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전쟁 22 - 콩코왕국은 포르투갈과 싸우다가 벨기에 식민지가 된후 독립하다!
아프리카! 하면 먼저 떠오르는게 검은 흑인이고 또 흑인 하면 떠오르는게 아프리카의
콩고 이니.... 김효근 이화여대 교수가 사람이 죽으면 이 세상 곳곳에 머문다고
생각한 인디언의 구전에다 곡을 붙가 작곡한 “내 영혼 바람 되어” 가 생각이 납니다.
“그곳에서 울지마오
나 거기 없소
나 그곳에 잠들지 않았다오
나는 천의 바람이 되어
찬란히 빛나는 눈빛 되어
곡식 영그는 햇빛 되어
하늘한 가을비 되어"
죽은 조상에 의지하는건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원주민이 다를바 없었으니... 콩고
동남부에 위치한 은동고왕국의 은징가 여왕도 포르투갈인들과의 전쟁등
어려운 결정을 할 때 마다 무녀(巫女) 에게 조상님이 무어라 하시는가 그 뜻을 물었습니다.
동아일보 최훈진 기자는 “보노보 핸드셰이크” 라는 이름으로 ‘버네사 우즈’ 가 지은 책에
“비극의 땅 콩고 어딘가에 다정한 유인원이 산다” 라는 부제목을 달아 기사를 썼습니다.
600만년전 인류의 조상 사람족(Hominini)은 사람(Homo) 과 침팬지(Chimpanzee), 보노보
(Bonobo) 의 세갈래로 나뉘어지며 그리고 사람속은 호모사피엔스를 거쳐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로 진화해서는..... 아프리카로 부터 퍼져나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보노보(Bonobo) 는 침팬지와 마찬가지로 멸종 위기에 처한 반면에 인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세계 인구 80억명을 돌파할 정도로 진화적 측면에서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2002년에 차드 공화국에서 발견된 화석은 대개골과 턱뼈 2개, 치아 3개가 발견되었
는데.... 이는 유인원이라 불리는 인류의 선조의 것과 매우 유사하니 화석의
이름은 사하라 사막 남부의 명칭 사헤르에서 따와 사헤란트로프스 차딘시스 입니다.
사헤란트로프스 차딘시스의 화석은 골격등 여러 분석을 통해 침팬지와 인간의 공통 선조
에 가장 가까운 유인원으로 밝혀진 것인데 현재의 인간은 여러번의 진화를 거듭하면서
완성된 것이라면...... 그 진화의 순서도 발견되어야 하는데 아직 다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흔히 인류고고학자들은 발견되지 않는 증거를 '잃어버린 고리' 라고 말하니 그렇다면 인류의 진화 과정도
'잃어버린 고리' 일까요? 맞다면 그 고리를 찾아 인류의 진화 과정을 명확하게 밝혀지길 기대해 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진화했다는 인간은 아직도 여전히 서로 총칼을 겨누고 약자를 희생시키고 있으니
주변국의 수탈과 내전으로 수천만명이 희생되고 난민이 되어 떠도는 아프리카 중서부에
위치한 콩고, 이 참혹한 비극의 땅에 폭력과는 거리가 먼 평화주의자인 보노보가 살고 있습니다.
저 책에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개는 천재다’ 의 공동저자인 버네사 우즈 (미국
듀크대 진화인류학과 연구원) 가 평생 존재조차 몰랐던 보노보를 알기 위해
2000년대 중반 콩고로 넘어가 어엿한 과학자이자 작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이 담겼습니다.
다정한 친화력을 지닌 종(種)이 번영한다는 주장이 담긴 그와 남편 브라이언 헤어 듀크대 진화인류학과
교수의 전작은 찰스 다윈의 적자생존론을 정면으로 반박해 주목받았는데..... 두 저자는
보노보 연구를 통해 깨달았으니 우리가 사람으로 자리매김할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협력이라는 것입니다.
암컷이 중심이 된 보노보 공동체 사회는 낯선이를 봐도 우리와 그들을 편 가르지 않으며, 오히려 보노보 만의
인사법(성적 행동)으로 환대하고, 어미를 잃고 세상에 홀로남은 어린 보노보를 힘을 합쳐 보살핀다고 합니다.
“나는 침팬지를 사랑한다. 그 고집과 힘을 사랑한다. 난폭한 기질 아래로 흐르는 다정함을 사랑한다.
(중략) 보노보에게서는 다른 느낌을 받는다. 보노보 와는 사랑에 빠진 기분이 든다.”
