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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반반창회-4월모임-
일시:
장소: 누에섬-시화방조제-공룡알 화석지-
참석:
특기사항:
1. 지난 해부터 벼르고 별렀던
2. 다음 달은 안동장에서 정기모임을 갖기로 하였고 6월에는 정선으로 1일 관광을 가기로 하였다. 여행사를 이용하여 갈 계획이라 예약을 하여야 하므로 미리 총무에게 사전 연락을 해야 한다.
방문경과:
우선 대부도 초입에 있는 누에섬을 들렀다. 대부도는 이제 섬이 아니다. 한 15여 년 전쯤에 탄도, 불도, 선감도, 대부도가 연육(連陸)되고 안산의 오이도까지 방조제로 이어지면서 섬의 풍취(風趣)는 없어졌다.
옛 섬 탄도의 남쪽 끝에 있는 조그마한 누에섬에는 등대가 있어 사방 전망이 그럴 듯하다. 만조 때 외에는 걸어 들어 갈 수 있는데 왕복 약 3키로의 거리다. 등대에 올라 사방을 조망(眺望)하니 주변의 제부도와 대부도가 희미하게 모습을 보인다. 봄 날씨라서 그런지 안개가 끼어있는 듯 뿌옇게 보인다. 그래도 누에섬에는 진달래, 개나리가 한껏 예쁘게 피어 마음을 간질이고 있다.
곧 대부도로 들어가 점심 식사 후 섬 북쪽 끝머리 시화방조제(始華防潮堤) 입구인 방아머리에 있는 시화호 환경문화관에 들러 잠시 시화호의 개발사(開發史)를 보여주는 전시물과 시화호의 주변 경관을 둘러보았다.
다시 이동하여 방조제 도로를 달려 건너편 안산의 오이도까지 한 바퀴 돌며 방조제 중간쯤에 있는 간만(干滿)의 차를 이용한 조력(潮力)으로 전력을 생산하는 조력발전소 건설현장까지 구경하였는데 완공되면 조력발전의 규모로는 세계최대가 된다는 것이다.
대부도를 다시 돌아내려와 송산면에 있는 공룡알 화석지(化石地)로 들어갔다.
시화방조제를 만들어 대규모로 농업용지화하려던 계획으로 송산면 북쪽의 바다가 육지화되었는데 이때 생태계 조사 중에 이 부근에서 공룡 알 화석이 많이 발견되어 이 일대를 천연기념물 보존구역으로 지정하였고 현재도 공룡화석을 탐사(探査)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이제 막 초지(草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는데 시야(視野) 끝 저 멀리까지 평야가 펼쳐져 광대한 평야의 원점에 있는 듯하다. 바닥은 염분이 있는 개펄이 표토화(表土化)되어서 흙이 부드러워 하얀 융단 길 위를 걷는듯하여 5-6 키로를 걸었어도 힘들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이렇듯 광활하게 펼쳐진 들판이 또 있을까 싶다. 심장약을 개발하다 생각지도 않던 비아그라라는 약물이 튀어나왔듯이 그 말썽 많던 시화호 개발 과정 중에 공룡 알 화석지라는 특이한 선물을 받은 셈인데 내가 보기에는 어쩌면 시화호보다 더욱 값져 보인다.
그렇지만 지금 이 지역을 관통하여 안산까지 고속도로를 건설하느라 쉴새 없이 공사차량이 들락날락 거리니 과연 막 개발이 시작된 지금과 같이 소박(素朴)하고 광활한 자연이 그대로 유지가 될까 의문스럽다.
아마도 지금이 자연미(自然美)를 그대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다. 다만 아이들에게는 글쎄, 그다지 재미는 없을 것 같지만.
마당에서 드럼통에 불을 붙여 바비큐를 하며 담소하는 중에 서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곳은
기분 좋은 하루를 위해 마음을 써준 종국이와 모든 친구들, 즐거운 하루였었다오!
“인연이 있으면 천리를 떨어져도 서로 만나고 연이 없으면 얼굴을 마주쳐도 모른다(有緣千里來相會 無緣對面不相逢)”라는 옛말대로 우리의 이런 귀한 인연(因緣)을 잘 이어 나가보자.
누에섬 등대에서 누에섬의 봄맞이 바지락 칼국수로--- 이런 귀여운 공룡이 살았다는데-- 우리가 중심이다! 공룡아! 놀자! 정신없이 맛있게 먹고있음! 시골집 정문입니다. 방문기념! 행복이 가득하기를!
