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인간의 영적 문제를 아십니까?”
인간의 참된 행복과 인생의 강건함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이제는 건강의 정의에 있어서도 영적인 건강(Spiritual Health)을 제안했고, “육신적,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 건강과 더불어 영적 건강이 연합하여 강한 상태(Dynamic)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건강”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도 증언하기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1:2)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명예가 있고, 재산이 많고, 성공했어도 가장 소중한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행복한 인간의 삶을 위해서는 생명이 가장 중요하고, 그 생명에는 영혼을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영적(靈的)인 건강이 없다면 인간에겐 이해할 수 없는 불행들이 반복되게 됩니다.
세상에서 계속해서 들려오는 극단적인 불행의 소식들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일찍이 21세기 지구상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마약, 정신병, 청소년문제”가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 예측대로 지구는 시대의 편리함과 상관없이 정신병동이 되어가고 있고, 마약이 가져다주는 가짜 행복, 청소년들의 타락과 범죄는 급증하고 있습니다.
부귀와 권세도, 성공과 명예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감추어진 근본적 불행의 문제,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을 떠난 원죄 사건 이후, “사탄이 가져다 준 영적문제”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왜 이런 영적인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은 짐승과는 다른 “영적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말씀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 영적 세계를 아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1: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니라”(창세기2:7). 그리고는 인간에게 참 행복과 에덴동산을 선물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1: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세기2:8). 그래서 인간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행복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 행복했던 인간에게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 불행을 가져다 준 근본 존재의 실체, 세상은 그것에 대해 전혀 가르쳐주지 않고 오히려 그 흑암의 존재들을 섬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흑암존재의 우두머리인 사탄이 가져다 준 “우상숭배”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인간이 짐승을 경배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4절)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6절)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15절) 성경에서 말하는 용은 무엇이며 짐승은 또한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떠나버린 인간은 사탄이 만들어 낸 온갖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 믿는 자를 비방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가져다 준 영적문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참 행복과 참 축복을 누리도록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이후 찾아온 문제, 사탄의 손에 장악되어 고통받기 시작한 문제가 바로 영적 문제입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집안에 반복되어 찾아오는 문제가 영적 문제입니다. 그 뒤에 계속해서 정신 문제, 육신 문제, 가정 문제, 내세 문제, 후대 문제가 따라올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 불행의 장본인은 바로 사탄(Satan)입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대적자라는 뜻이고, 사탄의 헬라어 단어인 마귀는 이간자라는 뜻입니다. 사탄(마귀)은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난 존재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고,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여 인간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사탄의 졸개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가리켜 귀신, 혹은 악령, 미혹의 영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 사탄이 거짓의 아비요, 멸망시키는 자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편14:1-3)
이 사탄이 가져다 준 영적 문제와 불행을 해결하는 성경의 해답은 이렇습니다.
①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 참 안식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② 그런데 인간은 타락한 천사요, 거짓의 아비인 사탄(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과의 선악과 약속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떠나는 원죄(原罪)를 범하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지고 그 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죽은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인간을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영적 축복을 빼앗아 가고, 경배의 대상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으로 바꾸게 해서 결국 진리를 알지 못하게 하고,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③ 그때부터 인간에겐 다툼과 갈등, 실패와 죽음, 고통이 쉴새없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온갖 궤계와 거짓말로 분리시켜서 날이 갈수록 갈등과 다툼, 자살이 많아지게 하고, 인간이 인간을 신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합니다.
④ 결국 이 땅에서 일평생 이해할 수 없는 외로움과 허무속에서 나그네 생을 살다가 본향(천국,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 죽음과 부활하심으로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원죄 문제, 자범죄와 저주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사탄과 지옥의 권세를 꺾어 버렸습니다.
⑥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⑦ 예수님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11:28)
당신은 참 행복을 누려야 할 소중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3:8)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브리서2:14-16)
원죄(原罪)이후 찾아온 영적문제 해결
2001년 9월 말, 미국 마이애미의 도로 중앙분리대에서 69세의 여성이 발가벗은 채 하이힐과 옷을 양손에 들고 앉아 있다가 외설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성구치소에서 재판을 기다리다가 며칠 만에 병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셋째아들 그레고리 헤밍웨이였습니다. 그는 네 번째 아내와 이혼한 뒤 63세의 나이에 성전환수술을 한 것입니다. 그의 죽음 뒤엔 술과 여자, 여행에 빠져 처자를 돌보지 않다가 “처자유기죄”로 양육권마저 박탈당한 아버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있었던 셈입니다. 헤밍웨이 가문의 비극은 뿌리가 깊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의 아버지처럼 권총으로 자살했고, 그의 형제와 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1996년에는 유명 배우였던 그의 손녀 마고 헤밍웨이(Margaux Hemingway)도 할아버지의 기일에 자살함으로써 그 뒤를 따랐습니다.
