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스톤 국립공원에 다녀와서
김유훈 (밴쿠버 문인협회)
지난 해 가을 미국 와이오밍주에 있는 옐로스톤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에 다녀 왔다. 그 곳은 여행 전문가들이 뽑은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한다고 추천한 바로 그 국립공원이다. 그러나 내가 그곳에 가게 된 것은 관광이 아니고 대형 트럭으로 짐을 싣고 가는 일이지만 좀 흥분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목적지는 그 곳 공원의 제일 높은 데 있는 호숫가 근처 건축 현장이였다.
이곳 미션( MISSION )근처에 있는 시더(CEDER) 목재소에서 지붕용 자재를 가득 싣고 약 1000마일 가까이 달려갔다. 10월 초 밖에 안 되었어도 높은 산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나는 천천히 운전하여 밤 늦게 몬타나주에 있는 버즈맨(BOZEMAN)에 도착하였다. 다음 날 눈을 떠보니 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초행 길, 나는 흰 눈사이로 트럭을 몰고 옐로스톤 국립공원(YELLOWSTONE NATIONAL PARK)까지 달려갔다. 다행이 북문(NORTH GATE)를 통과하고 부터는 도로에 눈이 쌓이지 않았다. 깨끗한 도로를 보고 확실히 미국 국립공원은 다르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그 큰 트럭을 끌고 높은 산 길 을 구비구비 올라 8000피트 넘게 올라갔다. 그곳에는 유황 온천도 있고 관광 온 관광객들도 많이 보였다. 관광으로 말하자면 나는 누구보다 더 잘 하고 있었다. 승용차 세 배 높고 전망 또한 180도 전면 유리로 내려다 보는 경치야 말로 무엇과도 비교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갈 길이 급하여 한가롭게 마음놓고 경치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 생각 같아서는 그 유황 온천 근처에 내려 폼 잡고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었겠지만 짐을 싣고 산 길을 바쁘게 가야 하는 나에게는 사치스러움이였다.
그 곳 국립공원은 자연경관을 그대로 보존하기 때문에 송신탑이 없어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아 공중전화에서 겨우 공사 현장측과 연락이 되었다. 다행히 공사장의 사람이 내게로 와서 나를 안내해 주었기에 그 곳에서 무사히 짐을 내릴 수 있었다. 내가 짐을 다 내린 후에 비로서 주변의 경치들이 눈에 잘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높은 산 속 그 위에 큰 호수가 있는 것이 신기하였고 버펄로 떼들이 도로에서 한참 거니는 모습도 인상적이였다.
수 십마리의 버펄로 떼가 도로를 건너는 동안 양쪽의 차량들은 길가에서 그 광경을 한가하게 지켜보았다. 그들은 나의 바쁜 마음에는 아랑곳 없이 아주 천천히 풀을 뜯기도 하고 동료들 길을 다 건너도록 지켜 주기도하며 자기 할 일들을 다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신기해서 사진도 찍고 즐거워 했지만 마음이 바쁜 나는 그렇게 함께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돌아올 길이 1000마일 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기다리며 지도를 보니 서쪽문(WEST GATE) 길이 더 용이해 보였다. 차가 움직인 후에 나는 오던 길과 달리 서쪽으로 향하였다.
한참을 달리면서 보니 점점 이상한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버펄로 떼도, 유황 온천도, 그리고 진흙 온천도 아니였다. 그것은 바로 불에 타버린 채 쓰러져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였다. 지금은 모두 신록에 감추어진 채 누어 있어서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었다. 나중에 기록을 찿아보니 1988년 7월부터 9월까지 석 달 동안의 큰 산 불은 공원을 절반 가까이 태웠다. 미국은 국립공원에서 산 불이 나면 원래 끄지 않고 그냥 둔다는 것이 법으로 되어있다. 인간과 동물들의 생명, 그리고 주요한 건축물 및 문화재에 직접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초목의 신진대사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너무 화재가 커서 부득이 정부가 소방인원 수 만명을 동원하여 진화에 나서 불을 끄려하여도 끌 수 없었고 가을에 눈이 내려 겨우 꺼졌다고 한다. 결국 자연의 섭리대로 불이 나고 계절의 변화가 불도 끄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자연 앞에서는 아무 손도 쓸 수 없고 또 노력해도 그 결과는 미약 할 뿐이다.
