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치료이론가들은 사회적 성(젠더) 쟁점과 페미니스트의 비판, 즉 거시적 이론의 개발에서 사소한, 그런 미시적 이론으로 비평을 보는 것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관점은 페미니스트 이론이 말하는 문제와 즉, 가족과 사회 안에서 여성의 종속적인 지위, 동질적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한 동질성은 우리에게 많은 수준의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회적 성(젠더)에 대한 생각과 지각의 독특한 방식들이 어떠한가를 설명한다. 젠더가 사소한 쟁점으로 존재한다 라기보다는, 오히려 젠더는 조직되는 세계가 기본적인 범주이다. 가족치료는 다른 분야와 이론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은 젠더에 대해서 기본적인 쟁점을 다룰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치료이론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 제안하는 페미니스트 이론이라는 것은 다른 렌즈로 제공된 현실의 선택적인 구조이다. 페미니즘은 사회적 변화를 요청하는데 있어서 미래학자이고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변화이다. 가족은 일차적인 이득이고, 여성의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 어머니의 일에 대한 근원뿐만 아니라 여성의 노동에 초점을 맞추는 페미니스트들은 가족과 관련되어 있다. 사람들이 사회에서 역할을 형성함으로써 가족은 사회성의 욕구가 충족된다. 페미니스트는 여성 억압을 바탕으로 성별간의 사회적으로 구성된 역할 차이를 본다.
구성된 현실(A Constructed Reality)
우리의 현실은 구성된 현실(실재)이다. Hume의 관찰에 의하면, 경험으로부터의 배운다는 것은 미래는 과거를 닮을 것이라는 것이다. 치료자가 세계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법은 가족치료에서 가장 강력한 요인이다. 치료자의 중립성을 가정함에도 불구하고, 가족치료는 가치-자유롭지 못하고, 가족치료는 정신역동적 입장을 포함하거나 체계적 접근을 포함한다. 중립성 그 자체조차 가치를 나타낸다. 치료적 중립의 생각은 모든 치료자가 좋은 기능하기와 나쁜 기능하기, 성장과 침체, 남성과 여성의 규범적인 개념을 갖는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이것들은 치료적 체계에 깊이 간직되어 있고, 사실, 서구의 사고에서 거의 논평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가족치료는 지금 성공적으로 발전되고 있으며, 국제적인 기업조차도, 사업으로 한다. 한때, 가족치료는 외로운 길을 따라 가는 것으로 지각했다. 현재, 우리는 중서부 고속도로를 곧바로 달리는 것과 같이, 자동차로 자동적으로 도로를 순항하는 것이고, 세상의 시름을 잊는 입장이며, 운전자의 좌석에 다리를 접는 것과 같이 기타 등등 이다. 가족치료는, 미래로 번창하는 것이고, 세상의 시름을 잊는 입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의 현자, Lao Tzu(노자)는 “사물을 만들려는 시도는 커다란 어려움들 속에서 쉽게 끝난다.”라고 말했다. 어려움들 중에 하나는 새로운 개념에 반응하는 가족치료 분야의 무능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 어떤 기능으로 우리의 이론이 공헌하는가? 물어야만 한다. 아마도 그들은 단지 과거를 보존한다. 나는 가족치료에서 젠더 편향을 이끌고 가족을 구성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방법에 영향을 미치는 가족의 몇몇 양상을 재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분법적인 젠더 역할에 대한 몇몇 질문을 제안할 것이다.
가족의 구조(The Construction of The Family)
의미와 상징은 가족이 과거를 만들고 미래를 조직하는 것과 관련되었다. 오늘날 가족은 뜨거운 정치적 쟁점이 되어오고 있는데, 아마 일하는(직장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및 학령기의 두 자녀로 구성된 전통적인 가족은 아직도 미국 가구의 10%이하이기 때문이다.
현대 가족은, 19세기 초부터, 산업혁명으로 일과 가정이 분리되었을 때, 최근 사회적으로 조작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더 많이 통제될 것이고, 생산기술은 가정에 있었던 작은 작업장을 넘어서 이동하였다. 19세기 초 빈곤한 여성들에 대한, 노동조합이 형성되기 이전에 거대한 제조 공장 노동자들의 대부분이 여성들과 아이들이었을 때, “여성의 공간은 집안이다”가 아니라, “여성의 공간은 제조 공장이다”라는 속담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한 번도 옛날을 그리워함을 알지 못했다고 과거를 보는데, 우리가 어리석고 가혹한 매일의 삶과 젊음의 억압을 잊어버렸고 안정된 가족과 관련된 활기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Lasch(1977)같은 사회 비평가들에 의해 천국으로 이상화한 가족은 가부장적인 관점이다. 남성이 일차적인 임금 노동자가 되었기 때문에, 가정은 그들을 위한 휴식과 여가의 장소로 구성되었다. 그 당시, 여성들은 집안의 허드렛일을 담당하였다. 오늘날, 미국의 어머니는 몇몇 어머니가 집안일과 육아에 대하여 최소한의 도움을 준다.
