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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허무주의자의 허튼 고백
‘96. 6.<○○가족>에 실린 글 허필두
친구에게,
늘 그랬듯이, 새벽녘 자명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 졸린 눈을 비비며, 몰려오는 잠을
이기며 길을 떠난다, 오늘도.
전날 마신 술기운 때문에 아직도 머리는 띵하고, 담배를 물을 때마다 입덧(?)이 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다.
이 정신병원 같은, 아니 시궁창 같이 더러운 세상에서 늘 취한 기분으로 현실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술에 취해, 여자에 취해, 사상에 취해, 나이들어감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아편(?)’이 아닌가?
자넨, 이미 아기의 아버지로, 어린 부인의 남편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는데,
난 늘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네.
친구여,
‘88년도 겨울이었지. 해결되지 못한, 아니 해결 할 수도 없는 존재의 고민으로 괴로워하고,
도망치려는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또 자네는 학교생활을 정리하고 다른 길을 가기 위해
등록금을 털어 겨울여행을 하던 때가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너무 좋았네.
어느 누가 그랬다지,
“시장가 좌판에 소금에 절여져, 배가 갈린 채 내장을 다 보여주는 고등어에게도 등이
푸른 자유가 있었다”라고.
요즘 한층더 느끼는 것인데, 긴 방황의 시간이 지나고 안정이 찾아오기 시작하자
‘고뇌의 흔적(?)’ 배가 나오기 시작했네.
예전의 사고 속에서는 지극히 혐오스러웠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었는데,
그게 나의 문제가 되고나니 생각이 바뀌었다네.
그 나온 배만큼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부드러워졌다고나할까?
또 그런 생각도 드네.
어렵게, 힘들여 나오는 배를 애써 도로 집어넣을 필요가 있을까?,
할 수 없지 않는가?’ 등등.
그만큼 세상살이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지고,
우리가 신경쓰고 고쳐나가야한다고 생각한 것으로부터 무뎌지는 것이 아닌가?
일종의 자기합리화에 익숙해지는 나이가 되었다는 증거겠지?
일터에서 지루한 시간이 되면 수첩을 뒤적이곤 하는데, 옛날에 그렇게 친했던,
꿈이 높았던,
어느 누구보다도 정열이 많았던 녀석들은 모두들 ‘살기위해 살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네. 그런 게 인생이라는 것이겠지.
지금도 자네와 통하는 것이 단 한 가지가 있네.
5년전 공지천 보리밭에서 술잔을 기울이면서 한 이야기에서도 작년 망년회에서
나눈 대화에서도 우린 서로를 확인하지 않았나?
“삶에 있어서 삶의 질의 높고 낮음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이 짧은 인생에서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하는 가?”라는 문제였지.
그때를 되돌아다보면, 내가 공무원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네.
나의 존재이유를 이곳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고도,
그곳에서 잘 해나가리라는 것도 믿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지.
어느덧 이 일을 한지도 벌써 일년이 넘었네.
발령을 받고나서는 견딜 수 없는 심적상태의 일그러짐으로 매일 술집을 기웃거렸고,
잠자리가 일정치 않은 생활이었네.
그렇지만 세월이 약이라고 차츰차츰 다듬어지고 있네.
또 지금까지는 나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는 지독한 개인주의자였었는데,
이제는 부모와 가족, 언제 나타날지 모를 사랑하는 여자의 삶까지도 챙겨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넉넉한 사람으로 자리잡아가고 싶어지네.
며칠 전 아주 감동적이고, 예쁘고 술도 잘 마시는,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는 한 여자를 알게 되었네.
그 여자와 함께 춘천으로 달려가 푸르른 공지천 보리밭에서 앞으로의
일어날 일들을 이야기하고 싶어지네, 그냥 꿈으로만 끝날지도 모르지만.
친구여, 부인이 너무 어려서 철이 없다고 구박만하지 말고, 잘 보듬어 주기 바라네!
결국 그렇게 하는 것이 자네의 건강과 가족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 될 것이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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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4. 3.일요일
그는 참 괜찮고 우수한 청년이었습니다.
제가 원주에 들르면서도 아내와 늘 싸우다보니 몇년간 한번도 찾아본적이 없는 친구입니다.
1988년도 겨울이었습니다.
6개월 방위가 끝나고 복학을 했으나 시대상황을 견딜수없고 자신이 없어 도망치듯 휴학을 하고
6개월간의 막노동후 다시 복학을 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제게,
"자기는 이제 대학을 다니지 않을 거라고,
이제 학교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겨울여행을 할 생각인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그래서 우리는 전남대와 망월동묘지, 부산태종대를 둘러본 후 여행을 가기 전에
술을 마셨던 서울 성대 앞 선술집에 다시 도착했습니다. 그때 그가 말했습니다.
