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몸이 늙어가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마음이 늙어가는 것일까요?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마음보다 몸이 먼저 늙어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현실과 달리 환상을 가지는지도 모릅니다. 하기야 젊은 몸으로도 환상은 존재합니다.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을 채우려는 욕망입니다. 그렇다고 환상을 좇아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넘을 수 없는 한계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지요. 구태여 법을 따지지 않아도 우리의 이성이 제한하는 규약이 있지요. 어쩌면 환상은 그 규제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의 산물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욕망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채우고 싶어서 환상이라도 가지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아내의 헌신만큼이나 남편도 수년을 힘썼습니다. 그리고 언제고 떠나야 할 길이었기에 그 날은 왔습니다. 아내는 그렇게 떠났지요. 떠난 사람은 다른 세상으로 갔습니다. 미련을 가져봐야 돌아올 리도 없고 남은 사람은 다시 험난한 세상과 마주해야 합니다. 살아있기에 욕망은 살아서 꿈틀댑니다. 피할 수가 없는 일이지요. 때로는 몸과 마음이 따로 반응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통제될 수 있기에 제대로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불리겠지요. 채워지는 기쁨이 어딘가에는 남아있기에 그래도 살 만합니다.
한 평생 몸을 섞어가며 고락을 함께 해온 아내입니다. 그러면서도 딸의 질문을 받았을 때는 섬뜩했습니다. 아빠는 엄마를 사랑한 적이 있어요? 사랑 없이 병수발이 가능할까?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사랑만큼 강한 책임이라는 것이 있으니 말입니다. 책임감으로도 희생을 감수합니다. 사랑 때문에 감수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적으로는 사랑에 무게가 큽니다. 하지만 공적으로는 사랑보다 책임이 훨씬 무거울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그만한 보상도 따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랑에 보상이 따른다면 그 사랑은 무게가 그만큼 줄어들고 자칫 비난까지 따라옵니다.
자식도 외면하는 병수발을 기꺼이 감수하면서도 그 딸에게서 그런 질문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곱씹어봅니다. 정말 사랑했을까?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랑하는데 그 아내 위로 젊은 여자가 환상으로 등장할 수 있을까? 미안하지요. 그래서는 안 되는데 떠다니는 환상을 막을 길은 없습니다. 요동치는 감정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도록 통제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가능합니다. 한 순간으로 끝나는 전쟁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어제 참았으면 오늘도 참아야 하고 내일도 견뎌내야 합니다. 살아있기에 감당해야 하는 책임입니다.
아내의 유품을 정리합니다. 아내는 이미 쓸 만한 것은 구호품으로 보내고 남은 것은 소각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정리하여 불에 던집니다. 오래된 지갑이 나옵니다. 텅 빈 듯한데 속에 무엇이 비쳐서 꺼내봅니다. 젊었을 적 자기가 담겨있는 사진입니다. 이것을 그렇게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나? 아내의 사랑이 묻어나온 듯 느껴집니다. 괜스레 미안해집니다. 그렇게 사랑해주고 떠났나보다 생각하니 마음이 더 싸해집니다. 그래서 젊은 여직원이 작별 인사 차 그 먼 길을 일부러 찾아왔음에도 그 자리를 피합니다. 아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요 사랑의 표시입니다. 그래, 나의 마음에도 아직은 당신이 남아 있다오.
사람의 욕망이란 어쩔 수 없습니다. 하기는 아내를 간병하며 억누르고 살아온 시간이 본능을 부채질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몸은 마음과 다르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장례식장에서도 먹어야 하고 죽음의 슬픔을 당해도 몸 안의 호르몬이 쉼 없이 분비되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배고프고 채워지지 않은 욕망의 부르짖음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깊어갈 수 있지요. 그냥 외면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감정의 흐름에 몸이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기준을 세워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감정에 지배될 수도 있고 반대로 몸에 지배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고 따질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 사람의 특성일 테니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나름 규범을 만들기도 합니다.
수 년 동안 아내를 간병하면서 다른 여자를 연모합니다. 양심에서는 정죄한다고 해도 기울어지는 마음을 제어하기는 어렵습니다. 머릿속을 오가는 생각과 떠오르는 환상까지 막을 수 있을까요? 누군가 그랬습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틀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있다.’ 마음속의 전쟁을 보는 듯합니다. 애처롭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어느 특별한 사람만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래서 함께 그 마음의 동선을 따라갑니다. 아쉬움과 탄식이 함께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을 누구나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영화 ‘화장’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배우 안성기의 연기가 일품이고 환자 역할을 감당한 여배우 김호정의 헌신에 절로 감사가 나옵니다. 제목에도 뜻이 스며 있답니다. 화장(火葬) - 아내의 장례를 생각할 수도 있고, 화장(化粧) - 남자의 일(직업)과 연관된 연모하는 젊은 여자의 화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가 겹쳐서 영화를 이끌어가지요. 하나는 여자가 떠나고 또 하나는 여자를 떠나보냅니다. 그 아픔은 일과 속으로 묻혀 들어갑니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