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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VI . 탄애티선생 순례이야기
프랑스에 처음 가는 사람들로서는 에펠탑이 단연코 가봐야 할 곳의 랜드마크 일위이다. 그러나 조금 더 낯익게 되면 베르동협곡의 에메랄드빛 강물의 신비 앞에 넋을 잃는다.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루르드가 사람의 마음을 일으키고 영혼에 이끌리게 하는 압도적인 거룩함으로 첫째인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런 것을 별로 놀랍게 생각하지 않아.' 하는 신부도 벌컥벌컥 샘물을 들이키고, 침례까지 신청한다. 그저 강건너 멀찍이서만 촛불행렬을 바라보는 이방인에게도 그 기도소리의 울림은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개신교 신도 중에는 성당문을 걸어잠그려던 마지막 시점에 한국어를 아주 조금 배운 프랑스신부의 빽[?]으로 겨우 들어간 성당 안의 고요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도 보게 된다. 탄애티라는 싱가폴 여인이 있다. 마르띠노나 이냐시오가 그랬던 것처럼 군인이었던 여장부인 그녀는 한반도에서처럼 미카엘라라는 세례명으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런 그녀가 한반도를 다녀간 것은 삼십여 차례. 처음에는 그렇게 일로 다음에는 곁들인 신앙 그다음은 오로지 신앙. 그리고는 치명자산성지인 세계평화전당에 반해 삼년 전부터는 싱가폴 신앙인들과 더불어 온다. 처음에는 십여명. 이듬해는 이십명. 올해에는 이십오. 우승고속 한 대를 다 채운 인원으로 십여일을 돈다. 그리고 두번째 해부터는 수단 톤즈의 이태석신부처럼 케냐에서 사목하며 총대리까지 역임한 영성적 깊이의 테오신부의 지도로 하며, 올해는 아프리카 케냐에서 온 마이클부제도 함께 한다. 김대건신부와 남종삼성인의 앞에서는 이들이 한국인인가 싶을 정도로 못지않은 열정적임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단연코 으뜸으로 꼽는 것은 어은동공소이다. 예전 공소의 돌너와지붕 한옥에도 그러하지만, 현재 공소의 살아있는 공동체의 환대. 그리고 자신들도 양반다리를 하고 차려놓은 음식을 서로 나눌 때를 못잊는다.
이번 순례에 매우 흥미로운 여인이 있다. 딱 봐도 스페인 계통과 연계된 여인인데, 싱가폴인 남편과 순례를 한다. 원래는 필리핀 태생인 스페인 계통의 여인이 어떻게 싱가폴에서 지금의 남편과 만나고 세 자녀를 두게 됐는지는 서서히 얘기를 할 것이다. 하지만 강조해서 얘기하는 바는 1500년대부터 시작된 신앙선조들에 관한 것이다. 이 여인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팩트에 근거한 잠시 비켜간 소설같은 얘기는 이렇다.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은 십여만명. 그 중 일만여명 정도가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됐다. 하지만 상당수는 시암과 인니의 노예로 팔려가고 거기서 다시 유럽의 노예로 팔려갔다. 지금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지이다. 아프리카 서북단 포르투갈령 작은 섬은 작지만 유명한데, 그 이유는 축구영웅 호날두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가장 큰 노예시장 섬 중 하나였다. 팔려간 이들 이외에도 남아있다가 시작된 박해를 피해 예수회신부들과 중국과 동남아 등지로 잠시 피신한 신앙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예수회신부들의 도움으로 해방된 이들이었다. 그리고 남아있던 그리스도교 신앙인번주에 속한 조선인신앙인들과 해방된 조선인신앙인들은 박해를 맞아 순교의 길을 갔다. 여기가 주로 나가사키지역이지만, 실은 일본전역이다. 일본은 다른 기회에 하더라도 어쨌든 떠난 이들을 얘기하면 이렇다. 거기에는 파편처럼 소개된 안토니오코레아도 있고, 권빈첸시오처럼 되돌아온 이들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노예로 갔건 해방이 됐건 이들이 간직한 신앙은 대대로 면밀히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소설같은 얘기겠지만 지금 성지순례를 하는 이들 중에 더러는 먼 세대 우리 신앙인들의 피가 섞이고 이어져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호날두도. 그리보면 아담의 자손 아닌 이가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아담의 자손이 아닌 예수의 후손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이 한국인 순교성인들에게 심취하니 하는 객쩍은 소리.
