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난징(南京) 30만명 대학살
(상)
12월 13일은 “난진 대학살 추모일”이다. 1937년, 대학살 사건이 발생한지 76년이 지나서 시진핑 정부가 2014년에 제정한 추모일이다. 이 날은 중국국민들의 법정 공휴일이다. 중국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요 가장 수치스러운 날이라고 시진핑은 그 날의 아픔을 되새기면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저 이 날을 “추모의 공휴일”로 제정한다고 선포하였다.
이 난징 대학살 사건이 중국의 제청에 의하여 2015년에 UNESCO에 등재되였다. 일본 아베정부는 발칵 화를 내면서 300,000이라는 숫자는 과장된 것이라고 반박을 하였다. 그것은 중국의 일방적인 선언으로 생긴 숫자이며 UNESCO가 일본과 타협을 하지 않고 등재를 결정한 것이기에 일본은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며, UNESCO 회비 지불을 중지하여야 한다고 큰 입을 벌렸다. 참으로 염치 없고 뻔뻔그러운 일본의 얼굴을 또 한번 세계 만방에 내밀은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미안하다는 말은 일언반구도 없고 숫자가 거짓말이니 회비납부를 중단하겠다 느니 등재를 취소하라느니 하는 아주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그것이 아베정부의 면모다. 그런 일본이 UN의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 되어야 한다고 미국을 등에 업고 뒷거래를 펼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듯한 일본의 오만방자한 자세다.
일본 국내에서도 아베정부의 처사에 반발이 보통이 아니다.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등에 잘 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 하며 상응하는 조치를 해야 한다고 담화를 발표한 전 관방장관 고노씨와, 하도야마 전 총리는 아베정부가 UNESCO에 대해 표출한 감정적인 처사에 크게 분노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일관하려는 아베정권의 파렴치한 행위는 결국 일본의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힐란하였다.
인류의 근대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극악무도했던 대학살의 3대 사건이 있다. 독일의 나치 정권이 1942-1945년에 저질른 “600만 유태인 학살 홀로코스트”가 그 첫번째이고, 일본의 살인마 군대가 1937년 12월 13일 ~ 1938년 1월말까지 6주간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 (南京)을 공격하면서, 남녀노소 무차별 공격으로, 약 300,000명을 일본도로 학살한 소위 “남경 대학살 사건”이 그 두번째이다. 세번째로는 1923년 일본 동경 근처 간토에서 대지진으 로 혼란이 일어 났을 때에, 그 지진이 동경에 거주하는 조선 사람들의 저주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라고 허위 소문을 퍼뜨리며, 일본 민간인과 군경 들이 무차별적으로 조선인 6,000-6,600명을 살해한 대학살 사건이다. 이를 일컬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關東大地震 朝鮮人 虐殺事件) 이라고 한다. 이 3대 학살 사건중 첫번째는 독일 민족이 저질른 죄악이고, 두 번째와 세번째는 일본 민족이 자행한 중국인과 조선인에 대한 대학살 사건이다.
오늘은 여기에서 그 두번째인 남경 대학살 사건의 이야기를 고찰해 보고저 한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고 나서 일본군은 만주를 침공하였다. 꼭두각씨 국가 만주국을 세 워서 손아 귀에 넣은 다음, 일본군은 중국 본토로 진격을 하였다. 중국 본토로 진격하여 난징을 정복하기 까지의 역사적 배경을 요점적으로 해설을 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37년 7월, 중화민국과 일본 사이에 “루거우 차오 사건”으로 무력충돌이 발생하면서 중-일전쟁이 터젔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베이징, 톈진 등 주요 도시들을 손쉽게 점령 하고,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면서 중국 본토로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상하이 전투에서 2-3개월이나 전투가 장기화 되었는데, 여기에서 일본군이 예측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 국민당(장개석)군의 저항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 때에 일본군은 오송상륙작전에서 처음 으로 많은 피해를 보았는데, 이것이 오만방자했던 일본군에게 상당한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고 중국인들을 무차별 살해하는 계기로 이어진 것이다.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일본군이 공격을 함에 장개석 정부는 중경으로 후퇴를 하였다. 일본군에게 포위당하는 난징은 피란민과 약 15만명의 중국군 포로들로 아수라장이 되였 다. 1937년 12월 10일,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항복을 하지 않으면 피의 양자강을 만들 겠다”고 최후의 통첩을 보냈다. 하지만 이 때에 아무도 항복을 하지 않고 성내에서 일본군 에 결사항쟁을 주장하였다. 끝까지 결사항쟁을 하겠다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징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 한 채 양자강을 건너 먼저 도망을 처 빠저 나갔다. 여기에서 피난을 가지도 못한 채 남아 있던 50-60만의 난징 시민들과 포로병들은 지휘권자를 잃어버린 완전 공황상태에서 대학살의 공격을 받아 피의 바다를 이룰 수 밖에 없었다.
