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장
“뭐얏! 돈이 벌써 바닥났다고?”
루아가 마치 돈이라도 벌어다주는 남자처럼 꿱 소리를 질렀다. 파티아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쭈, 너 마치 남편처럼 군다! 나 참, 기가 막혀!”
파티아는 어제 밤 TV 드라마에서 본 부부싸움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속내를 알 길이 없는 루아는 남편 같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뭐야, 남편? 기분 나빠, 그 말 빨리 취소해!”
그러나 파티아는 루아의 태도가 마뜩찮아 더욱 더 심술이 뻗쳤다.
“그래, 남편도 아닌 게 돈 타박이야. 꿈에라도 남편 될까 무섭다. 쳇!”
“나도 그래. 너 같이 헤픈 여잔 아주 정 떨어져!”
파티아는 분위기가 점점 드라마처럼 흘러간다고 생각하다가 헤프다는 루아의 말에 이성을 잃어버렸다. 드라마 속의 남자에 대한 악감정까지 더해져서 폭발 일보직전이었다.
“헤프다고? 뭐가 헤퍼? 나 혼자 썼어? 너도 같이 썼잖아?”
“돈은 네 호주머니에 있었잖아? 난 만지지도 못하게 해 놓고선……”
“뭐얏! 못 만졌다고? 그래 만져봐! 자자, 다 줄 테니까 만져봐! 만져, 만지라고!”
파티아가 호주머니를 털어 돈을 모두 꺼냈지만 잔돈 부스러기와 동전 몇 개만 튀어 나왔다. 파티아도 남은 돈이 그렇게 적은 줄 몰랐다는 듯 놀라는 표정이었다.
“됐어! 몇 푼 되지도 않는 거… 너 다 가져라, 뭐!”
루아는 몹시 화가 난 얼굴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방석 속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순간 파티아의 팔팔하던 음성이 한풀 꺾였다.
“크윽! 언제 이렇게 됐지?”
파티아는 망연히 서 있다가 루아에게로 다가갔다. 루아 옆에 다소곳이 앉아서 돌아누운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루아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시 톡톡 두드렸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파티아가 루아를 안아 일으켰다. 루아가 몸을 뿌리치며 다시 엎어졌다. 두 번을 그렇게 하다가 세 번째로 안아 일으키자 못 이기고 따라 일어났다. 파티아가 루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루아는 파티아의 시선을 피하려고 얼굴을 돌렸다. 파티아가 두 손으로 루아의 귀를 잡고 얼굴을 못 돌리도록 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돈은 은행에 있잖아. 우리 한번만 더 하자, 응?”
“싫어, 무서워!”
“한번만… 한번만 더, 응?”
“크응……!”
루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있었다. 그 동안 먹었던 맛있는 음식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런 것들은 고사하고 또다시 쫄쫄 굶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스러웠다. 파티아가 루아의 볼을 만지며 애원조로 말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한번만 더하자, 응?”
루아는 순간 정신이 살짝 몽롱해짐을 느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무척 생소한 느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차올랐다. 루아의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때 파티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무언가 보드라운 것이 입술에 닫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파티아가 몸을 발딱 일으켜 방문을 열고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저 아줌마만 나가면 바로 들어가는 거다, 알았지?”
파티아가 마치 작전지시를 내리는 분대장처럼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루아는 몹시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알았어! 근데, 누가 갑자기 나타나면 어쩌지?”
파티아는 자신의 다리와 맞댄 루아의 다리가 심하게 떨림을 느꼈지만 모른 척했다. 파티아도 떨리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루아를 안심시킬 말을 찾아야 했다.
“아무도 안 와. 봐! 거리도 조용하잖아.”
루아는 파티아의 말이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 듯 굳은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아줌마가 점포 문을 열고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이다!”
파티아가 현금지급기가 늘어선 점포를 향해 달려가자 루아도 뒤를 따랐다.
“암호, 인증번호 다 기억하지?”
“응!”
“빨리 끝내자!”
파티아가 현금지급기의 지시에 따라 통장번호와 암호를 차례로 입력하고 출금할 금액을 선택하기 전에 루아를 힐긋 바라보았다.
“오천 기니!”
“그렇게 많이?”
“마지막이야. 이천 기니는 너무 작았어.”
“난 몰라, 맘대로 해!”
파티아가 오천 기니 버튼을 눌렀다.
이제 마지막으로 보안카드 번호를 쳐 넣을 차례였다. 파티아가 루아에게 물었다.
“26번째 암호 중 앞 두 자리?”
루아가 대답했다.
“35.”
“18번째 암호 중 뒤 두 자리?”
“81.”
파티아가 출금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기계에서 돈이 나오지 않았다.
저번에는 이 순간 스르르륵 현금 세는 소리가 들리고 돈 통 뚜껑이 마치 보물상자처럼 열렸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왜 안 나오지? 너 정말 제대로 기억한 거 맞니?”