陽川閑談
순간의 선택에 성쇠(盛衰)가 달려있다
이번 반창회 모임으로 둘러보게 된 송산면(松山面) 일대는 화성시(華城市)에 속하고 대부도는 안산시에 속한다. 조선 시대는 이 지역을 남양군(南陽郡)이라 했다.
무슨 일이든 단숨에 해치우는 것을 빗대어 쓰는 말로 “남양 원님 굴회 마시듯”이라는 옛 속담도 있다. 오랜 옛적에 어느 남양 원님이 그렇게 굴회를 잘 먹었다 해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남양은 반도처럼 생겨 주변에 많은 만과 크고 작은 섬들이 주변에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고 넓은 평야지대에서는 농업생산도 활발했다 한다. 상고시대 중국과 한반도 북부로부터 바다를 건너거나 해안을 따라 이동하면서 초기 백제사에도 상당한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지는 않았다고도 한다.
송산면의 중심지인 사강(沙江)은 시화방조제가 완공되기 전에는 강처럼 조수(潮水)가 드나들었다고 하여 붙여졌다 하는데 지금은 내륙이 되었다.
종국이의 시골집은 사강 북쪽에 있는 고정리(古井里)인데 예전에는 고잔, 원정 등과 같은 마을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곶(串) 안쪽의 마을이라 하여 고잔(古殘)이고 우물이 멀리 있어 원정(遠井) 마을이라 이름 붙여졌다고 하는데 이 두 마을이 합쳐지면서 고정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역시 시화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에는 포구(浦口)가 있었으나 방조제가 이 지역도 내륙(內陸) 마을로 바꾸어 놓은 셈이다.
하여튼 평탄한 간석지(干潟地)가 많으며 파도가 적고 하천과 높은 산이 없는 곳이어서 염전으로는 최적의 지대였다고 하니 이곳에 터를 잡았던 종국이의 장인은 매우 선견지명이 있었던 분이었겠다.
고정리 북쪽으로는 멀리 안산에 이르기 까지 많은 돌섬들이 점점이 널려있는 바다였을 터인데 그리 오래지 않은 15년 전부터 그야말로 글자로만 새기던 상전벽해(桑田碧海)가 거꾸로 이루어진 셈이다.
원래 가지고 있던 지명(地名) 따라 산천(山川)의 모습이 바뀌기도 하고 지형지물(地形地物)의 변화에 따라 지명이 바뀌기도 하니 훗날 이 지역의 명칭은 과연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시화방조제에 대하여는 갖가지 시시비비(是是非非)가 끊이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야 어느 정도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는 것인지?
아마도 최초에는 단순히 방조제를 쌓고 그 안에 담수호(淡水湖)를 만든 후 넓은 평야를 만들자는 계획이었겠지만 생활폐수와 산업폐수로 인해 최초의 계획은 뒤집어져 버리고 이제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썩은 물을 정화(淨化)시키게 되었으니 결국 해수호(海水湖)를 만든 셈이 되었고 농업지역 대신에 신도시(新都市)와 레저지구를 건설하게 되었으니 말 그대로 방조제를 만들기 위해 쓸데없는 헛돈을 쏟아 부은 셈이 되었다.
그래도 모든 일에는 선악(善惡)이 병존(竝存)하는 것일까? 그런 시행착오(試行錯誤)를 거치면서 자연환경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은 것과 방조제를 이용하여 조력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마음에 위안 거리가 될 것이다.
게다가 뜻하지 않게 공룡알 화석지가 덤으로 주어졌으니 비싼 수업료를 들여 큰 공부한 보상이 될지도 모른다. 바다가 육지로 변하지 않았다면 이런 선사시대의 유적이 발견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시화방조제로 인하여 이끌어 내어진 가장 훌륭한 선물이 될 지도 모른다.
500만평에 달하는 광활(廣闊)한 평야는 시야(視野)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고 시원한 바닷바람이 온몸을 휘감으며 상쾌함을 더한다. 바다가 육지로 되었으니 당연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탁 트인 곳이 또 있을까?
이 들판에 갈대(?)와 함초(소금기를 품은 바닷풀)와 갖가지 이름 모를 바닷풀들이 잔디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고 개펄이었던 탐사로(探査路)는 아직도 소금밭처럼 하얗게 반짝이고 있어 이국적 느낌을 주는데다 바닥이 마치 우레탄을 깔은 듯 감촉이 부드러워 6키로 정도를 걸었어도 피곤하지 않다.
