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시타 나츠 소설 『조용한 비』(위즈덤하우스, 2016)를 읽고
b6. 2023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젖어드는 것들이 있다. 행동의 습관이나 생각들이 굳혀져서 내 삶이 된다. 조용한 비처럼 스며들어 가슴을 적시는 이야기를 만났다. “인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먹은 음식과 마신 물, 젖, 기억, 단백질과 물 등 여러 가지 답들이 거론된다. 찬찬히 서사를 따라가 보자.
유키스케는 선천적으로 다리 마비 증상 때문에 목발을 짚는다. 회사가 문을 닫은 날. 귀갓길에 파친코 가게 안 주륜장에 있는 붕어빵가게에서 맛있는 붕어빵을 먹는다. 고요미가 운영하는 붕어빵 가게는 나름 맛집으로 인기 있는 가게다.
“맛에는 힘이 있다. 먹기 전까지 가슴을 채우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진다.”(p21)
고요미와 가까워졌는데 예기치 않는 교통사고로 고요미가 쓰러진다. 유키스케는 의식이 없는 고요미의 병실을 매일 저녁 퇴근 시간마다 들른다. 고요미는 3개월 하고 사흘 만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눈을 떴다.
기억을 관장하는 부위에 바늘 끝 정도 크기의 손상으로 인해 사고를 기억하지 못한다. 장기기억은 남았는데 단기기억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예를 들면, 어제의 일은 기억하지 못한다. 매일 밤, 잠이 들면 그날의 기억은 모두 잊고 사고 전날로 돌아간다.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는 고요미와 목발을 짚는 유키스케는 계속 만남을 이어간다. 유키스케는 고요미가 걱정되어 한집에 살기로 한다. 유키스케의 가족들은 모두 걱정하지만, 고요미를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고요미의 밝고 성실한 모습과 맛있는 붕어빵을 좋아하게 된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부터 붕어빵가게를 다시 열었다. 고요미는 사고 난 사람이라거나 기억력 장애가 있는 사람 같지 않게 붕어빵을 굽는 전문가의 모습으로 일을 잘해 낸다.
어느 저녁 고요미를 위협하는 일당 네 명을 상대로 유키스케는 목발 짚는 발을 절뚝이며 다가가며 소리친다. 고요미는 당황하지 않고 대처하지만, 유키스케는 고요미가 걱정된다.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텐데도 물러서지 않고, 고요미를 지키기 위해 달려드는 용기를 내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유키스케는 어느 날, 충격요법으로 고요미를 향해 ‘기억 못 해’라는 폭력적인 발언을 한다. 청소하다가 잊지 않으려고 써 놓은 수많은 메모를 넣어 둔 서랍을 발견한다.
“종잇조각에 메모를 남기고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고 달력을 지운다. 이렇게 수많은 점을 이어 사라져 버리는 오늘을 내일로 연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p71)
(인간은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라는 질문에 유키스케의 누나는 조심스레 ‘기억’이라고 대답한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기억을 만들지 못하는 고요미는 어쩌란 말인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고요미이기에 그 기억되는 모습을 고요미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사고를 당하기 전보다 가까워졌다. 잊어버리고 잊어버려도 자라났다. 기억에서는 흘러나와도 고요미 씨의 어딘가에 남아 자라는 것이 있다.”(p92)
(오늘을 모두 잊어버리고,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고 해도. 몸이나 생각이나 기억의 일부에 고요미의 기억은 표시 나지 않게 남아서 성장시킨다는 사실이 큰 의미를 지닌다. 두 사람은 분명히 가까워지고 있었고, 붕어빵의 모양도 맛도 점점 좋아졌다. 두 사람의 관계성과 붕어빵의 맛이 쌍을 이루며 비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찾아 읽던 때가 있었다. 화려하거나 소란스럽지 않고 잔잔하게 서사가 펼쳐지면서도 가슴 밑바닥을 울리는 감동이 있는 것이 일본 소설의 한 특징인 것 같다. 이 소설도 그랬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함께하고자 하는 측은지심이 인간다움의 근본이 아닐까를 생각하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시련에 굴하지 않고, 의연하고 밝고 대담하게 살아가는 고요미와 그에게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서로 사랑하며 함께 세상을 헤쳐 나가는 유키스케의 모습이 아름답다. 조용한 비처럼 슬픔이 온몸에 젖어드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한다. 외유내강형인 사람들이 있다. 겉으로 부드러워 보이지만, 안으로 단단해서 일희일비하지 않고 탄탄하게 삶을 꾸려가는 자세를 배우고 싶다.)
(서로 아픈 사람들이지만, 서로의 세계에 서로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소설이다. 외부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생을 살아가는 당당한 모습이 좋았다. 슬픔이 희망으로 바뀌는 순간은 젖어드는 비와 같았다. 귀한 삶을 배울 수 있는 귀한 책을 선물해 주신 은하 작가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