고, 똥거름마저 각양으로 쌓아올려 금덩어리처럼 모시는 저 제도를 본받아야 진정한 북벌이 가능하지 않겠냐고 역설한다.
정말 근원적이고도 통쾌한 논리가 아닌가.
장자가 말한 붕새의 눈이나 불가에서 말하는 여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게다.
연암의 편견 없는 안목과 전복적 사유는 열하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천자의 고희를 축하하기 위해 천하의 모든 진귀한 종족과 산물들이 열하로 몰려들고 있었다.
길들이지 않은 각종 야생동물들이 우리 안에서 눈빛을 번득인 채 수레에 실려 간다.
"붉은 굴레를 씌워 말을 끌고 가듯 하는" 사슴이 있는가 하면, 키가 거의 말만 한하고 용맹하기가 호랑이와 맞먹는 개도 있다.
난생처음 타조를 목도하기도 한다.
이미 연경에서 한번 마주친 코끼리를 열하에서 다시 볼 기회를 얻는데, 이번에 본 코끼리의 행동거지와 활약상은 연암의 상상력과 사유를 "우주적 차원으로" 비약시키면서 [상기象記]라는 명문을 낳게 한다.
우리가 배운 것이라고는 생각이 소 말 닭 개 정도에 미칠 뿐, 용 봉 거북 기린 같은 짐승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때려 죽이니 그 코야말로 천하무적이다.
그러나 쥐를 만나면 코를 둘 데가 없어서 하늘을 우러러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쥐가 범보다 무서운 존재라 말한다면 조금 전에 말한바 이치에 어긋나고 만다.
대저 코끼리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인데도 그 이치를 모르는 것이 이와 같다. 하물며 천하 사물이 코끼리보다 만 배나 더한 것임에랴. -- 본문 215쪽
저자는 여기에 ‘코끼리 철학’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면서 [상기]가 설파하는 건 ‘차이’에 대한 사유라고 지적한다.
우주의 변화는 실로 무상한 것이어서 하나의 단일한 척도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것.
닭이나 개를 보고 산출된 가치는 닭이나 개에게만 적용될 뿐, 그것을 용이나 거북에게까지 적용하려고 들면 바로 탈이 난다. 즉,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아니면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동일성의 폭력’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폭력’이란 단 하나의 기준에 의거하여 차이들을 완전 무시해 버리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그럴 때 그 기준은 그저 하나의 기준이 아니라, 모든 가치들을 압도하는 초월적 지위를 획득한다. -- 본문 216쪽
이렇듯 이 책은 독자들이 책을 읽는 내내 명문장과 명해설의 멋들어진 향연을 즐기게끔 한다. 그 비결은 원전을 성실히 독해하고 현재적 맥락에서 새롭게 변주하는 저자의 내공일 것이다.
'열하일기'가 그 첫 성과물이었음은 웬만한 독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왕복 장장 6천여 리, 5개월의 여정에서 탄생한 역작을 재발견하고 리라이팅한 책이 출간된 해가 2003년이었다.
민족문화추진회가 국역한 총서가 간행되어 거기에 '열하일기'가 포함된 것이 1968년이었고, 그것이 1997년 현대적인 장정으로 재출간되기 전까지 변변한 완역본도 없던 때였다.
전문 연구자의 정석적인 해설서는 애초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존재가 세상에 태어날 때 이유가 있듯, 글이란 것도 세상에 내놓을 때는 저작의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고미숙 선생의 글쓰기 지론은 ‘나는 왜 이 글을 쓰느냐’에 답해야 한다는 것!
더군다나 먼지냄새 나는 고전이 21세기 지금까지 읽힌다는 건 시대마다 독자의 요구가 추동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고전평론가 혹은 고전을 다시 쓰려는 작가라면 자신만이 가진 ‘특이점’의 그물로 포획한 고전의 의미를 통역해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의미에 충실한 저작일 뿐 아니라, 전작에 대한 탁월한 변주라고 할 만하다.
전작이 '열하일기'를 탈근대적 사유가 충만한 텍스트로 분석한 과감한 시도였다면, 이 책은 원전의 텍스트와 보다 밀착하여 대화를 나누듯 써가면서도 그 고유한 사유의 편력 또한 놓치지 않고 있다.
또한 청소년 독자들도 부담없이 읽기에 적합하도록 썼기 때문에 폭넓은 독자층이 두루 함께 탐독해볼 만하다.
고전 찬찬히 읽기, ‘고찬찬’ 시리즈!
고전이 교양인의 필독목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깊이 있는 해설서와 공들여 번역한 완역본들이 출간될 때마다 고전 독자들은 고마움과 설레임을 동시에 느낀다.
풍요로운 고전의 바다에 이제 여기, 고전읽기의 새로운 모범을 제시하는 시리즈를 내놓는다.
수많은 독자들이 공감하겠지만 고전읽기에는 다른 왕도가 없다.
고전이라는 텍스트가 본래 그렇게 쓰였듯, 그 느린 걸음과 깊은 호흡을 온전히 음미하며 ‘찬찬히’ 읽은 것만이 최상의 방법이다.
점자를 배우듯 시대의 낯선 언어와 이질적인 삶의 요철들을 나의 손끝으로 하나하나 더듬어 실감해보자.
