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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효경 회고록 -
작성자 조효경
1. 아들이 귀한 가문의 둘째딸
일제의 대동아 침략 전쟁의 막바지인 1945년 6월 5일 먼동이 틀 무렵 나는 부친 경산(更山) 조희열(曺喜悅) 정사와 모친 모타원(慕陀圓) 이복원(李福源) 정사를 부모로 하여 2남 3녀 중 위로 언니에 이어 둘째로 전남 영광군 묘량면 신촌리 부농(富農)에서 태어났다. 묘량면 신촌리는 우리 교단에서 신흥교당으로 유명하고 전무출신이 50여분을 배출한 묘량면 신흥부락의 초입에 있다. 창녕 조씨 충정공파인 우리 집안은 손이 귀하여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삼대 째 독자로 이어 오다가 아버지 대에서야 두형제가 되었다. 아들이 귀한 가문에 둘째 딸로 태어나 부모님을 비롯하여 할아버지께는 실망을 안겨준 축복받지 못한 출생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인지 내 어린 기억속의 할아버지는 무척 무서운 분이었다. 대종경 변의품 29장에 나오는 회산(回山) 조원선(曺元善) 할아버지는 전무출신 하시어 익산 총부에 계셨기에 마음속으로 ‘호랑이 솜리 할아버지’라고 생각했으며 외할아버지는 교단품 11장에 나오는 응산(應山) 이완철(李完喆)종사님이셨다.
다섯 살 때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일어났다. 우리 집안은 묘량면에서는 부농이어서 많은 논을 소작인에게 맡겨 도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 세상이 뒤바뀌자 소작인들이 낮에는 좋은 이웃으로 밤에는 반란군으로 변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전무출신을 하시어 영광에 있는 총부 토지를 관리하시어 동란 때 많은 고초를 겪으셨고 그로 인하여 악상(惡喪)을 당하셨다. 다행히 아버지는 평소 인심을 잃지 않아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작은아버지와 함께 인민재판에서 ‘저분들은 살려주어야 된다.’ 하여 풀려났다고 한다.
내가 다섯 살 무렵의 일로 밤이면 총소리가 요란하고 북한 공산군들이 몰려 와 집안에 있는 곡식과 짐승들을 모두 가져갔다. 어느 날 영광 읍내로 피난을 갈 때 나는 밤에 밝히는 호롱불을 내가 들고 간 기억이 있다. 아마 눈도 펑펑 쏟아지고 있었던 듯하다. 피난은 왔지만 먹을 것 등이 모두 시골집에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동생을 등에 업고 짐은 머리에 이고 영광읍내에서 묘량 집까지 걸어서 다니셨으며 작은 동생까지 임신 중이어서 그 어려움은 말할 수 없었다.
노환으로 편찮으신 84세 되신 증조할아버님이 계시니 피난을 멀리 갈수는 없고 밤이면 어머니는 반란군들에게 발길로 차이면서 온갖 고초를 당하셨다. 그럴 때면 증조할아버지와 어린 나는 그때 순간은 꼼짝도 않고 쥐 죽은 듯 있었다. 새벽에 그들이 떠나고 나면 그때서야 어머니에게 “그 무서운 사람들 갔느냐”물었다고 했다. 그때 어머님은 참 서글펐다고 하셨다. 늙은이나 어린것이나 다 자기 목숨만 소중하다며 숨어서 꼼짝 않고 있었으니 참 이기적이었구나 싶다. 그때 일로 어머니는 나중에 늑막염까지 앓으셨다.
할머니는 성품이 무척 괴팍한 분이었다. 어떤 며느리도 견디기 힘들 것이라고들 했단다. 그런데 어머니의 성품이 착하고, 두 분의 인연이 좋으셨던지 고부간에는 오순도순 잘 살으셨다고 한다.
6· 25 동란으로 인하여 할아버지가 악상을 당하셨는데, 어머니께서는 할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수습하기 위하여 잔혹하게 죽어있는 시체를 넘고 넘어 할아버지를 찾아 장례를 모셨다. 증조할아버님께서는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이 피난 중이었으므로, 두 손자의 생사여부를 모른 채 열반 하셨다 한다. 어머님께서는 가끔 증조할아버님을 마음에 걸려하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소중한 손자들이 다 죽은 줄 알고 낙망하다 가셨다며 마음아파 하셨다. 누구보다 우리 어머님은 동란의 고통을 혹독하게 겪으셨다.
2. 샛별학년이 되기까지
동란의 어려움 속에서 다들 학교 입학이 늦었다. 나는 9세 때 묘량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내 나이가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적었다. 동기들의 나이가 모두 언니 또래였다. 그때는 모두 형편이 어려워서 초등학교만 졸업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졸업식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친구들은 중학교에 입학하는 나에게는 무슨 울 일이 있겠느냐며 부러워했다. 아무튼 철이 안 들어서 그랬든지, 모두 우는데 나만 울지 않는 것도 창피했다. 아무리 울려고 해도 울음이 나오지 않아 아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영광중학교에 입학 하였다. 바로 옆 영광초등학교에서 늘 들려오는 노래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문화연필을 선전하는 노래였다. ‘외국산만 좋다 말자 나라마저 빼앗길라 문화연필 한 자루가 우리나라 지켜준다’는 노래를 매일 들려주니 저절로 외워서 따라 불러 지금까지 기억을 한다. 면에 소재하는 학교에서 영광읍으로 가니, 시골에서 자라 내성적 성격인 나는 누구와 말 걸기가 쉽지 않았다. 언니는 이리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집안일을 도우며 4키로 쯤 되는 학교까지 늘 걸어 다녔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가끔 읍내에서 시장을 보아다 드리기도 했는데 하루는 빨래 삶는 양잿물을 사오라 하셨다. 하필이면 그날 비가 와서 양잿물을 우산에 대롱대롱 달고 오는데 어디선가 찐빵 찌는 냄새가 났다. 어디서 나는 냄새인가 보았더니 모처럼 언니가 준 모직으로 된 기지치마가 양잿물에 구멍이 나서 못 입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언니는 날 보고 털털하다고 놀려 댔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사실 언니가 4-5년 입었던 헌 옷인데, 조금 억울한 마음도 있지만 어찌 보면 내가 털털 한 것도 사실이다.
내가 중학교를 마치자 우리 집이 모두 이리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마침 이리교당에 정타원 이정은 이모님이 교무로 계셔서 교당이 마치 큰집처럼 낯설지는 않았다. 1년 후 원광여고를 들어가게 되었는데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전무출신의 길을 걸어야 되는 것이 운명처럼 생각되었다. 갑타원 조영진 언니가 이미 출가하여 교학과를 다니고 있기에 큰 고민 없이 나도 자연스럽게 출가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당시 전무출신을 하려고 하는 학생들은 헌타원 정성숙 교장 선생님의 집무실을 함께 청소하여 그때부터 서로 알고 지내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원기 52년(1967년) 교학과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하였다.
전무출신이 되기 위하여 입학한 학생들은 남녀 모두 서로 언니 동생 하며 마치 혈연처럼 다정하게 챙겨주며 지냈다. 특히 우리 학년은 대부분 나이가 어린 편이었고 모두 노래도 잘 부른다 하여 ‘꾀꼬리’ 혹은 ‘샛별학년’이라고 했다. 나는 합창단에 들어갔고 체육대회에서 계주에 출전하기도 했다. 교학과 학생들은 운동과 응원 작업 등 무엇이든 뭉치고 합하여 잘해 냈다. 우리 학년은 다른 학년에 비해 끈끈한 정은 덜한 것 같지만, 각각 개성들이 있어 나름대로 멋있게 보냈던 시절이었다. 후에 들으니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라 말수가 없고 비사교적인 나를 어느 동기는 벙어리인줄 알았다고도 했다.
3. 원남 교당과의 인연
4학년 때 우연히 종교 분포조사를 한다고 처음으로 서울을 가게 되었다. 그때는 보통 서울까지 가는 시간이 8시간 걸렸다. 초타원 백상원 교무님이 언니와 친근하게 지냈다는 인연으로 원남 교당을 찾아가 그곳에서 숙식을 하며 서울대 성균관대 등에서 학생들 종교분포 를 조사를 했는데 대종사님 손자인 숭산님 큰 아드님이 서울대 철학과를 다니는데 종교란에 무종교라 썼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때 원남 교당의 승타원 송영봉 교무님과 백 상원 교무님과 인연이 되어 원기 56년 졸업 후 3월에 첫 임지로 원남 교당 부교무로 발령이 나서 가게 되어 설레고 한편으로는 긴장된 마음으로 부임을 하였다.
그해 원남 교당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244평의 콘크리트 현대식 2층 건물을 지어 신축 봉불식을 하고, 서울에서 처음으로 수위단 회의를 했었던 같다. 교단의 굵직굵직한 회의와 교전 영어 번역 사업 등을 하였기에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서울사무소 소장님이신 상산 박장식 종사님을 원남 교당에서 모셨기에 더욱 손님이 많았던 것 같다.
잊지 못할 인연은 호타원 최 행덕 부회장님이시다. 내가 부교무로 재직한지 두해 째 되던 해에 교무님은 훈련을 가시고 내가 일반법회를 보게 되었다. 그때 얼마나 긴장된 마음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호타원 최행덕 교도 부회장님께서 맨 앞줄에 앉으셔서 고개를 끄덕이며 잘 경청하시더니 끝나고 내 등을 따독거리며 앞으로 훌륭한 교무님 되겠다고 격려해주셨다. 이것이 정말 나에게 커다란 용기와 희망이 되었다. 당신은 작은 격려를 해 주신 것이지만 나에겐 큰 용기가 된, 일생을 통해 잊을 수 없는 어른이다.
원남 교당은 서울대 병원과 가까워서 건강이 좋지 않은 교무는 대부분 원남 교당을 거쳐 병원에 가게 되었다. 원기 55년 서울회관 건립 기공식을 성대하게 하였는데 백 상원교무님이 서울회관 감사로 근무하였다. 건축공사가 4층까지 진행이 되었는데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교단이 엄청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백 상원교무님은 어려움의 중심에 있게 되었다. 채권자들에게서 전화가 자주 왔는데 나는 옆에 교무님이 계시는데도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 정말 괴로웠다. 늘 거짓말을 하며 교화자로 봉직한다는 갈등 속에, 서울회관 수습위원회는 주로 원남 교당에서 열렸다.
늘 손님이 끊일 날이 없었고, 그 와중에 교단의 큰 기대주이셨던 백 지명교무님은 건강 검진에서 뇌암 판정으로 검진 중에 열반하시었고, 각산 신 도형 교무님은 주사 부작용으로, 서울대 병원으로 옮기셨으나 갑자기 열반에 드시었다. 그분들의 빈소가 교당에 차려 져서 손님을 받았기에 손님도 많고 일도 많았다. 정말 교당이 여관인가 다방인가 할 정도로 손님이 계속 이어졌다. 나중에는 손님오시고 가시는 것에 무디어져 오시면 오시는가 보다 가시면 가시는가 보다 할 정도로 무심히 대하게 되었다. 자주오시는 손님은 오히려 편안해서 좋다 하셨고 모처럼 오시는 분은 불친절하다고 불평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지내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4. 승타원님 모시고 산 원남 교당
그 속에서도 승타원님의 교화력은 대단했다. 연원교당으로 전농(답십리)교당과 안암(제기)교당을 창립하려고 마땅한 집을 구하러 다니느라 모시고 다녔는데 나는 계속 서울생활이 적응이 어려웠든지 서울멀미를 많이 했었다. 그 와중에도 승타원님께서 정기적으로 교도 교리훈련을 하고 젊은이를 유입하여 월요일은 연화 법회를 개설하여 교도자부들이 법회를 볼 수 있도록 법회장을 특별히 마련하였다. 또 박 청수교무님이 연합으로 보시던 청년회를 원남 청년회로 발족하여 150여 명씩 참석하여 서울대와 연· 고대생들이 줄을 잇는 교화전성기를 이루셨다. 승타원님은 설법을 잘 하시어 한 때는 불교청소년들의 법회모임인 룸비니에서 법회에 초청되시기도 했다. 그리고 청년들이 활발하여 KBS에 초청되어 합창도 했었다. 그때가 청년회의 최전성기였던 것 같다. 나는 어린이와 학생교화에 정성을 다하며 그때 당시는 각교당 청소년교화가 활발하여 교당대항 체육대회를 하는등 청소년 교화의 최전성기였을 때 인데 마침 백 상원 교무가 미국으로 떠났다. 미주 교화에 물꼬를 터 원기 60년 6월에 상산종사님과 승타원님께서 미주 개척으로 떠나시는 바람에 나와 함께 원남 교당에 근무하였던 김 법련 교무와 나는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원기 60년에 조 진숙 교도의 남편 사갑기념으로 희사하신 145만원으로 흑석동에 전세를 얻어 교당을 창립하게 되었다.
후임이신 향타원님께서 원남 교당에 바로 부임을 하시지 못하여 갑자기 내가 원남 교당 일반 학생 청년 어린이 등 모든 책임을 도맡아 벅차고 힘들게 2주를 견디다가 원산 이 제성교무님이 부임하셨고 뒤에 향타원님 일행이 부임 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어찌 그렇게 다부지게 했었는지 그때 쌓은 내공들이 후에 교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흑석동에서 방배동으로 옮겨 이름을 관악교당으로 또 다시 방배교당으로 명칭 변경한 방배교당 33주년에 써낸 글 속에 이때의 생활을 살펴 볼 수 있어 여기에 옮긴다.
“흑석 선교소에서 관악교당으로, 방배교당으로…
지금 생각하면 아무리 내게 젊음이 있었다지만, 이름이 두 번이나 바뀌는 과정 속에서 집을 두 번이나 신축하고, 혼자의 몸으로 청소년 교화와 일반교화를 어떻게 그렇게 다 할 수 있었던가 싶기도 하지만, 어찌 혼자였겠는가. 법신불 사은님의 가호하심과 곁에서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소중한 인연들의 합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알기에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원기 56년 출가식 후 첫 부임지로 승타원 송 영봉 종사님을 모시고 남한강 서울회관 신축문제로 어려운 경계를 겪는 초타원 백 상원 교무님과 함께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던 원남 교당이 나의 첫 교화장이긴 하지만, 흑석 선교소(방배교당의 전신)는 나의 교화의 첫 무대라고 볼 수 있다. 흑석 선교소에서 나의 첫 주임교무 출발은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우연히 열리게 되었다. 그동안 부교무로 타력에 의지하며 살던 어느 날 상산 박 장식 종사님과 승타원 송 영봉 종사님, 그리고 초타원 백 상원 교무님이 미국 개척 교화장으로 떠나셔야 될 상황이 되었다. 인사기가 이미 지난 후인지라 김 법연교무와 나의 거취가 애매하게 되었고, 원남 교당 조 진숙 교도의 남편 사갑기념으로 쾌척해 준 145만원으로 서둘러 흑석동에 전셋집을 얻어 원불교 흑석 선교소 간판을 내 걸고 나와 김 법연 교무가 함께 부임을 하게 된 것이다.
