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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말돌리 공동체 - 사크로 에레모 (Sacro Eremo)
까말돌리회는 천 년 전 성 로무알도에 의해 설립이 되었고
베네딕도회의 규칙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이 수도회는 두 개의 공동체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하나는 거룩한 사막 (Sacro Eremo)이라고 불리며
애독의 생활을 하는 은수자들의 공동체와
산 아래 떨어져 있는 폰테보나 수도원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두 공동체 모두 기도하고 일하며 하느님을 찾는 삶을 살고 있지만
세상에 등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
외부 사람들을 맞이하고 수도원 영성을 나누는 삶을 사는 곳입니다.
이러한 의미는 12세기에 수도원 정원에서 볼 수 있는 부조에서
두 마리의 비둘기가 하나의 잔으로 갈증을 해소하는
상징적인 모습으로 확실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 생활에 있어서 은수 생활과 공동생활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도 생활의 완성을 위해 상호 협조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이 수도회의 모토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Ego Vovis - Vos Mihi.
나는 여러분 것이고, 여러분은 나의 것입니다.
사크로 에레모 (Sacro Eremo)
해발 천 미터에 위치한 까말돌리 공동체는
사크로 에레모 (Sacro Eremo)라고 부르고 있는데
에레모 라는 말은 그리스 말에 어원을 가지고 있는 사막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초세기 시리아나 팔레스트리나에서 있었던
은수자들의 삶의 형태를 모범으로 하여
자신의 은수처에서 애독, 침묵, 기도, 노동으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고
베네딕도의 정신에 따라 공동 수도 생활과 함께
오스피찌오를 만들어 순례자나 방문자들이 까말돌리 영성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크로 에레모는 전승에 따르면
1012년에 아레쪼의 백작이었던 말돌로가 자기의 땅을 (Campus Maldoli)
성 로무알도에게 기증하면서 처음 공동체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반면 학자들은 1025년경 아레쪼의 태오달도 주교가
사랑스러운 땅 (Campus amabilis)이라고 불리던 땅을
1025년에 기증하여 이 공동체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주교에 의해서 1027년에 성당이 축성되었습니다.
여하튼 처음에는 다섯 개의 은수처와 공동 기도할 수 있는 경당 (오라토리오)
그리고 이 은수자들을 도와주고 순례자들이 와서 머물 수 있는
오스피찌오로 건물이 구성돼 있었습니다.
나머지 열다섯 개의 독채들은 그 후에 만들어졌고
지금은 모두 스무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크로 에레모의 ‘아름다운 문’이라고 불리는 이 정문은
2013년 클라우디오 파르미자니 (Claudio Parmiggiani)에 의해 만들어졌고
삶과 죽음, 이 세상과 저세상, 지상과 천상 사이에 있는
이곳 수도자들의 삶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미닫이의 왼쪽 문은 죽음을 은유하는 마른 나무, 산양의 머리 뼈,
해골 그리고 공동묘지의 비석이 들어가 있습니다.
오른쪽 문은 생명을 은유하는 살아있는 겨울나무와
부활의 계란이 들어가 있습니다.
죽은 나무 사이에 있는 부엉이는
언제나 깨어 기도하는 은수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문의 뒤편에는 원장이었던 성 로돌포가 쓴 회칙에 있는 내용으로
은수자가 갖추어야 할 성덕 일곱 가지를
나무에 비유하여 기록하였습니다.
문 위의 참새는 그 성덕으로
종으로 표현한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향하고 있습니다.
이 사크로 에레모는 성 로무알도가 생각한
수도 생활 방법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종하시기 3년 전에 이곳에 공동체를 만들면서
이미 시행착오는 다 겪으신 상태에서 완성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최소한의 것만 갖춘 단순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건물이 필요하게 되고 건물이 많아지면 소유가 늘어나면서
결국은 하느님께 향하는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을
성인은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공동체는
사막에 들어가서 한 사람만 세상과 떨어져서 사는 은수자의 모습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규칙에 우선하여 희생해야 하는 공동생활도 아닌
완전히 다른 수도 생활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전에 없던 새로운 은수 수도 공동체를 만드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크로 에레모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채의 은수처와 성당이 어울려
하나의 공동체 모습으로 생활했던 것은 4세기 때부터
라우라 (Laura)라고 불렸던 동방의 은수자들의 모습 속에서도 존재하였습니다.