순례를 한다는 것은 원형[ArcheType]에 따른 전형[ProtoType]을 본받으려는 것이다. 어은동공소에 가면 느낄 수 있는 믿음살이의 전형이 있다. 사제가 온다고 하면 예전에는 일년에 한차례 겨우 판공에 오는 사제를 정말로 반기듯 반긴다. 강승훈신부의 아버지는 개울건너에서 사제가 먼 발치에서 보이면 휠체어를 굴리며 달려오는데, 일반인보다 빠르며 거의 빛의 속도[?]에 가깝다. 아파서 누워 겨우 며느리가 가래를 받아낼 정도인 어르신도 마지막 고해를 하자고 하면 무릎꿇게 해달라며 곧추세운다. 신앙으로 다날리고 박해받고 쫓겨다닌 후 순교의 삶을 산 원시장베드로가 마지막 무릎꿇고 하늘에 기도했다는 것을 아는 신앙후손들은 늘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게 해달라며 전형[ProtoType]에 기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형은 원형[ArcheType]을 표본으로 삼는데, 바로 예수이다. 싱가폴의 순례자들은 그런 원형을 닮은 전형을 찾아 해마다 한반도의 순례를 한다. 사람은 바뀌지만 소문은 귀에서 귀로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져 순례의 열기를 불태운다. 하지만 이백여년이 지나면서 어느새 우리는 잊고 있었지만 이들이 간직한 전형[ProtoType] 또한 있음을 고백하게도 한다. 서소문에서 공동으로 미사참례를 하면 한반도의 신앙인들도 놀라는 두가지가 있다. 미사 중 사제가 앉기 전에는 앉지 않는 것, 그리고 성찬례의 거룩한 예식이 치러질 때는 모두 무릎을 꿇는 것. 관절이 쑤시고 다리가 저려도 예외없다. 우리에게는 어쩌면 사라진, 그래서 자칫 마음마저도 흐트러뜨리게 하는 이 하나하나의 제스처를 간직한 순례자들을 보면, 순례는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살이의 전형을 가르치는 교육의 장임을 새삼 느낀다. 이쯤 되면 이들이 왜 다른 어디보다 어은동공소에서 큰 감동을 받는지도, 김진소신부가 왜 믿음살이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는지도 알게 된다.
'교육열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어느 교육학자가 지역을 연구하면서 공소의 교육수준을 두고 한 말이다. 안중근의사가 독립을 위해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상해에 있던 르각신부에게 물으러 갔을 때, '교육과 계몽에 힘쓰라.'고 한 것도 상기된다. 공소 곁에 혹은 성당 곁에 학교가 있었음도 주지할만한 일이다. 한반도 내의 교육열은 한국전쟁 이후 놀랄만한 급성장의 계기를 마련했는데, 가톨릭교회 안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앞서는 교육학자도 뒤이은 사례까지도 단적으로 보여준다. 탄애티의 그룹의 순례영성지도를 하는 사도성바오로선교수도회[Congregation Missionary Of Saint Paul The Apostle]의 테오신부가 발견한 포인트도 이 지점에서 멈춘다. 그가 사목한 케냐를 두고 '돈과 빵과 약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책을 달라는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 한반도를 순례하며 여러 대목에서 강조하는 바이다. 케냐출신의 마이클부제를 데리고 온 것도 그러했으리라. 성당 곁의 학교. 전동성당 옆의 성심학교. 이태석신부도 그러했으리라. 어은동공소 곁의 모시골공소. 지금은 아무 것도 없이 이명서성인의 후손인 이학수와 이춘화가 살던 터만이 남았다. 눈에 띄는 것은 아름드리 은행나무. 그들은 소금을 지게에 져나르며 팔고 담배를 끌어모아 팔며 부를 만들었고 땅을 사들였다. 그리고 그 땅을 아낌없이 교회에 봉헌했다. 교회의 미래인 학교를 위해서. 거기에 이병호주교는 'Non Sibi'라는 기억의 비문을 남겼는데, 아이들은 '시비걸지 말라고요.'라며 모르는 라틴어의 제멋대로의 해석과 함께 재잘대며 웃지만, '나를 [위해서가] 아닌'이라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 그렇게 전재산을 내놓고 가져온 것은 학교터로부터의 은행나무가지. 향교와 사원에 가면 유생들을 위한 은행나무가 있는 것처럼, 공부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지금도 은행나무 이파리에서 엿보인다.
