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울시향의 음악고문을 거쳐 올해 초 음악감독으로 공식 취임한 지휘자 정명훈.
지휘자로서는 오케스트라와 청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발휘하지만 생활인으로서의 정명훈은 어떤 사람일까.
“엄격한 카리스마 뒤에 감춰진 의외의 모습에 반하다”
벌써 7회째 강행군이다. 지난 1월 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시작으로 10일, 11일, 13일, 16일, 17일, 18일 그리고 마지막 20일까지…. 전문 콘서트홀부터 구민회관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일 이어지는 공연과 리허설에 서울시향 단원들은 그야말로 녹초가 될 법했다. 지휘자를 따라 악기를 메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리허설까지 반복해야 하는 단원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들에게서 도통 힘든 기색이나 싫은 기색을 찾아볼 수 없다. 서울시향 재창단에 따른 새 출발 이후 단원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빡빡한 연습과 공연을 다부진 각오와 넘치는 의욕으로 소화해내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는 카리스마
지난해 6월 재단법인으로 재출범한 서울시향이 6개월간의 워밍업을 마치고 새해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서울시향의 지난해 반년은 창단 반세기 만에 맞은 가장 큰 변혁의 시기였다. 전면적인 오디션을 통해 단원의 3분의 1이 바뀌었고, 단원 평균 연령도 44세에서 36세로 낮아졌다. 올해는 연간 60회 정도이던 연주를 100회 이상으로 늘리고, 상임지휘자인 정명훈이 직접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전곡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상당히 야심찬 계획이다.
1월 18일 저녁 노원문화예술회관 리허설 현장. 지휘자 정명훈은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지휘봉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50여 명의 단원들 시선이 일제히 지휘봉 끝에 집중된다. 지휘봉이 힘차게 허공을 가르면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이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웅장하게 울려 퍼질 것이다. 모두가 지휘자의 지시만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는데 난데없이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린다. 사진기자 딴에는 지휘자의 시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뒤에서 셔터를 눌렀는데 워낙 조용했던 터라 소리가 예상외로 커서 정적을 깬 것이다. 그 소리에 놀라고, 정명훈은 고개를 홱 돌렸다. 아차, 이제 곧 불호령이 떨어지겠구나.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런데 정명훈은 뒷머리를 몇 번 긁적이더니 씨익 웃었다.
“설마 내 뒤통수 찍은 거 아니죠? 얼마 전에 오랜만에 만난 분이 있는데 갑자기 저한테 ‘머리카락 참 많이 빠졌네’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요즘 제 머리가 정말 많이 빠졌거든요.(웃음)”
그의 말에 공연장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됐다. 날카롭고 엄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그 이면에 이렇게 코믹하고 유머러스한 면이 있다니. 그러고 보니 웃을 때와 엄하게 보일 때의 분위기가 극과 극이다.
새해 들어 한국 음악계에는 ‘정명훈 효과’가 몰아치고 있다. 정명훈이 직접 지휘하는 서울시향의 공연에 연일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 특히 지난 1월 16일 서울 구로구 궁동 연세중앙교회에서 열린 ‘찾아가는 시민 음악회’는 2만여 명이 공연을 보기 위해 몰려들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3~5층 예배당에 마련된 1만5000석은 청중들로 꽉 찼고, 1층 로비에 별도로 설치된 대형 스크린으로라도 서울시향의 연주를 듣기 위해 5000여 명이 몰려들었다. 선착순 무료로 입장한 이날 연주회에선 좌석이 모자라 2시간 동안 서서 지켜본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지휘자 정명훈은 연주가 없는 날이면 ‘연습해야 하기 때문에 밥 먹는 시간도 아깝다’며 세종문화회관 별관의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으며 리허설에 열중했다.
세계적인 큰 무대에서 활동하던 그가 작은 구민회관까지 직접 찾아다니며 시민을 만난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전용 콘서트홀이 아직 없기 때문에 마련된 고육지책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문화혜택을 누릴 수 없었던 동네 주민들에게 수준 높은 클래식 공연을 선사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네 살 때 피아노를 시작해 3년 뒤인 일곱 살 때 그는 서울시향과의 협연으로 데뷔했다. 그리고 45년이 흘러 서울시향의 음악감독이 되었으니 남다른 소회가 있을 듯했다.
“솔직히 일곱 살 첫 연주회 때 기억은 나지 않아요. 외국의 교향악단과 함께하는 것도 즐거운 일임엔 틀림없지만 우리나라 교향악단과 행복한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아주 흥분되고 설레는 일이지요.”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알려진 대로 어머니의 극진한 노력 때문이었다. 7남매를 모두 세계적인 음악가와 교수, 사업가, 의사로 키워낸 어머니 이원숙(81세)씨는 각각 다른 개성을 가진 7남매의 재능과 적성을 일찍부터 찾아주었다. 식당 일로 바빴지만 레슨시간에는 꼭 옆에 붙어 앉아 아이들의 연습을 지켜보았고, 피서를 갈 때에도 레슨 선생님을 데리고 갈 정도로 하루도 빠짐없이 수업을 받게 했다. 한국전쟁이 터져 부산으로 피란을 갈 때에도 피아노를 실어갔을 정도니 이런 이씨의 열정에 모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제가 어릴 때 유난히 수줍음을 많이 타서 어머니는 일부러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했어요. 그리고 연주가 끝나면 ‘잘했다’는 칭찬부터 했고, 선생님들한테도 그렇게 이야기해줄 것을 당부하셨죠.”
