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수도사와 하나님의 도시
1100년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야만인들의 침입은 더 이상 유럽의 위협이 되지 못했다. 유럽은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었다. 농업의 생산성 향상과 인구의 증가 그리고 상업의 부활에 힘입어서 도시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다. 이런 사회적 발전은 시민 문화를 성립시켰고,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수입된 이슬람의 선진문물은 지적 각성을 불러왔다.
무섭고 어두운 숲 사이로 도로가 뚫리면서 여기저기에 도시들이 세워졌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봉건적 계급 질서와 토지에 묶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공기를 마실 수 있는 도시로 발길을 돌렸다. 그들 가운데는 상인, 장인, 광대, 순례자, 성직자, 기사, 음유시인, 교사, 그리고 학생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상인들은 농노나 귀족과 무관한 제3의 계급, 즉 시민이라는 자의식을 지닌 새로운 계층으로 발전했다. 시민들은 기동성을 갖춘 상인들로서 현금을 받고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했다. 기동성 있는 계급은 당연히 기동성 있는 성직자를 요구했다. 따라서 전에 없던 새로운 유형의 성직자가 등장했는데, 그들이 바로 탁발 수도사들이었다. 탁발 수도사들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각지에서 모여드는 상인과 농민을 상대로 설교했다.
리옹의 가난한 사람 왈도
1173년 프랑스의 어느 부유한 상인이 거리의 악사가 부르는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어느 부자 청년의 회심을 주제로 한 그 노래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유한 상인은 가족들에게 약간의 재산을 남겨주고는 나머지를 모두 팔아서 빈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는 두 명의 성직자를 고용해서 라틴어로 된 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게 했는데, 그가 바로 왈도(Peter Waldo, ?-1218)였다.
왈도는 성서를 읽다가 혼란에 빠졌다. 성서에는 연옥이나 교황의 강력한 권한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없었다. 왈도는 로마교회가 강조하는 핵심 개념들을 거부한 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소개했다. 그가 보기에 당시의 성직자들은 청빈과 금욕을 주장하면서도 실제 행동은 달랐다. 소유를 포기한 왈도의 신선한 주장은 복음적 삶을 외면한 제도교회에 염증을 느끼던 평신도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쳐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많은 이들이 그를 추종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여성을 포함한 모든 ‘가난한 사람들’은 신약성서를 공부하고 일반적인 언어로 설교했다. 4년이 지나지 않아서 왈도파들이 프랑스를 뒤덮었다.
왈도는 제3차 라테란 공회(1179)에 참석해서 교황에게 자신의 운동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한 가지 조건을 달아서 허락했다. 성직자를 초청할 경우에만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식한 평신도들에게는 단독으로 설교를 허락할 수 없다는 게 교황의 생각이었다. 그러자 왈도는 “교황은 하나님의 음성을 거절하는 인간의 소리”라고 일축하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전도를 계속했다.
교황 루치우스 3세(루치오 Lucius III, 1181-1185 재위)는 1184년에 왈도를 이단으로 간주하고서 파문해버렸다. 그를 파문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주교의 허락없이 평신도로서 성서를 설교했다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성직자의 권위를 부정했다는 것이었다. 신학적인 교리 때문에 이단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자주 있던 일이었지만, 세속화된 성직자들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영적 각성을 요구하는 청빈 운동을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교회의 논리는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왈도는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여전히 이단의 굴레에서 못 벗어났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왈도파의 활동이 그의 사후에도 활발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은 행상인이 되어서 시골이나 귀족의 성을 찾아다니면서 천이나 보석을 팔았다. 사람들이 다른 것이 없는지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다. “예, 아주 진귀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보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마음에 불을 붙이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고는 성서 두루마리를 꺼내어 보여주었고, 그렇게 해서 전도가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폴란드를 비롯해서 수많은 지역에서 왈도파들이 왕성하게 활동했다.
인노첸티우스 3세(인노첸시오 Innocentius III, 1198-1216 재위)는 제4차 라테란 공회에서 또다시 왈도의 파문을 확인했고, 1200년대 중반까지 왈도의 추종자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종교재판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수백 명의 왈도파가 이단의 섬멸을 목적으로 조직된 십자군들에 의해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타국으로 피신했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개신교에 합류했다.
하나님의 광대 프란체스코
12세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적 열정의 시대였다. 그들은 변화하는 세계에 적합한 새로운 신앙의 패러다임을 모색했고, 그로 인해서 탁발 수도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왈도파처럼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교회체제에 대해서 비판적이기도 했지만, 도미니쿠스회나 이제부터 살펴보게 될 프란체스코회처럼 교황에게 철저히 순종하는 소위 ‘대 탁발 수도회’의 탄생을 가져오기도 했다.
앗시시의 프란체스코(Francesco d’ Assisi, 1181-1226)는 1204년에 이웃한 도시였던 페루자와의 전투에 참가했다. 프란체스코는 포로가 되어 1년을 감옥에서 지내다가 풀려났지만 또 다시 병에 걸리는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세계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하루는 말을 타고 가다가 문둥병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리스도를 만났다. 이후로 부유한 의류상의 외아들이었던 프란체스코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지니고 있는 것들을 어려운 이들에게 나눠주고는 부자들에게 구걸하고 다니면서도 늘 기뻐했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면 프란체스코는 즐겨 대답했다. “청빈이라는 부인과 결혼했기 때문이라오.” 이 일로 아버지와 의절하게 되었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에게 감사했다.
프란체스코는 앗시시 부근의 버려진 예배당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사랑과 봉사를 강조하는 그의 단순한 복음은 많은 추종자들을 불러모았다. 세상의 부를 포기한 채 자신을 따르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프란체스코는 몇 가지 규칙을 만들었는데, 나중에는 그것들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종교가 되었다. 그로부터 한 해가 지난 뒤에 프란체스코는 교황 인노첸티우스 3세를 찾아가서 자신이 이끄는 이들을 위해서 수도원을 설립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교황은 철저한 부의 포기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희생을 강조하는 프란체스코의 규칙이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설립을 승인했다. 여기에는 아마도 교황의 이상한 꿈이 작용했을지 모른다. 교황은 프란체스코를 만나기 직전에 산피에트로 성당이 무너지려고 하는 순간에 한 사내가 나타나서 어깨로 건물 전체를 떠받치는 꿈을 꾸었다. 교황은 프란체스코를 자기 꿈에 나타난 영웅으로 생각했다.
1218년까지 프란체스코를 따르는 이들이 꾸준히 늘어나서 무려 3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부유한 이들이 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더욱 부유해졌고,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들은 아주 드물었다. 클뤼니 수도원처럼 부유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은 프란체스코는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하도록 가르치면서 탐욕을 거부하고 겸손한 삶을 살도록 가르쳤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갈색 옷 두 벌 이외에는 가질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수도사들은 언제나 기뻐하고 즐거워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은 ‘하나님의 광대’라고 불렀다. 나중에 마틴 루터는 선행을 강조했던 프란체스코를 강력하게 비난하기도 했지만, 사실 두 사람 모두 단순한 삶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외면했던 로마교회를 상대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치열하게 싸움을 벌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