페터춤토르라는 스위스 건축가가 있다. 거창한 대형건축들에 비견할만한 것은 아닌 작은 경당들. 특히 스위스의 성니콜라오를 기념하는 들판의 성당은 겨우 몇 명만 들어갈 수 있는 경당에 불과하다. 나무를 캠프파이어처럼 세우고 그 위에 시멘트를 바른 후 내부의 나무를 태워 시멘트만 남은 채 나온 경당은 그을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꺽인 입구로 인해 오로지 빛은 가운데 뻥 뚫린 조그마한 하늘에서 쏟아져들어온다. 건축이 종합예술이라는 것은 문학, 음악, 미술 등을 담고 있기 때문인데, 거기에 철학, 신학, 그리고 심지어 영성 등이 담긴다면 살아숨쉬며 사람과 자연과 더불어 대화하는 '세상과 더불어의 인류[HumanE]' 공간이 될 것이다. 페터춤토르는 건축가로서의 삶 이전에 수도자처럼 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서 나온 다른 데 비하면 코딱지[?]만한 경당. 마리오보타의 남양성모성지 곁에도 수락만 해놓고 아직도 지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 역시 그런 조그마한 경당일 것은 뻔하다. 묘한 것은 그런 그가 건축거장들의 틈바구니에서 건축에 있어서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건축은 과연 사람을 치유하고 자연과 더불어서 어울려 함께 하는가. 탄애티의 순례그룹이 처음으로 방문한 진산성지.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의 고향. 모두들 김용덕신부의 영성적 깊이가 담긴 하나하나의 상징[Sign]에 큰 감동을 받는다. 조그마한 경당 입구 한복을 입고 두 팔을 벌린 성모 앞에서는 손을 잡든지 와락 안긴다. 예수의 어머니 성모일수도 윤지충 어머니 권씨일수도 있는 이 성모상은 단지 순례자와 이방인만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떠올리게 하는 또 하나의 이름. 권빈센트. 임진왜란 때 끌려가 예수회 수사로 화형에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둔 그의 발자취는 김대건신부 여정 못지않다. 그런 권빈센트를 찾는 중국, 일본, 유럽 등의 행보 앞에 '어서 오라.' 하는 듯 하다.