원기 60년 6월 내 나이 30살 되던 해였다. 원남 교당에서 함께 와준 김 현덕, 고 홍서옥, 이 윤정 유태연님 등 10여명의 교도와 함께 6월 17일 첫 법회를 본 후 교화를 시작하였다. 조금씩 늘어나는 교도들로 재미가 붙어 가는데 전세로 들어 있던 집이 팔리게 되어 마땅하게 법회 볼 장소가 없어 급하게 반포 아파트에 근접해 있는 이수교 근처에 대지 50평을 구입하고 법당과 생활관을 신축하기 위해 원남 교도를 중심으로 인연을 찾아 김 현덕 교도님과 얼마나 열심히 권선을 다녔던지 김 현덕님의 발톱이 빠질 정도였다. 모든 정성을 다해 거룩한 신축 불사를 이룩하고 62년 7월 17일에 봉불식을 하며 교당 이름을 관악 교당으로 바꾸게 되었다. 지금은 서초구이지만 당시에는 관악구에 있는 교당이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김 법연교무와 친 자매처럼 교화를 하다 교단의 인사 방침에 따라 김 법연교무는 강화교당으로 부임하고 혼자 청소년 교화와 일반교화를 해 나가게 되었다.
주변에 학교가 있고, 인구가 모이는 지역적인 특성과 함께 사은님의 도움으로 나날이 교화가 발전이 되니 교화공간이 협소해 넓은 공간의 교당 신축이 절실하게 요구 되었다. 마침 부동산 소개업을 하던 정 도권 교도님의 소개로 지금의 방배 교당 부지를 매입을 하고 설계를 하고 건축회사에 견적을 받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논의 끝에 평소 건축업을 하였던 박 홍렬 교도와 김 건희 교도의 감역으로 직영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교당 신축 과정 중에서도 모든 교도들이 일심 단결하여 희사계를 짜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이 경천 교도님이 1번을 하겠다고 자청을 하니 모두가 감동을 받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개인과 교화단과 단체들이 서로 합력하여 24개 희사계를 모두 들어 주어 신축금 조달에 큰 무리가 없었다. 이때 유 태연 교도님은 아이들 돌 반지 20여개를 모두 희사 하는 등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다함께 불사에 동참하는 은혜 속에서 거룩하고 아름답게 불사를 하여 봉불을 하게 되었다.
이때 동 이름을 따서 교당 이름이 다시 한 번 방배교당으로 바뀌게 되었다. 방배에서 잊을 수 없는 인연을 참 많이 만났다. 내가 혼자 몸으로 청소년 교화와 일반교화까지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재가 교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 건희 교도님은 회계 등 교당 살림 일체를 돌보아 주었고, 박 홍렬 교도님은 교당 신축 때부터 시작하여 교당의 크고 작은 일들을 세세히 살펴 준 고마운 인연이다. 발톱이 다 닳도록 순교와 권선에 몸을 아끼지 않았고 굳이 교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척척 알아서 일을 보살펴 주었던 김 현덕님을 비롯해, 유 태연, 남 현익, 박 정혜화 님도 잊을 수 없는 인연들이다. 이때는 또 세대별 교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세대별로 친목 모임을 만들어 원목회는 청년 후원, 정진회는 학생회 후원, 연화회는 어린이 후원을 하게 하였다. 자연스럽게 이들이 법연으로 이어지고 교당의 주인으로 성장해가는 결실을 보게 되었다. 내 교화 경험에 비추어 보아 교당의 장단기 교화계획이 실현되어 교당이 발전되고, 청소년 교화에 결실을 보기까지는 10년은 필요하다고 본다.
방배교당 시절에는 365일 기도생활을 하였다. 눈에 무명씨가 박힌 김 주영님은, 남편이 택시 운전을 하였다. 항상 남편의 안전을 위해 기도에 정성을 들이고 교당에 자주 왔었는데, 어느 날은 “교무님 교무님 내 눈이 빠져버린 것 같아요”라고 한다. 눈에 무명씨 같은 흑점이 생겨 수술을 하라는 진단을 받았으나 수술비가 많이 들어 엄두를 못 내고 새벽마다 기도를 올렸는데 그날 아침은 가제 손수건이 흠뻑 젖도록 한없이 눈물이 나더니 그 흑점이 빠졌다는 것이다. 이 소문이 나서 교당에서 기도하면 병도 낫는다 하여 사당동에 사는 교도들이 한동안 교당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법신불 사은님의 은혜와 위력을 입은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145만원 전세로 시작한 흑석 선교소 시절, 좌종장사 등을 통해 교당 재정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그 고초가 적지 않았지만, 묘하게도 장사를 하면 호응이 좋고, 성공을 하였고, 교당 부지를 마련하면 그 곳의 가치가 높아지는 등 운이 좋다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어찌 운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은혜를 받으며 내 마음에는 어떤 사업이나 교화계획을 세우더라도 내 당대에 끝을 보겠다는 생각은 없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은 교단의 일이고 회상의 일인데, 내가 열매를 거두지 못하면 내 후임이 와서 열매를 거둔들 무슨 상관이랴.
나는 평소 오고 싶은 교당, 만나고 싶은 교무가 되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교화에 임해 왔다. 소외된 사람은 없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이왕이면 어렵고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더 마음을 많이 써왔다. 교도를 내 사람을 만들기보다는 교무가 바뀌어도 그대로 신심이 변하지 않는 참 주인이 되도록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뿌리 없는 인심을 얻기 보다는 차라리 교무가 외로운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살아온 시절이었던 듯하다. 보람도 많지만 때론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한다. 좀 더 주위의 인연들을 챙기고 살았어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 때문이다. 고맙게도 내가 그다지 챙기지 못했음에도 내 주위에는 소중한 인연들이 많이 있다. 사심 없이 공사에 임해 온 것에 대한 법신불사은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내 젊음의 많은 세월이 녹아있는 방배교당의 나이만큼 나도 나이가 들었다. 건강이 조금 좋지 않음을 느끼지만, 내 건강과 바꾸고 발전하고 있는 교당이 나의 보람이다. 방배교당이 신앙과 수행의 훈련도량, 법신불 사은님의 위력을 확인하는 은혜의 터전으로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방배교당 33주년을 기념하여 써냈던 글이다. 이 시절은 무엇보다 교도와 교무가 혼연일체가 되었고, 교리 강습회를 성타원 이성신 교무님을 모시고 하는 데 법당이 좁아 신발장 있는 현관까지 가득 찰 정도였다. 교화 발전을 위해 더 큰 교당을 신축해야 된다는 의견에 따라 신축을 추진 중에 있는 데 임기가 6년이 다 되다보니 이동을 해야 한다며 총무부에서 이동서를 내라 했다. 교도님들이 그 소식을 듣고 유임하기를 요청하여 유임을 하고 신축 부지를 마련했다. 교도들이 직접 직영으로 짓자 하여 박홍렬, 김건희 교도가 건축 감역을 하며 일일이 건축자재를 구입하여 교당을 건축하게 되어 튼튼하고 견실하게 집을 지었고 건축비 조달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교무가 8년을 살다보니 어린이 출신이 학생이 되고, 학생들이 청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남자 친목모임으로 원목회, 50대 이상의 여자교도 모임으로 정진회, 젊은 여자 교도모임으로 원화회를 결성하여 청소년들을 후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교화가 자연스럽게 탄력을 받아 청소년교화도 자력을 얻은 듯 했으며 건축하는 과정에서 이웃주민들의 반대로 파출소에 불려 가기도 하고, 감독이 이웃주민에게 얼굴에 손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신축은 순리적으로 잘되었다.
원기 67년도 11월 봉불식을 하게 되었다. 그때 봉불식에는 언제나 법무실장님이 참석을 하셨다. 그런데 법무실장도 못 오신다 하고, 교구장도 못 오신다 하는데 어린 마음에 교도들에게 말 할 수도 없고, 섭섭한 마음에 얼마나 속앓이를 하였던지 봉불식 하는 날 봉안문을 읽지 못하고 울음보가 터져 버렸던 일은 정말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교단의 흐름상 말로는 다 표현 할 수는 없지만 그때 당시 내 어린 마음에 엄청난 피해 의식이랄까 소외감이 깊었었다. 교당 신축이 쉽지 않는 그때 그토록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 것은 꼭 나만의 상처는 아니었을 것이다. 교도들은 전혀 눈치를 못 챘겠지만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아픔이고 상처였다. 봉불식이 끝나니 모두들 나를 보고 작은 거인이라며 칭송과 찬사가 이어졌다. 당시의 설교 한편이 남아 있어 여기에 옮겨 본다.
6. 낯설고 물 설은 천안 교당 교무로
그 다음해 1월에 천안교당으로 가라는 발령장을 받아 이동하였는데 그해는 유난히 추웠었다. 낯설고 물 설은 누구하나 아는 인연도 없는 천안으로 부임했다. 임대 건물 3층에 임시 법당을 만들고 방 2개에 부엌을 대강 만들어 연탄을 때고 있었다. 연탄가스가 차면 안 되니 부엌문을 열어야 되는데 인계인수과정에서 꼭 일러주어야 할 그 말을 안 해주어서 부임 첫날밤에 연탄가스를 마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었다. 인계 인수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소통을 해야 하는데, 소통 되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부실한 건축으로 수돗물도 나오지 않는 집에서 겨울을 보내는 것은 기본 생활 자체가 어려웠다. 매일 물을 동네에서 길러 먹어야 하고 빨래는 교도 집에서 해야 하고 대 소변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하수도와 화장실 시설이 부실하여 그 불편함은 살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 이상 이었다. 기본 생활이 어렵다 보니 부임 하자마자 교당이전과 신축문제가 시급해졌다. 사실 이때는 부교무 5년, 교무 8년 동안을 몸을 돌보지 않아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순환장애, 불면증, 변비 등이 심각 한 상태였는데 어리석게도, 교화자라는 책임을 맡았으니 교화에 충실해야 된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다. 그래서 전임들이 애쓰고 가신 뒤라 어떻게 해서라도 교당을 신축해야 된다는 큰 과제를 위해, 순교를 하면서도 괜찮은 땅만 보면 교당신축 부지를 떠올리며 매일 땅을 보러 다니다가 드디어 원성동에 땅을 마련하게 되었다.
충청도 교화가 녹록한건 아니었다. 그러나 교화단 교화로 모든 정성을 다하고 원래 산을 좋아해서 그 지역 산악회에도 들어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며 새로운 교화의 물꼬를 터 나갔다. 조금 씩 교화에 정착을 하며 시급한 교당신축의 꿈을 부임 3년 만에 이루기 위해 진력을 다하다 확보된 예산은 없었지만 불사는 십시일반으로 모두 정성을 합하면 이루어진다는 신념이 있었다. 조경련 교무의 동생이 감독하게 하여 또 직영으로 교당을 신축하며 여기 저기 인연지를 찾아다니며 권선을 하게 되었다. 참 쉽지 않았다. 내가 방배교당을 신축하며 절실히 느낀 것이 동냥은 못주어도 쪽박을 깨지 말자였다. 이곳저곳 권선을 다니며 그 지역 그 교당의 인심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서청주 교당에 오 주은 교무님이 계셨는데 교도님과 교무님이 최선을 다해 권선을 해주었다. 그때 감사한 마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느 교당은 넉넉하여 서로 품앗이처럼 나누자 했는데 마치 거지에게 동냥을 주듯 하여 그것도 잊을 수 없다. 불사가 쉽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천안교당은 자체가 어려우니 더욱 힘이 들었다. 그래도 대중이 하는 일이라 여기저기서 십시일반 모아주신 공덕이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원남 교당에서 뜻밖에 크게 협력 해 주셨고 또한 구타원 이 공주 종사님께서 내가 몇 번의 불사를 정성으로 함을 알으시고 기특하게 생각하셨는지 삼백여 만원의 건축금을 주시고 봉불식에 직접 참석해주셔서 큰 용기와 힘을 얻게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이다.
7. 교화현장의 어려움
또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다. 봉불식을 한 후 3일후 쯤 강도가 칼을 들고 들어와 얼마나 놀랬던지 잊을 수 없다. 새벽 1시쯤 강도가 들어왔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나는 “누구야 누구야” 했더니 “누구는 누구야 도둑이지” 하면서 칼로 후레쉬를 치면서 “꼼짝하지 마. 칼 들었다” 할 때는 숨이 꽉 막힐 정도로 놀래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신기했던 것이 나도 모르게 도둑이 가져 갈만한 것들을 하나씩 마음속으로 버리고나니 마음이 안정됨을 느꼈고 오히려 너무 가져 갈 것이 없어 도둑에게 미안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새로 집을 지었기에 이제는 교화활성화가 관건이라 일반회 학생회 청년회 교화를 활발하게 하기위하여 부교무를 신청하였다 천안이 충청도교통 요충지라 대학만해도 7개가 넘었다. 그래서 활발하게 청소년 교화에 전력하고자 했었다.
그래서 척박한 충청도에서 신발이 달도록 인연 찾아 매일매일 순교를 다니며 교도들의 세정을 들어 주며 모든 정성을 다하다보니 교화가 제법 틀을 잡혀졌다.
8. 대명 교당을 신축하고
교화자로써 울고 웃는 우여곡절을 지내면서 쉽지 않았던 충청교화 6년의 임기를 무사히 마쳤지만 지친 심신을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부모님 걱정 하실까봐 다시 이동서를 냈다. 대구에 있는 대명교당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내가 부교무로 처음 부임한 곳이 멋진 양옥집에서 살았던 복을 누렸기 때문인지, 내가 가는 곳마다 교당을 신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다. 부임 첫날부터 어설픈 한옥 집 마당에 연탄 화덕이 있어 보기가 참 흉했다. 다음날 그 화덕을 치운 것이 너무 무거웠던지 오른손 장지 손바닥 쪽에 인대가 늘어나 3년 고생을 했다. 똑같은 우리나라지만 경상도 사투리는 낯설었다. 하지만 그 말이 싫지 않고 참 좋았으며 사람들도 모두 참 소박하고 진실하고 따뜻했으며 한분 한분이 참 미덥고 든든했다. 다만 한옥이 오래 되다 보니 밤이면 천정에서 쥐와 고양이의 놀이터가 되어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쥐약을 놓았더니 어느 날 법회 끝에 교도님들 배웅하고 현관을 들어오는데 천정에서 무엇이 똑똑 떨어졌다. 고양이가 죽었는지, 쥐가 죽었는지 하얀 벌레가 천정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 놀라 그 일을 정타원 교구장님께 말씀 드렸더니 왜 그랬느냐며 그 들을 위해 천도재를 지내주라 해서 쥐 고양이 천도재를 지낸 일도 있었다.