게다가 드문드문 예전에는 섬이었거나 암초였던 곳이 갑자기 치부를 드러낸 여인네처럼 부끄러운 듯 붉은 화성암을 드러내 보이는 비경(秘境)이 마치 먼 옛날 중생대(中生代)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지금은 화석의 발견도 그러하거니와 이 지역의 개발도 초기 단계라 소박(素朴)한 자연환경이 잔재미는 없을 지 몰라도 오히려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풍미(風味)가 있으나 글쎄 훗날 고속도로나 여러 시설물이 생긴 후에는 어떠할지 모르겠다.
시화방조제의 개발로 여러 가지 생각지도 못한 결과가 나오듯 어떤 일이 발생하였을 때 예상대로의 결과가 나올지 또는 전혀 예상 밖의 엉뚱한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러한 모든 일들이 그야말로 인(因)이 연(緣)을 만나 낳은 결과물로 예정된 운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인 것이다. 그러나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이미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앞에 두고 어떤 목적을 향하여 어떻게 관리하느냐 라는 선택의 문제로 귀착된다.
자연환경의 개발에서도 그러한데 하물며 인간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서야 더욱 예상 밖의 일들이 많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역사적 사건에서 두 가지의 상반된 결과를 살펴볼 수 있다.
197년 고구려의 고국천왕(故國川王)이 죽었을 때 그의 왕비 우씨(于氏)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다. 아직 젊은 우씨는 권력욕이 강한 여자로써 고국천왕이 죽은 후에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략을 꾸몄다. 고국천왕에게는 후사가 없고 단지 동생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우씨는 왕이 죽은 사실을 외부에 비밀로 하고 야밤에 은밀하게 첫째 시동생인 발기(發岐)를 찾았다. 발기는 왕후가 왕위 계승에 관해 이야기를 하자 신중하게 날이 밝으면 중신들과 논의하자고 하면서 왕후를 내보냈다. 우씨는 발기가 자신을 내치자 부끄럽고 분하여 다시 둘째 시동생인 연우(延優)의 집을 찾았다. 연우는 왕후가 자신을 찾자 왕후의 뜻을 짐작하고는 왕후를 극진히 접대(?)하였다.
어느새 왕후와 연우는 한 통속이 되어 은밀히 궁으로 함께 돌아가 아침이 되자 선왕의 유명이라고 하며 연우(山上王)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뒤에 시동생과 다시 결합하여 왕후의 자리를 지켰다.
분노한 발기는 궁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도리어 불리하여 드디어는 요동으로 건너가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에게 군사를 빌려 재침하였다. 이때 막내인 계수가 대적하면서 발기에게 “비록 형이 불의한 행동으로 왕위에 올라 분함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는 있으나 어찌하여 요동의 군대를 끌어들여 나라를 멸망시키려는 것입니까?”하고 꾸짖자 자책감을 못이긴 발기는 자결을 하고 말았다.
발기는 서열상(序列上) 자신의 왕위 계승은 당연하다고 여겼고 또 병권을 쥐고 있었기에 당당하게 왕위를 계승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우씨를 내쳤지만 연우는 우씨를 이용하여 선왕의 유명이 있었다고 하는 명분론을 흘리면서 먼저 왕위에 올라 선수를 침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것이다.
권력의 흐름이 여자로 인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지만 그 뒷수습에 있어서 발기는 실패한 셈이다.
[같은 이야기로 고구려 신대왕(新大王)이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남무(南武)를 태자로 삼았으나 176년 남무(고국천왕)가 왕위에 오르자 장남 발기(拔奇)가 불만을 품다가 196년에 반역을 시도하다 패배하고는 요동태수 공손탁에게 가서 원군을 얻어 재차 침입하였으나 패배하여 요동태수 공손탁에게 의지하다 죽었다는 것인데(三國志 東夷傳) 아무래도 하나의 사건을 오기(誤記]한 것을 보이나 혹시 유사한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 실체는 아직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여자가 관련된 왕자의 난으로서 정반대의 결과를 보인 사건도 있다.
청 태조 누르하치는 네 명의 정비를 포함하여 9명의 부인을 두었고 18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가 1626년 중국 내륙으로 침입하기 위하여 요서(遼西)의 영원(寧遠)을 공격하다가 명장(明將) 원숭환의 반격으로 부상을 입고 요양하다가 죽었다.