고찬찬 시리즈는 찬찬히 읽는 방법에 딱 맞춤한 장편고전 텍스트를 첫 탐사지로 선정했다.
고미숙 선생님의 '열하일기'를 필두로, 남산강학원의 패기 넘치는 필진들이 가세하여 장편고전 세계로의 탐사여행에 멋진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다.
- 앞으로 나올 책들 : '레 미제라블'(빅토르 위고), '서유기'(오승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데카메론'(조반니 보카치오) 등.
[책속의 글들]
인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 둔다고 했던가.
1780년, 울울한 심정에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를 염원하던 차, 삼종형 박명원이 건륭황제의 70세 만수절 축하 사절로 중국으로 가게 되면서 그를 동반하기로 한 것이다.
연암의 집안은 대대로 노론 벌열[
박명원은 평소 연암이 청나라 문명을 동경하는 걸 알고서 그를 자신의 개인수행원(자제군관)으로 임명해 준 것이다.
말이 수행원이지, 실제론 특별한 공무가 없는 일종의 ‘프리랜서’였다. 연암의 생애에 있어 가장 빛나는 사건이자 화려한 외출인 중국 여행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 p.34
거기에 비춰 보면 인간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범이 야생동물을 잡아먹는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가, 마소를 먹으면 그때부터 원수라고 떠들어 댄다.
자기네들이 마소를 부려 먹기 때문일 텐데, 그럼에도 “저 마소의 태워 주고 일해 주는 공로도, 따르고 충성하는 생각도 다 저버리고 다만 날마다 푸줏간이 미어지도록 이들을 죽이고, 심지어는 그 뿔과 갈기까지 남김없이 먹어 치운다.
그러고도 “다시 우리들의 노루와 사슴을 토색질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산에서 먹을 것이 없고 들에서도 끼니를 굶게” 한다. 그러니 “하늘로 하여금 이를 공평하게 처리하게 한다면 우리 범들이 너희 인간들을 먹어야 하겠는가, 놓아주어야 하겠는가?”
--- p.124
생각해 보면, 삶이란 참 얼마나 우연투성이인지.
한양을 떠날 때만 해도 여행의 목표는 연경이었다. 연암으로선 연경을 유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벅찬 일이었다.
헌데, 이제 느닷없이 동북방의 요새지 열하로 가게 되다니.
연암으로선 압록강을 건널 때 못지않은 두려움과 설레임을 느꼈을 터이다.
게다가 조선인으로선 처음 거기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사실 때문이었을까. 잠고문에 굶주림까지 겹친 무리한 여정으로 몸이 지칠 대로 지친 상태건만 연암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회에 휩싸였다.
--- p.176
명심이 바로 그것이다. ‘어두운 마음’이란 사사로운 집착을 다 놓아 버린 상태를 뜻한다. 그리 되면 당연히 나 아닌 외물에 대한 고정된 상도 버릴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나와 대상이 하나로 융합되면서, 나도 아니고 외물도 아닌 ‘활연관통'의 경지로 진입하게 된다.
이 글의 클라이막스,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는 대목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물이 옷이 되고, 물이 몸이 되고, 물이 마음이 되는 경지, 그것이 곧 연암이 말하는 ‘도'다. --- p.194
어디 장님만 이러하랴. 우리네 삶이 온통 이런 식일 터, 보이는 걸 그냥 좇다 ‘무명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장님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도로 눈을 감아야 하듯, 우리 또한 보고 듣는 것에 휘둘리지 말고 그 너머에 있는 심연을 응시해야 할 것이기다.
그때야 비로소 양변을 떠나 ‘사이에서’ 사유하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사이에서 사유하기’와 ‘도로 눈을 감는 일’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려 있는 셈이다. --- p.281
[YES24 제공]
☞ 박지원 (
朴趾源, 호 : 연암)
조선 후기의 문호이자 실학자로,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그 밖에 공작관 ·무릉도인(武陵道人)·박유관주인(薄遊館主人)·성해(星海)·좌소산인(左蘇山人) 등의 호를 사용하였다.
『열하일기』를 저술하여 당시 중국의 정세를 살피고, 그 선진 문명을 소개하는 한편, 조선에 대한 심도 있는 내부 비판을 시도하였다.
1786년 음직으로 처음 선공감 감역이라는 벼슬을 지냈으며, 이후 여러 말단 벼슬을 거쳐 1792년 안의 현감에 임명되었고, 1797년 면천 군수가 되었다.
1800년 양양 부사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홍대용과 함께 조선의 주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 위에서 이용후생의 실학을 모색했으며, 창조적이고 성찰적인 글쓰기를 통해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이 갖고 있던 미망과 편견, 허위의식과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유와 미의식의 지평을 몸소 열어 나갔다.
문집으로 『연암집』이 전한다.
박지원은 18세기 지성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자, 문체반정의 핵심에 자리하게 된 『열하일기』를 통해 불후의 문장가로 조선의 역사에 남은 인물이다.
박지원은 노론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이라는 코스에서 벗어나 이덕무, 홍대용, 이서구, 백동수 등과 어울려 수학하였다.
1780년에 삼종형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열하일기』라는 저서를 남겼다. 그는 69세에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운명을 달리했다. [출처] 네이버.
2013년 7월 신간도서도 한편 소개합니다.
고미숙 저, 《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의 개정판입니다.
[책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