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부천개혁교회에서 2024년 겨울사경회를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종교개혁사' 강의를 병행하여 '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주제로 1월 13일(토요일)-14일(주일)에 가지며 강의한 내용입니다. 강사는 고경태 목사님(주님의 교회, 조직신학 교수)입니다. 네 번째 시간인 4강은 ' 때가 찬 종교개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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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
목 차
1.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개혁 진영이란
2.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3. 종교개혁 대략
4. 때가 찬 종교개혁
5. 루터의 종교개혁
6. 칼빈(Jhon Calvin, 1509-1564)의 종교개혁
7.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8.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9. 재세례파와 신령주의(신비주의)
10. 로마 카톨릭주의와 세르베투스주의(소시니안)
11. 도르트 총회(1618-1619: the Synod of Dordrecht (Dort) in 1618-1619)
12.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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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사경회 첫째 날 : 네 번째 시간 -
4강 때가 찬 종교개혁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이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현되는 참 교회에 대한 충성이고 열망이다. 그런데 교회가 그것을 막았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은 현상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있었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의 성급함이 1세기 교회에만이 아니라 어느 때에 교회에 있었고, 21세기 교회에도 있다. 복음을 역행하는 다른 복음의 위협에서 복음으로 교회를 지키는 것은 복음의 사람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중세기 십자군 전쟁은 1095-1291까지 약 300년 동안 진행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서방교회와 이슬람의 충돌인데, 서방교회가 동방교회, 비잔티움의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일도 발생했다(4차 십자군 원정, 1202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제국에 의해서 1453년에 멸망되었다. 성상파괴론자 1만 5,000여명은 튀르크 군에 편재되어 콘스탄티노플에 창과 화살을 겨눴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기독교 제국(Christendom) 몰락의 시작이다. 그러나 유럽 지역으로 많은 비잔티움의 교회사역자와 다수의 사본이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7-1457)는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Ι, 274-337)가 교황 실베스테르(Sylvester Ι, 314~335)에게 넘겨주었다고 알려진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寄進狀: 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1440)" 문서가 조작된 위서임을 밝혔다. 십자군전쟁으로 활발해진 이동과 교역으로 부의 이동이 촉진되었고, 문화 이동으로 새로운 시대, 르네상스(Renaissance, 문예부흥: 다시(re) 태어남(naissance, 재생)1)가 14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르네상스는 사회 문화(학문과 예술) 전 분야에서 발흥했다.
흑사병(Black Death)은 1347년부터 1351년 사이, 약 3년 동안 2천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다. 쥐와 벼룩을 통해 전염되는 흑사병은 유라시아 서부 일대를 휩쓸면서 당시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인구의 60%가 감염되었고, 치사율은 30~60%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흑사병은 16세기에도 꾸준하게 유지되었다. 종교개혁가들도 흑사병 상황에서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1527년 루터는 치명적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것인가?라는 팸플릿을 출판했다. 이것은 루터가 브레스라우의 목사인 요한 헤스로부터 흑사병이 덮칠 때 그리스도인이 도망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한 글이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전염병은 하나님이 내린 형벌이기 때문에, 그것을 피해 도망하는 것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신앙이라고 주장했다. 루터는 전염병조차도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퍼뜨리는 것은 마귀의 행동이라고 말하며, 전염병에 대한 조치와 치료를 위해서 노력했다. 1568-1571년 제네바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3,000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로마 교구의 중심 건물인 베드로 성당을 건축한 일이다. 역사에서 무리한 전쟁과 무리한 건축 사업은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주요 요인이다.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Pope Julius II, 1443-1513)가 베드로 성당 재건축 계획을 세우고 설계안을 공모한 결과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의 작품이 뽑혔다. 이 작업은 1676년에 종결되었다. 율리우스 2세는 대성당 신축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1506년 면죄부를 발행했다. 뒤를 이은 레오 10세(Pope Leo X, 1475-1521)도 면죄부를 발행했는데, 신성로마제국에서 면죄부 발행이 성행했다. 교황청 조직에서는 성직 매매가 성행했다. 마틴 루터는 ‘면죄부가 죄의 완벽한 사함을 준다’는 훈령 19조에 대해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교회당 정문에 게시하며, 종교개혁의 선을 확증시켰다. 이후로 로마 교황주의에 항의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개신교, 중, 抗罗宗)”는 “루터주의”로 불리기도 했다.
※ 왜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기점을 1517년 10월 31일로 보는가?