나는 공원의 큰 불의 흔적을 보며 트럭을 몰았다. 서쪽문을 지나 191번 도로를 달리는 길도 산 불의 흔적은 계속이였다. 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생을 생각해 보았다. 어느 날 언젠가는 쓰러져야 하는 우리가 아깝거나 후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 되었다. 왜냐하면 더 유능하고 활기찬 신 세대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서 신록 마냥 새롭게 덮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특별히 우리 자녀들 세대는 이중 언어에도 능통하고 한국문화와 서양문화도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처럼 전쟁과 가난과 아픔의 기억조차 없는 아주 순수한 세대들 인 것이다. 더우기 아들 딸 구별없이 사랑과 정성을 듬뿍 받고 자라난 세대들이기에 나는 솔직이 이들 세대가 무척 부럽다. 마치 갓 자라난 나무들이 푸르름을 더한 것 처럼 그 싱그러움과 발랄함을 지닌 지금의 세대가 더욱 희망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온실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세월의 풍파에 좀 약하다는 것이 흠이겠지만 억지로 험하게 키울 수도 없는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나는 비록 목회를 중간에서 그만 두었지만 높은 분이 보시기에는 나보다 더 유능하고 더 젊고, 맑고 그리고 밝게 자란 세대를 원하시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면 우리 가족부터 안정을 시키는 일이 더 급하다는 뜻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젊은 날, 뜨거운 신앙으로 공부하고 또 그 열정으로 주의 일에 이십년 동안의 헌신을 그만두게 된 나의 아쉬움은 남아 있지만 이제는 시대의 흐름과 이민의 삶이라는 엄연한 현실앞에서 나는 다음 세대에게 사명을 넘겨 주었다. 마치 야구에서 투수의 중간 계투가 필요하듯이 우리들의 혼란했던 시대에는 나와 같은 목회자가 필요하였고 이제는 더 이상 독재나 이념이 아니라 더 밝은 신 세대들의 언어와 노래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지도할 수 있는 신세대 인물의 시대가 왔다.
우리 세대는 일제의 강제 합병의 아픔을 껵은 부모님 밑에서 6.25 전쟁이 일어난 해에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 시절은 지독한 가난과 보리고개의 아픈 추억이 있다. 특히 남 북의 군사적인 대치속에서도 조국 건설을 이루는 주역으로 일하였다. 또 싸우며 건설하자는 구호 아래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맹 활략을 하였다. 특히 월남의 전쟁터에서는 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이 있었고, 독일에는 광부와 간호원으로 또 그 뒤를 이어 중동, 그 사막의 해외 건설현장에 나가 외화 벌이를 했던 세대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장기 군사독재 앞에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최류탄 냄새를 맡아가며 학교 보다 거리에서, 그리고 학문적인 실력 보다 몸으로 행동하였던 시대이다. 이토록 우리 세대가 젊음을 바친 노력과 땀에 힘입어 조국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민주화를 이루었고 그 덕에 우리 자녀 세대는 풍족함을 알고 세계화도 된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쓰러진 고목들을 보면서 지나간 6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나무들 사이로 지나가는 듯 하였다.
나는 그 새롭게 자라나는 나무와 그 밑에 쓰러진 고목들을 보면서 비록 내가 점점 더 늙어가고 기운이 없어 질 지라도 그냥 쓰러질 것이 아니라 활 활 타는 불 꽃과 같이 되어 남아 있는 정렬도 태우리라 생각해 보았다. 이런 생각을 하니 그동안 60년 살아온 나의 경험들을 잘 기록하는 일이 필요해졌다. 그리고 남은 생애를 누군 가를 위하여 보람이고 값있게 보낼 계획과 시간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어느날 나에게 남은 불꽃은 겨울 눈이 내리면 꺼져갈 것이라고 ...
이렇게 생각하고 달리는 동안 날씨는 또 바뀌어 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첫댓글 자연을 보면 우리도 자연의 일부라는 생각을 버릴수는 없지요 .
나고 자라면서 많은것을 겪고 지나갑니다
남은 시간을 마지막 불꽃으로 태울 지나온 시간
누군가를 위해 보낼수 있다면
정말 아름다운 불꽃으로 기억 되겠지요
글 잘 읽었습니다
장거리 운전으로 피로하실텐데 줄곧 글쓰기에 여념이 없으십니다. 계속 건필하시기 바라고 뜻대로 삶을 이끄는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