탕셩즈 사령관이 도망을 가면서 난징성이 허무하게 일본군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피란을 가지 못한 사람들과 포로가 된 병사들은 예상 못한 큰 재앙에 닥친 것이다. 일본군은 백기 를 들고 항복하는 중국군 포로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하여 닥치는대로 성곽 밖이나 양자강 하구에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적게는 수 십명, 많게는 수 만명에 이르기 까지 일본군의 총검술 훈련용이 되거나, 목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었다. 여기에서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들은 많은 사람들을 산채로 파묻어서 생매장을 하기도 하였고, 입뽄도 칼로 닥치는 대로 난도질을 하기도 하였다. 난징의 광장에서는 어린 아이 부녀자는 물론 노인까지도 천여명의 사람들이 몇 개의 단위로 구분되어 묶여진채 세워젔는데, 일본 군은 이들에게 석유를 쏟아 붓자마자 기관총을 난사하였다. 총탄이 시체를 꿰둟자마자 불이 붙게 하였다. 그렇게 죽은 시체가 산더미 같이 쌓여서 불에 타는 것을 보았다고 살아 남은 사람들이 증언하였다.
제2차 대전 이후 난징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일기의 내용중에 “심심하던 중에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고 하면서 “산 채로 묻어 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서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서 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이러한 잔인한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일본군은 여자들에게 눈을 돌렸다. 이른바 “집단윤간”(集團輪姦), 선간후살(先姦後殺)을 자행하였다. 집단윤간이란 한 여자에게 수 십명이 순번대로 자행하는 강간행위이며, 선간후살이란 먼서 여자를 강간하고 나서 목을 졸라서 죽이던지 입뽄도로 살해하는 짓을 말한다.
***********************************
(하)
1937년 12월, 일본군은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을 그렇게 공략하였다. 일본군은 중국인을 사람으로 생각지 아니 하고 마치 짐승의 목을 치 듯이, 주로 입뽄도(日本刀)로 매일 약 7,000명의 목을 베어 나갔다. 병사들은 중국인을 세워 놓고 목베기 대회를 하기도 하였고, 한 동네 사람들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떼거리로 잡어다가 골짜기 에 몰아 넣고 기관총으로 갈기기도 하였다. 어떤 부대는 작두로 인간의 목을 하나 하나 자르면서 희열을 느끼기도 하였다.
이렇게 비참한 학살의 역사를 당한 것이 중국인이었는데, 중국은 모택동 정부이후 근간에 이르기 까지 일본에 대하여 특별한 반일본 반응을 일으키지 아니 하였다. 다만 국가의 경제건설을 위하여 매진하여 왔다. 그런데 2013년 일본에 아베정권이 들어 서고 중국에 는 시진핑이 정권을 잡으면서 마찰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시비를 건 것은중국이 아니고 일본이었다. 중국과 일본간에 위치한 무인도 “센카쿠 열도”를 일본이 자국영토 라고 선언 함에서 양국의 시비가 고조되였다. 이에 따라 조용하던 중국 국민들이 눈을 부릅뜨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소름 끼치는 일본의 남경 대학살 사건을 되새기며 반일 사상을 불러 일으 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몇 년간 양국간에 시커먼 전운(戰雲)이 깃들고 있었는데 2014년 11월 7일, 갑자기 중일 양국간에 화해 무드가 협의되고 곧 양국 정상 회담을 개최한다는 소식으로까지 비화하였다. 아마도 곧 중국에서 개최될 예정 이었던 APEC회의를 위한 일시적인 유화작전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 국민들의 반일 앙금은 쉽게 물러 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 중-일간의 전쟁사를 돌이켜 보면은 3번의 전쟁이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우리 나라의 14대 선조께서 의주로 몽진을 가 있으면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여송이 명군 을 이끌고 들어와 평양에서 일본군과 한 판 싸움이 붙었다. 명군이 이겼다. 황해도 사리원 부근에서 두번째 싸움이 붙었다. 이번에는 일본군이 우세하였다. 그 이후 중-일군은 서로 싸움은 아니 하고 흥정만 하면서 우리 나라에 장기간 머물렀다. 피해를 본 것은 힘없는 우리 나라였다. 조선의 여인들은 양군에 의하여 수없이 겁탈을 당하였고, 식량을 탈취 당하 였다.
두 번째 중국과 일본의 전쟁은 1894년에 조선 땅에서 일어난 청일전쟁이었다. 대원군과 민비의 알륵속에서 조선을 누가 먹느냐 하는 전쟁이었다. 일본이 또 이겼다. 그 결과가 1905년, 우리 나라 가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1910년에는 드디어 한일합병을 강요 당하게 된 것이다.