우간다 침팬지 보호구역에서 자원활동가로 일한 저자는 침팬지와 보노보에게 느끼는 자기 감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인류의 역사는 피로 물든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자를 돕고 깊이 교감하는
보노보에게 주목할 때 무자비한 학살과 폭력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고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사하라 사막 이남 검은대륙 아프리카에는 왕국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대륙에도
오래전 부터 여러 왕국이 세워졌으니 3세기에 오늘날의 말리국 팀북투에 세워진 가나
왕국은 11세기까지 존속했으며 9세기에 니제르에 세워진 카넴왕국은 19세기까지 이어졌습니다.
9세기에 남부 짐바브웨에 들어선 모노모타비왕국은 17세기까지 존속했으며 11세기 나이지리아
에 세워진 베닌왕국은 19세기까지 존속했고 13세기에 말리 서남부에 세워진 말리국은
15세기까지 이어졌으며 14세기에 가나 북부에 세워진 송가이 왕국은 16세기까지 이어졌습니다.
14세기경 콩고강 유역에 므위시 콩고족이 음반자 콩고 라는 도시를 건설하면서 “콩고 왕국”
이 등장했으며 15세기 후반 부터 콩고강을 거슬러온 유럽인과 노예무역을 통해 세력을
키웠는데, 16세기 초에 국왕 아폰소 1세와 왕자 엔리케는 기독교를 받아들여 교회를
설립하고 포르투갈에 학생들을 유학 보내는 등 신문물의 수입에 적극적으로 임했습니다.
본래 노예 무역은 서아프리카의 소국 혹은 부족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함이었으나 유럽과의 교역에서는 미국과 카리브해 및 브라질로 흑인의 대량 유출이
되었으니, 1526년 아폰소 1세는 자신의 통제를 넘어 성행하는 대량의 노예 무역에
위기감을 느끼고 포르투갈에 항의했으며 노예 수출을 이방인과 죄인에 한정시켰습니다.
원주민의 콩고 왕국은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구축했으니 영토를 6개 주로 나누고, 모든
지역에 왕의 지위가 먹혀들도록 했으니 탄탄한 정치 기반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도
모두 복속시켰으니 남쪽 앙골라의 “은동고 왕국”도 이런 나라 가운데 하나였는데
은동고 왕국의 왕은 “응골라” 라고 불렸으니 이 왕의 이름에서 “앙골라” 가 탄생했습니다.
앙골라의 은동고 왕국(Ndongo kingdom) 은 콩고왕국의 제후국이었는데 점차 자립했고 이후 포르투갈의
침공을 받아 은징가 여왕이 분전했으며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일부로 편입되는 19세기전까지 존재했습니다.
은동고 왕국은 16세기 이후에 기록이 나타나는데 당시 앙골라 일대에는 콩고 왕국, 은동고 왕국등 여러
왕국들이 존재했고 콩고 왕국은 앙골라의 종주국이었으며 그리고 은동고 왕국은 앙골라 동부
에 위치했으니 은동고 왕국은 대항해시대에 앙골라 서해안을 침범한 포르투갈인들과 접촉하게 됩니다.
은동고 왕국은 포르투갈인들과의 접촉과 영향으로 콩고 왕국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는데 결국에는 은동고 왕국도 콩고 왕국과 함께 쇠퇴했으며 19세기
이후에 은동고 왕국은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일부로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콩고 왕국이 노예 무역을 제한하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인근 소국들과 노예무역을 새로 트면서 댓가
로 총기를 주니, 이런 총기를 손에넣은 마탐바 왕국, 로앙고 왕국, 음분두 왕국등은 종주국이었던 콩고
왕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서양 세력도 서서히 콩고왕국 그 자체를 노리고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콩고 귀족들은 조상 전래의 토착 신앙을 억누르는 콩고왕국 교회의 시도에 반발했고 결국 1568년 수도를
뒤흔든 반란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개입했으며, 주변국 야카(Yaka) 그리고 소요(Soyo)와의 충돌로
한세기 동안 콩고왕국은 몰락해, 가르시아 2세의 분전을 마지막 불꽃으로 분열의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콩고왕국은 이제 커져버린 주변국들로 부터 압박을 받아 재건 노력은성과를 이루지 못했고
무역의 중심도 타지로 이동한 상태였으며 19세기 중엽 포르투갈에서는 노예 무역을
폐지하고 이후 남은 거주민을 후퇴시켰으며, 공통 조상을 중심으로 단결하는 마칸다
(makanda) 가 나타나 콩고의 독립성도 강화되었지만 주변 민족 또한 단결하게 됩니다.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 땅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으니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도
제국주의에 편승하여 국제아프리카협회를 수립해 콩고를 식민지로 삼으려고 하였으며,
겉으로는 인도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상은 콩고 식민지화를 위한 명목 단체였으며
또한 1879년 탐험가 헨리 모턴 스탠리를 고용해 콩고 족장들과 불공평 조약을 맺게 됩니다.
