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 꽂아 두고 바빠서 혹은 게을러서 읽지 못했던 책들을 알뜰하게 찾아서 꺼내보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황석영의 <객지>를 읽었습니다. 43년생인 작가가 이 작품을 신문에 연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자료를 준비했을까 생각하며 읽었답니다. 쉬운 것은 없습니다. 글쓰기도 엄청난 공부와 공력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제가 알기로 황석영이라는 작가는 리얼리즘적인 태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법적인 측면에서 비현실적인 요소를 활용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본질적인 글쓰기의 태도나 정신과 관련해서 하는 말입니다. 루쉰이 글을 통해 이루고자 한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알 만한 일입니다.
오랜만에 대하소설이라고 할 만한 것을 읽으니 예전에 읽었던 다른 작품들이 떠오른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박경리의 <토지> 등등. 아울러 읽지 못한 작품들의 목록도. 짧은 숏폼 위주로 자극적인 볼거리가 횡행하는 요즘 세태에 긴 호흡을 갖고 읽는 대하소설이란 것은 대세에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의 잃어버린 집중력을 되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종이 냄새가 나는 손때묻은 책을 긴 호흡으로 읽는 훈련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유한한 삶에 대한 초조함 때문에 보다 많은 곳을 보러 다니고 보다 많은 경험을 하고 보다 다채로운 먹거리를 즐기려는 파우스트적인 욕망이 우리로 하여금 차분하게 골방에 틀어박혀 지긋이 두꺼운 책을 조금씩 읽어나가거나 조용한 적막 속에 사유할 마음의 여유를 잠식하고 말기에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다독 위주로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한다. 지식의 습득을 위한 독서도 좋지만 삶에서 필요한 지혜는 지식의 축적에서 비약하여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삶과 지식이 함께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지혜가 조금씩 자라는 법이다. 석회동굴 속의 석순이 자라는 이치와 같이 그렇게 시간의 오랜 흐름이 각각의 계기와 맞물리면서 능동적인 사고와 행위를 통해서 실천적인 지혜로 살아나고 드러나는 것이다.
나지브 마흐푸즈의 <우리 동네 아이들>이라는 작품은 인류의 삶과 종교의 역사를 펼쳐내는 작품이다.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한 알레고리적인 성격의 작품인데 폭력과 착취와 지배의 세상을 향해 다양하게 대응되는 구원에의 움직임을 역사적인 맥락을 떠올리게 제시하고 있다. 이는 기존 종교적인 틀에 맞춰 다소 도식적으로 대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황석영의 <장길산>은 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요즘 신문에서 연재소설을 보기가 어렵다. 꽤 오래전에 한겨레 신문을 구독할 때 황석영 씨가 <바리데기> 연재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연재소설의 시대는 지나간 셈이다.
아무튼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연작이나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알레고리적 서사로 <장길산>을 본다면 서사적인 측면에서는 리얼리즘과 환타지라는 차이는 있겠지만 의미론적 측면에서는 유사한 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악과 그 악에 대한 극복의 희망과 기대라는 관점 말이다. 물론 작가 측면에서는 이런 비교 자체에 대해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길산>의 결말에 대한 처리를 보면 이런 비교가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