주부들이 산업화 이전의 시기에 남아있는사람이라고 묘사되었는데, 가족의 개인적인 신분으로 일을 하는 것은 시장에서 교환가치가 없는 것이다. 여성의 억압은 종종 무관심하고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집안일의 판에 박힌 일과 연관된다.
연속과 변화(Continuity and Change)
1950년대, 가족치료를 시작했을 때, 이전 또는 다음 시기의 가족과는 다른 독특한 가족이 존재하였다; 사람들은 더 젊은 나이에 결혼하였고 더 큰 대가족들의 형태를 가졌다. 오늘날의 한 자녀 가족과 두 자녀의 가족은 미국에서 장기간의 출생률의 감소와 함께 더 많이 일치한다. 낙태는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사실상, 낙태는 지난 몇 세기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있었고, 오늘날과 같은 정도의 임신율로 나타나고 있으며, 중요한 대다수는 결혼한 여자들에 의해 추구되었다. 현재, 한 부모와 살고 있는 모든 아이들의 1/5은, 아마도 부분적으로 모든 출생의 25%는 지금 미혼모로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퍼진 가족의 유형은 두 명의 임금 노동자, 두 명의 부모 가족이다.
금세기 가족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는 붕괴된 가족들이 아니며, 고용된 노동의 세계로 여성의 참가를 제외하고는, 과거에 광범위하게 퍼졌던 유기와 이른 죽음 때문이다. 비록 대다수가 성-인종의 차별과 저임금의 직업으로 고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미국인의 56%가 가정 밖에서 일한다. 광범위하게 퍼진 양육의 부족은 미국 여성들이 그들의 기타 직업을 갖기 때문에 바로 가정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균형 잡히지 않는 일과 가족의 경계들은 가족들이나 치료자들에 의해 문제시 되지 않는 것으로 그렇게 넓게 수용된다. 일로써 여성들에 대한 가족 책임의 강요는 노동자로서 여성의 부정적인 평가를 야기한 반면에, 남성들에 대한 다른 방향으로 침투 경계는 그들이 가정 일을 가질 수 있거나 직업적인 스트레스를 회복하기 위한 가족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의 사생활은 고립을 야기하고 여성의 우세는 공적인 감독에 영향을 덜 받았다. 우리는 가족에서 묵인된 모르는 사람 사이의 폭력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내들에게 남편의 폭행은 강간, 폭력강도 및 자동적으로 결합된 우연한사건보다 의학적 치료를 요청할 더 많은 상처의 결과를 가져온다. 살해된 모든 여성의 1/3은 그들의 남편이나 남자친구들에 의해 살해된다. 그러나 일부 가족치료자들은 그들의 이론의 관점에서 희생자가 없음을 주장한다.
페미니즘은 첫 번째 남성으로부터의 자유인가? Weitzman(1985)의 최근 연구는 가족의 와해는 여성과 아이들에게 빈곤을 주지만 남성에게 해방을 제공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혼한 여성들과 그들의 자녀는 새로운 최하층이 되는데, 동시에 표준적인 생계에 있어서 73%의 감소를 겪고 있으며, 이혼한 남성은 42%의 증가를 경험하고 있다.
가족의 개인적인 영역이 공적 생활의 압력으로부터의 도피처가 되는 것이 라기보다는 오히려, 공적 생활이 오늘날 가족 구성원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공공의 생활은 익명을 제공할 것이고, 가족생활을 특징짓는 강렬, 친밀 및 책임으로부터의 도피뿐만 아니,라 가족 구성원에게 할당된 정체성을 넘어 살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할 것이다.