이런 삶의 형태를 본받았지만 로무알도 성인은
베네딕도 규칙 안에서 좀 더 체계적인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은수자들이 많은 시간을 자신의 독채에서 생활하는 것은
카르투시오회의 수도자들과 비슷한 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카루투시오회는 엄격한 봉쇄 수도 생활을 지향하고 있고,
이 공동체는 외부 사람들이 찾아와 머물며
함께 체험하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해서 로무알도 성인 시절부터 오스피찌오라는 건물을 따로 두어
그들이 자기네의 모습을 보고 배우기를 원했고
이곳에 봉헌자들이 있으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도 했고
공동체의 수도자들이 생활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폰테보나 수도원 설립에 대해서
로무알도 성인은 생각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성인의 생각에는 이미 이 공동체의 모습이 완성체였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독방은 처음 만들어진 다섯 개의 은수처 중 하나이고
프란치스코 성인이 한동안 이곳에서 은수 생활을 하실 때 사용하신 독채입니다.
아시시에 가면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내부에서
포르치운꼴라 (Porziuncola)라는 경당을 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아버지와 결별한 후 포르치운꼴라에서
자기를 따르던 형제들과 처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의 모습을 보면 사크로 에레모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크로 에레모에서 생활했던 프란치스코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고
이 방법이 하느님과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수도자들이 살아가는
좋은 길이라는 것을 성 프란치스코가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레또의 성모 마리아 독방에서는
밀라노 추기경이면서 트렌토 공의회를 이끌었던
성 카를로 보로메오가 1579년에 머물렀던 곳입니다.
교황의 경당은 후에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되고 프란치스코회의 보호자가 되었던
우골리노 추기경이 1220년에 봉헌한 경당입니다.
이 경당 안에는 이곳에서 은수생활하면서 복자가 된 분들의 유해가 있고
바로 옆에는 이곳 사크로 에레모와 폰테보나 수도원에서 선종한
수도자들의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공동체와 침묵 속에 잠들어 있는 형제들의 모습은
죽음으로 공동생활이 끝이 아니라 다가올 부활을 함께할
또 다른 삶의 표시이고 연장임을 알려주는 듯합니다.
성 로무알도의 독채
1. 입구 및 기역 자 복도 2. 거실 3. 침대 4. 공부실 5. 소성당 6. 땔감 보관실 7. 창고 8. 화장실 9. 텃밭
수도자들이 생활하는 독채는 봉쇄 구역이라 당연히 볼 수는 없지만
유일하게 개방되어 있는 로무알도 성인께서 2년 정도 생활하셨다는 독채를 보면
수도자들이 어떤 집에서 살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수도자들은 카르투시안의 수도자들처럼
자기의 독채에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기도와 공부 그리고 노동으로
애독의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에 수도원의 독방이 아니라
활동 공간이 있는 독채를 사용하였습니다.
수도자가 주로 생활하던 공간이 가장 중심에 있으면서
나머지 공간들이 감싸고 있는 달팽이 모양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든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기후 변화가 심하고 여름에도 온도가 떨어지는 산중이라
외부의 추위를 막기 위한 건축이었고 벽들의 마감재도
똑같은 이유로 나무를 사용하였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기역 자 모양의 복도가 나오는데 이
곳 또한 날씨가 나빠 수도자가 텃밭에 나갈 수 없을 경우
걸으면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었고 간단하게 손작업도 할 수 있었습니다.
독채의 가장 중심부에는 벽난로가 있는 거실과 함께
영적 독서 및 성경을 보는 공부방 그리고 보온 유지를 위한 벽장 침대가 있습니다.
이 공간에 햇빛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창문과
음식을 외부에서 넣어주는 조그만 문이 있습니다.
