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규 朴炯圭 (1923~ 2016)】 "유신체제 꾸짖던 ‘길 위의 신학자’ 참 신앙인"
故 박형규 목사는 1950년 부산대학교철학과를 중퇴하고 1950~58년 미 육군에서 근무했다. 그후 목사가 되기로 결심해 1959년 일본 도쿄[東京]신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63년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이후 공덕교회와 초동교회에서 목회 사역했다. 1967년 한국기독학생회 총무를 지냈으며, 1968년 기독교서회 발행 〈기독교사상〉 주간, 1970년 기독교방송 상무이사를 지냈다. 1972년 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1992년 8월까지 20년간 시무했다. 1981년~82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제66회 총회장을 역임했다.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실천하여 1973년 반유신체제 시위인 '남산부활절사건',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과 '기독교장로회 청년 전주시위사건' 등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등 평생 여섯 차례 옥고를 치렀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기장 회보」를 통해 회고한 내용이다.
“1958년 동경에서 아시아지역 기독교교육대회가 열렸을 때 한국 대표로 온 강원룡, 김관석 두 선배 목사를 만난 것이 나의 기장행(基長行)의 계기가 되었다. 나는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양모 밑에서 강원용, 조향록, 김관석, 서남동, 문익환, 문동환, 안병무 등 형님들과 김익선, 이영민, 조덕현 등 동연배 형제 목사들의 따뜻한 배려를 받으면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내가 민주화 인권 평화통일 등 교회의 사회참여에 나서게 된 것은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꾸짖듯이 수시로 내게 가야할 길을 제시해주신 고 김재준 목사님의 훈시와 질책 때문이었다. 나는 일생을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라”(Let the Church be the Church)라는 모토를 따르려고 애썼다. 우리 기장이 그래도 이 목표에 가장 가까이 있고 또 가까이 가려고 정진하는 교회라 믿고 감사하는 바이다.”
남북평화재단 이사인 조화순 목사는 ‘나도 많이 잡혀 갔었는데 그때마다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박형규 목사 때문이다. 박 목사는 매우 자유로운 사람이다. 나는 박 목사를 닮아 웃으면서 자유롭게 살아가려고 했었다’며 추억을 회상했다.
전 CCA 총무인 안재웅 박사도 축사에서 ‘박형규 목사와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만으르도 축제를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축제와 춤을 비웃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비록 흥행하지는 못했어도 우리는 신나게 춤을 추었다. 박 목사의 생애와 사상은 우리 마음에 품은 성상. 기쁨과 감동을 주는 아이콘이다. 이 사람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는 성서구절이 잇는데 박 목사가 바로 이 시대에 그런 역할을 한 분이다’라고 했다.
끝으로 박형규 목사는 ‘나는 좀 모자라는 사람이다. 내가 앞장서서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날 꼬시고 날 이끌어서 민주화운동도 하고 감옥도 갔다. 4.19 때 총을 맞고 피를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목사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이 나를 이끌었다. 박형규가 없어도 민주화는 이루어지고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