"필두야 나 이제 공장에 갈 거야, 학교생활이 의미가 없어." 그가 부러웠습니다.
여행을 통해 자기정리를 한 그에 비하면 저는 더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그가 8개월인가 공장생활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다시 종이를
자르는 지업사의 재단기사 되었고,
형수님의 소개로 아귀가 잘 맞지도 않을 것 같은 결혼을,
6년만에 이혼을.......
그러던 그가 술을 마시는데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알고보니 주말에 늘 혼자 술만마시다 보니 이미
알콜의존 상태가 되어 오랜만에 친구가 찾아왔는데도 그랬나봅니다.
저 혼자만 소주 2병을 마시고, 편지를 남기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가 너무 약해졌습니다.
아이한테 말했습니다. "아빠 제발 술 좀 조금 마시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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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부르마
소리타래
등록자:sad wizard
너를 부르마(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사랑이라 하마
아무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 쉬는 공기여 시궁창에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싶다.
내 여기 살아야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새삼스레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그 이름 잘못 불러도 변함 없는 너를 부르마
자유여 민주여 내 생명이여, 자유여 민주여 내 사랑이여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그 이름 잘못 불러도 변함 없는 너를 부르마
자유여 민주여 내 생명이여, 자유여 민주여 내 사랑이여
2007.7.21. 토요일 아침
홍천 장례식장에서 영구차를 타고 춘천시립화장터에 도착했습니다.
예정도 없이 춘천에 오다보니 그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지난 6월 23일 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야, 개새끼야 그동안 연락도 않하고 뭐했냐고?
나, 한달 동안 한림대 알콜클리닉에 입원했다가 지난주 퇴원했다고.....
한번 만나자고......."
그런 전화를 받고도 정신없이 한 달을 보냈습니다.
그를 만날 계획도 없이 길을 떠나다보니 전화번호를 메모한 것을 가져오지 않아
그의 휴대폰번호를 알려고 여기 저기에 연락을 해보았으나
통화가 되지 않아,
이동전화기의 통화내역 중 부재중수신목록울 열람하다가
한달전 토요일 그 시간에 찍힌 전화번호가 있어 눌렀습니다.
다행히도 그가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참 반가웠습니다.
오랜만이니 술이나 하자고 우선 차를 세워둘 곳 부근에서 만나자고 하니
그가 저를 데리러 온다고 했습니다.
2년전보다는 살이 좀 빠졌고 그대로였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완전채식으로 먹을 거리를 바꾸고나서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참으로
힘듭니다. 그 역시 고기는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깔끔한 한정식에 가 메뉴에 없는 두부전골을 만들어줄 수 있냐고
묻고는 두부전골에 소주를 마셨습니다.
한때 그와 전 한 자리에서 그는 그린을 전 진로 25도를 각자 세 병씩 마시고도
맥주를 더 먹었는데......
이제는 들 다 술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예전에 원주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정서적으로도 안정이 되어가고
삶에 대한 의지와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 강해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여자 생각은 나지 않느냐고?
인터넷에서 소통의 공간을 찾는 것은 어떠냐고?
혹시 요즘 책은 읽느냐고?
마라톤을 할 생각은 없느냐고?
그가 그랬습니다.
아내가 도망가고 난 후 몇년간은 아주 그리웠으나
알콜에 쩔어 살다보니 그런 거는 별로 느껴지지도 않다고......
온라인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재미있지 않냐고 하니
자기 성격이 그래서 그런지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
마라톤 할 생각도 해보았으나 아침에는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저녁에도 아내를 대신해야하기에 힘들지 않겠냐고.......
이젠 자주 그를 찾아보아야겠습니다.
그가 1988년 7월 경남에서 막노동현장에서 제가 일을 할 때 녹두서평에
나온 글을 읽고서 썼던 편지를 집에와 찾아보았는데 몇번의 이사를 다니느라
없어졌음을 알았습니다. 글도 잘 쓰고 '너를 부르마'라는 노래를 잘 불렀지요.
그의 얼굴을 담아두고 싶었으나 차마 카메라를 들지 않았습니다.
굳이 사진에 담아두지 않더라도 넉넉한 친구로
약게 변해가는 세태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그 옛날 동시대의 고민을 했던 벗으로서
죽는 날까지 만날 수 있는 그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춘천에서 헤어져 원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즐거웠습니다.
그동안 제가 너무 무심하게 살아왔지요.
2007.7.22. 밤에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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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제가 챙기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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