지금은 식사를 공동식당에서 함께 하고 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식사도 각자의 독채에서 따로 하였고
이 음식을 준비해 주던 사람들이 콘베르시 형제였습니다.
거실과 통해 있는 문을 열면
개인적으로 미사를 드리거나 기도할 수 있는 경당을 볼 수 있고
제단화는 성인께서 이곳에 계실 때 산속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구하는 장면을 그린 17세기 때의 소데리니 (Soderini)의 그림입니다.
개인 텃밭은 육체노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독채의 2층과 옆 건물은 순례자나 방문자들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는데
1622년부터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수도원을 폐쇄하면서 이곳의 책들도 여러 곳으로 흩어졌지만
아직도 만 오천 권의 책들을 보관하고 있고 한쪽 방에는
계몽주의 시절 교회가 금서로 지정했던 책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 책들은 그 시절 아무나 볼 수 없었고
교회에서 허락된 학자들만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수도원 성당
1. 현관 2. 준비소 3. 동정 마리아의 제단 4. 성 요셉 소성당 5.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제단
6. 사막의 성 안토니오 소성당 7. 가대 (Coro) 8. 중앙 제대와 성직자 자리
9. 성체의 소성당 10. 규칙서의 방 11. 제의방
1027년에 변모하신 구세주의 이름으로 처음 축성된 기도소 (오라토리오) 위에
1220년 8월 23일 우골리노 추기경에 의해 새로운 성당이 봉헌되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축성 예절에 프란치스코 성인도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되는 우골리노 추기경이
수비아코의 그레고리오 경당을 축성할 때에도 프란치스코 성인이 함께 있었던 것처럼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며 은수 생활의 기쁨을 느낀 프란치스코 성인이
함께 하였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으로도 가능한 일입니다.
이때 지어진 성당은 지금의 성당처럼 하나의 회랑을 가지고 있는 성당이었고
제대의 성직자석과 함께 기도석은 은수처에 있는 수도자들이 사용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준비소로 되어있는 현관과 성당 사이 공간은
콘베르시 수도자들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 수리가 있었지만 13세기 때의 모습의 성당이 16세기 말까지 이어왔고
현재의 성당 모습을 갖게 된 것은 1575년, 1659년 그리고 1708년도에 공사를 거치면서
그 당시 전례에 맞는 바로크 양식의 성당으로 만들면서부터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당은 더 좋은 재료와 바로크라는 더 화려한 양식으로 바뀌었지만,
수도자들이 하느님을 찾고 만나는 장소로써 기도와 전례가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공동체의 중심이라는 것은 변함없이 지속되어 왔습니다.
베네딕도 성인께서 ‘전례보다 앞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것은
이곳 수도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성당 정면은 1713년도에 성당 입구 앞에 현관을 두기 위해서
원래 있던 정면에 덧붙여서 만들었습니다.
입구를 중심으로 위 벽감에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왼쪽에는 노르치아의 성 베네딕도 그리고 오른쪽에는 성 로무알도의 석상이 들어가 있습니다.
입구를 들어가면 조그마한 현관이 있고 성당을 들어가는 문 위에는
1480년경에 톰마소 피암베르티 (Tommaso Fiamberti)가 만든
아기 예수님을 앉고 계신 성모님의 대리석 부조가 있습니다.
천사들에 둘러싸여 애정 어린 미소를 방문자들에게 보내고 계십니다.
문을 들어서면 나오는 공간입니다.
저는 이곳을 준비소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성당의 장소에서 7세기 이후에는 사라진 공간이지만
하느님 앞에 가까이 가기 전 양심 성찰을 하며 준비하던 곳입니다.
이 장소는 원래 1575년까지 콘베르시라고 불리던 노동 수도자
혹은 봉헌자의 기도석 (Coro)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수도자들이 기도하는 공간과는
건축적으로 구분을 지어놓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7세기에 좌우로 확장되면서 제대와 소성당이 덧붙여 만들어졌습니다.