유연기의 끝(The End of Childhood)
기존의 핵가족들, 많은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 없이 이웃에서 자라고 있다. 오늘날 아이들을 갖는 대신에, 많은 부부들은 개인적인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은 역시 구별된 존재를 경험할 것이다. 초기에 젠더의 차이를 배우는 것은 시작이고, 그것은 소녀와 소년 모두에 대한 젠더 고정관념을 가르치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에게 더 있다.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부재를 예상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 거의 불평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어머니가 멀리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로이 그들의 분노를 표현한다. Pleck(1977)은 어머니의 직업(일)이 장기간이고 부정확하게 심리적으로 아이들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직업(일)이 아이들에게 해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모성애의 신화(The Math of Motherhood)
아버지다움(아버지 역할)과 어머니다움(어머니 역할)은 다르다: 아버지는 돈을 버는 것이고, 어머니는 양육과 보살핌이다. 미국사회에서 어머니다움에 대한 강조는 특히 미국의 관점에서는 아이를 순진하고 상처받기 쉬운 자식으로 보고 생의 초기의 영향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중요한 잠재적인 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Kagan(1984)의 연구와 같이 이 끈기의 관점은 최근의 연구 방법으로 거의 주어지지 않았고, 대다수 아이들에게는 현저하게 인내를 요한다고 주장하고, 초기의 영향이 개인의 발달에서 나중의 영향을 지배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성의 주요한 정체성은 어머니의 역할과 동일하지만, 오늘날 여성들은 어머니의 역할에 있어서 그들의 삶의 작은 부분을 제외하고 소비한다. 어머니의 이상화와 어머니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모두 강력한 어머니에서 양측면의 신념이 있다. 모든 중대한 심리적 어려움의 원인으로써 우세한-어머니/무력한-아버지의 공식화는 가정에서 여성에게 할당한 책임에 대한 관심 없이 전형적으로 만들어진다. 사회는 여성에 대한 평등을 지지하기 시작하고 있으나,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직 아니다. 여성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이상화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어머니의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일관된 증거들이 있는데, 실제 많은 가족치료자들은 감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개개의 아이의 출생과 함께, 가족에서 어머니의 힘은 남편의 힘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Chodorow(1978)와 Dinnerstein(1976)은 여성의 두려움은 유년기의 무력감의 결과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아이들이 가지는 남성의 두려움을 간과한 것이다. 아버지는 종종 그들의 외진 곳에 떨어져 있어서 대단히 문외한 이지만, 크기가 크고 목소리가 큰, 아이들을 위한 정말 비현실적인 낯선 사람은 아니다. 아버지는 소년과 소녀 모두에게 낯선 사람일뿐만 아니라 경쟁자가 될 수도 있다. 일부 치료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였다. 어머니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그들이 어머니를 통제할 수 있는 가족 치료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시사하고 있다.
결혼 상태(The Marital State)
많은 여자들이 베이비붐 세대집단에서 남편을 찾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미국에서 선취권이 있는 상태로 남아있다. 결혼 문제는 사람들이 치료에 가져오는 가장 흔한 문제이지만, Gurman와 Klein(1980)의 관찰에 의하면, 결혼의 내부에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하다. 현재 자기실현에 대한 강조는 불행한 결혼에 대한 더 적은 관용을 의미하였다. 프로이트의 시기에, 정신분석은 한 해를 계속하였고 결혼은 평생을 지속하였다는 것은 흥미 있다. 오늘날 그것은 바로 정반대이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간의 신분 차이를 확실하게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그것은 결혼에 있어서 왜 남자가 전형적으로 더 크고, 더 나이 먹고, 더 많은 교육, 더 거친, 더 허스키하고 더 높은 사회적 계급이어야 하는가이다. 우리가 생소한 것으로 간주하는 상태가 아닌 것이 결혼이다. 치료자들은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표준적인 생활이 주로 그들과 관련된 남자로부터 유래되었는데, 첫 번째 그들의 아버지, 다음은 그들의 남편으로부터 파생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고 한다. 나이가 많은 여자, 독신 여자 및 이혼한 어머니와 같이 남자를 가지지 않는 여자들은, 낮은 지위를 가지고 가장 가난한 삶을 사는 것 같다.
결혼은 정신적 건강과 신체적 건강 모두의 점에서 보면, 남자에 대해 보호적인 효과를 갖는 반면에 여자에 대해 불리한 효과를 갖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Miller(1976)는 결혼에 있어서 여자들은 남자를 위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자기의 본성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기술하였다. 개인적으로 남성들은 그들이 강력하게 느끼지 않는다고 호소할지라도, 남성다움의 특권을 포기하려고 노력하는 남성을 찾는 것은 어렵다. 지금까지 자발적으로 힘을 포기했던 우세한 집단은 없다.