그것은 마르틴 루터(1483-1546)가 1520년 보름스 회의(Diet of Worms)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았기 때문이다. 루터가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를 계기로 로마 카톨릭주의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면죄부, 죄사함에 대한 질의),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이신칭의, 오직 믿음으로 구원얻음,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과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럼에도 종교개혁의 시점을 1517년 10월 31일로 세운 것은 루터가 개혁 사상으로 등장한 최초의 일이고, 95개조 반박문이 유럽으로 확산되며 개혁 사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 때 우리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해서 말한다. 금속활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었다고 한다(직지심경. 1377년). 그런데 세계적으로 금속활자는 구텐베르크로 알려지고 있다(1455년). 그것은 영향력에 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로 정보전달의 혁명을 가져왔다. 개혁가들이 집필한 원고는 인쇄되어 유럽으로 보급되어 정보 전달 방법과 속도에 혁명을 가져온 것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기술이다. ※ 우광훈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직지코드’(2017년)에서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고려 인쇄술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당시의 상황을 짚어나가는 추적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1333년 교황 요한 22세가 니콜라우스 신부를 캄발리크(중국 베이징) 대주교로 임명하며 들려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바티칸 비밀 수장고에서 발견된 교황의 편지 필사본에, “고려왕이 우리가 보낸 그리스도인들을 환대해줘서 기쁘다”는 문장이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기점은 1517년 10월 31일이다. 장로파와 감리파가 대다수인 한국 개신교에서 종교개혁기념일로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시점으로 세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루터가 비텐베르크 예배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는가?
이 사건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다소 논의가 있다. 루터가 95개 조항을 직접 본인이 내걸었다고 언급한 증거자료가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에피소드에 대한 관심은 역사를 보는 한 관점에 대한 훈련으로 가치가 있을 뿐, 학문적 가치는 부족하다.
첫째로는 루터가 직접 논제들을 게시판에 내 걸었다는 주장이다. 이것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멜랑톤이다. 그는 루터가 사망한 후 몇 달 뒤에, 루터의 저작물들 중에서 중요한 것들을 모아서 2권으로 출판했는데, 책 서문에서 루터가 성문에 내 걸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멜랑톤은 당시 현장에 없었다.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에 부름을 받고 교수로 가르치기 위해서 이사를 온 것은 1518년 8월이었다. 그래서 멜랑톤의 주장은 신빙성이 부족하다.
둘째로 제기된 학설은 루터가 게시판에 내다 걸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사건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에서 나온 것이다. 로마 카톨릭에 속한 독일 역사학자 이셀로흐(Erwin Iserloh, 1915-1996)는 루터가 95개 조항을 교회당에다가 걸어놓은 것이 아니라, 고위 성직자들에게 편지로만 보냈다고 주장했다. 교회의 공적인 사건이 아니라 개인적인 항의와 시정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셋째 주장은 이런 논쟁들을 검토한 후, 루터의 비서 혹은 학교 직원이 게시판에 부착시켰다는 주장이다. 루터가 반박문을 직접 게시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내다 걸었다고 하더라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당시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들은 토론 주제를 대학교회 게시판에 내걸고 토론에 초대했었다. 그런데 토론 주제를 게시하는 일은 주로 실무적인 일을 담당했던 학교 교직원이 수행했다. 헤르만 셀더하위스(Herman Selderhuis, 1961- :<루터를 말하다>.신호섭 역, 세움북스, 2016)는 루터 전기에서 이런 행정적인 업무를 수행했던 교직원이 토론 주제를 걸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주장에는 루터의 비서였던 게오르그 뢰러(Georg Rörer. 1492-1557)가 1540년 루터의 신약성경 개정판에 남겨놓은 기록에 보면, 루터가 공식문서를 알리는 방식으로 성벽교회에 게시판에 내걸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11월 1일은 만성절이자 공휴일이었으므로, 하루 전에 깊은 신학적 토론을 하기에는 적합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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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네상스 시기 유럽 각지에서 희랍, 로마의 고전을 연구가 성행함. 인간의 존엄, 개인의 경건과 윤리생활,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인문주의(Humanism)가 태동. 종교개혁의 하나의 배경 : 1) 새로운 인간성에 대해서, 피코 델라 미란돌라, 「인간의 존엄성」에서 운명의 주인이 자신임을 선언; (2) 중세교회의 모순과 부도덕 풍자에 관해서, 에라스무스, 「바보 예찬」을 통해 교회를 풍자; 3) 고전에 대한 문헌비판함; 로렌조 발라, 「콘스탄틴의 기증 문서」가 가짜임을 밝혀냄; 4) 타 종교에 대한 관용에 대해서,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의 세계 종교가 함께 예배하는 사원 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