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성모 마리아
복음: 요한 19,25-27: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부속가).>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어제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다. 교회는 그 다음 날인 오늘을 고통의 성모 마리아를 기념한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에 지내는 이유는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였음을 드러낸다. 이 축일이 오늘로 확정되기 전에는 성지주일 전 금요일에 행해지기도 하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있어서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에서부터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 순간까지 어머니로서의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신 성모님의 모습이다. 우리가 작은 마리아가 될 때, 또 다른 구원의 협력자로서 하느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마리아는 자신의 삶을 항상 그 영혼을 찌를 것이라는(루가 2,35) 시메온의 예언된 예리한 칼에 대한 전망 속에서 살았다. 이 칼이 바로 그의 십자가이다. 이는 이미 파스카 축제 후에 성전에 남아있던 예수를 잃어버림으로 시작되었다(루가 2,41-52). 그리고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에 또한 마리아도 어떤 모습으로 예수께서 가져오신 보편적 형제애를 이룰지를 배우기 위해 당신의 “학교”에서 형성되어야 했다. 그것은 항상 “얻기”위해서 “잃어버림”의 삼위일체적 역동성에 더욱 이끌 것이다.
마리아의 생애에서 절정의 그리고 더욱 고통스러운 순간은 그녀가 십자가의 발 앞에 있으면서 예수의 외침을 들을 때였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마르 15,34). 가장 큰 잃어버림의 순간이다. 십자가 밑의 마리아의 고통은 아들의 고통과 일치한다. 아들의 외침은 당신이 전적으로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일치를 재건하기 위해 인간적 조건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사랑의 표현이며 아버지께 대한 영원한 응답의 반향이다.
마리아의 침묵의 외침은 당신 아들의 버림에 대한 피조물의 메아리이다. 이 순간에 그녀의 참 정체성이 실현되었다. 당신 아들의 “동반자”가 되도록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셨고, 이제 처신한 것이 무엇인지 깊은 곳까지 계시되었다. 마리아는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아들에게 주어진, 아들이 자신의 버림받음으로 실현할 구원된 새로운 인류와 피조물의 가시적 표징으로 예수 앞에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승리에서 또한 자신을 떼어놓아야 한다. 그분은 마리아를 더 이상 어머니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또 마리아는 가장 위대한 보물, 그녀 안에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첫 번 잉태의 결실인 아들에게서 떨어져야 한다. 지상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행위는 실제로 마리아의 모성을 다른 아들, 전 인류를 대표하는 요한에게로 옮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 요한복음이 가리키듯이 마리아에게는 요한과 함께 십자가의 발 앞에 있음으로써 두 번째 잉태가 실현된다. 그녀의 고통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쇄신되고 예수가 된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마리아는 이제 당신의 아들을 잃어야 하는 아픔까지 겪으신다. 아들이 죽는 것보다도 이제 다른 아들을 가지시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잉태라는 것이다. 그로써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마리아는 이제 예수님의 어머니로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공동체의 어머니가 되심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관계에서 형성되는 관계이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5)라는 말씀의 확인이라고 하겠다. “자기 집에”라는 표현은 단순히 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말한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든 삶을 함께 했다는 의미이다. “모셨다”라는 표현은 제자가 마리아에게 모든 것을 개방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마리아와 제자 사이에 새롭게 맺은 가족관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오늘 이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더욱 마리아의 삶을 본받고, 이 어머니의 고통을 우리도 함께 하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참된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며 도우심을 구하도록 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부속가>
1. 아들예수 높이달린 십자곁에 성모서서 비통하게 우시네.
2. 섧고설운 슬픔고통 성모성심 칼에찔려 참혹하게 뚫렸네.
3. 독생성자 수난하니 여인중에 복된성모 애간장이 다녹네.
4. 아들수난 보는성모 맘저미는 아픔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5. 예수모친 이런고통 지켜보는 우리죄인 누가울지 않으리?
6. 십자가의 아들보며 함께받는 성모고통 누가슬퍼 않으리?
7. 우리죄로 채찍모욕 당하시는 아들예수 성모슬피 보시네.
8. 기진하여 버려진채 죽어가는 아들보고 애처로이 우시네.
9. 사랑의샘 동정성모 저희들도 슬퍼하며 함께울게 하소서.
10. 그리스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제마음에 불이타게 하소서.
11.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맘속에 주님상처 깊이새겨 주소서.
12. 저를위해 상처입고 수난하신 주님고통 제게나눠 주소서.
13. 사는동안 십자고통 성모님과 아파하며 같이울게 하소서.
14. 십자곁에 저도서서 성모님과 한맘으로 슬피울게 하소서.
15. 동정중의 동정이신 성모님의 크신슬픔 저도울게 하소서.
16. 주님상처 깊이새겨 그리스도 수난죽음 지고가게 하소서.
17. 저희들도 아들상처 십자가위 흘린피로 흠뻑젖게 하소서.
18. 동정성모 심판날에 영원형벌 불속에서 저를지켜 주소서.
19. 그리스도 수난공로 십자가의 은총으로 보호하여 주소서.
20. 이몸죽어 제영혼이 천국영광 주예수님 만나뵙게 하소서. 아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묵상
지난해에 세상을 떠난 소설가 박완서 씨는 남편과 사별한 지 일 년도 채 안 되어 외아들을 잃었습니다. 26세밖에 안 된 외아들이 죽자 그녀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벽에 달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너무도 화가 나 그것을 땅바닥에 던져 버렸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들을 데리고 가신 하느님을 그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긴 세월 동안 하느님을 원망하고 증오하던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온종일 하느님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하느님,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殺意), 내 살의를 위해서도 하느님은 계셔야만 해.”
시간이 흘러 그녀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며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때 나에게 포악을 부리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하느님께서 안 계셨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가끔 생각해 봅니다. 살기는 살았겠지요. 그러나 지금보다 훨씬 더 불쌍하게 살았으리라는 것만은 환히 보이는 듯합니다.” 그녀가 하느님을 원망하고 울부짖을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 박히시는 아드님을 보러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아드님께서 겪으시는 고통 하나하나가 어머님의 마음을 찔러 꿰뚫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사람들의 미움과 증오가 끝까지 아드님을 괴롭히는 그 자리에 고통을 참으며 아드님과 함께하셨습니다. 성모님을 그토록 강하게 만든 것은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믿음, 이 믿음이 성모님께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첫댓글 우리들 이야기에 있는<비발디>슬픔의 성모 "Stabat Mater"를 들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