이때 그에게는 제1부인 통쟈가 낳은 장자 다이샨(代善)이 있었고 셋째 부인 멍구제제가 가 낳은 황태극(皇太極=淸 太宗)이 있었으며 또 넷째 부인 아바하이가 낳은 뚜얼곤(多爾袞) 등이 후계 경쟁을 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장남인 다이샨을 매우 믿음직하게 생각했고 또 황태극은 가장 사랑했던 부인이 낳았기 때문에 귀여워했었으나 말년에는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막내아들인 뚜얼곤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죽음이 목전에 이르자 사랑하는 막내의 안위가 걱정되어 다이샨에게 뚜얼곤과 그 생모까지 잘 거두어 보호해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장남인 다이샨이 후계자가 되지 못하였을까? 사실 황태극(청태종)은 여덟째 아들로 왕위 계승 순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생모는 정비(正妃)가 아닐뿐더러 더욱이 외가(外家)인 예허족이 여진족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누르하치와 경쟁하는 적대적(敵對的) 관계에 있었기에 그가 왕위를 계승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런 반면 다이샨은 장남으로서 성격이 온화하면서도 여러 전투에 앞장을 서서 전공(戰功)이 컸었다. 그렇기에 황태극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많은 전적을 읽고 공부하여 아들들 중에서 가장 문재(文才)가 뛰어났고 심신의 단련을 쉬지 않아 무술과 모략(謀略)에 능하였음에도 항상 몸가짐을 단속하여 누르하치와 여러 중신들에게 흠을 보이지 않았다.
다이샨이 신망(信望)을 잃게 된 것은 왕위 계승의 제1순위자임을 자신도 모르게 과신(過信)하여 은연중에 다른 왕자들을 박대하였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막내 뚜얼곤의 생모 아바하이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아바하이는 어린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여 다른 왕자들과 좋은 유대관계를 가지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황태극은 몸조심하기 위해 그녀의 제의를 거절했으나 다이샨은 별다른 생각 없이 아바하이의 식사대접을 받기도 하고 또 그녀가 다이샨의 집을 드나드는 것도 용인하였는데 이런 일은 이상하게 보면 한이 없는 것으로 찜찜하게 생각하였던 누르하치가 징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좋게 대하는 다이샨의 이런 행동은 어쩌면 평시에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라고 보여질지도 모르나 명과 죽느냐 사느냐 투쟁하고 있었던 여진족의 입장에서 볼 때 어딘지 모르게 나약하지 않느냐는 느낌을 중신들에게 주게 된 것이다.
당시 청은 후계자를 옹립하는데 중신들의 지지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그것은 군신이 혼연일치하여 합심이 되어야 명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이샨을 선택하게 되면 내부적으로 분열이 되어 국력의 통합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중신들이 황태극을 옹립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자 상당한 권력을 쥐고 있었던 다이샨의 행보(行步)에 여진족의 운명이 걸리게 되었다. 그런데 다이샨의 아들 악탁(岳托)이 “황태극의 재능과 덕이 뛰어나고 선제의 뜻과 모든 중신들이 그리 생각하니 그를 옹립합시다”라고 하자 다이샨이 깊이 생각하다가 아들의 뜻에 동의하고는 스스로 황태극의 아랫자리에 서서 그를 도울 것을 맹약하였다. 다이샨은 훗날 황태극의 아들(順治帝)의 옹립에도 노력하였으니 결국 제2인자로서 수(壽)를 누린 셈이다.
아마도 다이샨은 명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온화한 성격을 가진 자신보다 황태극이 훨씬 뛰어난 적재(適材)임을 깨닫고 어린 동생에게 승복(承服)함으로써 결국 청이 중국 대륙을 정복하는데 있어 최대의 공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맞닥뜨린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훗날의 역사가 크게 비상(飛翔)하기도 하고 오욕(汚辱)의 역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시인의 글에서도 “천리만큼의 큰 차이도 단지 추호와 같은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千里之謬不容秋毫)”고 한마디로 딱 잘라 새긴 것이 아니겠는가?
(양천서창에서
첫댓글 상두 덕분에 역사공부도 하게되고 송산의 사강에 대한 설명도 보게되고 고대 유적지인 화석지를 방조제 공사로 육지로 바뀌며 찾을수 있었다는 설명을 보니 지난 번에 갔다가 왔으면서도 모르는 사실을 알게 해주어 고맙네! 또한 청나라의 운명이 지금 북쪽에서 벌어지는 태자들의 권력투쟁과 무언가 닮은 인상을 주는데 황태극은 여덟번째라 그것이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