가족치료에서 편향(Bias in Family Therapy)
치료적 접근에서 가족치료의 전통적인 구조는 사회의 남성 규준과 여성 상보성을 반영하는 것이 바탕이 된다. 치료적 모델은 광범위하게 퍼진 젠더 편향을 드러내는 가족들과 작업하기 위하여 개발된 것이다. 그러한 편향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편향의 한 형태는 사람 집단 간의 차이를 지나치게 과장한다. 이것은 알파 편향이라고 부른다. 편향의 다른 형태는 차이가 존재하는데 차이를 무시한다. 이것은 베타 편향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체계이론의 편향이다.
알파 편향의 도식은 여러 가지 점에서 연구에서 가설을 검증하는 것과 유사하다. 가설 검증에 있어서, 알파 또는 1종 오류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유의미한 차이를 보고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베타 또는 2종 오류는 어떤 것이 존재할 때 유의미한 차이를 간과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나는 오류의 확률에 주목하지 않는 것에 “편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오히려 경험의 어떤 면을 강조하기 위한 계획적인 의도이고 다른 면은 지나친다. 여기에 젠더에 대한 생각을 조사하기 위하여 알파-베타 도식이 사용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인종, 계급, 나이 및 기호를 이해하는데 사용된다.
해체된 정신분석(Psychoanalysis Deconstructed)
많은 정신분석의 비평이 있었고 혜택 받지 못한 여자들이 얼마간 있었다; 이들은 지금 상세하게 반복되는 것이 필요치 않다. 프로이트의 여성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 여자를 싫어함, 인간의 규준을 남성다움으로 규정하기, 남성의 인체를 표준으로 하여 여성 발달을 보는 것이 그의 이론의 비평적인 구성요소인데,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족치료자들의 최근 조사에서, 프로이트는 가족치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명의 이론가들 중 두 번째로 평가받은 것은 과장이 없는 사실이다.
정신역동적 이론이 가족치료자들 사이에서 왜 그렇게 영향력이 지속되는가? 원래 정신분석은 환자로서 여성들과 주로 관련되었고, 만약 심리치료가 여성들에게 퍼지는 불행 없이 잔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1922년 John Dewey의 관찰은 오늘날에도 진실로 남아있다.
정신분석가에 의한 성 치료는 인공적인 간이화의 결과와 심리적인 원인의 결과로 나타난 사회적인 변질이 모두 명백하게 보이기 때문에, 대부분 교훈적이다. 작가들, 보통의 남성이 여성들의 심리를 공표하고, 마치 그들이 플라톤 철학의 보편적인 실재(존재)를 다루는 것처럼, 그들이 습관적으로 남성을 개인으로 다룰지라도, 조직과 환경에 의하여 변화하는 것이다.
알파 편향은 정신역동적 이론들에서 표면상 나타나 있고, 여성들의 종속을 무시함으로써 여성들의 심리를 신비화하였다. 에릭슨과 같은 발달 이론가들(1968)은 심리내적 설명에 집중하고 남성이 발달의 바탕이 된다. 정신분석적 이론의 견해의 대상관계에서 조차도 여성은 “객체(대상)”이다. 대상관계 이론은 인간 발달의 유해한 영향으로 어머니에게 중요성을 돌렸다. 어머니는 단지 그들의 아이들에게 맞은 생활을 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하지 않는 사람으로 경험되었다.
프로이트의 유명한 도라(Dora)의 사례는 불행한 두 가족과 관련된 배반의 드라마 이다. 그것은 유혹된 소녀는 유혹자 이다 라는 신념을 포함한 것으로, 여성에 대한 정신분석적 관점을 생생하게 설명한다. 도라는 성역할 고정관념과 일치하는 행동을 거절하는 여성의 중요한 예를 제공한다. 프로이트는 그녀를 매우 독립적인 판단을 하는 젊은 여성으로 묘사하였으며, 더 심각하거나 덜 심각한 연구들과 여성들을 위하여 강연에 참석하는 것에 전념하였다. K씨의 유혹과 그녀가 치료를 중단할 때 프로이트의 의도는 그녀가 저항하는 것이며 그녀에게 “불쾌한 및 원한을 품은”으로 꼬리표를 붙이게 되는 것이다. 도라는 K가족을 직면하였고 K씨의 성적인 구애와 K부인과 그녀 아버지의 정사, 어른들이 부인하는 모든 것을 직면하였다.