성심으로 교화를 해 보지만 워낙 집이 낡고 보잘 것 없다 보니 큰 행사를 하거나 재를 지낼 때 낮선 손님이 오시면 아무리 의식내용이 알차고 정당하고 훌륭한 법이지만 어쩐지 어설퍼 보이고 떳떳하지 않는 느낌은 숨길 수 없었다. 경상도에서는 원불교를 전라도교라며 거부감도 있는데 교당도 어설프고 여러 가지 열악한 상태에서도 나름으로 여러 가지 이벤트를 기획하여 교화해 보았지만 눈에 띄는 발전에 이르기까지는 더디기 그지없었다. 원불교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종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할 때 포스터에 “소태산 대종사”라 하니 영남대생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소태산이 어느 도에 있느냐” 이렇게 소태산에 대종사라는 절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시대라 교화가 쉽지 않았다. 면모를 갖춘 교당 신축이 더욱 시급했다. 마침 부임 후 두 달쯤 되었을 무렵 옆집 교육감 사모님이 겨울에는 개인 주택이라 파출부를 구할 수 없다며 아파트로 이사를 갈려하니 자기 집을 교당에서 사라고 제안 하였다.
9. 대명교당의 지성이면 감천
교당 교화협의회를 거쳐 꼭 사야 된다는 교도들의 동의를 얻었으나, 예산이 부족한 것이 걱정이었다. 매입 후 전세를 내놓고, 부임 4년 뒤 신축을 서원하고 천일기도를 시작하여 건축자금을 모으며 모든 교도가 대 원력을 세워 열심히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올리고 여기저기 권선을 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인연이 있다. 과거로부터 숙세의 인연이었는지 신축 할 때마다 뜻밖의 불사에 원력을 베풀어주는 공덕주 유 태연님이다. 지금은 뉴질랜드 창립주로 계시는 유 태연 교도님께서는 내가 원남 부교무 때부터 두 마음 없이 불사에 온통 다 바쳐 보시 해주시는 분이었다. 대명에서 땅을 살 때도 걱정을 하고 있는데 선뜻 그때 돈 500만원을 희사해 주셨고 교당을 신축 할 때도 최선을 다해 돕겠다며 거액을 쾌히 희사해주시어 불사를 수월스럽게 이룰 수 있었다.
공가의 살림은 대중의 합력으로 어려운 가운데 기적처럼 되어 짐을 절감하고 늘 법신불 사은님께 감사드린다. 대구교구청을 신축 할 때도 사실 현금이 없었는데 마산 정사장님께서 1억을 희사 해주시고 손사장님께서 1억을 계약금조로 희사하여 기적처럼 신축을 하였다. 손사장님은 일생에 절 3개를 지으면 극락을 간다며 서원하고 있었다. 우리도 3억 공사에 2천만 원을 가지고 어찌 보면 무모하게 신축의 염원만을 갖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 하고 있던 차에 여기저기에서 견적을 받은 후 결국 손사장님께 사정 하여 부임 6년차에 신축을 하게 되었다. 마침 박 보인 교도님께서 수원에 가 계시게 되어 자기 살집을 전세로 얻어 우리가 임시로 법당을 사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 주셨기에 참 고마운 분으로 길이 기억된다. 아울러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대중이 합력하여 대명교당도 정말 기적처럼 신축 하게 되어 지금도 손사장님을 잊을 수 없다. 청소년 교화에 부교무로 조현제 교무가 부임하여 열성을 다하여 교당이 한창 북적이며 사는 것 같이 활발해서 조금 더 연장 하여 교화의 장을 펼쳐보고자 1년 더 연장을 하고자 하였으나, 뜻과 같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명교당의 7년 동안 최선을 다하여 즐겁고 보람 있는 교화현장으로 살려냈다. 홍타원 박 명익, 란타원 박 정은, 김 명진 교도님을 비롯하여 윤 양문 교도 부회장 등 잊지 못할 인연들로 영원히 기억되리라 믿는다.
10. 업장 소멸상과 천사표
운수납자인 우리는 총부의 사령장에 따라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임지로 가게 된다. 나는 서울에서 13년이나 살았기에 진심으로 서울로 가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교단의 명령에 따라 원기 81년 1월 서울 영동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패션거리라 하는 압구정동에 있는 영동교당은 마당도 없이 옹색한 곳이었다. 화려한 거리에 자리 잡고 있어 교당이 더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날아오는 창은 방패로 막으나 밀려오는 업장은 불가항력이라 하듯이 무슨 업장으로 그렇게 했는지 교도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교통의 요충지 강남구청 사거리에 있던 기존 교당을 팔고 신사동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 와 자리 잡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교무님이 교도들과 엄청난 갈등 속에 교당신축 후 완성도 보지 못한 채 결국은 다른 데로 이동을 하였다.
후임 교무님께서는 뒷수습하느라 성탑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그 어려움 속에서도 문산에 땅을 사놓고 파주에 교당을 내시느라 절약절식이 대단하셨다. 연원교당을 내느라 4대 교무인 나에게는 250만원만 인계하게 되었다.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소법당에 불을 넣지 않다가 새 교무가 온다고 갑자기 난방을 하니, 동파이프가 터져 곳곳에서 물이 새었다. 원래 부실공사를 했던지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몹시 추워 생활하기가 어려운데도 잘도 견디며 사셨던 것 같다. 하필이면 그동안 교도가 지하에서 세 들어 살다 이사를 하여 지하가 비워 있던 차에 내가 부임 몇 일 후 지하 70평을 고가구 파는 분에게 임대 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계속 천정에서 물이 떨어졌다. 방바닥 이곳저곳 물새는 곳을 찾아 무려 20여 일 동안 보수 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그래도 공사가 마무리 되어진듯하여 마음을 다시 추스르며 이제 안정을 찾아 마음 가다듬고 잘 살아봐야 되겠다고 음 1월1일에 새벽기도 때 다짐을 하고 앉아있는데 밖에서 똑똑 노크하는 소리에 나가보니 지하층 리모델링 하는 사장님이 다시 천정에서 물이 떨어진단다. 난감하였다. 설날이라 누구에게 연락 할 분도 없고 해서 동기동창 이 수현 교무에게 전화를 하여 내가 복이 많다더니 이게 무슨 복 이냐고 공연히 항의하듯 투정을 부렸다. 그랬더니 복은 복이란다. 무슨 복이냐 했더니 일복이란다. 과연 나는 일복이 많아 가는 곳마다 집을 짓고 이토록 집을 고치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싶었다. 이제 수용하는 수밖에 없다 싶어 신협에서 4천 5백만 원 빚을 얻어, 대대적인 방수공사를 하기로 했다. 지붕에서 벽과 바닥까지 하기로 하니 대공사였다. 인부들 간식으로 라면을 끓이다가 간사였던 장 영선 교무가 발등을 데어 집에서 치료하는 소동도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물이 새는 일은 해결이 되지 않아, 떠나 올 때까지 지하 사장님과 물 때문에 갈등도 생기고 물새는 것에 대해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일반교도들은 3대 마 원종 교무님께서 훈련을 잘 시켜 마음공부로 인격도 모두 훌륭하시었다. 하지만 교통도 불편하고 주차장 하나 없는 상태라서 교화 신장에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주어진 일에 혈심을 다하고 늘 새로운 이벤트로 교리퀴즈, 불단 꽃꽂이, 복주머니 만들기, 법위 단계별교리 훈련 등을 시키며 변화를 주고자 노력을 다 했다. 교도님들 개개인들을 살펴보면 어떤 가정은 남편이 도박으로 평온하던 가정이 파산이 되고, 어떤 교도는 남편이 아직 젊으신데 파킨스씨병과 알쯔하이머로 하루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되고 있어도 모두 업장으로 돌리고 달게 받고 있고, 어떤 가정은 남편이 주벽이 심해 매일 술과의 전쟁과 병으로 안정된 가정이 파산이 되어 가정적으로 대단히 어려운데도 인고하며 살기에 업장 소멸상을 주기도 하고 천사표라고 별호를 붙여 주며 격려도 했었다. 한 교도는 파킨슨씨병으로, 한 교도는 알콜 중독으로, 한 교도는 도박으로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인데도 늘 미소와 밝은 얼굴로 항상 긍정적으로 화내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모습은 모두에게 상당한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때 한울안지에 기고했던 감각감상이 있었다.
< 아름다운 사람 >
우리 교당에는 신앙의 힘으로 업장을 녹여가며 경계 경계를 용케도 잘 극복하며 항상 밝은 인상과 넉넉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하는 천사표 교도님들이 많다. 그 중 한 교도님의 이야기를 해 볼까한다.
이 교도님은 20여 년 동안 대학촌에서 하숙을 치며 알찬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 집은 항상 열려 있고, 도시 속에서는 느끼기 힘든 시골 사랑방의 푸근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언제 가 봐도 가까이서 멀리서 모인 동네사람들로 그 집 응접실은 늘 가득하다. 주인 손님이 따로 없이 차 마시고 밥 먹고 누구나 가족 같다. 이렇게 모든 이들이 항상 편안하고 부담없이 모이게 하는 것이 이 교도님의 큰 기술이다. 하루는 내가 “때로는 귀찮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사람이 먹어대면 어떻게 살아요”라고 했더니, “아니예요. 교무님. 사람들이 먹은 것 보다 주고 가는 것이 훨씬 더 많아요”라고 한다. 그리고 엄마는 놀기만 하고 공부는 안하는 것 같다며 걱정하는 딸에게 “야 너는 내가 노는 걸로 보이냐? 교화가 별 거 아니다. 도시에서 주부들이 허물없이 마음을 열고 대화하기 어렵지 않느냐. 내가 노는 것 같아도 내가 그런 자리 안 마련하면 그 사람들이 어디가서 이야기 하겠느냐. 사람들이 그렇게 부담없이 서로 이야기 하다보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사람 사는 것 같단다”라고 말했단다. 이것이 이 분의 교화에 대한 지론이다.
이 말처럼 이 집에 모인 분들은 살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의 답답함을 해소하고 그 과정에 자연스럽게 원불교가 전해진다. 원불교 교도로써 품위를 잃지 않고 자연스레 몸에 밴 교법 탓인지, 아무튼 근본적인 신심으로 무장되어 있는 이 분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된 S학생들은 상당수가 자연스럽게 교당에 나오게 된다. 이 집에서 하숙했던 학생 중 교당의 학생회장과 청년회장까지 하게 된 경우도 세 사람이나 된다. 유창하게 설법을 잘하거나 학벌이 높고 유식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따르고 편안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런데 ‘아하 그래서 그렇구나’하고 해답을 얻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숙하던 청년이 한 아가씨를 사귀어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아가씨의 집안에 반대가 있었는지, 무엇 때문인지 아무튼 아가씨가 헤어지겠다고 했단다. 상심해 있는 청년 몰래 이 교도님은 그 아가씨를 불러 본인의 인생담을 들려주고 손가락에 끼고 있던 5돈 짜리 금반지를 끼워주며 “둘이는 천생연분인 것 같으니 이 금처럼 변하지 말고 결혼하여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그로 인해 아가씨의 마음이 돌아서서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었고 결혼하여 지금은 쌍둥이 아들까지 두고, 우리 교당에 나오고 있다. 이번 정초 가정기원 독경때도 “교무님 그분 댁에 가서 기도 해 주고 점심은 저희 집에 와서 잡수세요. 그분은 기도하고 싶어도 생전 해 달라는 말 먼저 못할 것입니다” 한다.
‘좋은 일, 복 받을 일’은 자신이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보통인데, 이 분은 자신의 기도보다 다른 교도님의 기도를 먼저 챙기고, 그 후에 자신의 가정 독경을 하였다. 평소에도 이 분은 교당에서도 다른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궂은 일, 힘든 일을 앞장서서 소리 없이 하곤 한다. 하숙생이 17명이나 되니 힘이 들고 만사가 귀찮을 법도 한데, 그런 내색 없이 항상 보살 마하살의 마음이다. 이렇게 늘 베풀고 사는 삶이다 보니 그 공도 또한 헛되지 않음을 보게 된다.
시골에 사시던 시아버님을 모시게 되었다. 무종교였는데 며느리가 좋아 원불교에 나오신다고 하시며 교당에도 나오셨는데, 작년에 돌아가셨다. 장례 때 동네 사람들이 내 일 처럼 모두 식당 일을 도왔다. 동네 사람 중 둘은 입교까지 하여 지금 같은 단의 단원이 되어 교당에 잘 나오고 있다. 또 천심을 쓰니 진리께서 천복을 주시어 작년에는 3층집 양옥까지 사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내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 주는 교도님들의 모습이 참 아름다왔다. 2년 전에는 다른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예쁜 큰 딸이 원불교학과에 편입하여 올해 원불교대학원으로 진학하게 되니 이것도 큰 경사다.
교당은 간사들이 있어 항상 손님이 끊이지 않고 늘 하숙을 하는 손님들도 있었다. 원래 교도가 지도하던 요가교실을 인수받아 5년 동안 새벽마다 15-20여명의 요가회원과 요가도 하였다. 1인당 4만 원씩의 요가회비는 5-6십만 원 가량 되어 교당 경제에도 도움이 되었고 나의 건강과 동네 사람과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 시간을 통해 주부들과 시사 문화 연예 정치 사회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며 서로 소통이 되어 친근해 지고 인간적으로 가까워졌다. 오히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교도님들보다 더 정들고 가까워졌든지 전주로 부임했을 때 제일먼저 버스를 대절하여 방문을 하였는데 전라도를 처음 오셨다는 분이 계셔서 하섬 변산 제법성지 고창 선운사 등을 관광하기도 했었다.
11. 교화보살과 교무 보처불
요가회원들 중에는 한국인으로 좀 기인으로 꼽히는 김 대한 님이 계셨다. 그분은 쌀 한 톨에 반야심경을 새겨 기네스북에 오른 분이다. 또 손가락으로 북채 7개를 잡고 북을 치며 장 사익님과 연강홀에서 북을 치는 모습은 모두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이분은 유감스럽게도 2002년 3월 1일에 열반했다고 한다. 또한 영동교당에서는 교화보살인 박 우경 교도 최 영연 교도 정고문 님 등 교무 옆에 보처불이 함께하여 현장교화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모두 잊지 못할 인연들이였다. 그 외에도 교단 최초의 원무이신 김지선 교도는 교전을 보고 발심한 상근기로 초등학교 마음공부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교도님들의 협조 아래 대과없이 교화 발전에 최선을 다하며 6년의 임기를 마치게 되었다.
다음은 내가 영동교당을 이임할 때 해준 윤 광준 교도회장님의 송별사를 옮겼다.