“응.”
“이상하네. 돈이 많아서 그런가? 저번처럼 이천 기니만 해야겠다. 다시!”
“놓치지 마세요, 절대로!
한느가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반드시 붙잡아야 해요. 붙잡으면 경찰에게 넘기지 말고 나한테 연락하세요!”
이천 기니를 선택해도 보물상자는 열리지 않았다. 천 기니도 마찬가지였고, 하다못해 백 기니짜리 한 장만 달라고 해도 매정한 현금지급기는 싸늘한 눈길만 보내고 있었다.
“돈이 없어진 걸 알고 안 되도록 해놓았나 봐.”
“이제 어쩌지?”
“오늘은 돌아가자! 다음에 다른 사람 걸로 해야겠어.”
파티아와 루아가 점포 문을 열고 나오는데, 새까만 자동차 한 대가 점포 쪽으로 달려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파티아가 소리쳤다.
“달아나자, 빨리!”
둘은 인적이 끊어진 도로를 질주했다. 자동차에서 남자 둘이 내려 파티아와 루아를 향해 달려왔다. 둘은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전에 루아가 쓰러져 있던 골목이 보였다.
“저기 숨자, 빨리 와!”
파티아가 골목 안으로 달려가는데 루아는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골목에 대한 나쁜 기억 때문인 듯했다. 남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들렸다. 파티아는 쓰레기통 속으로 쏙 들어갔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진동시켰지만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남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발자국 소리가 모퉁이를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파티아는 골목을 나와서 반대방향으로 달아났다.
한참을 달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강이 보였다. 처음 와본 곳이었지만 강을 따라가면 루아의 집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 먼저 집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파티아는 걸음을 재촉했다.
“푸하하하! 꼬마 절도단이라니, 이런 깜찍한 도둑은 처음 보는군, 그래!”
보안회사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폭소를 터뜨리자 다른 직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친구, 그렇게 좋아할 때가 아냐. 한 애를 놓쳤으니 의뢰인한테 뭐라고 할 건지나 생각해 봐!”
“곧 잡히겠지. 꼬마가 도망가면 얼마나 가겠어?”
그때 문이 열리고 삼십 중반의 여자가 들어왔다. 한느였다.
“밤늦게 수고하십니다. 아이들은 어디 있죠?”
직원 중 한 남자가 회의실을 가리켰다.
“저 방에 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는 놓쳤어요. 여자아이!”
“뭐라고요? 어쩌다가?”
음성이 날카로웠다.
“아이들이 영악하게도 찢어졌어요. 아무튼 지금 추적 중이니까 곧 잡힐 겁니다.”
“잡아요, 반드시 잡아야 해요!”
한느는 몹시 못마땅한 눈으로 남자를 쏘아보다가 회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남자가 그 뒤를 따랐다.
방 한 가운데 커다란 회의용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한 소년이 귀퉁이에 앉아 있었다. 한느가 들어가자 소년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한느가 다가가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이름이 뭐니?”
루아는 들어온 사람이 여자이고 음성도 사납지가 않아서 약간 안심이 되었지만, 저번에 카드 패를 읽어주다가 험상궂은 남자들에게 죽도록 얻어맞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서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아에요.”
“도망친 아이는……?”
“……”
루아가 대답을 않자 한느가 뒤따라 들어온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나가주세요!”
남자가 나가자 한느는 루아의 곁으로 다가가서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친구 의리를 지키려나 본데, 지금 그럴 때가 아냐. 네 집은 어디니? 부모님은 계셔?”
“아뇨. 엄마가 집을 나가서 안 돌아 와요.”
“아빤?”
“없어요.”
“그럼 너 혼자 산단 말이니?”
“네!”
한느는 루아가 귀여운 얼굴인데다가 순진해 보이기까지 해서 이런 일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도망친 아이도 부모님이 안 계시니? 걔도 혼자야?”
“그런가 봐요.”
“그럼 너희 둘이 사는 모양이구나……”
루아가 대답은 안 했지만 그의 표정이 그렇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어디서, 네 집에서?”
“네!”
한느는 집이 어디냐고 물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루아가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고, 실은 그녀가 궁금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넌 어떻게 돈을 인출했지? 비밀번호와 인증번호를 어떻게 알았어?”
루아는 대답을 못하고 커다란 눈망울만 말똥말똥 굴리고 있었다. 한느가 타이르듯 말했다.
“네가 사정이 딱해서 돈을 훔쳤다고 해도 이건 나쁜 짓이야. 너도 알지? 네가 끝까지 말을 안 하면 경찰에 넘길 수밖에 없어. 그러나 자초지종을 자세하게 말해주면 경찰에 넘기는 대신 내가 널 보호해 줄 수도 있어.”
루아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파티아가 있었더라면 좋은 대답을 해주었을 텐데……’
한느가 재촉하듯 말했다. 이번에는 약간 딱딱한 음성이었다.