치료자들에게 정신역동의 매력은 무의식 너머의 의식, 감정 너머의 이성 아마 그것의 반전이 서구의 으뜸일 것이다. 정신역동 이론은 합리성과 어버이의 교훈의 권위를 공격한다. 은밀한 사건을 찾는 것은, 끝없는 퇴보를 이끄는 조사로 그것의 선입견과 비교된 환자의 경험에서 관심 부족은 명백한 증거이다. 도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녀가 지각한 것에 대한 진실의 확증이고, 그러므로 그녀 자신에 대한 확증이지만, 프로이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환자들은 그들에게 일어난 것이 아닌, 그들의 환상에 의해 질병을 만든다는 이론을 발달시켰다. 대상관계 이론가들은 또한 도라의 상황을 과소평가 할 것이고, 그녀의 문제를 생애 초기 그녀의 어머니와의 관계에 원인을 돌릴 것이다. 프로이트는 도라의 어머니를 결코 만나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를 “(전업)주부의 정신병”으로 진단한다. 가족치료에서 가족에 대한 어머니의 빈번한 비난은 계속된다. 이 가족의 경우 - 도라, 그녀의 어머니, 하녀, K부인 - 문제의 근원으로 도라의 아버지나 K씨가 아닌, 여성들에게 있다고 보는 것에 주목한다.
정신역동 이론은 해체에 주목하고 있는데,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허구이고, 문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은유적이며, 모든 은유는 왜곡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사상(사건)의 근원을 탐색되는 것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 어떤 것을 허구로 간주된다. 알파 편향은 여성들은 믿을 수 없다는 신념을 널리 갖는데서 명백한 증거이다.
체계 이론(Systems Theories)
구조적 접근과 전략적 접근을 포함하고 있는, 가족 체계 치료는, 차이가 존재하는데 차이를 무시하는 베타 편향의 특징이 있다. 체계적 모델은 되풀이되는 결과와 순환하는 인과관계에 초점을 두고, 추상적이고 기계적인 가족의 구조를 만든다고 비난받고 있다. 치료자의 중립적인 지위를 가정하여 문제를 재구성한다. 즉, 치료자의 현실에 대한 구성을 가족에게 가르친다.
더 폭넓은 유리한 점으로, “종합적인 시각”은 벽면 너머 반대편의 연못(해지)을 보는 관점 이상으로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종합적인 시각은 보는데 있어서 실패한 것이다. 벽면을 넘어서 안 보이는 것은 역할, 경계 및 사회의 계층이다. 우리가 가족에 대한 사회, 경제 및 정치적 맥락에 대한 관여 없이 가족의 내적인 기능을 바꾸려고 할 때, 변화하지 않는 가족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회와 공모에 있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수준에서, 가족치료는 “그와 같은 것의 이상”이다.
체계 접근은 세상과 타협하는데 객관적, 활동적, 역사와 관계없는 방법으로 서구의 개념을 반영한다. 사람은 단지 가족 구성원의 미시적인 상호작용에서 봄으로써 가족에 대하여 배울 수 있다는 그들이 취하는 입장 때문에, 그들은 실제로 환원주의적이다. 가족 역기능은 내적인 사상, 가족 내부 문제, 맥락의 독립으로 본다.
최근 조사에서, 가족 치료자들은 구별과 협상을 치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개인과 합리성에 대한 진부한 남성 가치를 나타낸다. 자기에 대한 구별과 해명은 가족의 구조와 사회 변화까지 여성을 위한 이상적인 과업이다. 전형적으로 어머니의 주된 책임으로, 최하위의 목표가 돌보는 것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베타 편향은 가족 구성원은 동등하다는 가정 하에 대상물을 교환하는 거래를 제공하는 치료자들에 있어서 명백한 증거이다. Margolin과 그의 동료들은 여성들이 원하는 변화는 남성들에 의해서 변화하기를 바라는 것보다 덜 쉽게 성취될 것임을 지적하였다. 남성들이 충분한 변화를 느끼게 될 때, 여성들은 불만족스럽게 될 것이며, 여성들이 가지는 더 많은 관계에 대한 염려 때문일 뿐만 아니라, 애정에 대한 여성들의 요구와 이해하기 때문에 남성들이 바라는 행동적 목표보다 덜 쉽게 성취될 것이고 치료자들은 더욱 즉시 파악한다.