1879년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국제아프리카협회의 명칭을 '국제콩고협회' 로
바꾸었는데, 기존의 국제아프리카협회가 유럽국가들 사이의 명목에 불과한 단체
였다면.... 국제 콩고협회는 레오폴드 2세의 실질적인 콩고 지배 기구가 되었습니다.
1884년 콩고강 유역에 대해 포르투갈이 식민지 영유권을 주장했으나, 쇠퇴한 포르투갈의 의견
은 무시당하고 대신 상아 등의 사치품을 원하던 벨기에의 국왕이자 제국주의의 첨병
이었던 레오폴드 2세가 콩고 식민지를 획득하니, 벨기에의 콩고 획득을 반대하던 열강
들도 콩고 내에서 자유무역을 보장한다는 레오폴드 2세의 조항 때문에 찬성으로 돌아섭니다.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 부분을 대부분 획득했고 단지 콘스탄티노플
만은 서유럽의 견제로 손에 넣지 못했는데, 1878년에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산스테파노(이스탄불 서쪽 예실키)에서 조약을 체결해 발칸반도 여러 민족의 독립을 승인합니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루마니아의 독립을 인정했고, 그들의 영토는 늘어났으며 보스니아
와 헤르체고비나는 자치주를 구성하도록 했고 발칸에서는 모이시아,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서 인종상으로는 불가리아의 영토로 된 불가리아 영토가 대폭 늘어났습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유럽 제국들은 독일 비스마르크의 주선으로 저 산스테파노 조약을 개정
하기 위해 1884년에 베를린 회담을 열었는데 엉뚱하게도 "아프리카 식민지를 나누는"
협정으로 변했으니 다른 말로 콩고회담(영어: Congo Conference) 이라고 하는데 주최국
인 독일 제국은 카메룬과 탄자니아, 나미비아 를 얻고 영국은 케냐와 우간다를 얻었습니다.
산스테파노 조약 개정을 위한 베를린 회담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미국, 스페인, 포르투갈, 스웨덴-노르웨이, 덴마크, 벨기에, 네덜란드,
터키 등의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독일의 총리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회담을 주재했습니다.
이 회담은 유럽 발칸반도 문제가 아닌 엉뚱한 콩고 강 어귀를 지배할 특별권을 주장한 포르투갈
의 제안으로 열렸는데....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를 넓히려고 애쓰는 다른
나라들의 노력을 서로 질투와 의혹의 눈으로 보고 있던 당시 상황이 회담 개최를 촉진시켰습니다.
실제로 탐험가 헨리 모턴 스탠리가 벨기에의 레오폴 2세의 후원을 얻어 탐험과 영토 획득
임무를 추진하고 있는 동안, 프랑스 탐험가인 피에르 사보르냥 드 브라자는 이미
1880년에 스탠리풀 (콩고 강의 일부) 남쪽의 킨타모 급류에 브라자빌 기지를 세웠습니다.
그때 마침 그 옆에 레오폴드빌(현재 킨샤사) 이라는 기지를 세워 흡족해 하던 스탠리는
같은 해 프랑스 기지가 스탠리풀 북쪽으로 이전한 것에 더욱 기뻐했으니 그
때문에 스탠리풀 남쪽 연안이 모두 레오폴 2세의 관할권으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한편 포르투갈은 콩고 강 북쪽과 남쪽 땅에 대한 영유권을 지키려고 남위 5° 12′ 과 8°
사이의 대서양 해안선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해달라고 영국에 요구했으니, 이
포르투갈 영토의 동쪽 한계선은 오늘날 콩고 공화국의 마타디(브라자빌) 근처까지
뻗어 있었는데 영국은 1884년 2월 26일의 조약에서 포르투갈의 요구를 승인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 조약의 몇몇 조항이 거센 항의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조약은 무효가 되었고 포르투갈
은 국제회담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는데 독일과 프랑스의 지지를 받은 벨기에가 영국의 짖지를 받은
포르투갈을 물리치고 콩고를 차지했으며, 총회에서 각국은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포함한 콩고 분지
를 중립지대로 선언했지만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때 연합국은 이 사실을 무시하고 전쟁을 확대합니다.