출입구 위에는 죠반니 드라고 (Giovanni Drago)가 17세기 때 그렸고
1985년도에 복원작업을 한 ‘성 로무알도의 환시’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까말돌리회 수도자들이 흰옷을 입고 하늘로 오르는 모습을
로무알도 성인이 탈혼 상태에서 보는 장면입니다.
사실 수도원 영성의 테마에서 하늘과 연결된 ‘층계’라는 것은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층계는 창세기 28장 10절에서 17절에 야곱의 꿈에 나오는
하늘과 연결된 층계와 연관이 되어있고 수도자들이 하느님께 다가가는
영성의 단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보면 로무알도 성인은
개혁 수도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흰옷을 입고 있지 않은데,
이 시기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른다는 의미와
이탈리아 개혁 수도회의 아버지라는 의미에서
베네딕도 성인과 같은 수도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놓았습니다.
제대를 바라보며 오른쪽 끝에는 1575년 날디니 (Naldini)가 그린
성 베네딕도, 성 로무알도, 성 예로니모 그리고 성 루치아에 둘러싸여
아기 예수님과 함께 계신 동정 마리아의 제단화입니다.
바로 옆 오른쪽으로 성 요셉 소성당이 있고
이곳에는 까말돌리회를 빛냈던 세 사람의 유해가 있습니다:
암브로시오 트라베르사리 (+1439), 마리또 알에그리 (+1478), 에도아르도 바론치니 (+1741).
반대쪽에는 몬테뿔치아노의 칸디도 소르비니 (Candido Sorbini)가 1856년도에 그린
원죄 없으신 동정녀의 제단화가 있습니다.
복자 비오 9세 교황께서 1854년 12월 8일에 원죄 없으신 성모님 교의를 반포하셨으니
그 직후 바로 이 그림을 모신 수도자들의 성모님에 대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왼쪽으로 사막의 은수자 성 안토니오의 소성당이 있습니다.
이 소성당 안에는 안드레아 델라 롭비아 (Andrea Della Robbia)가
15세기 말에 만든 아름다운 유리 테라코타가 있습니다:
중앙에는 축복하시는 아기 예수님을 무릎 위에 세워 안고 계시는
동정 마리아의 머리에 두 천사가 하늘 여왕의 관을 씌우고 있고,
우리가 보기에 왼쪽부터 성 로무알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세례자 요한
그리고 사막의 은수자 안토니오가 부조되어 있습니다.
천상에선 영원하신 성부께서 두 천사의 흠숭을 받으며 축복을 하고 계십니다.
마리아의 발아래 원형 안에 부조는 성 로무알도가
텔리토의 급류에 빠뜨려 죽이려 하는 악마와 싸우시는 장면입니다.
현재 그 자리에는 소성당이 세워져 있고 내부에 사탄과 싸울 때 세겨진
성인의 손과 발 자국이 있습니다.
소성당 내부 왼편 그림은 십자가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고
1932년 아돌포 롤로 (Adolofo Rollo)라는 화가가 그렸습니다.
성직자석과 수도자들의 기도석
수도자들이 자신의 독채에서 애독의 생활을 한다면
성당은 가대에서 수도자들이 함께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공동생활을 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수도자들은 매일 미사를 포함하여 다섯 번 함께 모여 기도를 드립니다.
제단화는 1593년 토스카나 학파에서 그렸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그리고 이곳 카센티노 계곡에서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만나신
성 로무알도와 근처 라 베르나에서 오상을 받으신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제단화 위에 반타원형 천장에 그려진 그림은
1937년 에찌오 죠반노찌 (Ezio Giovannozzi)가 그린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변모입니다.
제단화 양옆벽에는 벽을 파서 만든 감실이 있습니다.
왼쪽은 지노 다 세띠냐노 (Gino da Settignano)가 1531년에,
오른쪽은 그레고리오 디 로렌죠 (Gregorio di Lorenzo)가 1463년도에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는데 17세기 말 성당 공사를 하면서 순금으로 입혀놓았습니다.
천장은 동정 마리아의 이야기를 네 장의 프레스코화로 그렸습니다.