힘의 불균형에 따라 조직된 4개의 주요한 축들이 있다: 계급, 인종, 성 및 나이. 이들 중 두 개는 모든 가족 내에 불균형과 관련이 있다: 성(젠더)과 나이. 계층(제)는 Haley(1976)와 Minuchin(1974)과 같은 체계 이론가들에게 중심이지만, 계층(제)에서 지위에 대해서 범주화하는 그들의 표식은 단지 개인의 나이(세대)이다. 이 범주를 제외함으로써 그들은 같은 세대의 여성들과 남성들이 가족 계층에서 반드시 동등한 지위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체한다.
나이와 성(젠더)은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작용한다. 정말, 여성들이 전형적으로 가족 안에서 남성들보다 더 낮은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사회에 의해 성숙한 어른(어린이 같이 순진한)이하로 간주되는데, 아버지와 동맹하기 보다는 오히려 아이와 동맹하는 그녀는 이들 이론들을 취함으로써 그러한 계층(제)에 위반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지 세대 차이에 초점을 맞춘 치료자들은 이미 균형을 잃은 계층을 불균형하도록 시도하고 있다. 사회적인 성, 계층의 결정적인 표식자, 성은 무시되고 있다.
체계적 접근들은 가족 구성원을 순환적인 상보성에서 동등한 상호작용을 하는 일부로 봄으로써, 힘, 자원, 욕구 및 가족 구성원 사이의 흥미에서 오는 차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의 가족에서 남성과 여성이 같은 계층적 수준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러한 이론들은 가족 구성원의 비차별적 치료를 동등한 치료로 간주한다. 따라서 우리는 베타 편향을 가지고 있다: 성(젠더) 차이를 무시함으로써, 치료자는 체계적 접근들을 지지한다.
상반된 성(젠더)의 구조(The Construction of Gender Opposites)
구조주의는 우리가 실체를 알아채지 못한다고 지적 한다; 우리는 그 실체를 만들기 위해서 세계와 상호작용한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우리의 이론들(의견들)은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을 결정한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상반된 측면을 만든다. 우리는 쉽게 일상의 마니교도(이원론자)를 나타내는 이중성에 미끄러져 들어간다. 따라서 우리는 번갈아 가며 서로 각자 상쇄되는 양면성이 있는 지각을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치료 방법에서 상반된 모델의 무가치함을 인식할지라도 남성과 여성에 대한 우리의 이론들에서 “그와 같은 것의 이상”을 발생함으로써, 마치 그것이 현실인 것처럼 우리는 정반대를 받아들인다.
항상 두 가지 측면 이상이 있기 때문에, 문제의 양면을 보는 것은 그것의 해결책으로 예방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만약 우리가 한 가지 방법이 옳고, 다른 방법은 그르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소위 정반대의 그릇된 생각으로 이끌리게 된다.
남성과 여성의 대칭적인 상호허위성은 도전받을 수 있다. Not-a는 반드시 a의 반대만은 아니다. 남성에 대한 반대에서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무엇인가? 남자 또는 겁쟁이? 남자 또는 짐승? 남자 또는 수퍼맨? 남자 또는 아이? 남자 또는 산? 남자 또는 기계? 남자 또는 여자? 반대편은 어느 것인가?
나는 성역할화된 사고가 잘못된 이분법을 이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성 역할에 대하여 정반대 측면의 허위성을 굴복시키는 방법을 지적할 것이다.
성(젠더) 역할: 잘못된 이분법(Gender Roles: A False Dichotomy)
세계의 본질은 복잡함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가정 이외에 단순화함으로써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성-역할 고정관념들은 그러한 단일화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흔히 정반대로 간주되지만, 남성과 여성을 지각한다는 점에서 차이는 남성과 여성의 실제적인 차이보다 더 많이 크게 발견되어진다(Deaux, 1984).
실증적인 문화에서는, 인지적인 차이에 대한 요구는 가치 판단의 자유를 가정하게 된다(Broughton, 1983). 합리성과 독립성 같이, 남성과 관련된 특성은 이상적이며 정신건강의 신호로 간주된다. 비록 여성과 관련된 특징이 상보성으로 나타날지라도, 여성들이 동등하게 평가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불균형이 드러나는데, 행동에 대한 규준은 여성다움이라기보다 오히려 남성다움이다.