해미와 공주와 여산의 순교지를 가면 유독 눈에 띄는 것은 무명순교자이다. 교황 프란치스코도 '이름없는' '이름없는' '이름없는' 하고 되뇌었다는 그곳에서 '서방' '소사[조이]' 등이 나열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죽음의 모습 또한 다양하다. 주리, 교수, 참수, 구살, 척살, 석살, 오살, 육시, 매장, 수장, 백지 등이 자행된 것이다. 법정판결 등과 무관하게 벌어진 사건도 허다하다. 역사학자는 '설마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고, 소문이 소문으로 이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처럼 과장된 면도 또한 없지 않다. 하지만 앞선 현상들을 조합하고 역사 안의 비슷한 사건들과 비교하면 도출되는 한 단어가 있다. '학살' 학살의 현장이야말로 법정도 없이 이름도 없이 방식도 없이 자행되는 것이다. 유럽에서, 중국에서, 일본에서 목격한 바들이 그렇다. 잔혹할수록 벼슬따내는. 우리의 이 학살의 주범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 오페르트가 있었다. 유대인을 모두 통틀어서 비난하고자 꺼낸 이름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사욕의 개인주의가 불러온 화가 이렇게 큰 피해를 낳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 그의 변명은, 그리고 그를 안내한 이의 변명은 '해방자'였지만, 도리어 '박해자'였었다. 싱가폴 순례자들은 이런저런 이민자들의 디아스포라와도 같은 곳에서 모인 이들이다. 중국, 일본, 인도, 시암,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학살을 피해 모인 그곳에서 후손들이 여러 학살지들을, 어쩌면 자신들의 역사와는 도무지 하나도 상관없어 보이는 학살지들도 순례하는 것은 단 하나의 까닭일 것이다. 어떠한 이유나 변명을 가지고도 학살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 이러한 마음자세로 순례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학살의 소식을 듣는다. '민중의 해방'과 '여성의 해방'을 앞세운 '해방자'로 자신을 세뇌시키는 제국주의적 권위주의는 언제쯤 자신이 '박해자'로 돼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인가.
'이런 날이 오고야 말리라.' 더러는 콧방귀를 꼈다. 대세는 도시의 성당이다. 애써 옛것을 붙들고 있지 마라. 이런 추세는 종교의 자유가 있고 난 시점에서의 블랑주교의 사목노선과 뮈텔주교의 사목노선의 차이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블랑주교는 명동성당의 초석을 다졌음에도 공소의 기본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박해의 끝자락에 쫒겨다니다가 자신을 품어준 공소에 대한 기억과 모두가 가난함에도 서울의 천주교 신앙인들의 옥바라지에 가장 많은 헌금을 한 것 등을 너무나 잘 아는 블랑주교로서는, 이 정신을 잊는 순간 마치 로또에 당첨된 거지가 들떠서 정작 로또복권이 들어있는 동냥깡통을 강물에 던져버리듯 망각은 망조로 향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월이 흘러 공소들은 성당들이 되고 더러는 옛 정취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너무나 가난해서 그저 태풍이라도 한 차례 지나가다가 지붕과 벽체를 쓸어가면 '어쩔 수 없이 그리 됐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그 공소들. 하지만 유네스코의 비정부기구[NGO]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예리하고 날카롭게 이것을 포착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의 미래적 가치를 내다봤다. 무형의 가치를 담은 유형의 자산을 본 것이다. '함께 걷고 함께 나눌 때 눈이 열렸다.'는 것은 바로 이런 대목에 어울린다. 이를 눈여겨 본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처음에 어은동공소를 보고간 싱가폴 순례자들은 이제는 신부와 더불어 와 미사를 봉헌하고 헌금을 지불하며, 공소신자들이 '풀떼기만 줘서 워쩐데.' 하는 로컬푸드[와일드푸드]를 먹으면서 그릇들을 죄다 비운다. 그것도 가장 비싼 밥값을 지불하고. 이번의 늘어난 스물다섯 중 다섯은 벌써 해마다 온다. 게다가 올해는 소문을 타고 말레이시아에서도 온다. 내년은 인도네시아에서도 예약하고. 속물처럼 장사의 셈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인심과 도심을 파는 단골의 남는 장사.
