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주(珠)자는 구슬옥(玉)자와 붉을주(朱)자를 합친 글자로써 그 뜻은 한마디로 붉은 구슬이다
캄캄한 밤에도 붉은 광채가 찬란하게 빛나는 야광주 구슬을 말하는것이다
천자문에서 주칭야광(珠稱夜光)이라함은 주(珠)는 칭야광(稱夜光)이라고 읽으며 그 해석은 구슬이란 야광주를 말하는것이다 즉 야광주란? 칠흑같은 밤중에도 환하게 그 주변을 밝혀주는 야광주(夜光珠=밤을 밝히는 구슬)라는말이다
또 그 바로앞에 있었던 검호거궐(劍號巨闕)은 검(劍)은 호거궐(號巨闕)이라고 읽으며 그 해석은 칼에는 거궐이라 이름하는 유명한것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통틀어
세상에는 '거궐'이라 이름하는 유명한 칼이 있었고 바다속에는 밤중에도 붉은 광채를 발하는 "야광주"라는구슬이 있다는 말이다
구슬하면 생각나는것이 어린아이와 거위와 애꿎은 수난(受難)을 당하는 윤회라는 사람이 있다
그것을 멱주완아(覓 珠完鵝=구슬을 엿보다가 거위를 살려주었다)라고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닢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있다 역사의 전환기에서 어려운 시대의 소용돌이치는 물구비속에서도 뚜렷한 이름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나이어린 윤회는 서울 학교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한 객주(客主 =이씨조선때의 여관을 객주집이라고 하였다)집에서 하룻밤을 자고가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날따라 손님이 넘쳐흘러서 방을 얻지 못하고 추녀끝 한 구석에서 이슬을 피하면서 새우잠을 청하고있었는데 객주집 어린아이가 아름다운 구슬한개를 갖고나와 놀다가 그만 땅에 떨어뜨린것을 그 집 커다란 거위가 꿀꺽생켜버리고 말았다
어린아이는 울면서 집안으로 들어갔고 조금후 주인이 나와서 윤회를 보고 구슬을 내놓라고 다짜고짜욱박질렀다 애꿎은 윤회를 도둑으로 몰아서 밧줄로 꽁꽁묶어서 날이 밝으면 포도청(捕盜廳=도둑잡는 관청)에 넘기겠다는것이었다
윤회는 주인에게 간청을 했다 주인집 거위를 나와 함께 묶어달라고 요구했다 하도 간절히 청하므로 주인은 그대로해주었다
날이 밝을무렵 거위가 똥을 누었는데 거위의 뱃속에서 그 구슬이 나온것이다
아무죄도 없는 윤회를 도둑으로 몰아친 주인은 죄송스럽고 미안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윤회에게 "왜? 어젯밤에 거위가 구슬을 집어먹었노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윤회의 대답이 <당신의 성질로 보아서 어젯밤에 거위가 구슬을 집어먹었다고 바른대로 일러주었으면 당신은 저거위를 당장 목을 비틀어 죽였을것이요!>
이렇게 하여 잃어버린 구슬도 찾았고 거위도 살려낸 이야기는 윤회의 어린시절의 그 놀라운 참을성과 또 사람의 생각까지 꿰뚫어보는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있었다
윤회 ( 尹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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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1380-1436)30대 중반_이원종 | |
| | - 1380(고려:우왕 6)~1436(이씨조선:세종 18).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청경(淸卿) 호는 청향당(淸香堂). 아버지는 동지춘추관사 소종(紹宗)이다.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사재직장(司宰直長)이 되었고 좌정언(左正言)·이조좌랑·예조정랑·이조정랑·우부대언·병조참의 등을 거쳐 병조판서와 대제학 벼슬에 올랐다.
활달하고 이해심 많고 끈기 있는 성품의 소유자. 그러나 한 번 술독에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두주불사(斗酒不辭)라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하여 술 때문에 순군옥에 여러 번 갇히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취중에 교서를 작성해도 임금의 뜻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무난하고 이해심 많은 성품, 게다가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동시에 받은 인물이므로 세종의 초정 무렵, 현왕 세종과 상왕 태종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의견을 조율하여 갈등을 최소화 하는데 크게 공헌한다.
흥미진진<사냥개와 거의의 싸움> 누가이겼을까?
구경 한번 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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