오늘, 우리는 애별이고(愛別離苦)의 석별의 정을 나누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금번 중앙총부 인사발령에 따라 우리들의 신앙과 수행의 길잡이가 되어주셨던 녹타원 조효경(曺曉鏡) 교무님과 안혜연(安慧蓮) 부교무님께서 우리 영동교당을 떠나시는 송별법회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만나면 반드시 헤어져야 하는 것이 진리인 줄은 알지만, 이렇게 인정과 법정이 깊게 자리 잡은 상태에서의 이별은 분명 애틋한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녹타원 교무님께서는 6년 전에 우리교당에 주임교무님으로 부임하시어 그동안 저희들을 지도해 주셨습니다. 그동안 교무님께서 담임교무로 거쳐 가신 방배교당과 천안교당, 대구 대명교당에서 연이어 세 차례나 교당을 신축하시어 지치신 심신을 쉬실 사이도 없이 일이 많은 영동교당에 오시어, 오시자마자 바로 지하실에 물이 쏟아져 이의 보수공사를 시작으로 거의 매년 법당과 생활관 그리고 지하실의 보수공사를 비롯하여 도시가스 사용에 따른 공사와 지붕 누수공사 등의 갖가지 공사가 이어져 편히 쉬실 날이 없으셨습니다.
교무님과 함께 한 6년은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던 기간이었습니다. 국가적으로 4년 전에 있은 IMF의 경제체제로 이를 전후한 교도들의 어려운 경제적 가정상황 속에서 우리들과 함께 고초를 같이 나누어 주시면서 우리들을 지도해 주셨고, 그러한 속에서 정산종사 탄생 백주년 성업봉찬 사업과 서울원음방송 개국사업의 우리 교당 몫을 원만히 진행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한때 건강이 매우 나빠지시어 휴무까지도 고려하시기도 했습니다만, 이를 극복하시고 당신의 건강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열심히 교화에 전념하셨습니다.
교무님은 참으로 부지런하시어 잠시도 쉬시는 시간이 없으셨습니다. 교단과 교구의 크고 작은 모든 행사에는 항상 주인의 심경으로 빠짐없이 참여하셨고, 교도들의 애경사와 가정의 일까지 두루두루 살펴 주셨습니다. 또 매일 새벽에는 교당 주위사람들에게 요가를 지도해 주셨습니다. 스승님에 대한 상봉의 도와 동지애도 남다르셨습니다. 하나의 예로 승타원 송 영봉 종사님에 대한 스승님께 바치는 정성은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아프리카 김 혜심 교무님에 대한 동지애의 배려는 지난 해 10월 일일찻집 행사를 낳게 해 주셨습니다.
교무님은 엄격하시면서도 퍽이나 마음이 따뜻하고 자상하신 교무님 이셨습니다. 교도들 하나하나를 다 챙겨주시고 배려해 주시는 정성이 지극하셨습니다. 그러하셨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과 의견들이 있었습니다만, 법회 후 교도 전체가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끝까지 이를 관철해 주셨습니다. 또한 교무님의 6년 재직기간에 많은 교도님들에게 법호를 주셨고, 법위 승급도 시켜주셨으며, 3명의 원무(圓務)도 탄생시켜 주셨습니다.
교무님은 여러 가지 교화에 능하신 점이 많습니다만, 특히 의식교화에 탁월하신 장기가 있으셨습니다. 의식진행도 잘하시고, 독경도 잘하시고 그때그때 심고와 기도문이 일품이셨습니다. 그래서 의식교화로 새로운 신심이 일어나게 하셨고, 새로이 맺어진 인연들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6년의 기간에 보여주셨던 교무님의 모습은 우리가 영영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교무님의 새로운 임지가 전주 서신교당입니다. 전주는 불심이 강하여 교화하기가 좋은 고장이고, 서신교당도 안정된 교당이라 하니 다행입니다.
안 혜연 부교무님은 작년 1월에 첫 근무지로 우리교당에 오시어 1년 동안 녹타원 교무님을 잘 보필하시고, 많은 교화 경험이 있으셨던 것처럼 물 흐르듯이 교도 관리와 교당의 제반 살림을 차질 없이 잘 수임하셨습니다. 키는 작지만 국량이 트이시고 대인관계도 원만하셨으며 또한 부지런하시어 모든 교도님들로부터 호감과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일일이 가정통신으로 수십 차례 편지를 보내시는 정성을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금번에 새로운 서원을 세우시고 아프리카의 오지인 스와질란드 교당으로 자원하시어 김혜심 교무님과 함께 어려운 삶을 사시게 되었습니다. 풍토와 생활과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과 무지가 높은 나라에서 고생하실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아무쪼록 두 분 교무님들 새로운 임지에서 더욱 건강에 유의하시고, 복혜증진하시며, 법력 증진하시어 교화의 큰 결실 나투어 주실 것을 우리 교도 모두가 함께 기원 드리겠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뜻을 담고, 그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마음깊이 감사를 드리며 두 분 교무님들께 감사와 격려의 큰 박수 보내드립시다. 감사합니다.
원기87(2002)년 1월 13일 영동교당 법회에서
마지막 법회 때 박 우경 교도님의 송별사가 있었다.
“가시는 걸음걸음 일원종자 뿌리옵소서”
다정다감하신 녹타원 교무님! 가는 세월을 그 누가 유수 같다 하였던가요? 교무님께서 교당에 오신지 벌써 6년이라니요? 교무님이 처음 영동교당에 오시어 차멀미가 나는지 머리가 아프다시며 인수인계는 내일 하자던 날이 바로 엊그제 같건만 벌써 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람은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또 다시 만나는 것이 인과의 진리요, 자연의 순리라지만 너무나 마음 시리고 섭섭합니다.
교무님! 부임해 오시자마자 추운 겨울 방엔 불이 들어오지 않고 여름이면 법당 천정에 비가 새고 지하실에는 빗물이 들어 퍼내시느라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거기다 집 고치시느라 고생 많으셨지요. 그런 가운데도 틈만 있으면 교도님 댁 방문순교와 전화순교로 한 분 한 분 다 챙기시고 교화에 정성 다 하셨으며 교구 봉공회, 여성회, 호스피스, 원음합창단 등 각 회원에게는 따뜻한 격려 말씀 아끼지 않으시고 힘닿는 데로 후원과 기운 밀어 주셨으며 각 교당 봉불식 등 교구와 교당 및 크고 작은 교단의 모든 행사에 교무님의 손길과 정성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셨습니다.
특히 교도님 중에 자칫 소외되기 쉬운 노인 분들이나 병환으로 또는 가정사나 경제의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을 더욱 알뜰히 살피고 따뜻하게 챙기시며 기도해주셨죠. 그러면서도 못내 안쓰러워 하시는 교무님의 모습을 늘 곁에서 지켜보며 ‘교무님이야말로 대종사님의 교법을 행으로 나투시며 종교의 역할을 다 하는 성직자이시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또한 위로는 교단 선진님을 잘 받들어 모셔서 저희도 교단의 높으신 법사님들을 자주 가까이에서 모시고 법문 받들 수 있었고 아래로는 후진 양성에 소홀함이 없으시어 방학 때면 연선, 인경, 상인, 덕문 등 예비 교무들이 저희 교당을 찾아 교무님의 훈증 받으며 열심히 훈련하고 가르침을 받드는 모습을 보며 과연 ‘교무님은 좌우를 통달하시고 상하 두루 막힘이 없으신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무님께서는 6년 동안 공양원도 없이 몸도 지치고 건강도 좋지 않으시련만 불편하심은 흔적 없이 감추시고 교도님들을 대하실 때면 언제나 환하고 밝으신 모습과 표정으로 교도님들 사정 얘기 다들어 주시고 ‘네네’ 하시며 격려해주실 때 저는 산더미 같은 고민도 교무님만 곁에 계시면 어느덧 눈 녹듯 다 사라지고 샘물처럼 새로운 힘이 솟아나곤 했습니다. 또 매주 법회가 끝나면 대종사님 교법을 제대로 다 전달해 드리지 못한 것 같아 항상 교도님께 죄송한 마음이라시며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사후 돈망하신다고 겸손해 하시던 모습, 교무님! 그러나 그 힘 있는 법력과 따뜻하고 인정 넘치신 그 마음 세월이 흘러도 저희들 모두의 가슴에 깊이깊이 새겨져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오시는 교무님을 위해 구석구석 돌아보고 요인회를 통해 봉고차를 구입하도록 하시고 잠자리가 불편할까봐 손수 이불까지 새로 준비해 주시며 불편함이 없도록 챙겨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몸은 작아도 마음이 크면 대인’이란 법문이 바로 ‘교무님을 두고 하신 말씀이구나’, ‘교무님이 바로 작은 거인’이라 생각했습니다. 교무님 계시는 동안 좀 더 잘 받들고 모셔서 많은 가르침 받을 걸 하고 후회해 보건만 이미 때는 늦었고 그 은혜에 보은하는 길은 오직 저희 영동교도 모두가 건강한 심신과 한마음으로 공부사업 잘하고 새 교무님 잘 모시고 교화에 힘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안 혜연 부교무님! 교당에 오신지는 비록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온통 다 바치는 심경으로 생활해 오셨습니다. 그 조그마한 체구에 교무님 보좌역할에서부터 교당 살림살이와 꽃꽂이, 심고 및 기도의 정성, 행사 때면 명상의 시낭송, 장구 거기다 운전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이 배우며 갖추셨고 교리해득 능력과 글 솜씨는 또 어떻구요? 바쁘신 중에도 청년교화 하시느라 매주 한 번도 빠짐없이 기록하여 교당청년들에게 보내주시는 감각감상, 심신작용 처리건의 마음대조 일기를 주마다 이어 보내주신 교리편지를 받아보며 그 정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또한 교당에 오시는 손님과 교도님들에게 손에 물마를 사이 없이 차라도 한잔 들고 가시게 다 챙겨 주시면서도 힘든 표정 한번 짓지 않으시던 우리 알뜰하신 천사표 작은 교무님. 영동교당에 오시어 고생만 하셨는데 이젠 또 아프리카 스와질랜드에 가셔서 얼마나 고생을 하실지 걱정되고 마음 아픕니다.
우리 두 분 교무님들께 저희 모두는 머리 숙여 감사드리옵고 힘찬 박수 보내 드리며 법신불 사은님의 은혜가 늘 한량없이 충만하시니 항상 건강하신 가운데 참 낙을 수용하시기를 간절히 염원 드리옵니다. 가시는 걸음걸음 일원종자 뿌려 주시옵고 안녕히 가십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박 우경 올림
12. 아프리카를 돕는 작은 음악회
원기 87년 총무부로부터 전북교구 서신교당으로 발령을 받았다. 서신교당은 전주교당 창립 60주년 기념으로 연원하여 교당을 새롭게 신축을 하여 교당을 내었고 전주에서 신개발지역으로 아파트 밀집지역이라 초대교무의 헌신적인 교화 덕에 창립 6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3-4십대 젊은 교도가 많아 교화단 활동이나 합창단 활동을 하기가 수월했다. 나는 특히 아프리카 김 혜심 교무와 돈독한 인연관계로 영동교당에서부터 아프리카 돕기 일일 찻집을 하며 후원을 해왔었다. 이곳에서도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는 작은 음악회’를 기획하여 매년 발표를 하는 것이 교도들에게는 보람이고 기쁨이었다. 즐겁게 준비하며 6년 내내 봉공회에서 김밥, 여성회에서 차공양등으로 정성스럽게 음악회를 할 수 있었다.
입지적인 조건이 좋으므로 법회 때 마다 새로운 교도가 찾아와서 한 달에 한 번씩 득도식을 할 수 있었고 20단쯤 되다 보니 매일 단회 날이 있어 보편적으로 교도들과 자주 만남이 이루어졌고 봉공회에서는 수익성 있는 김부각, 유자차등 생산적인 봉공물품을 개발하여 만들어 팔다가 유 오행 님께서 성당에서 만드는 돈가스를 도입하여 서신교당표 돈가스를 월1회씩 주문 판매를 하다 보니 수익성도 좋고 반응도 좋아서 아마 지금은 전문적인 품목이 되어 널리 활용하고 있을 것이다.
교화도 순교와 교도들 단계별 훈련을 시켜 가며 년1회 교리퀴즈 대회를 하는 등 교리알음알이와 각자의 법위 향상과 교화단 단원 상호간의 법정을 두텁게 하기 위하여 10주년 되는 때에는 옆 땅을 미리 마련 후 3억원 쯤 드려 활불당을 신축하여 200여명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과 3층은 생활관 2층은 훈련관으로 활용하도록 신축을 했다. 식사공간이 있다 보니 법회 후 단별로 식사공양을 하였고 점심공양 후 소모임으로 합창연습, 국악연습, 등산모임들이 활성화 되어 교도상호간에 유대가 더욱 잘되는 것이다.
마침 부교무로 박 제은 교무님이 항상 밝고 소녀같은 모습으로 활발하게 응해주며 청소년 교화뿐만 아니라 매사를 적극적으로 합력해주었는데 몸이 약하여 3년 근무 후 김 수련 부교무가 와서 체계있는 청소년 교화와 모든 의식에 사범수준의 꽃꽂이 실력으로 아주 정성스럽게 보좌하며 교구 신입교도 훈련에도 적극 합력하여 모든 일이 순리로 마음이 조금도 거슬리는 것이 참 좋은 인연으로 교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든든한 박도정 간사가 9월부터 와서 2년 4개월간 충실하게 근무하였으며 늘 일반 교도님들과 친화력을 공고히 하므로 마침 길산님 내외에게 부모 역할을 해주도록 은부모를 맺어 주었더니 지중한 법연으로 두텁게 지내고 있었다.
나는 6년차 되던 10월 15일 새벽 좌선마치고 목욕탕을 갖는데 세수 대야가 잡히지 않고 다리가 임의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이상한 자각증상을 느껴 모든 일을 접은 체 서둘러 가까운 이 건학 한의원에 첫손님으로 찾았다. 원장님이 몇 가지 진찰을 하더니 큰 병원으로 가라해서 그곳에서 진찰하니 뇌경색이 살짝 왔다며 입원을 하라고 했다. 급히 서둘러 양방과 한방으로 치료를 하여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 하게 된 것이 참 다행이었으며 예고 없이 찾아오는 병고임을 절실히 느꼈다. 그때 다행스럽게도 어찌 그리 서두를 생각을 했던지. 죽는 것은 그리 무섭지 않은데 만약 중풍으로 장애인의 삶을 살게 되었다면 얼마나 불편했을까를 생각한다.
