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교향악단 제646회 정기연주회 상임지휘자 함신익 취임 기념연주회
(2010.7.23 예술의 전당)
프로그램: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제 1번(협연자: 스티븐 허프)
칼 오르프, '카르미나 부라나'
KBS 교향악단의 신년 연주회(그 때도 함신익님 지휘였음)와 백건우 선생님이 연주하는 브람스 피협 1번(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 내한 공연시)을 들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이렇게 다시 K향과 브람스 피협 1번과 만나게 되다니 우연치고는 조금 묘하게 느껴지기도 한 자리였다. 함신익님 취임에 관해서는 조금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다들 알 이야기니 굳이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상임지휘자 없이 휘청대던 K향이 그래도 마침내 상임지휘자를 맞이하게 됐다는 것은 K향과 아무런 관련없는 일개 청중으로서는 조금은 기쁘기도 했다.
게다가 오늘의 브람스 피협 협연자는 꼭 한 번 보고 싶었던 스티븐 허프가 아니었던가! 하이페리언 레이블의 '낭만주의 시대 피아노 협주곡' 시리즈로 무척 인상 깊어서 언젠가 한 번은 그의 실황 연주를 들어보고 싶었는데 이런 뜻 밖의 기회가 올 줄이야! 사실 협연자에 대한 더 큰 기대를 갖고 설레는 마음으로 예당으로 향했다. 청중들이 3층까지 빼곡히 채워지고, 이미 온라인상에서 '매진'되어서 현장구매하러 온 사람들은 많이들 아쉽게도 발걸음을 돌리거나 밖에서 모니터로 공연을 보기도 했었다.
브람스 피협과 카르미나 부라나 모두 스케일이 큰 곡들이라 일반적인 서곡 연주 없이 바로 브람스 피협으로 전반부가 시작되었다. 사실 뭐 빨간 구두나(...) 녹색구두(...)를 쪼~오끔, 아주 쪼오끔 기대는 했으나(^^;) 그 기대를 저버리고 허프는 검정 구두에 검정 정장의 깔끔하고 단정한 차림새로 나왔는데, 전의 백건우 선생님 연주가 '인생을 되돌아보는 노년의 회한이 서린 연주'였다면 스티븐 허프는 '절제가 깃든 청년의 담백한 미소' 같은 연주를 들려 주었다. 그의 1악장 연주를 들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인 'My cherie amour'의 'In a cafe or sometimes on a crowded street, I`ve been near you but you never noticed me...That behind that little smile I wore, How I wish that you were mine'라는 구절이 절로 떠올랐는데, 아마 브람스도 클라라를 평생 동안 바라 보면서 이렇게 느꼈겠지. 사실 난 브람스가 쓴 모든 곡에는, 아니 음악가들이 쓴 모든 곡에는 그들의 연인(그게 파니든, 클라라든, 엘리제든, 아니면 알마든지간에...! 슈베르트는...지못미~ OTL)을 향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데(시와 음악을 관장하는 Muse가 여신인 것은 괜히 그런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심지어 브람스 교향곡 1번 1악장이든 아님 피협 1번 3악장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1악장 연주를 들었을 때 사실 서정적인 측면을 아름답게 되살려내는 그의 장기로 보아 1악장 보다는 2악장에 더 기대가 많이 되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2악장에서 그는 단순한 음표 몇 개만 치고도 그 속에 녹아있는 행간(行間)까지 충분히 짚어내면서 어떤 남자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그 아름다움이란 이제 막 멀고 먼 겨울 사냥길에서 돌아온 아주 젊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늙지도 않은, 얼굴엔 아직 주름이 드러나진 않았으나 눈가엔 몇 개의 가느다란 주름과 그늘이 잡힌 서른 중후반의 사냥꾼이 집 안의 난롯가 앞에서 불을 쬐며 그를 기다렸던 아내의 귓가와 이마에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나직하게 미소 짓는 그런 것이었다. 나의 모든 근원(根原)은 당신이었노라고, 내가 가는 곳, 가야할 곳, 그리고 돌아가고픈, 반드시 돌아가야 할 그런 곳은 다름 아닌 당신이었노라고. 모든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란, 결국 에스키모에게 있어서 북극성 같은 의미가 아니겠는가.
사실 2악장의 그런 고요한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있다가 3악장의 갑자기 영웅적(?)인 힘찬 어조에 놀라면서 적응이 그닥 안되는 것은 언제든지 이 곡을 들어보아도 마찬가지인데, 1악장이야 뭐 그렇다 치더라도 내게 있어 피아니스트가 이 곡을 얼마만큼 잘 소화해 내느냐는 2악장과 3악장을 얼마만큼 논리적으로(?) 잘 전개해 나가는가(이것은 쇼팽 피협 1번의 2악장과 3악장의 연결도 마찬가지인데, 그런 의미에서는 카차리스의 쇼팽 피협 1번 음반을 좋아하는 편이다. 일단 2악장과 3악장의 말하는 뉘앙스가 아주 딴판은 아니므로...)를 많이 따지는 편이다. 허프의 연주는 그런 면에서 꽤 괜찮은 편이었었는데 물론 '건반 위 피아니스트의 완전 연소'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기엔 1.5% 모자른, 끝까지 어딘지 모를 절제의 뉘앙스를 풍기긴 했어도(하긴 그렇게 절제력을 갖춘 연주 스타일이기 때문에 낭만주의 시대 피아노 협주곡 음반이 방종(放縱)으로 치닫지 않고 끝까지 우아한 품격을 잃지 않아 비평가들과 대중의 찬사를 받았는지도...) 다시 원기 회복을 한 사냥꾼이 활력에 찬 얼굴로 '나는 (당신을 아무리 사랑한다지만) 다시 떠나야 해, 왜냐하면 이것은 나의 운명이니까'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긴, 모든 여자들에게 있어서 남자들은 원래 처음부터 사냥꾼이었던 것 역시 사실이니.