'밖이 그렇게 수려해도 안은 지극히 단순하다.' 후쿠오카주교가 가우디의 성가정성당[SagradaFamília]을 두고 한 말이다. 예수의 십자가 하나로도 족하기 때문이다. 세계문화유산이 된 시츠성당의 작업실. 여느 작업실과 다를 바 없는 그 공간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제빵, 소면, 간장, 직물 등을 만들어냈다. 그런 이층 쉼터와 삶터는 앞에 십자고상 하나만 놓으면 경당공간, 기도공간, 피정공간 등으로 탈바꿈되는데, 그 거룩함은 가톨릭의 빛깔을 뚜렷히 지닌 여느 성당 못지않다. 정교분리[Séparation De L'Église Et De L'État]를 표방하고 세속화[LaïciSation]의 시작을 알린 프랑스 학교 교실들의 전면에 떼어낸 십자가의 먼지쌓인 흔적과는 또한 대조적인 면도 없지 않다. 그런 평범한 곳에 거룩함이 스미는 것을 여러 현장은 말해준다. 가쿠레기리스탄을 가둔 코딱지[?]만한 소막[牢室]. 꼴베의 굶주린 죽음이 깃든 아우슈비츠의 감옥, 미사공간이 된 다하우수용소의 화장실 한 켠, 무너질 듯 기울어진 채 파리가 들끓던 난지도쓰레기장의 수사의 움막. 모두 다 눈을 씻고 봐도 교회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는 공간이지만 신비로운 거룩함의 기운이 감돈다. 보두네의 한지공소 사랑방도, 김양홍의 한봉공소 작업장도, 비예모의 옹기공소 불가마도 그렇다.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를 박해 앞에 신앙인들은 순식간에 십자고상 하나만 놓으면 기도공간과 미사공간이 되는 거룩함을 맞이한 것이다. 파편적인 얘기들을 주섬주섬 주워담아 순례를 하는 이들에게도 그 거룩함의 기운은 가시지 않는다. 세월은 숱하게 흘렀건만. 그래서일까. 그런 공간에 서면 마치 억울한 일을 엄마의 치맛폭에 와락 안겨 일러바치며 우는 아이처럼 속내를 다 드러낸다. 치명자산성지 세계평화전당 내의 옹기경당. 싱가폴 순례자들이 신부건 신자건 말을 하다가 잇지 못하고 몇 번을 꿀꺽꿀꺽 삼키는 것도 그 때문일까.
'멈출수없는[UnStoppAble]'이라는 잘 알려진 노래를 부른 가수 시아[Sia]의 '왜 나를[Why Me]'이라는 노래가 있다. 아담의 후예이자 카인의 후예로서 인간은 뭔가가 잘못되면 '왜 나지.' '왜 하필.' 등의 물음을 던진다. 다큐멘터리영화 "난징, 난징"을 보면 학살과 노예의 상황을 피해 소도[蘇塗, Asylum]와도 같은 난징대성당에 숨어든 사람들이 묘사된다. '간절함의 극치는 이 정도겠지.' 할 정도로 무염시태성모 앞에 모두 기도한다. 성노예인 위안부로 착출하자, '내가 아니기를.' 하는 기도도 담았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자 일본군인들은 '모두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처음으로 손을 드는 여인들 중 조선여인. 나중에 위안소 그녀의 방 앞에 붙은 글귀는 이렇다. '조선처자' '순진무결' '성병안심' '가격저렴' 아무도 나서지 않는 자리에 희생양을 자처한 조선여인이라고 '왜 내가.'라는 생각을 안했을까. 모두를 위한 희생은 장예모의 "진링십삼소녀[金陵十三钗[진링십삼비녀]]"에서도 뚜렷히 드러난다. 수련수녀들을 대신한 술집종업원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을 위해 나선 여장을 한 장례지도사의 남자분장조수. 열두제자와 예수를 연상하게 하듯 상징이 가득하다. 사제를 가장하며 이들을 구한 장례지도사는 무염시태성모 앞에서 사제 못지않게 간절히 기도한다. 장례지도사 역을 맡은 배트맨의 크리스찬베일은 많은 묵상 끝에 기꺼이 응했다. "황시의아이들"에서는 아이들의 탈출을 위한 외국인교사들을 도와 길안내를 맡은 이가 나오는데, 주윤발이 역을 맡았다. 주윤발은 이후 살아서의 재산을 기꺼이 내놓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가난한 한국땅에 와서 더불어 살다가 이제는 아프리카로 간 원선오신부. '천국의 우편배달부'로 한국에 살다가 말년에는 아프리카로 가고 싶어한 지정환신부. '왜 날까.'라는 말이 이들 앞에서는 무색하다.

첫댓글 '천국의 우편배달부'로 한국에 살다가 말년에는 아프리카로 가고 싶어한 지정환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