서신교당은 아마 전국에서 젊은 교도가 제일 많은 교당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청소년 교화도 보편적으로 활발했다고 생각하고 일반교화도 여러 면에서 활성화 될 조짐이 많았다. 초대 길산 한 길상 교도회장님은 건축사업을 하는 분이라 옆에 활불당 건축도 쉽게 신축 할 수 있었지 않은가 싶었다. 10주년 때는 활불당 낙성식에 당시 중도훈련원 원장으로 계시던 현 경산 종법사님을 모시고 일반 350명 청소년 150여명이 함께하는 가운데 대 법회를 볼 수 있었던 것도 잊을 수 없고, 2대 교도회장님으로 장산 전 도원 교도님이 취임 하신 것도 잊을 수 없다. 합창을 끝까지 잘 이끌 수 있도록 앞에서 뒤에서 늘 협력해주신 전 동인, 유 오행 님 등등 모두 고마운 법연들이다. 부교무 박 제은 김 수련 교무 그리고 간사로 박 도정이 보좌불로서 힘껏 도와준 은혜도, 황 인성 교도님을 인도해 준 김 대준 교도님의 인연 등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원기 93년 10월 13일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 작은 음악회를 앞두고 훈련을 다녀온 후 교당에 도착 하자마자 음악회 참석을 독려하는 전화를 아마 50여 통 쯤 했을 것이다. 그날 밤도 상당히 쌀쌀한 날씨 속에 2시간 이상 도청 야외 공연장에서 있었고 그리고 법회를 보고, 고창을 다녀온 후 몹시 피곤했었다. 저녁에 갑자기 볼펜이 잘 잡아지지 않고 사르르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인 15일 새벽 목욕을 하려는데 손발 움직임이 좀 이상했다. 수련교무에게 오늘 보은기도 등 기타 다른 일과를 부탁하고, 아침 9시쯤 이 건학 한의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 하는 것이다. 익산으로 가면서 공익부에 물으니 그런 증상이면 신경과로 가라해서 박 현영교수에게 진단을 받으니 뇌경색이 왔으니 입원을 하라고 했다. “오늘 일이 많은데!” 했더니 의사선생님이 웃으시며 오후 2시까지 입원을 하라고 했다. 다시 서신교당에 가서 입원준비를 하고 정토회 교당에서 이성국 교무 정토 종재에 잠시 참석한 후 입원을 하게 되었다.
한 15일쯤 입원치료를 받고 교당으로 오니 더욱 신경이 쓰이고 복잡한 생각만 들어서 일단 그 해만 채우고 휴무를 신청하기로 준비를 하였다. 모두 놓기로 하고 12월까지 근근히 채우고 요양휴무를 신청하기로 했다. 6년을 회고해 보니 정말 쉼 없이 앞만 보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았던 것 같다. 위법망구 위공망사라 했듯이 정말 법을 위하여는 자신의 몸을 잊었고 공을 위하여는 사를 놓는 교단 출가정신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모든 정성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
다음은 그때 했던 설교 “감사생활을 생활화 하자”이다.
우리들의 삶속에서 감사가 얼마나 필요한지 이는 역사적인 요청이요 시대적인 요청임을 여러분도 절실히 느낄 것입니다. 대산 종사님께서 세계의 큰 발견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부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발견하여 주셨고 또 하나는 대종사님께서는 은혜를 발견해 주셨다고 하신 것이다.
없어서는 살수없는 은이란 대오분상에서 본 대종사님의 우주관이다. 우리도 대종사님의 이 우주관을 나의 우주관으로 만들어 세상을 긍정적으로 모두를 은혜로 보고 고맙고 감사 하게 삽시다. 우리가 흔히 불교는 자비의 종교,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 하지요. 원불교는 무슨 종교 ? 바로 은혜의 종교다. 대종사님께서는 하나의 의심으로 구도가 시작 되었고 20여년의 구도 속에 아하! 하고 깨달고 보니 나 혼자 깨달은 것이 아니고 무수한 도움으로 깨달았음을 알으시고 그 무수한 은혜를 대시주 은혜, 대자비 은혜, 대협동의 은혜, 대보호 은혜였음을 알으시고 모두가 은혜다 고로 감사하자 하시었다.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며 만족하고 주어진 소유에 감사하며 만족하고 주어진 인연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아야 되겠다 했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심층뉴스 TV프로그램“인싸이드에디션" 의 진행자로 유명한 데보라노빌 여사가 쓴 “감사의 힘” 2008년도에 베스트 쎌러1위 였다 합니다. 0,3초의 기적 이라고도 한다. 데보라 노빌은 어릴때부터 사소한 것에도 고마워할 줄 알면서 살았던 삶이 자기에게 살아가는 가장 큰 에너지였답니다. 감사는 삶의 가장 큰 에너지임을 깨달았다며 이 감사하는 마음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아니라 꾸준히 배우고 훈련받는 결과물이라 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가지 감사의 에너지를 통해 기적을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소개 되었다 감사를 통해 성공도 하고 행복도 이제 내것이 되었어요 하면서 공통적인 소득10가지는 첫째는 낙천적인 성격으로 변했고,2,열정적으로 활동하게 되었고,3,스트레스 이기는 힘이 이전 보다 훨씬 커졌고 4,예전보다 운동을 열심히 하게되었고 5,숙면을 취하여 건강이 좋아졌고 6, 여유있어 유머감각도 생기고,대인관계도 좋아졌고,7,결단력도 강해졌고 8,다른 사람에게 관대하고 친절해졌고,9, 가족관계도 돈독해져 새로운 인생을 선물받았다 했습니다.
46세의 미국의 굴지 식품업체 부사장인 윌 톰슨 이야기=동네건달로 부모 속을 썪히며 별 희망이 없는 건달 청년이였다 친구들이 오토바이 뒤에 여자친구 태우고 다니는 것이 너무 멋있어 오토바이 하나 사기 위해 레스토랑 웨이터보조로 취직 했는데 처음은 창피하기도 했는데 그만두고 뛰쳐나가고도 싶었지만 오토바이를 사야 되니 참고 살았다. 어느 날 종업원이 고객에게 실수를 하여 말다툼을 하게 되어 지배인이 몇 번씩 사과를 해도 소용없자 무료식사권을 주니 진정이 되었다. 영업 끝난 뒤 지배인의 잔소리가 1시간 이상 하는데 지루하고 짜증도 낫지만 조용히 음미하며 생각해 보니 요약하면 딱 몇 가지 첫째 고객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라, 고객이 우리에게 월급을 준다. 고객이 있기에 우리가 즐겁다. 고객에게 진심으로 감사 할수록 우리미래가 밝아 진다, 지배인의 말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때부터 그 말을 학습하듯 그렇게 실행하다보니 지배인의 인증을 받아 정식 웨이터가 되고, 또 고객들의 인기투표에서 매달 1위를 하고 고객들의 칭찬하는 메모가 책상에 수북히 쌓이다 보니 웰은 고객들에게 더욱 고마움을 느끼게 되어 웰은 사장의 배려로 야간대학, 경영학 석사 그리고 그곳 지배인이 되고 최고의 기업들이 손을 내밀고 지금은 전용 비행기로 미국 전역을 출장 다니며 업무를 보고, 휴일에는 페라리를 몰고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한다.
감사도 학습니다. 계속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감사가 저절로 되어 질 것이다. 이왕이면 [되는 방향으로], 하는 방향으로, 좋은 방향으로 발상을 바꾸면서 비판보다는 그 순간 순발력 있게 어떤 대안을 찾다 보니 창의력도 생기고, 마음도 여유 있어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좋아지는 체험을 했다.
대산종사 20대에 폐결핵으로 죽을 고비를 겪으셨다. 한때 다 놓아버리고 진리께서 쓸모가 있으면 살려 주시겠지! 하면서 도방하 하고는 망병 즉 병을 잊었고, 병은 바로 나의 선량한 나의 친구다 했답니다. 사실 그때 도력을 얻으셨다. 진리는 묘하게 전탈전여 전부 빼앗아가고 또 다시 주시는 위력이 있다 합니다. 진리는 평온하고 순탄할 때보다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더 큰 은혜 와 위력을 주시기도 합니다. 번뇌 즉 보리라 했듯이 시련이 곧 감사일수도 있다. 감사와 원망은 출발부터 다르다. 매사 감사하면 절반의 성공이고 원망하면 절반의 실패로 돌아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모두 감사생활 합시다. 정산 종사님께서 법훈편 59장에 감사생활만 하는 이는 늘 사은의 도움을 얻게 되고, 원망 생활하는 이는 늘 미물에게서도 해독을 받으리라, 하셨다.
좌산상사님께서 항상 감사하고 보은해라 =가정에 모든 재앙이 미연에 방지되고 은혜가 풍성하리라 하셨다 .
상대감사 : 내가 감사 해야 할 조건이 되는 대상에 감사하는 감사조건이 되는 감사로 초단계 감사. 이러한 감사도 생활 속에서 하기 어렵다. 똑같이 아파트 50평으로 이사 갔는데 한사람은 울상이고 한사람은 입이 귀에 걸려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
대종사님께서는 1,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사람은 어떠한 경게를 당하든지 분수에 편안한 사람 2,세상에서 제일 부귀한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만족을 얻는 사람 (욕심과 기대감을 항복받아야 된다. 지나친 욕심과 기대감에 차 있으면 감사할 줄 모른다. 감사조건을 찾아라. 아무리 작은것에서도(욕심항복)
부분감사 : 감사와 원망의 요소가 혼재해 있다 꼭 감사의 요소만 있는 것 아니다. 불보살 성현은 감사와 원망의 요소 중 감사부분을 찾아낸다. 범부와 중생은 감사와 원망의 요소 중에서 원망의 요소에 감사부분이 가려진다.
가믐으로 비를 기다리다 비가오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건축 공사장엘 갔더니 인부들이 아이구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왜 하필 오늘 비가 올까? 옥상 슬라브 콘크리트 공사해야 하는데!! 하늘 원망 하드라. 우리는 흔히 한 부분 잘못 했는데도 전부를 원망한다. 며느리가 미우니 며누리 발 뒤금치가 달걀 같으니 밉다 하고, 시댁이 싫으면 시금치까지 안 먹는다는 말이 있다.
여러분 살면서 어느 때 제일 감사드렸느냐 양제동 꽃시장
절대 감사 : 상대감사와 부분감사를 초월한 감사가 절대감사다. 절대감사는 조건 없는 감사, 무조건 감사, 감사해야 할 조건은 물론 이고 원망해야 할 조건에서도 감사만 찾아서 흔적 없는 감사를 실천 하고 했다는 흔적까지도 없는 감사. 원망과 해를 받았는데도 감사하면서 그 흔적이 없어야 한다. 그냥 감사 합니다 무조건 감사합니다. 절대 감사생활 속에서 확 바뀌더라. 대산 종사 은혜의 핵을 터트려라 교당은 감사와 은혜의 충전소가 되어 교당 다녀간 뒤에 감사가 충만으로 여러분 생활이 은혜롭고 활기 넘치는 기쁨이 샘솟는 생활되시길 바랍니다.
13. 보살도 병이런가?
원기 93년 중앙요양원으로 들어오니 참 편안하고 좋았다. 요양원에는 오랫동안 투병생활로 힘을 얻은 분도 계셨고, 또 주어진 것에 모두 감사하면서 안분하는 분도 있고, 공연히 트집 잡아 투정하는 분도 있었다. 한 마음이 한 생각을 낳고 한 생각이 한 행동을 낳아 좋은 습관 나쁜 습관이 되어 있음을 그대로 역력히 보여주고 있는 현장이었다. 나이도 있고 선배이기도 하여 그곳에서 단장을 맡아, 요양원 벽에 걸려있는 “[평상심 공부 잘한 이가 참 도인이니, 빈부귀천 고락간에 도심(道心)이 일관하여야 큰 도인이니라.] 이 법문을 아침저녁으로 실천하려 노력하였고 그때 서이리 교당 목타원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막내 동생인 세련이가 틈틈이 알뜰하게 살펴주는 온정이 넘쳤고 가끔 어머님을 모시고 쉬며 다 놓고 편안하다 보니 솔직히 다시 교화현장에 부임한다는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왕이면 원대 병원 가까운 곳의 조그마한 교당으로 배치되기를 희망하며 염원 했더니 마침 원기 94년에 이성도 교무와 함께 영등교당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부임 첫 법회를 아래와 같이 보았다.
14. 꽃자리,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반갑습니다. 먼저 저를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녹타원 조 효경 교무입니다. 법호가 프를 녹(綠)자이고, 이름은 새벽 효(曉), 거울 경(鏡)입니다. 원기 56년에 출가식을 하고 금년에 교무로서 교역에 임한지 39년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동안 서울 천안 대구 전주 등에서 교역에 임하다가 오랜만에 고향으로 오니 마음이 편안하고 특히나 훈련이 잘된 교당, 연륜이 깊어 이해가 풍부한 교도님들과 낫설지 않은 교도님들이 계시는 영등교당을 많은 교무들이 오고 싶어 하셨을 것입니다. 제가 평소 좋아하는 시가 있습니다.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입니다. 영등교당에 사령을 받고나니 제 마음을 잘 표현한 것 같아서 오늘 우리 교도님들과의 첫 만남의 법회에서 낭송해 볼까합니다. 함께 감상해 보실까요?
꽃자리 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 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이렇게 뵙게 되니 참으로 반갑고 기쁩니다. 세상에는 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정산종사님께서 “소중한 인연 두 가지가 있나니 혈연과 법연이라, 혈연과 법연이 다 소중하나 영생을 놓고 볼 때에는 혈연보다 법연이 더 소중하나니라”(원리편 58장) 하셨습니다. 오늘 대도정법으로 맺어진 영생의 인연인 소중한 법연을 만나게 되어 그 어느 만남의 인연보다도 더 반갑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고맙습니다.
세상에는 하는 일도 많고 사업도 많지만 가장 크고 거룩한 사업은 성불제중하는 대도사업 이라고 하였습니다. 일원대도를 신봉하고 대종사님의 성업을 이루어 가는데 함께하는 여러분들이 한없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더욱이 우리 교당은 29년이 되었고 제가 5대 교무이기 때문에 전임교무들이 헌신적으로 가꾼 흔적들이 느껴져 인수인계를 하면서 전임교무들의 노고와 공로에 새록새록 마음깊이 감사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마음공부에 정진하고 교당을 관리 수호하는 우리 교당의 주인이신 여러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처음 어린이집이 있다하니 책임감과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이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 대해 들으셨겠지만 어린이집에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어찌 할까 했었지만 저는 처음부터 교화계에 있으면서 오매불망 어떻게 해야 교화를 잘해볼까 하면서 그 때 그 때마다 이벤트를 하면서 이왕이면 즐겁고 행복한 교화현장을 이끌어 왔었습니다. 그동안 1년 요양하면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자신에 맞는 일거리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꼈습니다. 대산종사님께서 ‘진리가 주는 벌 중에 가장 큰 벌은 일을 뺏어가는 것이다.’ 하신 법문이 있습니다. 건강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법신불사은님께서 보은의 큰 일터를 상으로 주셨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랴 이처럼 고맙고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생각하니 가시방석처럼 여겨지던 자리가 꽃자리가 되어 기쁜 마음으로 이곳 보은의 일터인 영등 교당과 영등어린이집에 기쁜 마음으로 힘차게 왔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곳에서 꽃자리를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꽃자리를 만들어 가는데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꽃자리는 어떤 꽃 자리어야할까? 무슨 꽃을 피워야 할까? 부임하기 전에 두고두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가 피워야 할 꽃은 일원화입니다. 항상 저 둥그러운 일원의 진리를 본 받아서 걸림이 없고 텅 비었으나 다 갖추어있는 마음을 찾고 또 찾고 닦고 또 닦는 길이 일원화를 피우는 길입니다. 효산 법사님께서 심중에 일원화를 피워라. 세상은 온통 평화의 꽃밭이 되리라.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심어있는 일원화를 피우기 위해 믿음의 길로, 수행의 길로 부지런히 쉼 없이 정진하십시다. 그래서 이곳 우리가 사는 영등동이, 여러분이 사는 곳곳이, 일하시는 그 곳에서 일원의 향내가 풍겨나게 하십시다. 낙원세계를 가려면 마음속으로 들어가야지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내 마음을 늘 챙기고 살펴서 한 마음 들고 날 때 복문이 열리도록 해야겠습니다. 보보일체 대성경 일원화를 피워야겠습니다.