“설마 남의 돈을 훔치고서 발뺌하려는 건 아니겠지? 네가 어떻게 돈을 빼내었는지 알아야 내가 대비할 수 있지 않겠니? 생각해 봐! 집 담벼락에 구멍이 생겼다면 얼른 매워야 하지 않겠어?”
아줌마가 천사의 집 원장처럼 고약해 보이지 않아서였을까, 루아는 이야기만 잘하면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루아가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통장과 보안카드를 보았어요. 프리슨은행에서요. 그래서 아주머니가 하던 대로 따라했어요.”
“그래, 나도 기억난다. 내가 돈을 인출할 때 옆에 있었지? 하지만 잠깐 보았을 뿐인데 그 많은 숫자를 어떻게 다 기억했니?”
“그냥 기억이 났어요.”
한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암호는…? 내 기억에 암호를 입력할 땐 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건……”
루아가 머뭇거리자 한느가 넘겨짚었다.
“네 친구가 본 게로구나.”
“아… 아뇨! 본 게 아니에요.”
“그러면?”
“들은 거예요.”
“뭐라고? 뭘 들었다는 거니?”
“아주머니가 암호를 입력하는 소리요.”
“세상에! 소리를 듣고 알았다고?”
“네!”
루아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한느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오른 손을 이마 위에 갖다 놓았다. 자기가 지금 정상적인 상태로 제대로 듣고 있는 것인지 확인해보려는 것 같았다.
한느는 며칠 전 ‘고양이 눈’에서 일어났던 일까지 떠올라, 어째서 지금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연속적으로 터지는지 그저 놀랍기만 했다.
“지금 네가 하는 말들이 보통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너도 알겠지?”
“소리를 듣고 암호를 알아내는 건 정말 신기했어요.”
“너도 마찬가지야. 보안카드의 숫자를 한 번 보고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루아가 아스퍼증후군이 아닌 건 분명해 보였다. 눈도 똘망똘망하고 어투도 지극히 정상이라 어느 모로 보아도 자폐의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루아가 자기 손에 들어온 것은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고 한느는 생각했다.
‘어쩌면 티라노사우루스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내려온 하늘의 사신들일지도 모른다.’
한느는 루아를 반드시 자기 집으로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자 이제 우리 얘길 해 보자! 넌 내 돈을 훔쳤으므로 마땅히 경찰서로 가야 해. 경찰서로 가면 아마 보호소로 넘겨질 거다. 어떻게 하겠니? 네가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 것이고, 나를 따라 가겠다면 내가 널 보호해 줄 수도 있다. 넌 어차피 엄마 없이 혼자 살긴 힘드니까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 해. 지금 내가 널 그냥 보내준다고 하더라도 넌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또 도둑질을 해야 할 거야. 어떻게 하겠니? 경찰서로 가겠니, 나를 따라 오겠니?”
루아는 아주머니가 말하는 보호소가 천사의 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주머니를 따라 가는 것도 내키지가 않았다. 아주머니가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루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한느가 말했다.
“내가 누군지 몰라 그러는 모양이구나. 그럼 이렇게 하자. 나랑 같이 경찰서로 갔다가 네가 보호소로 넘겨지면 내가 데리고 나올 게. 그럼 되겠니?”
“아주머닌 왜 절 보호하시려는 거예요? 전 아주머니 돈을 훔쳤는데……”
한느는 루아가 아주 똑똑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라리 솔직히 말해주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실은 내가 네 도움이 필요하단다.”
“무슨 도움요?”
“암호를 푸는 일이야. 티라노사우루스 암호! 혹시 들어 보았니? 큰 상금도 걸렸던데……”
“아하! 그러니까 아주머닌 절 이용해서 암호를 풀어서 상금을 타시려는 거군요.”
“난 상금을 타지 않을 거야. 그건 맹세할 수 있어.”
“그럼 무엇 하러 암호를 풀려고 하세요?”
“내가 그 이유를 말해 주어도 네가 이해하기는 힘들 거다. 그래도 네 협조가 필요하니까 말해주마. 난 대학 교수인데 내가 연구하는 내용이 그 암호 속에 있단다.”
“무슨 내용인데요?”
“그것까진 말해줄 수 없다. 말해줘도 넌 절대로 이해하지 못해!”
“제가 암호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보나마나 무지 어려운 암호일 게 뻔한데요. 만일 암호를 못 풀면 절 다시 보호소로 보낼 건가요?”
“아니! 못 풀어도 내가 계속 보호해 주마!”
루아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경우에도 경찰서로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닐 따라 갈 게요. 경찰서엔 갈 것 없고요. 그 대신 우리 집을 들러야 해요. 엄마가 돌아오면 절 찾을 테니까 편지를 남겨야 하거든요.”
“그래, 알았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도록 하자. 그럼 되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