그런데 왜 KBS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냐고 한다면 아니, 뭐 쓸 거리를 줘야 이야기를 하던지 말던지 하지...;;; 솔직히 브람스 피협을 놓고 보면 오케스트라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현도 1악장에서는 손이 덜 풀려서 그랬겠지만 칼칼한 소리가 나오다가 3악장에서야 비로소 정갈한(아무리 K향이 상임지휘자 없이 몇 년을 파행적으로 운영 되었다 하더라도 준치임엔 틀림없으니)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뭐 특징적인 해석 없이 그냥 무난하게 반주(?)의 소임을 다하긴 했으나 (지인들의 이야기에 의거한) 전날 KBS홀의 공연에서처럼 예당에서의 공연도 협연자랑 쿵짝~이 잘 안들어 맞았으니...쩝~ 솔직히 연주내내 피아노만 들렸고, 연주 내내 허프 꼭 우리나라에서 독주회 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터미션 후 '카르미나 부라나' 음...일단 비주얼로도 '있어 보이고' 지휘자의 역량을 과시하기에는 이만큼 좋은 곡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취임 기념연주회의 곡으로는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라틴어로 부르니 천만다행이고...^^; 사실 그날 관중들 중에는 가족 관람객도 많았었는데 곡의 내용이 뭔지 알면 아마도 기절초풍 했겠지...^^;;;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http://to.goclassic.co.kr/opera/8148 참조) 지휘자는 암보로 지휘했는데(요즘은 암보 지휘가 기본?) 전곡 연주는 시간상 못하고 중요 파트만 발췌하여 연주를 했다. 일단 독창 파트의 가장 중요한 베이스는 처음엔 목이 덜 풀려 그냥 그랬으나, 13곡 '나는 승원장(僧院長)님이시다' 부터는 좋은 노래를 들려주었었다. 테너는 거의 활약을 못하고 딱 한 부분, 그러나 가장 인상깊고 웃긴 내용의 12곡 `일찌기 내가 살았던 호수, 일찌기 나는 아름다운 백조'에서 그야말로 '백조의 노래'를 들려주는데 이 곡의 관건은 팔세토(가성)를 얼마만큼 잘 사용하여 우스꽝스럽고 웃기게 노래하느냐에 따른다. 그런데 불행히도 진성과 가성을 넘나드는 소리에 아무리 젊은 미모의 테너가 반짝이 의상까지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실망감이 들었던 건 어쩔 수 없었다. 소프라노 강혜정님은 전에 어느 연주회에서인가 봤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났는데, 이번에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청중들을 매혹시켰다. 비록 내가 생각했던 순진하기 그지 없는 시골처녀 캐릭터는 아니라, 적당히 교태어린 처녀의 모습이긴 했지만서도...^^; 특히 개인적으로는 이 '카르미나 부라나'의 절정은 23곡 '그리운 사람이여'라고 생각하는데, 그 짧고도 아름다운 노래는 그야말로 인생에서의 화양연화(花樣年華)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나서 다시 '운명의 여신이여'가 되풀이 되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마치 달이 차고 기울듯이...)
인천, 안양, 안산시립연합 합창단은 작년의 KBS교향악단 '합창' 공연에서도 활약했었는데(그때는 안양과 안산시립 연합이었었던듯), 이번에는 무려 100명이 넘는 연합합창단이었으니 일단 음량에서 만족했고, 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남성 파트도 괜찮았다. 특히 KBS어린이 합창단은 딱 한 곡에서만 등장하는데 스무 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그 한곡을 위해 조용히 기다리는 것도 꽤 인상적이었고...오케스트라는 작년 서울시향의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를 본 이후로 그렇게 거대한 대편성은 처음이었는데 피아노 2대, 오르간, 팀파니 2대, 팀파니를 제외한 타악 주자 6명 등이 총출동 했으니 시각적으로도 대단했다. 연주도 브람스 피협 때보다는 훨씬 생기에 넘쳤고 일단 곡의 스케일이 크다보니 자잘한 실수들은 작렬하는 팀파니 및 타악기의 폭격과 대편성의 쪽수에 의거한 거대한 음향+합창소리에 묻혀 드러나지 않았다. 타악기 중에는 탬버린이 리듬감 넘친 멋진 연주를 들려주었고, 글록켄슈필과 마림바는 활약하는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약간 미흡함이 느껴지는 연주에 살짝 아쉬웠었다.
연주회 후에 이례적으로 사인회까지 해서 혹시나 협연자도 사인회 하지 않을까 기대 했지만 지휘자만 사인회를 하길래 잠시 기다려 프로그램북에 사인 받고 결국 협연자는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었어야만 했다. 어쨌든 이번 취임연주회는 일단 곡 선정도 괜찮았고, 연주회도 나쁜 편은 아니었으니 첫 단추는 잘 채운 셈이다. 함신익님께서 임기 3년으로 취임했다고 하는데, 그동안 KBS향이 더 많은 발전을 하기를 관현악을 사랑하는 청중의 한 사람으로서 기원해본다. 다음 연주회는 어떤 곡이 연주 되려나?
첫댓글 이번 공연에 혹평이 많더군요.K향 악장도 사표 냈다고 하던데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