한 가지 더 피우고 싶은 꽃은 은혜화입니다. 구체적으로 저는 은혜화를 피우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은혜를 생산하는, 늘 은혜만 만들어 내는 은혜화를 피우는 길은 불공에서 피어난다고 봅니다. 대산종사님께서 감수화로 불공하라 하셨습니다. 내가 달게 받는 마음으로 불공하라 불공은 가려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이 따로 없습니다. 좋은 사람 힘든 사람, 좋은 일 어려운 일이 따로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는 것, 어려움을 감수하고 하는 것이 참 불공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반드시 성공하고 은혜가 나오리라 믿습니다. 은혜화는 무조건적인 감사생활에서 피어납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법신불 사은님께서 호렴 하신다 생각하면 감사의 마음이 솟구칠 것입니다. 늘 감사하는 사람은 미물곤충에게서라도 도움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저는 우리 교도님들이 계시기에 존재하고 교도님들도 교무가 있기에 법을 공부한다는 은혜의 관계를 잊지 말고 때로는 기대에 부응이 되지 못할 때라도 이 근본적인 은혜를 생각한다면 늘 은혜의 꽃은 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상생화를 피우고 싶습니다. 인연에는 상생의 인연이 있고 상극의 인연이 있습니다. 상생의 인연은 선연이고 상극의 인연은 악연입니다. 상생의 인연은 늘 도움을 주는 인연이고 상극의 인연은 해를 주는 인연입니다. 상생의 인연과 만나면 극락이요 상극의 인연과 만나면 지옥입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이 어떠한 인연이 되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뿌린 씨앗이 어떤 씨앗이냐에 따라서 상생과 상극의 판가름이 나는 것이지요. 내 마음으로 지어서 뿌린 결과에 상생 상극이 있습니다. 대산종사님 법문에 ‘한 마음 열리면 극락이요 한 마음 닫히면 지옥이라 다만 이 한마음에 극락과 지옥이 있나니라’ 하셨는데 늘 내 열린 마음으로 포용하고, 국이 없는 큰 마음으로 다 수용해서 어떤 인연이 나와 만날지라도 다 살아나고 용서되고 순한 부처가 되게 산다면 상생화는 만발할 것입니다. 마음은 늘 훈훈해서 항상 극락을 이룰 것입니다. ‘기술 중에 제일 큰 기술은 인화하는 기술이요 화합이 세계평화의 길이라’ 하셨는데 인화와 화합으로 상생의 선연을 짓고 상생화를 피워가야겠습니다. 우리 교도님들과 저의 만남도 상생의 선연이 되도록 도와주고 살려주고 법으로 마음을 길들여서 영생의 도반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무리 혼자 하려고 해도 함께 돕지 않으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도님들의 협력과 협조가 더욱 필요합니다. 부임해서 삼일 동안 이 성도 교무와 함께 법신불사은의 가호 속에 이곳 영등교당 교화와 어린이집의 교육사업이 원만히 이루어지도록 정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법신불사은님의 위력을 얻도록 기원의 정성을 올리면서 다음 조항들을 서원했습니다. 역경과 순경에도 기도하며 희망으로 살겠나이다.
반갑고 고마운 우리 교도님들! 저와 함께 심중에 일원화를 피워서 대종사님의 성업을 이루어 온 세상에 일원의 법음이 널리 울려 퍼지도록 합시다. 소중하고 귀한 교도님들! 늘 감사와 불공의 생활로 은혜를 생산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은혜의 꽃으로 가득 채워 가십시다. 영생의 법연인 고마운 우리 교도님들!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감싸주고, 인화하는 마음으로 모두를 살려내서 영생의 선연을 만들어 가십시다.
이렇게 부임인사로 첫 법회를 열었다. 중앙 교구는 중앙 총부가 있는 관계로 장단점이 있었다. 교역자 모두가 행정 보다 교화계에 근무하는 사람이 많아야 되는데 교화, 교육, 자선 기관 중에서 교육과 자선기관에서 근무하는 교역자가 많다보니 교역자로서 좋은 인상보다도 직장동료로서 인간관계가 부드럽지 못한 느낌을 많이 받는 것 같아 안타깝다.
부임한 영등교당은 역사가 29년차로 교무로써 5대이기 때문에 교도님들이 모두 성숙하셨고 문화와 정서를 다 알기 때문에 교당 운영상 어려움이 없고 모두 주인정신이 투철하여 교화하기가 수월하다. 교무가 계획하고 이끄는 대로 따르는 것은 좋은데 진취적으로 추진하는 적극적인 교도는 안 계셔서 조금은 교화가 답보상태인 듯하다. 분과별로 조직교화를 하기위하여 5개 분과를 나누어 각각 분과장과 분과 위원들을 정해 드렸지만 연초에 교화 계획을 세운대로 구정특별기도, 교리강습, 대각개교절, 교리퀴즈대회, 성지순례, 인화 체육대회, 교도정기 훈련 등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처음에는 분과대로 활동이 활발한 듯 하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은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부임 후 2년 초 대각개교의 달을 맞이하여 아프리카 어린이 돕는 일일 바자회를 오케이 웨딩홀을 빌려 3천장의 티켓을 만들어 골고루 교도들이 인연 따라 팔았고 바자품목으로 돈가스를 주 메뉴로 하여 900근의 돈가스를 70여 교도님들이 모여 만들었고 비빔밥, 오징어 덮밥, 육개장을 식사메뉴로 정하여 분야별로 했다. 노소를 막론하고 함께 합력하니 목표를 달성하고 모두들 뿌듯한 만족을 느끼며 하루 바자회가 성황리에 마치게 되어 2천여만 원을 아프리카에 전달할 수 있었다. 이후 계속 해마다 돕는 것을 의무로 알고 늘 적극적으로 돕게 되어 매 해 1천만원정도 도울 수 있었다. 참 장하고 고맙고 감사하기 그지없다.
한편으로 오랫동안 다문화 가정을 돌봐주며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 주는 이 희원 교도님, 다문화 가정에 대한 사랑을 쉬지 않아 한 때는 다문화 가족이 26명까지 왔다. 뜨개질, 한글교실, 반찬 만들기 등 교도님들이 자발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있는데 그들이 임신 출산 등으로 자꾸 흩어지고, 사는데 바빠 출석이 저조해 져서 당분간 미루게 되었다. 그 후로도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 보지만 쉽지가 않아 대각개교절 혹은 성지순례, 체육대회 등 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들을 초청해서 선물도 주고 식사도 함께 해보고 있다.
특히 봉공분과에서는 매월 돈가스를 주문하여 직접 만들어 팔게 되니 아무래도 어르신들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여 감사의 뜻으로 계절에 한번 씩 야외로 모시는데, 이것이 어른교도님들에게는 엄청 즐겁고 유쾌하신가보다. 그동안 각 교당에서 봉공회 상품으로 여러 가지 품목을 만들어 보았지만 그래도 가장 단순한 것이 돈가스라서 꾸준히 하고 있다. 4월은 군 교화 지원, 장학금 지원, 11월은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 등을 할 수 있어 해마다 도움을 줄 수 있어 감사한 일로 생각된다. 마침 돈가스가 주문이 잘 들어오고 어르신 교도님이 희생적으로 협조해 주어 잘되고 있음이 감사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이번 아프리카 봉불식에도 참석하도록 봉공회에서 적극 후원해 주신다 한다. 6월의 스와질랜드 아프리카 봉불식 참석을 계기로 이제는 아프리카 돕는 일에도 손을 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늘 원불교는 감사 종교라며 주로 은혜와 감사에 대해 설교를 많이 하였다.
“감사합시다”
제가 요양원에 있을때 0,3초 기적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의 주인공 데 보라 노빌은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에너지는 감사에서 비롯된다 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의 에너지를 통해 기적을 맞이한 사람들의 얘기를 예를 들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대종사님께서 밝혀주신 사은의 은혜를 새롭게 받들고 우리들의 삶에서 은혜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1. 해생어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한 설상가상으로 어려움이 어려움을 불러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업력을 원망하고 불평하면 할수록 해로운 고통이 계속 따라온다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참 업이 무겁다는 생각을 합니다. 과거에 지은 업력들이 계속해서 밀려오는 징조이기도 하겠지요. 이렇게 업이 계속 밀려오면 보통 중생들은 좌절하고 원망으로 신세를 한탄하며 살아갑니다. 왜 하필이면 나 입니까. 왜 나에게 만 이런 고통을 주시나이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벌을 내리십니까? 라며 한탄으로 삽니다. 그들을 자세히 관찰 해 보면 입만 열면 원망, 말만 하면 불평, 불만을 폭포수처럼 쏟아놓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우리 중생들의 병중의 하나가 원망병이라고 하셧습니다.. 세상에 귀 기우려 보면 모두 남을 탓하며 원망하는 소리가 참으로 많습니다. 갈등이 많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감사, 은혜, 행복 보다는 원망의 말을 훨씬 많이 합니다. 불평과 원망은 하면 할수록 계속 액을 몰고 옵니다. 원망하는 사람들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액운이 따라옵니다. 왜 그럴까요? 원망은 내 불성을 죽이는 일이며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고 조물주임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원망하면 할수록 악한 기운이 힘을 키우고 악한 기운을 불러들입니다. 원망은 더 큰 원망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어둠은 계속 어둠을 불러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은 해생어해로 그 어둠에서 벗어나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2. 해생어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은혜에서 해가 생길까요? 순경에 도취한다거나 탐닉하여 악업을 짓고 죄과를 불러오는 것이 해생어은 입니다. 해생어은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은혜임에도 불고하고 항상 해독과 원망을 발견하여 강급하게 됩니다. 그래서 해생어은 으로 원망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풀고 베풀었다는 상이 생기면 나에게 섭섭하게 될때 더 미움이 생겨서 악연이 되기도 합니다. 대가를 바라고 베푼 은혜나 대가까지 바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주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도리어 그 은혜가 나에게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내가 은혜를 베푼 적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미운 생각이 덜 나지만 내가 은혜를 준 사람이 나를 섭섭하게 하면 몇 배 더 미운 생각이 납니다. 내가 어려울 때 어떻게 해주었는데 나에게 그럴 수가 있어 하면서 원망심은 더욱 커지며 악연을 짓게 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성자들이 상없이 베풀라 하셧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 하셨습니다.
대종경에 부호(富豪) 한 사람이 흉년을 당하여 약간의 전곡으로 이웃 빈민들을 구제한 후에 항상 송덕(頌德)하여 주기를 바라는지라 동민들이 의논하고 비(碑) 하나를 세웠더니, 그 사람이 오히려 만족하지 못하여 스스로 많은 돈을 들이어 다시 비를 세우고 굉장한 비각(碑閣)을 건축하거늘 동민들이 그 행사를 우습게 생각하여 험담과 조소가 적지 아니한지라, 김 광선(金光旋)이 이 말을 듣고 회화 시간에 발표하였더니, 대종사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곧 억지로 명예 구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산 경전이로다. 그 사람은 제 명예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일을 하였건마는 명예가 나타나기는 고사하고 그 전의 명예까지 떨어진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어리석은 사람은 명예를 구한다는 것이 도리어 명예를 손상하게 하며, 지혜 있는 사람들은 따로이 명예를 구하지 아니하나 오직 당연한 일만 행하는 중에 자연히 위대한 명예가 돌아 오나니라.」인도품 54장에 있는 이법문은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마음에 새기고 반조해야 할 법문입니다. 베푼 후 몰라줌으로 생기는 미움 때문에 고통 받는 삶은 많이 보고 사니까요.
3.은생어해 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김재동 노 부레이크 토크쇼가 전국투어에서 늘 매진 된답니다. 한때 방송티부이 출연이 어렵다 했는데 스스로 토크쇼를 만들어 이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음을 보고 어려움속에서 은혜가 옴을 애풀의 씨이오 인 스티븐 잡스가 스텐포드대 졸업식에서 축사를 통해 더 유명해 졌는데 “자신의 라이프 스토리를 진솔하게 털어놓음으로 감동적이였다. 미혼모에서 태어났고, 교수에게 입양하기로 했는데 남자라고 싫다해, 다시 고졸 양부모가 나타났는데 학력이 낮다고 미혼모가 싫다했는데 대학까지 보낸다고 약속을 받고 입양시켜 대학을 들어갔으나 정규대학은 크게 도움이 안된다하여 자퇴하였다. 그후 서체강좌를 듣고 배우며 오늘날 애풀의 씨이오가 되었다. 몇 년 전부터 시한부 생이라는 취장암에 걸려 6개월을 못 넘긴다 했는데도 기적같이 생을 연장하였다. 그는 암진단을 받으며 이미 생사 연마를 하였을 것입니다. ”인생의 매순간을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는 말을 감동적으로 받아드렸다고 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 자신에게 물었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과연 내가 오늘 하려는 일을 할까?"
인디언 옷으로 유명한 박순호 회장은 재봉틀 9대로 매출 9500억의 회사 만든 사람입니다. “가난에 받은 쇼크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어떠한 역경 난경에서도 인과의 진리를 믿고 선업을 쌓아 복락을 장만하는 것이 은생어해 입니다. 이 생활을 하는 사람은 항상 은혜를 발견하여 진급하게 되고 감사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고 늘 외고 살아가는 수행인 입니다.그런데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린다는 것이 실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해가 돌아오면 원망심부터 생기는 것이 중생의 삶입니다. 감수불보 즉 다 자신이 지은 바라는 것을 인정하고 달게 받고 다시 갚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지만 남에게 충고는 그렇게 하지만 나에게 해가 돌아 올 때 감수 불보가 잘되지 않습니다. 감수불보도 되지 않는 데 감사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기만 합니다.