30년 전에, Parsons와 Bales(1955)는 남성은 도구적이고 여성은 표현적이라고 진술하였다. Parsons은 이것이 힘과 연결된 성 역할이 어떤지를 기능적으로 설명하였다. 뚜렷한 성 역할의 강조한 다음 정상적인 가족들과 발병이 되는 가족들을 구별하기 위한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들의 역할을 안내한다(Peal, 1975).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계층, 유전학(가계 혈동) 및 전통 안에서 결정적인 사회적 지위로서 명백한 쇠퇴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할지라도, 아직까지 우리는 사회적 장애에 대한 마지막 남아있는 보험으로 성(젠더) 분류법에 집착한다. 현재 성 역할에 대한 논쟁은 다른 학문분야에서 계속되고 있는데, 가족 치료자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무엇이 남성성인가?(What is Masculinity?)
서구 사회에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개인주의의 이상과 자율을 육성하였으나,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한 이상을 만들지는 못했다. 전통적인 남성 역할의 관점은 여성들이 단언, 지력 을 포함하여 및 명백한 성적 관심을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개인주의를 수반하는 이상은 모든 개인의 행동이 그 개인 자신에게 책임을 질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개인의 책임성에 대한 초점은 사회적인 힘을 무시하고, 분열되고 있는 개인을 이끌며, 성공과 실패의 연속을 범주화하였다. 경쟁적인 사회는 결과이다.
남성성은 무리한 활동, 의식주의적 투쟁에 의해 정의되어진다. 남성성은 단지 그러한 활동에 계속적으로 관여함으로써 성취된다. 호메로스의 시간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영웅적 자질의 첫째 요구는 참석자로서 여성을 제외하는 것이다.
지나친 합치성은 성 역할의 결과이다. 성 역할 요구에 대한 위반은 남성에게 더 많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남성은 여성보다 더 많이 규칙을 따른다. 전통적으로 남성 최대의 두려움은 여성처럼 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여성 역할의 관점은 가정에 전심전력하는 것, 다른 것을 통한 삶을 사는 것 및 장식에 대한 스트레스를 포함한 “진정한 남성”을 회피하였다. 그것은 남성처럼 옷을 입는 여성을 “성공을 위한 옷입기(dressed for success)”라고 불리지만 여성처럼 옷을 입은 남성을 “기묘한[이상한]사람(weirdo)”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일부 남자들은 “겁쟁이[무기력한 사람](Wimps)”이라고 부르는 것은 남성다운 스타일로 되돌아가도록 남성을 압박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과거보다 주변에 진정으로 더 좋고 더 민감한 남성은 없다; 아내 구타나 강간이 감소하지 않았고, 가정에서 남성들이 집안일을 한다는 기록도 증가하지 않았다.
여성 관련(Feminine Relatedness)
페미니스트에 의하면, 여성의 민감성을 정의하는데 첫째 임무는 어떤 경우에는 위험스럽게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일반화에 이르게 된다. Dinnerstein(1976)과 Chodorow(1978)의 이론에 의하면,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사회에서 성에 대한 조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의 차이를 본질적인 자연의 일부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 정신분석적 입장은 생애 초기의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서 성격이 형성되어 발달된다고 보았다. -> 이들 이론은 여성-남성의 차이를 사회 학습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시하고 검증되지 않는 가정에 의존 한다.
Gilligan(1982)은 개인의 이중성으로 출발점을 되돌려서,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했을 때 여성은 관계로 말하고, 남성은 원리원칙에 근거하여 평한다. 실제로는 남성과 여성 마찬가지로 원리와 관계 모두를 사용한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데, 그것은 관점의 차이로 표현하면 성별(젠더)의 차이라기보다는 상호작용에 의해서 힘을 가지는 사람에게 초점을 둠으로써 표현된다. Zuk(1972)은 약함은 관계를 지지한 반면에 강함은 법칙과 합리성을 옹호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의 갈등에서, 남편들은 논리를 사용하고, 아내들은 돌봄을 이용한다. 그러나 부모와 아이와의 갈등에서는 어머니를 포함한 부모는 법칙을 강조한다; 아이들은 이해받기 위해 호소한다. 사회는 정서가 아니라 합리성을 보상한다. 그것은 여성 또는 남성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힘을 가지는 사람과 관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와 계층(Opposition and Hierarchy)
남성과 여성은 실제적인 감각이 전혀 없이 반대한 것은 분명하다. 사실, 여성의 역할 개념은 직접적인 상대편이 없다; 남성은 그들의 성별에 의하지 않고 그들이 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남성 제도의 우세함 때문에, 여성들은 실제로 이중 사회화를 받아들인다. 그들은 여성의 하위문화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크게 제외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지배적인 남성 문화에서 사회화된 되었다.