베를린 회담은 모든나라에 교역과 선박운송의 자유를 보장했고, 노예무역을 금지했으며 또한 포르투갈의
주장을 물리침으로써 이곳에 영국과 프랑스 및 독일이 이미 원칙적으로 동의한 콩고 자유국이라는
독립국가가 1885년에 탄생하게 되었는데, 베를린 회담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손을 잡고 아프리카 문제
에서 영국을 고립시켰으며 이에따라 비스마르크는 독자적인 독일 식민지정책을 추진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레오폴드 2세는 콩고를 개인 사유지로 삼아 상아, 고무 등 자원을 손에 넣기 위해 무자비한 통치를 자행
했으니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콩고 원주민들은 손목이 잘리는 등의 가혹한 형벌을 가해 원주민이
무려 100만명이나 사망해 국제적 비난을 받자 벨기에 정부가 콩고 자유국을 레오폴드 2세로
부터 몰수해 1908년에 벨기에령 콩고를 수립하니 막대한 착취를 대가로 벨기에는 부를 누렸습니다.
1950년대에 미국과 소련은 벨기에령 콩고를 독립시키라고 벨기에에 압력을 넣으니 벨기에는 미국에
렌드리스 등 빚을 지고 있었던지라 1955년 부터 단계적인 독립안을 마련했으니, 현지 세력의
정당 설립을 허가했으며 의회도 허락했는데 그러나 정당 설립으로 독립 요구는 더욱 거세졌습니다.
노동 조합과 학생 운동가들은 경찰과 대치하며 독립시위가 많이 벌어졌으니 벨기에
식민정부는 점점 유화적인 방향으로 나아갈수 밖에 없게 되고 궁지에 몰립니다.
이후 벨기에 식민정부는 '본국에게 동등한 시민권, 선거 참여, 교육, 정치를 보장한다'
라는 사안을 보고했지만 벨기에 본국은 이 제안에 대해 현지에 혼란이
발생할수 있다 라는 이유로 거부하니 현지의 불만과 외교적인 압력은 거세집니다.
미국은 렌드리스 등 물자 대여에 대한 보상을 이유로 콩고의 독립을 요구하니 지친 벨기에 정부는
1958년에 2년 내로 콩고를 독립한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현지 내각이 구성되게 됩니다.
콩고인들은 파트리스 루뭄바의 정당에 지지를 보탰으며 좀 더 많은 자유와 권리를 누리게 되었으니
벨기에는 1955년 ~1962년까지 계속 된“알제리 전쟁” 같은 식민지 전쟁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콩고 원주민들은 끊임없는 투쟁 끝에 1960년 3월에 킨샤사 콩고로 독립했지만 루뭄바 총리와 조제프
카사부부 대통령 간 갈등이 심했고, 자원이 풍부한 동남부 카탕가주 총리 촘베가 벨기에의 지원
하에 독립을 선언하자 벨기에군은 국제연합에 의해 바로 철수되었으나 콩고 내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던 루뭄바와 벨기에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 백인정권
의 지원을 받던 촘베, 미국의 지원을 받던 카사부부 간의 삼파전으로 번졌습니다.
쿠바의 체 게바라 평전에도 이때 당시 콩고민주 공화국이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쿠바
혁명후 체 게바라가 콩고 내전에 참전해 게릴라 훈련 및 전투에 참가했기 때문으로
그러나 체 게바라는 콩고 인민군의 무능과 사치에 학을 떼고 쿠바로 돌아가 버립니다.
조제프 모부투가 정권을 수립해 루뭄바를 죽이고 1963년 카탕가의 촘베를 진압했으나 1964년
촘베가 콩고민주공화국 전체의 실권을 쥐게 되자 1965년 모부투는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내전은 최대 20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일단락 되는데 독재자로서 정권을 장악한 모부투
는 국명을 자이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부패와 사치, 실정으로 '도둑정치' 라는
국제적 악명을 얻지만...... 냉전이라는 환경에 반공주의자로 행세해 권력을 유지합니다.
그렇게 30여년간 모부투의 부패 독재 통치 아래에 있던 자이르에 다시 위기가 닥치는
데..... 바로 동쪽 옆 나라인 르완다에서 벌어진 르완다 내전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촉발된 1차 콩고 전쟁으로 결국 1997년에 모부투는 망명을 떠나고 마르크스주의자
였던 로랑 데지레 카빌라가 정권을 잡았고 국명이 다시 '콩고 민주공화국' 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1998~2002년에 아프리카의 제1차 세계대전이라고 불린 2차 콩고 전쟁이 일어
나게 되니 이 콩고 전쟁에는 8개 아프리카 국가가 관여하고 25개의 무장세력이
참전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피해를 낸 전쟁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전쟁에서 나미비아, 짐바브웨, 앙골라, 차드는 민주콩고 정부의 편에 섰고, 우간다와
르완다, 부룬디는 카빌라에 반대하는 반군들을 지원하면서 반대편에 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르완다와 부룬디는 동부 지역의 광물에 눈독을 들이고 서로 충돌하는
사태까지 발생했고, 반군들도 자원 때문에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으나,
카빌라 정권은 이미 전투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진 상태라 이를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