그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생각을 자식들에게 강요한 적이 없었다. 자식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기다려주고 그 선택을 믿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콩쿠르나 연주회를 할 때 어머니가 앞에 앉아 있으면 용기가 생겼다. 정명훈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언제나 자신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최고의 지지자였다. 피아노와 지휘를 놓고 진로를 선택하지 못해 고민에 빠졌을 때도 지휘자의 길을 걷도록 지원해준 사람이 바로 어머니였다. 모두들 뒤늦게 진로를 바꾸는 것이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어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지휘 쪽으로 기울고 있는 그의 마음을 존중해주었다.
‘가족’과 ‘요리’라는 단어만 나와도 표정이 밝아지는 남자
“우리 부부는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요. 유럽에 살면서 긴 여행을 할 때는 스테이션왜건에 아이 셋을 태우고 다녔어요. 차에서 자고 먹고 하면서 말이죠.”
무대 위에서의 인생과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균형을 찾는다는 것은 본인에게나 가족에게나 늘 힘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가 없을 때의 생활을 그는 지극히 평범하게 지내고 싶어 한다. 아내, 아이들과 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에 해야 할 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새벽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길렀다. 혼자 연주여행을 할 때는 집에 돌아가서 가족과 여유롭게 보낼 수 있도록 식사도 방에서 해결해가며 일과 공부에 전념한다.
유럽에서 주로 활동했던 그는 프랑스 프로방스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을 갖고 있다. 집 앞으로는 올리브가 400그루나 자라고 있는 올리브 농장이 펼쳐지고 뜰에는 요리 재료를 재배하는 텃밭이 있다.
연주가 없을 때 집에서의 식사 준비는 늘 그의 차지다. 그의 요리 실력이 수준급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 지난 2003년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디너 포 8>이라는 요리책도 출간한 바 있다. 요리책 제목의 ‘8’은 자신과 아내, 사랑하는 세 아들과 아들의 미래 반려자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그의 요리 이력은 열 살이 채 안 된 무렵부터 시작된다. 미국에 이민 가서 식당을 운영하던 부모님 대신 형과 동생의 도시락을 싸주고, 학교가 파하면 온 식구가 동원되어 일을 하던 식당에서 그는 아버지와 주방일을 전담하다시피 했었다. 워낙 요리하는 것을 좋아해 힘든 줄 모르고 일을 즐겼고 손님이 빠져나가면 식당 한편에 있던 피아노를 치곤 했다고.
“시애틀에서 식당을 할 때 기본적인 건 다 했어요. 불고기, 갈비, 닭찜…. 가장 비싼 요리로는 신선로가 있었습니다.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요리는 찌개예요. 나는 매운 걸 안 먹으면 뭔가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매운 고추가 항상 있어야 돼요. 비행기 안에서 매운 고추가 정 없으면 타바스코 소스라도 치지요. 그런데 타바스코를 치면 음식 맛이 달라집니다. 맛없는 비행기 음식은 그래도 괜찮아요. 하지만 좋은 음식에는 절대 넣으면 안 돼요. 김치찌개 만들면서 김치를 볶을 때도 매운 고추를 넣을 정도예요.”
똑같은 재료라도 언제 얼마만큼 넣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처럼 음악도 조화와 균형이 맞아야 아름다운 리듬이 만들어진다. 요리사가 각기 다른 맛을 내는 재료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듯 지휘자는 각기 성격이 다른 연주자들을 조화시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그에게 요리는 음악과 일상의 밸런스를 맞춰주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음악에만 몰두해 신경질적이고 편협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고, 삶의 여유를 느끼고 행복을 음미하게 해주는 쉼표 같은 것이다. 연주회를 마친 후 온몸의 진이 다 빠진 것같이 지쳤을 때도 집에 돌아와 요리를 해서 가족들과 함께 먹으면 모든 피로와 스트레스가 싹 날아가버릴 정도라고.
젊을 때는 고기도 수북이 쌓아놓고 먹을 정도로 엄청난 대식가였다. 그런데 채식주의자인 아내 덕분에 요즘엔 주로 생선과 야채를 먹는다. 얼마 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집에 있을 때, 가족과 있을 때는 세 끼를 아주 잘 먹지만 홀로 연주여행을 할 때는 커피와 오렌지주스로 아침식사를 때운다고 말했다. 요리가 함께 먹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음악을 얘기할 때와 요리를 얘기할 때는 그가 인상을 쓸 때와 미소를 지을 때 느낌이 다른 것처럼 그 느낌이 확 다르다.
예술가로서의 그는 가까이하기 어려운 존재지만 생활인으로서의 그는 누구보다 넉넉하고 친근한 사람이었다. 그게 바로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매력이었다.
진행기자=박인숙|사진=이정민
출처 : 우먼센스 2006-03-08 |
첫댓글 저도<마에스트로 정명훈의 디너 포 8>를 가지고 있어요. 한참 정명훈샘에게 올인할 때 사들인 귀한(?)책이지요. 요리와 더불어 다양한 표정의 마에스트로를 보는 기쁨도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