세번째의 중일전쟁은 1937년이었다. 남경에서 대학살을 당하는 사건이 이 때에 벌어 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하면은 자기들이 언제고 이긴다는 은연 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지금도 일본은 공격적이고 중국은 방어적인 자세라고 보여 진다. 어떻든 일본이 중국에 저질른 남경 대학살 사건은 세계사에서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사건이다. 여기에 동아일보 논설위원 최영훈씨가 발표한, “日軍이 점령한 남징의 ‘목베기 게임’ 이란 글”을 이하에 소개해 드린다.
중국 江蘇省 南京市 서쪽 외각에 있는 ‘난징대학살기념관’은 중일전쟁 당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난징을 침공한 일본군은 1937년 12월 13일 부터 다음해 1월까지 약 6주동안 30만명에 가까운 중국인을 학살했다. 1985년 8월 15일 개관한 대학살기념관은 ‘중국판 홀로코스트’의 바로 현장에 세워젔다.
가장 충격적인 전시물 중 하나는 난징시민의 유골이 집단으로 발굴된 곳에 만들어진 만인갱(萬人坑)이다. 투명한 유리벽에 둘러싸인 유골은 7단계로 층층이 쌓여 있어 처참 했던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중국 주둔 총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휘하의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을 총칼로 살해하고 산 채로 매장하였다.
기념관에는 당시 일본군 소위 두 명이 상관의 허락을 받고 살인 게임을 한 것을 증언 하는 전시물도 있다. ‘무카이 도시야키’ 소위와 ‘노다 쓰요시’ 소위는 난징을 함락하기 전까지 먼저 100명의 목을 베는 사람이 승리를 하는 소위 ‘목베기 게임’을 했다. 이들은 중국 군인만 살해한 것이 아니라 비무장 민간인까지 잔혹하게 입뽄도로 참수를 했다.
두 사람은 각각 106명과 105명을 살해했다. 이 사실을 보도한 일본 신문기사가 실물 크기로 확대한 두 군인의 사진판 뒤편에 전시 돼 있다. 피에 굶주린 살인마로 믿기지 않 을 만큼 둘의 얼굴은 평범했다. 살인 행각은 난징 함락 이후에도 이어저 무카이는 250 명을 살해 했다고 한다. 인과응보였을까. 이들은 1945년 해방이후 전범재판을 거처 총살형에 처해젔다.
학살기념관에는 12초 간격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공간이 있다. 12초 마다 일본군의 총칼에 쓰러저 간 희생자를 떠올리며 캄캄한 곳에서 묵념을 했다. 불과 40여일간 30만명이 살해된 참상을 이처럼 극적으로 되살리기도 힘들다. 처참하게 파괴 된 난징과 살해된 사람들을 상징하는 대형 부조물인 금능겁난(金陵劫難)등 곳곳에는 300,000이라는 숫자가 또렷이 새겨저 있다.
7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난징 시민들은 일제의 만행을 잊지 않고 있다. 기념관에는 평일인데도 난징시내 초중고교생들은 물론이고, 노인들까지 관람객이 모여 든다. 일본인 들도 드물게 이 곳을 찾는다. 현지 교포 신경란씨는 “동족의 만행을 목격한 일본 여성중 에는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거나 실신하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했다. 텐진 일본학교 중학 생들이 놓고 간 추모 리본도 눈에 띄였다.
그러나 일본의 아베정권 출범이후 일본의 우익세력들은 “과거사 역주행”에 혈안이 되여 있다. 우익세력들이 주도하는 일본 난징장학회 등은 일본신문이 보도한 “목베기 시합”마저 오보 또는 과장보도라고 주장을 한다. 학살자 수에 대해서도 종전후에 열린 도쿄전범재판소에서 최소 20만명으로 추산했지만 일본 정부는 받아 들이지 않고 있다.
중국내의 반작용은 심상치 않다. 시진핑 주석은 2014년 3월 독일 베를린 방문에서 “과거를 잊지 말고, 미래의 스승으로 삼자”(前事不忘, 後事之師)고 하면서 일제의 만행을 강하게 비판했다. 외신 기자들을 초청해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행사도 개최했다. 반일 감정이 심한 난징시 정부는 “난징 대학살 교재”를 만들어 초등학교에 보급했다.
대학살기념관을 방문한 중국인은 전체의 1% 정도에 불과 하다. 중국정부는 난징대학 살 추모일인 12월 13일을 2014년에 처음 법정공휴일로 지정했다. 일본이 과거를 부정하면 할 수록 기념관을 찾는 중국인의 발걸음은 늘어 갈 것이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상점에 나붙은 “일본인 출입 사절” 간판이 심상치 않은 전조(前兆)처럼 보인다.
2014 12 13 전 토론토한인회장 강 신 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