제대 위 천장에는 가브리엘 천사의 주님 탄생 예고이고,
기도석 천장 위에는 야고보 외경에 나오는 요아킴과 안나의 성전에 마리아 봉헌과 마리아의 탄생
그리고 네 번째 그림은 영원한 하느님께 마리아의 들려올려지심입니다.
성당 천장의 그림과 장식은 볼로냐의 두 형제인 안토니오와 쥬세페 마리아 롤리(Antonio e Giuseppe Maria Rolli)에 의해 17세기 말에 그려졌습니다.
기도석 벽에 있는 세 장의 그림은 당시 황제들과 관계된 성 로무알도의 이야기입니다.
제대 왼편 위에 있는 그림은
시에나 출신의 프란체스코 프란치 (Francesco Franci, 1658-1721)가 그렸고
내용은 오토 3세 황제가 성 로무알도에게
로마의 원로원인 크레쉔지오를 죽인 일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도석 양옆벽의 두 장 그림은
성당 뒤편 로무알도의 환시 그림을 그린 죠반니 드라고가 그렸고
내용은 페레오 은수처에 있는 성 로무알도를 방문한 오토 3세 황제,
그리고 다른 한 장은 로무알도 성인이 헨리 2세 황제를 방문하여
황제로부터 아미아타 산의 구세주의 수도원을 선물로 받는 장면입니다.
황제와 관련된 그림들은 성인의 폭넓은 대인 관계도 가리키겠지만
베네딕도 성인이 고트족의 왕이었던 도틸라를 만났던 사건을 연상시키며
두 성인의 삶의 관계성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시간경을 드리기 위해 모이는 수도자들의 기도석은 1
6세기 초에 호두나무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체 소성당과 규칙서의 방
요셉 소성당 정면으로 나있는 문을 들어가면 16세기에 봉헌된 성체 소성당이 있습니다.
소성당이라는 말은 이태리 말로는 카펠라 (cappella) 라고 부르는데
이 말의 시작은 투르의 성 마르티노의 망토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망토라는 말은 이태리 말로 카파 (cappa)라고 부르는데
성인께서 거지의 모습으로 나타난 예수님에게 자기의 망토 반을 잘라서 드리고
남은 것을 성당의 한 장소에 유물로 보관하면서 그 장소를
망토를 보관하는 장소라는 뜻으로 카펠라 (cappella)라고 부르기 시작하였고,
대성당 안에 제대가 있는 작은 장소를 이렇게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무 장식이 없고 작은 장소인 이 성체의 소성당은
카말돌리 수도자들이 주변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롯이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소성당을 나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면 규칙서의 방을 만나게 됩니다.
긴 의자와 카말돌리회의 문장이 들어간 천장은 16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성당과 연결되어 있는 문 옆에 있는 그림은
1915년에 아우구스토 무씨니 (Augusto Mussini)에 의해 그려진
‘숲속의 성 로무알도와 다섯 제자’입니다.
이곳에서 수도자들은 영적이든 물질적인든
공동체의 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다루게 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의 밑바탕이 되는 것은 항상 가난과 노동이며
수도회 영성을 유지하기 위한 대화가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수도자들의 가난은 자기 선택적 가난입니다.
욕심내는 인간의 마음에서 부족함이라는 세상의 가난이
고통과 연결된 개념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주어진 모든 것에 만족하는 수도자의 마음에서
충분함이라는 공동체의 가난이 마음에 여유로움을 주면서
하느님께 향할 수 있는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이 가난한 수도자의 마음과 결합되어 나오는 것이 노동입니다.
노동은 하느님께 향하는 흐트러진 마음을 잡아주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도 있지만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2데살 3,10)는 말씀처럼
공동체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병든 수도자나 아픈 수도자가 있으면 그들의 노동도 대신하면서
공동체 안에서 애덕을 실천할 수 있는 덕목이 되기도 합니다.
사크로 에레모의 각 수도자는
독채 안에서 나의 하느님을 만나고
성당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만나며
규칙의 방에서 세상의 하느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출처] 카말돌리 공동체 - 사크로 에레모 (Sacro Eremo)|작성자 Roma Vian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