지배적인 우세함은 남성이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난 본성의 결과로 가정한다. 이중 사회화는 여성에게 인위적인 이중법의 가치를 통찰하게 해 줄뿐 아니라, 여성이 남성스러운 문화 속으로 동화를 시도하기 위하여 임시적으로 일을 시도하는 것이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단순, 우아 및 잘못에 있다. 여성이 관계에 관여하는 반면에 남성 이성과 힘을 수반한 방법을 사용할 때 동등함을 제외한 분리는 그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다.
동등성은 양극단의 상반된 반대를 가지고 성취하는 것은 어렵지만, 경쟁적인 사회는 유사성이 아닌 차이를 강조한다. 이분화는 제로섬 게임을 암시한다. 만약에 한 사람이 이긴다면, 다른 사람은 지는 것이다. 이분화된 사고는 다른 것보다 더 가치롭다는 양극단의 상반된 관점으로 계층적인(위계적인) 생각을 이끈다. 성(젠더) 역할의 계층적인 측면은 왜 그들은 변화에 그렇게 저항하는지 또 다른 이유를 암시한다. 성 역할은 힘을 바탕으로 한 사회 체제를 유지하도록 한다.
유사성, 동질성 및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서의 동요된 경험이라기보다는 차이, 양극단의 정반대 및 계층을 강조한 것이 성(젠더)의 구조이다.
결 론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는가? 가족치료의 목표는 변화이다. 그러나 무엇이 변화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이론은 이들 발전 중인 이론들에 달렸다.
알파 편파는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를 강조 한다; 베타 편파는 이런 차이를 무시한다. 인간 경험의 한 측면에서는 남성을 다른 한 측면에서는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여성의 삶이 개인적이기 때문에 남성의 삶이 비개인적인 것인가? 남성의 삶이 이성적이기 때문에 여성의 삶이 감성적인가? 상반되는 것으로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해석하는 것은 계층(위계)을 낳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하도록 한다. 그들을 동등한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현재의 비동등성은 무시된다. 성(젠더) 비동등성이 보다 큰 사회 체계에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자연적인 서열의 일부로 가정된다. 어떤 결과는 암묵적이고 흔히 의도하지 않게 성차별이 지지된다. 여성은 하위층을 구성하였고, 가족치료자로서 우리는 여성에게 동등성을 허용하는 사회에서 실패와 연관시킨다.
이론과 혁신적인 실제에 대한 우리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가족치료는 우리의 문화와 시간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가족에 관한 진정한 새 비젼 혹은 가족과 사회의 변화에 관한 진정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혁신적으로 보였던 이론들도 이제 보수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성(젠더)에 관한 기본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찾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가 사용했던 해결책에 상응하는 문제를 찾았다. 여성의 불리한 지위에 관한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문제를 무시하고 문제가 없는 것으로 규정했었다. Libow(1985)는 우리가 성(젠더) 역할 문제를 가족 비밀처럼 다룬다고 지적하였다.
성(젠더)은 우리의 종족, 가족 및 모든 사회가 조직하는 기본 범주이다. 진실로 성(젠더)이 유일한 문제는 아니고, 가족치료에서 가장 기본적인 이슈에 대한 회피가 이것을 특별하게 한다. 우리가 성(젠더) 문제를 다룰 수 있을 때에야 우리는 이것을 초월할 수 있다. 가족치료 이론이 성(젠더)을 미시적 문제로 다루는 한 우리의 이론은 이 분야에서 요구하는 인식론적 변화를 이루어 낼 수 없을 것이다.
Maturana가 관찰했듯이, 모든 체계는 그 자체로 유지기능을 갖는다(Dells, 1985) 즉 이것은 성(젠더) 역할 체계를 갖는 것이다. 가족치료에서 거시적 이론을 제안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전통적인 성(젠더)-편향에 기초한 가족 구성방식에 의해 어떻게 제한되는지를 인식하지 못하였다. 거시적 이론이 요구하는 사고에 있어서의 비연속적인 변화는 우리의 능력 밖인 것 같다. 성(젠더) 역할 단순화에 의해 제한되는 우리의 현재 구조는 인간경험의 복합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견해는 쇠약해지게 되고 따라서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가족치료 분야는 자체 이론과 실제에 변화된 모델을 적용해오지 않았다. 가족치료는 이제 연속적인 과정이고 운전자가 결가부좌한 자세로 편안하게 차량 흐름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 우리 모두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그와 같은 것의 이상”이다. 그 해결책이 문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