예술가나 작가 중에는 유난히 헤밍웨이와 버지니아 울프처럼 자살로 삶을 마감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일까요? 인간의 마음속에 파고들어 상처와 욕망의 노예가 되게 하여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보이지 않는 흑암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최종 목적은 그 인생을 실패시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 후에 크게 무너지기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불행의 흑암세력을 폭로하는 유일한 책이 있는데 바로 성경입니다. 사탄(마귀, 귀신)이라고 하는 흑암세력은 지금도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으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원수가 됩니다. 원래 사탄은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기 전에 만드신 천사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천사였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담당한 신분이 높은 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 같이 되려는 교만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그를 추종하는 천사들과 함께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는 결국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이 사탄의 세력을 단번에 이기는 길이 있습니다. 사탄의 힘이 아무리 막강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는 꼼짝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의 권세를 결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이 인생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신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여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축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바울이...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사도행전16:18)
예루살렘이여 평안하뇨?
예루살렘(히브리어: יְרוּשָׁלַיִם 예루샬라임, 아랍어: القدس 알쿠드스, 영어: Jerusalem,)은 팔레스타인 중심부의 지중해 연안 평야와 요르단 강에서 이어지는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3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를 뜻한다. 아랍어 이름인 알쿠드스는 아랍어로 "신성한 도시"를 뜻한다. 알꾸드스라는 지명은 9세기에 무슬림 세력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부터 처음 등장했다. 예루살렘은 사해의 북쪽으로 약 28km 떨어져 유대 산맥 언저리의 해발 780m에 위치하며, 지형적으로 동쪽으로는 키드론 골짜기와 남쪽으로는 힌놈 골짜기의 가운데 솟은 구릉에 기원전 약 3000년 이래로 사람들이 부락을 이루어 사는 것으로 추측된다. 산악 지형이 가진 장점을 살려 예루살렘은 외부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는 성채를 중심으로 서서히 도시의 윤곽이 자리잡았다.
예루살렘은 지역 구도적으로 아시아와 유럽과 유럽대륙과 연결되는 관문이며 세계종교들의 교차로이고 문화와 문명의 연결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바위산 예루살렘은 생활에 편리한 장소는 아니다. 첫째 물을 구하기 어렵다. 도시는 물과 함께 발전하기에 중요한 도시는 반드시 강이나 바다를 끼고 있는 경우를 보게된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1년내내 물이 나오는 곳은 기혼샘 뿐이다. 사람이 하루에 필요로 하는 물이 대략 200리터 정도라고 하는데 이것은 먹고, 마시고, 요리하고 씻고 배설하는데 요구되는 양이다. 우기 때에 기혼샘은 대략 120만 리터의 물을 품어내는데 이것은 6,000명정도가 사용하기 좋은 양이지만 건기 때는 1,000명정도만 겨우 사용할 수 있는 20만 리터가 나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모리아산인 이곳은 아브라함 당시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던 곳이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여호수아가 정복하지 못한 여부스의 땅인 이곳은 다윗왕이 정복하였는데 당시 인구가 2,400명이라고 인구학자는 말한다. 솔로몬 시대에 와서 4,000명이 되었고 히스기야 시대에는 25.000명이 되었는데 앗수르의 공격에 대비해서 성 밖에 있는 기혼샘을 성안으로 옮기는 대 수로 작업을 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히스기야 터널 553m의 기념물로 남아있으며 지금도 물이 철철 흐르고 있다. 기혼샘과 연결된 실로암 연못은 베데스다 샘의 물 저장고를 통해 물 공급을 하였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의 인구는 40,000명이었는데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 그 성에서 110만명이 죽었으니 그 비참함이 어떠했는지 상상이 안된다. 둘째로 예루살렘은 식량을 구하기 어렵다. 농사지을 토지는 없고 전쟁하기 좋은 구도를 가지고 있는 산위에 있는 전략적인 도시이다. 셋째로 예루살렘의 교통이 어렵다. 높은 산 주변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은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 도시의 구성요소로 부족함이 많은 예루살렘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찾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언약의 여정으로 다윗성과 솔로몬의 황금 성전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장소는 공간의 의미가 있다. 그 공간이 관심과 애착의 장소가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모아진다. 그것으로 인해 공동체의 가치관이 형성되고 세계관이 발생한다. 고향집, 고향마을이나 어릴 때의 추억 현장이 마음 한 켠에 남아 마음을 흔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루살렘은 그런 의미에서 신앙인의 마음에 가보지 않은 향수를 자극하는 의미가 충분히 있다. 성경을 펴고 읽으면 어김없이 드러나는 예루살렘이니 영적인 애착이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육신을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출생하시고 성장하시고 천국에 가시기 전 마지막 시간을 보내신 현장이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 해결하신 갈보리산, 제자들에게 미션을 확인하신 감람산, 세상이길 성령충만의 마가다락방과 다시오마 약속하신 승천산의 현장이니 어찌 마음이 안 갈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히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시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