앞에 소개했던 데비라 노빌은 그녀의 책에서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잇습니다 나는 피츠버그 공항에서 뉴욕으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를 탑승하려고 하는 데 뉴욕행 비행기의 출발이 취소되었다는 안내 방송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대체 비행기도 없이 취소되자 승객들이 거칠게 항의하고 환불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저자도 그 비행기를 놓치면 방송 사고가 나게 생겼기에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렸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환경이 되면 불평과 짜증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때 마음 깊숙이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데비라노빌 감사하다고 해야지! 지금 이 상황에서 대체 무엇을 감사하단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감사하다는 것은 가당치나 하단 말인가! 저자도 처음에는 뭘 감사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녀는 하나를 생각해냈다고 합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생각으로 환불데스크에 도착해보니 직원들은 승객들의 항의에 녹초가 되어잇는 모습을 보고 불쌍하게 보이는 그들에게 “고마워요. 신속하게 대처해 주셔서 비행기에 문제가 있는 모양인데 이륙했다가 사고라도 났으면 끔찍했겠지요”라고 하자 직원의 얼굴에 웃음이 살아나면서 “빨리 운행이 정상화되었으면 좋겠네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예약을 해 놓았지만 제 시간에 비행기가 뜬다 해도 뉴욕에 도착하여 생방송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미지수 였습니다.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기 위해 이동하는데 카페테리아에서 식사를 하던 회사원들 중의 한 사람이 저자를 알아보고 뉴욕 외곽의 개인 비행장으로 가는 개인 제트기를 예약 했으니 같이 가시죠! 하는 것이었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희망이 생기기는 했는데 방송국에서 개인비행기를 얻어 탄다는 것은 회사규정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망설이다가 생방송이 펑크가 난다해도 규정을 어기지 않겠다는 생각에 사양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감사의 힘인가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사양을 하고 다른 게이트에 도착해보니 출발하는 비행기에 빈 좌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운동을 충분히 했다는 마음을 챙기고 있는 대 마침 한 승무원이 다가와 곧 뉴욕인근 공항으로 가는 또 다른 비행기가 출발할 계획인데 딱 자리가 하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 혼란 속에서 두 번이나 깜짝 선물을 받게 된 그녀는 흥분했습니다. 승무원의 도움으로 간신히 비행기에 탑승해보니 남은 좌석은 화장실 옆의 좋지 않은 자리였습니다. 돌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승무원이 다가와 이런 좌석을 배정 해드려 죄송하다며 미안해하는 진심어린 인사에 승객들의 거친 항의에 시달렸을 그녀의 모습이 참 아름답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자리에 앉아 시간 내에 도착 할 수 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거듭된 행운을 돼 새기며 이것이 운이 좋은 것인가. 아니면 감사의 힘이 보답을 한 것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조금 전 좌석 배정을 사과했던 승무원이 다가와 짐을 들고 따라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조그마한 목소리로 일등석 하나가 빈 좌석이 있으니 그곳을 이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자는 깨닫고 확신했다고 합니다. 처음 고마워요의 한마디가 자신에게 계속 행운을 만들어내고 지속시키는 힘을 우리들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인생이 바꾸어진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말합니다.
대종사께서는 없어서는 살수 없는 은혜 속에 우리가 살아 간다고 하셨습니다. 사실이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면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할 수 있겠죠. 어떤 상황에서도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종사께서 중생의 병은 원망병이라 고 진단하셨고 그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려야 없어서는 살수 없는 은혜의 위력을 얻게 된다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교리강습회가 정기적으로 열리곤 했습니다. 교리강습회는 교법정신에 따라 교도정기훈련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가장 인기 있는 강사가 바로 공타원 조전권 선진님이셨지요. 그 분이 강습나면 법당에 사람이 넘쳤고 입교자도 많았지요. 그 어른 교리 강습회 때 참석했더니 그 어른이 설교하면서 부른 대표적인 노래가 태평가였습니다. 여러분도 알지요. 노부부가 아들을 둘 두었는데 하나는 짚신장사 하나는 나막신 장사 그런데 비가 오면 나막신이 잘 팔리고 해나면 짚신이 잘 팔리죠. 그러나 비 오면 짚신 안 팔릴까 걱정하는 마나님이 있고 이것을 우리는 무엇이라 할까요? 해생어해 즉 해가 되는 것만 생각하니 마음에 평화를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루도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영감님은 언제나 은혜로운 면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니 태평일 수밖에 없습니다. 해가나나 비가 오나 두 아들중에 하나는 그 은혜를 받는 것이고 또 늘 비가 오거나 해만 나는 것 이 아니니 태평이죠. 이런 것을 은생어은의 생활이라 한다고 합니다.
4. 은생어은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사할 일을 감사라는 것은 당연하고 제일 쉬운 것 같죠. 논리적으로는 제일 쉬운 생활 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생활에서 대조해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없어서는 살 수없는 은혜를 깨달으면 그것이 견성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살아가면서 얼마나 없어서는 살 수없는 은혜를 느끼며 살아가나요. 몇 번은 감사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은혜 속에 살고 있음을 망각하고 살기가 쉽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사은의 은혜입니다. 사은은 곧 네 가지 큰 은혜를 말하는데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은혜를 말합니다.
우주의 진리를 은혜의 모습으로 보면 크게 이 네 가지 은혜로 볼 수가 있는데 원불교의 사은은 바로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를 곧 은혜로 바라본 중요한 교리체계입니다. 이 네 가지 범주에는 우주만물 가운데 한 가지도 벗어나는 물건이 없습니다.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는 물론 미물까지 모두 사은에 포함이 됩니다. 이 네 가지로 나누어 보면 진리의 은혜를 일일이 설명하자면 말이 길어지지만 가장 공통적인 것은 바로 이 네 가지 큰 은혜가 없었다면 사람이든 동식물이든 미물 까지도 단 한 순간도 생명을 유지 할 수가 없습니다. 이 광대한 우주의 모든 존재가 모두 다 나를 살려주고 도와주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은 벅찬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살아있다는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힘이 바로 이 사은이니 그처럼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이 주는 일시적이고 자그마한 은혜는 고마움을 쉽게 느낄 수 있으나 천지만물이 끊임없이 무한히 베풀어 주는 크나 큰 은혜에 대해서는 평소에 잘 느끼지를 못합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면 우리가 숨 쉬고 있는 공기에 대해서 하루 몇 번이나 고마움을 느끼는 지요 숨 쉴 때 마다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원망생활을 하는 사람은 미물에게서도 해독을 입게 된다는 말씀은 진리의 은혜를 모르고 진리에게 배은망덕 하는 행동을 하기 때문 일 것입니다. 원망만 하는 사람을 진리가 도와줄 리가 만무합니다. 반면 평소에 진리의 은혜를 믿고 감사 생활하는 하는 것은 평범해 보여도 진리의 뜻에 보답하는 것이 되므로 이러한 사람은 늘 진리의 보호를 받아 하늘과 땅이 도와주고 사람이 도와주고 법률이 보호해 주며 천지만물이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항상 진리의 가호와 함께 하기 때문에 늘 은혜가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잘나서 은혜가 생기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렇게 착각을 하기 시작하면 해생어은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영원히 강자가 되는 길 영원히 은혜를 입고 사는 길의 비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감사한 일에 더 크게 감사하며 살아라. 순경에 감사하고 망녕된 곳으로 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자신이 받은 감사를 진정으로 감사하고 복을 혼자 다 차지하지 말고 나누는 생활을 하는 것이 은생어은의 삶입니다. 은의 원심이 철주의 중심이 되어 동심력이 더욱 커져서 멀리 멀리 펼쳐 질 것입니다. 감사 생활 하는 이는 늘 사은의 도움을 받고 원망생활을 하는 이는 늘 미물에게서도 해독을 받으리라. 우리 모두는 은생어은(은혜에서 은혜로), 은생어해(해에서도 은혜로)로 살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정기일기 한편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 가 보게 한 교도”
원기 98년 1월13일 아침 9시쯤 연락도 없이 서울 장충교당을 다니시는 은산 김 홍은 교도님이 방문했다. 교당에서 신년 하례 차 총부를 오는데 혼자 먼저 오셨다는 것이다. 무척 반가웠다. 이분은 내가 방배교당에 있을 때 어머니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다가 서울에 둥지를 틀었다며 어릴 때 할머님이 원불교를 다니셨기에 반가워서 교당을 들렀다 했다.
이분은 사당동에서 리어카에 과일을 받아 파는데 매일 아이들 편에 좋은 과일을 보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 5,6세쯤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부 중 한명씩 번갈아 법회에 빠지지 않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도 가족이 쉬지 않고 원불교를 잘 다니고 자녀들이 결혼도 하여 자력으로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은 가끔 전화로는 했으나 천안으로 대구로 운수납자로 사는 우리 삶이라 무심하게 살고 있었는데 이렇게 일부러 시간을 내어 영등교당을 찾아 오신 것이다. 법회보기 전이라 짧게 소식을 물으니 부인은 돌아가셔서 원불교 영모원에 있고 큰아들은 연세대를 나왔고 둘째도 대학을 졸업하여 지금은 두 형제가 출판사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가정도 꾸리고 딸은 결혼을 안하고 경향신문에서 무슨 팀장으로 바쁘게 활동하며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데 시집을 안가 조금 걸린다고 하셨다. 며느리가 잘 들어와 매주 토요일이면 아버지 집을 방문하고 지금 아들가족들이 장충교당을 잘 다닌다니 무엇보다 반갑고 감사했다.
그날 법회 설교가 “가족교화 내가 먼저”라는 주제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분 얘기를 하게 되었는데 법회 끝에 사회자가 잠깐 그분에게 인사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분은 서슴없이 일어나서는 저는 일찍이 부모님이 계시지 않았기에 초등학교도 졸업을 못했고 성질도 거칠어 리어카를 끌고 장사하다 보니 한 달이면 파출소에 27번이나 끌려갔었다며 만약 원불교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아마 엉망이었을 거라며 우연히 방배교당 앞을 지나다가 할머님 생각도 나고 배도 고파서 교당을 들러 밥 좀 주라 했더니 교무님께서 따뜻한 밥을 주신 은덕으로 그 뒤 원불교에 의지하며 아이들을 교당에 다니게 했고, 아이들이 덕택에 탈선 없이 잘 자라주어 지금은 자녀들 모두가 일원가족이 되어 행복한 일원가족을 이루게 되었다며, 원불교는 나를 사람 되게 한 곳이고 동시에 원불교는 복 받는 교라고 하고 싶다면서 스스럼없이 솔직한 자기 얘기를 하는 모습이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솔직히 나는 그분에게 밥을 주었던 기억도 아이들에게 용돈 준 기억도 없는데 아이들이 서로 교당에 과일을 갔다 드리려고 다투었다는데 그때 교당가면 교무님이 용돈을 조금씩 주었다는 것이다. 그분의 말을 듣는 순간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37년 전 나의 30대 젊은 시절로 돌아가 오직 교화일념으로 모든 열정을 교화에 진력을 다하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당동, 방배동 반포아파트로 순교를 다녀 신발이 다라졌던 기억이 나고, 지인의 소개로 반포아파트 사는 교도 집을 방문했더니 가정부가 나와 원불교에서 왔다하니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원불교에서 사모님을 찾습니다. 하니 외출했다 하라는 말이 내 귀에 까지 들렀다. 그래도 그때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던지 또 가고 또 방문하여 결국은 그분이 가족 생일기도를 시작으로 주인이 되어 피아노를 사주고 많은 불사를 도우며 청운동산 동참불사에 1등 회원이 되기도 했다.
교화는 순교로 자주 만나는 것이 서로 소통하고 가까워 져서 인정이 건너고 법이 건너게 됨을 체험했다. 어쩌면 순교로 교화에 활력을 얻었기에 방배동에서 교당을 두 번이나 신축 하다 보니 나보고 작은 거인이라는 별호를 붙어주지 않았든가 ? 안 도현님 시 처럼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그때를 생각하면 누구보다 열정과 정성이 가득하여 위법망구 위공망사한 삶이 아니었던가 싶다. 사람은 한 번씩 과거를 되돌아보며 추억 해보는 것도 참 아름답구나 싶었다. 은산 김 홍은님 가족이 부디 공부 줄을 계속 잇는 일원가족으로 행복하기를 기원해 봅니다.
16. 교화선상 43년을 마감하며
교화선상에 나온 지 올해로 44년째이다, 그동안 내 앞일에 급급하여 주변을 돌보지 못하고 산 것이 퍽 아쉽다. 이제라도 조금 여유로움으로 앞과 뒤를 보며 두루두루 살피는 온정이 있어야 되겠고 마음에 촉이 없이 부드럽고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퇴임 후에도 내가 필요한 곳에 임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노인심리 상담사도 공부하고, 요양보호사 자격도 취득하여 내 손길이 필요한 곳에 힘 미치는 대로 살아 갈무리를 잘 해보는 멋진 교무가 되기를 소망 해본다. 영등교당에서 마지막 법회 99년 1월 12일 이임 설교다
꽃을 잘 피웠나요?
부임 인사 했던 때가 엊그제 갖은데 이임과 더불어 퇴임을 한다 하니 저도 아직도 실감 나지는 않습니다. 제가 원기 56년에 교역에 첫발을 내딛었으니 올해로 만 43년이 되는 것 같습니다.퇴임을 앞두다보니 지난세월을 다시 되돌아 보는 마음으로 그동안 기억나는 것들을 한번 쭉 적다보니 여러 가지 감회가 새로운중에 교역자로써 다행스럽고 가장 행운으로 여겨지는 것은 교역의 첫 부임지와 첫 번째로 만난 교무님 이였습니다. 첫 부임지가 서울 원남교당... 1971년 원기 56년도에는 아마 연건평으로 243평 2층 양옥으로 우람하게 잘지은 교당은 원불교내에서 최초로 가장 잘 지은 새집에서 5년을 살았기에 그댓가로 저는 가는 곳마다 교당신축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했어으로 받아드려 정성으로 했었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내인생에 가장행운은 첫교무님은 승타원 종사님을 만난 것으로 세월이 갈수록 존경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 나오는 것도 보통인연은 아닌 듯 싶습니다.
