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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생 본래의 면목(面目)을 되찾기 위하여 번뇌와 진로(塵勞)가 전부인 이러한 인생을 거부한다.”
“나는 인생 본래의 영지(靈知)를 되찾기 위하여 생로(生老)와 병사(病死)가 전부인 이러한 인생을 거부한다.”
“나는 인생 본래의 평등(平等)을 되찾기 위하여 기복(祈福)과 구명(求命)이 전부인 이러한 인생을 거부한다.”
‘허공으로서의 나’를 근간으로 삼아 전통적인 화두의 방편을 개혁해 ‘새말귀’를 제시함으로써 ‘거사풍’을 떨쳤던 백봉 김기추 거사의 인생선언문이다. 백봉 거사의 인생선언문은 곧 세간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착하는 삶의 모습을 개혁함으로써 자유인으로 세상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거사풍을 떨치며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던 백봉 김기추 거사. 그는 중국선종의 6조 혜능 대사가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금강경’ 구절에서 단박에 깨달았듯, 무(無)자 화두를 든 지 1년도 안되어 ‘확철대오’ 함으로써 돈오를 체현하고도 세간에 머물며 재가불자들의 공부를 이끌어가면서 거사풍 확립에 주력했던 선지식이다.
1908년 부산에서 태어난 백봉은 56세에 이르기까지 불교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고등학교 때 일제의 부당한 처사에 반발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 처분을 받고 학업을 중단한 그는 이후 일제강점기에 항일 민족운동을 펼치면서 그리고 광복 후엔 정치에 몸을 담았다가 몇 번이나 투옥되는 경험을 했다. 특히 만주에서는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생사의 기로에 서는 위험천만한 순간을 맞기도 했다.
이후로도 불교와 특별한 인연이 없었던 그는 지인의 권유로 찾은 절에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무(無)’자 화두를 받아 든 이래 정진을 거듭하던 1964년 1월 어느날 도반들과 함께 수행하던 중 아랫마을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분명허이/ 한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물은 물은 뫼는 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라는 깨달음의 게송을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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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봉 거사는 이를 두고 훗날 “당시 내 심경은 허공이 내 몸이었어요. 그러니 욕계, 색계, 무색계, 천당, 지옥이 다 허공 속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마음을 키우려면 이 육신을 내버려야 해요. 사실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는 꼭 허공과 한가지입니다. 이 허공이 ‘나’라는 느낌이 들면 확 달라집니다. 우리가 중생놀이를 하는 것도 무정물인 이 육신 때문에 중생놀이를 하는 것이고, 우리가 공부를 해서 부처가 되려는 것도 이 육신을 방하착해서 부처가 되는 거예요”라고 설명했다.
이후 승가에까지 소식이 전해져 청담 스님 등이 출가를 권유했으나, “불법이 머리를 깎고 안 깎고에 있지 않다”며 재가에서 법을 펴기로 하고 1985년 입적할 때까지 쉼 없는 설법으로 한국불교에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허공법문’은 이러한 백봉 거사가 철저하게 자신의 살림살이를 토대로 막힘없이 설법한 내용을 엮은 법문집이다. ‘허공으로서의 나’를 모든 상대성을 넘어선 절대적이고 주체적인 근원으로 제시한 백봉 거사는 “선지식을 만나야겠다고 간절히 생각하면 늦고 빠름이 있을지언정 인연이 닿으면 만나게 된다”며 마음 안에서 선지식 찾기를 권했고, “여러분이 어쩌다 잘못한 탓으로 여러분 자신이 되돌아서 여러분의 부처를 죽이는 것”이라며 부처를 해방시키라고 경책하기도 했다.
스님들로부터 ‘부처님 당시에는 유마 거사가 있었고, 중국에는 방거사가 있었고, 지금 우리나라에는 백봉 거사가 있다’는 찬사를 받았던 백봉 거사가 들려주는 가르침은 ‘누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