멀리 계시나 가깝게 계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저를 아껴주시고 감싸주시는 은혜에 늘 감사하답니다. 그런 인연복으로 가는 곳마다 개척하거나 교당을 신축하는 복덕이 주어졌으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보편적으로 수월하게 이루어졌던 것은 승타원종사님의 호렴하신 공덕이라 여겨집니다. 그뒤 방배교당 8년 천안교당 6년 대구대명교당 7년, 서울 압구정교당에서 6년살았고, 전주교당 창립 60주년 기념으로 교당을 신축하여 연원한 곳이 서신교당인데 그곳이 아파트 밀림지역이라 아마 전국에서 가장 젊은 교도가 많은 교당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교당입니다. 그곳에서는 합창단, 여성회 봉공회원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정성으로 아프리카 어린이 돕는 작은 음악회를 6회나 열어 많은 후원금을 보낼수 있었고 활불당을 지어 법회후에 점심공양을 하므로 여러 소모임을 갖을수 있어서 교화가 자연스럽게 활성화 될수 있어서 보람을 거두었는데 그때 너무 무리를 했던지 뇌경색으로 건강에 적신호를 얻어 1년을 요양원에서 휴양을 했던것도 좋았었습니다. 1년 충전후 법연깊은 영등교당으로 부임했는데 역사가 29년이나 되다 보니 교도님 모두가 주인정신을 가지고 계셔서 어쩌면 제교화역정에 안일하고 제일 편안한 마음으로 5년을 별수고없이 살아왔기에 생각하면 여러분에게 송구하고 미안함이 많은 것 같습니다.
좀더 활발하고 체계적으로 교화를 하여 활력있는 교화장을 펼치지 못했음이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단의 방침에 따라 퇴임을 하게 되니 여러분도 한편으로는 반가우리라 믿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부임때 드렸던 말씀을 다시 드릴까 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3가지 꽃을 피우자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피우고자 했던 그 꽃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무슨 꽃이냐하면
@@첫째는 일원화 였습니다. 일원상노래에 보면 둥그러운 한기운이 모두에 두루하니 하나이신 임이시라 일원으로 둥그시네..했지요 저 둥근 진리는 우주에 하나입니다.
대종사 대각하시고 만유가 한체성 만법이 한근원이로다
이가운데 생멸없는 진리와 인과보응의 진리가 한두렸한 기틀을 지었도다. 한두렸한 기틀이 바로 하나의 진리 일원화입니다. 상산박장식종사님께서 열반을 앞두고 하신 당부의 말씀이 우리 하나여햐 합니다. 둘이면 안됩니다 하셨습니다. 원불교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지금 오대양육대주에 교화장을 펼치고 있습니다만 일원의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러듯이 우리 교무와 교도가 하나된 마음으로 서로 믿고 서로 북돋으며 함께 공부하고 교화해야 합니다.
항상 저 둥그러운 일원의 진리를 본 받아서 걸림이 없고 텅 비었으나 다 갖추어있는 저 일원의 진리따라 마음을 찾고 또 찾고 닦고 또 닦는 길이 일원화를 피우는 길입니다. 효산 법사님께서도 심중에 일원화를 피우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온통 평화의 꽃밭이 되리라했습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심어있는 일원화를 피우기 위해 믿음의 길로, 수행의 길로 부지런히 쉼 없이 더욱 정진하십시다. 그래서 이곳을 비롯하여 내 자신이 머무는 곳곳이 일원의 향기가 펴져나가야 할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곳곳이, 일하시는 그 곳에서 일원의 향내가 풍겨나게 하십시다. 낙원세계를 가려면 마음속으로 들어가야지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내 마음을 늘 챙기고 살펴서 한 마음 들고 날 때 복문이 열리도록 해야겠습니다. 각자각자가 자신성업을 위해 정진하고 정진하다보면 텅비신 임이시라 일원의 둥그실것입니다.그것을바로보보일체 대성경 일원화입니다.
@두 번째 또 피우고 싶은 꽃은 은혜화였습니다.
은혜를 생산하고 은혜화를 피우는 길은 무엇일까요?작년에 경산종법사님께서 사사은생하라했지요, 경계를 만나 육근을 작용할 때에 은혜를 생산하는 공부입니다.우리는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도록까지 일을 만들고 그 일을 처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일을 할 때에 남과 자신에게 은혜를 생산하는 사람도 있고 해독을 생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흐르는 물을 소가 마시면 우유를 생산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을 생산합니다. 우리는 경계를 맞이하여 일을 할 때에 자리이타의 은혜를 생산합니까, 자해타해의 해독을 생산합니까? 대종사님의 모든 가르침이 은혜를 생산하는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마음공부를 잘 단련하여 인과원리를 활용하고 사은님께 불공을 잘 올리면 우리는 늘 은혜를 생산하는 불보살이 될 것입니다. 은혜의 생산이야말로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가정 사회 국가를 다 낙원으로 만드는 지름길이 됩니다. 또 은혜화의 꽃은 무엇으로 피울수 있을까요 바로 불공에서 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불공은 감수화입니다. 내가 달게 받는 마음으로 불공하는 것입니다. 불공은 가려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이 따로 없습니다. 좋은 사람 힘든 사람, 좋은 일 어려운 일이 따로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는 것, 어려움을 감수하고 하는 것이 참 불공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반드시 성공하고 은혜가 나오리라 믿습니다. 은혜화는 무조건적인 감사생활에서 피어납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법신불 사은님께서 호렴하신다 생각하면 감사의 마음이 솟구칠 것입니다. 늘 감사하는 사람은 미물곤충에게서라도 도움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저는 우리 교도님들이 계시기에 존재하고 교도님들도 교무가 있기에 법을 공부한다는 은혜의 관계를 잊지 말고 때로는 기대에 부응이 되지 못할 때라도 이 근본적인 은혜를 생각한다면 늘 은혜의 꽃은 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상생화를 피우자 했습니다. 인연에는 상생의 인연이 있고 상극의 인연이 있습니다. 상생의 인연은 선연이고 상극의 인연은 악연입니다. 상생의 인연은 늘 도움을 주는 인연이고 상극의 인연은 해를 주는 인연입니다. 상생의 인연과 만나면 극락이요 상극의 인연과 만나면 지옥입니다. 그렇다면 상대방이 어떠한 인연이 되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뿌린 씨앗이 어떤 씨앗이냐에 따라서 상생과 상극의 판가름이 나는 것이지요. 내 마음으로 지어서 뿌린 결과에 상생 상극이 있습니다. 대산종사님 법문에 ‘한 마음 열리면 극락이요 한 마음 닫히면 지옥이라 다만 이 한마음에 극락과 지옥이 있나니라’ 하셨는데 늘 내 열린 마음으로 포용하고, 국이 없는 큰 마음으로 다 수용해서 어떤 인연이 나와 만날지라도 다 살아나고 용서되고 순한 부처가 되게 산다면 상생화는 만발할 것입니다. 마음은 늘 훈훈해서 항상 극락을 이룰 것입니다. ‘기술 중에 제일 큰 기술은 인화하는 기술이요 화합이 세계평화의 길이라’ 하셨는데 인화와 화합으로 상생의 선연을 짓고 앞으로도 상생화를 피워가는 데 정성을 다해가야 겠습니다. 우리 교도님들과 저의 만남도 상생의 좋은 인연이 였습니다. 그동안 선연이 되도록 도와주고 살려주고 법으로 마음을 길들여서 영생의 도반이 된 것 같습니다. 아무리 혼자 하려고 해도 여러분들이 함께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함께 하질 못했을것입니다.
깨닫지 않으면 쉽지 않습니다.
정말 반갑고 고마운 우리 교도님들! 앞으로도 새교무님과 심중에 일원화를 피워서 대종사님의 성업을 이루어 온 세상에 일원의 법음이 널리 울려 퍼지도록 합시다. 소중하고 귀한 교도님들! 늘 감사와 불공의 생활로 은혜를 생산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은혜의 꽃으로 가득 채워 가십시다. 영생의 법연인 고마운 우리 교도님들!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감싸주고, 인화하는 마음으로 모두를 살려내서 영생의 선연을 만들어 가십시다. 이렇게 부임때 했던 말씀을 다시 말씀드리는 것은 그꽃을 활짝 피우지 못했지만 여러분이 참 소중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정산종사님께서 “소중한 인연 두 가지가 있나니 혈연과 법연이라, 혈연과 법연이 다 소중하나 영생을 놓고 볼 때에는 혈연보다 법연이 더 소중하나니라”(정산종사 법어 원리편 58장) 하셨습니다. 우리는 대도정법으로 맺어진 영생의 인연으로 한 법연으로 만났으니 영생을 함께 하리라 믿습니다. 세상에는 하는 일도 많고 사업도 많지만 가장 크고 거룩한 사업은 대도사업이라고 하였습니다. 일원대도를 신봉하고 대종사님의 성업을 이루어가는데 함께하는 여러분들이 한없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더욱이 우리 영등교당은 역사가 올해로 34년인가요 그러다 보니 교도님들이 한분 한분이 모두 우리 교단의 주인이라 알뜰살뜰하여 항상 교당 뿐 아니라 교단을 생각하고 발전시키고 공부 사업하신 주인공들이시기에 아주 많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고마웠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5년을 오롯이 살아주신 우리 이성도 교무님! 사실여기 부임하기 전에 몇 번의 스치는 인연으로 있었지만 이렇게 함께 살기는 처음이였지요. 그런데 제가 복이 많아 시원시원하게 저를 알뜰히 아껴주고 살펴주신 공덕으로 참 편안하고 행복했었습니다. 소통이 잘되어 한번도 답답하지 않았고, 오순도순 환상적인 팀억이 아니 었나 싶었습니다. 제가 밥상을 차리면 이 교무는 설것이 하고, 제가 법당에 꽃 꽂으면 이교무는 법당 청소를 깨끗이 합니다. 얼마나 민첩하고 정갈하고 깔끔하던지교당 앞뒤 어디에도 손댈것없이 척척 정리정돈을 잘합니다. 이교무님! 하고 부르면 네!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시원시원하여 한번도 답답하다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서로서로 절충보완하며 정답게 잘 살었습니다. 여러분이 뵙기에도 행복하게 보셨지요 ? 여러분이 생활하는 모습을 멀리서 가깝에 저멀리서 뵙기에도 정말 지켜보기에도 아주 잘 어울리는 환상의 팀억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정말 복되고 은혜롭고 좋은 인연이였다고 자부합니다. 확실히 저는 인연복이 많습니다. 부모복, 형제복, 스승복, 동지복, 교도복이 충만하여 그동안 큰 대과 없이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 하게 됨을 법신불 사은님과 여러분께 감사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언젠가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서 읽었던 시 한편을 소개하며 끝마칠 까 합니다.
행복합니다. (김형명 시)
마지막 돌아갈 곳 어딘지 분명히 알고 가는 사람
행복합니다.
마지막 돌아갈 곳알아 그길을 닦으며 가는 사람
행복합니다.
먼 여정에 가지고 갈것이라고는 남에게 베푼 것 뿐이라는 것 가지고 갈것하나도 없이 살아온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사람
원산김여창 교도회장님 송별사
록타원님, 조효경 교무님과 이성도 교무님에게 드리는 글
먼저 록타원님과 이성도 교무님의 은혜에 먼저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올립니다
록타원님과 이성도 교무님께서 우리교당에 부임 하신지 벌써 5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 버렸습니다
두분 께서 부임 하시자 마자 교도님의 가정에 의식을 통해 교화를 할수 있는 기회가 많이 발생하자 이것이 교화의 큰 기회라 생각 하시고 시작부터 퇴임 하신 오늘까지도 지금까지도 너무나 바쁜 나날로 열정을 쏟으신 모습이 저희들에게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교당 교도님 심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각종 야유회 및 성지 순례 시 오고가는 차속에서 가무를 허용 하시고 교도님과 마음을 함께 하신 일 문화창달도 교화의 큰 일이라 생각 하시고 등산이며 각종 문화행사 참가할 것을 독려하하셨고, 연말 연시 춤과 노래로 즐겁게 법흥을 진작 시킨 일 때로는 문학 소녀 처럼 시 낭독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고 법회를 시작 하신 일 매년 퀴즈 법회로 대종사님의 정법을 알아 갸게 하신 일 등이 새록새록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즐거운 교화로 노타원님꺼서는 오늘까지 교화 현장에서 대종사님의 대도정법 사도로써 어두움에 해메고 있는 우리들에게 정법의 길을 밝혀 주시고 불쌍한 중생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대종사님 품안으로 인도하시가 위해 49년의 고난의 세월을 두분 스승님은 5년간을 우리 영등교당 교도님과 언제나 함께 하시며 우리들에게 조금도 흐트러짐을 보이지 아니 하시고 오직 교화에 헌신 하신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때로는 심신간에 지치시고 힘드실 때도 많이 있었겠지만 완벽한 설법 준비로 법회 한번 빼놓지 아니 하셨고 한결같이 새벽 좌선과 기도를 올리시며 불철주야 교화사업에 매진 하신 모습이 더욱 우리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습니다
특히 우리교당 에는 돈가스 브랜드를 전수 하시어 막혀있던 우리교당 봉공회 사업이 날로 번창하게 하여 주시고 아프리카 돕기 와 군 교화 지원 사업을 계속 하쎴고 어려운 교도 가정을 두루 살피시어 장학금을 전달 하시고 해외 원불교 지원 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표하시니 이런 모든 일들이 원불교 백년 성업 5대 지표 실현에 모범이 되는 사업으로 우리 영들교당을 빛내 주셨습니다
때로 교화 하시며 교도님에게 알게 모르게 마음에 상처를 준 일이 있는가를 돌아 보시고 자애로운 마음 으로 대하는 모습이 저희들에게는 영원한 대 자비 스승의 모습 이었습니다
록타원님께서는 교도 한분 한분 빼놓지 아니 하시고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시고 언제나 챙기시며 이웃 이웃을 순교하여 잠자는 교도를 일깨우시고 교당으로 발길을 돌리도록 모든 정성을 다하여 주시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행복 하여지고 복 받는 길인가를 공부 하도록 보살펴 주시고 이끌어 주시었다
이성도 교무님께서는 록타원님을 성심의로 한결같이 모시고 받드시며 언제나 해맑고 즐거운 모습으로 우리 영등교당 발전에 헌신 하신 공덕이 우리 교도들의 표상이 되셨습니
존경하는 록타원님 우리 영등교당 교도들은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잊지 않고 더욱 열심히 성불하는 길로 뚜벅 뚜벅 걸어 가
록타원님 부디 행복하고 옥체 건강 하시옵소서 거듭 스승님의 은혜에 감사를 올립니다
이성도 교무님께서도 건강 하시고 언제나 가정에 행복 있으시기를 기원 합니다
감사 합니다
원기 99년 1월 12일
영등교당 교도회장 김여창 합장
마지막으로 전무출신이 사가 인연이 중요하지 않다지만 아직 90이 넘으신 어머님께서 계시어 마음 든든하고 갑타원 언니와 붓글씨를 쓰는 가산 현담 수현 동생이 전무출신 하였으며 막내인 종타원 세련이는 정토회원이 되어 우리 가족간의 연락을 맡아 주어 내가 교화현장에서 부지런히 뛸 수 있었기에 참으로 고맙다.
첫댓글 낮에는 더워도 이제는 조석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목요일날을 잘 보내셨는지요?
저녁시간에 컴퓨터에 앉자서 좋은글을 읽으면서 쉬었다 갑니다.
코로나가 증가추세에 있습니다 몸 관리를 잘 하시고 가족과함께 즐거운 저녁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