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이 패널 벽, 여닫이 창, 투박한 나무 식탁. 지극히 시골스러운 요소들로 채워져 있지만 촌스럽지 않은 집. 회벽은 아주 매끈하게 시공했고, 천장 몰딩은 아예 없애고 기막히게 직각을 맞췄으며, 손잡이·후크·수도꼭지·조명 등의 소품은 일본 카페에 온 듯 빈티지하다. 부부와 등학생 남매, 눈·코·입을 분간하기 어려운 새까만 강아지 ‘깜돌이’가 함께 살고 있는 ‘시골집 아파트’가 완성된 이야기를 들었다.
우직한 나무 식탁 세트가 놓인 다이닝 룸. 다용도실로 나가는 나무문 자리에는 본래 창문이 있었다. 깜돌이가 서 있는 왼쪽이 주방 입구.기획 이나래 | 포토그래퍼 김덕창 | 레몬트리
5년 전 살던 집으로 다시 이사 오다
집주인은 5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는데 당시에도 지은 지 20년이 넘은 오래된 아파트여서 최소한의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입주했다. 50평대지만 주방이 유난히 좁아서 옆에 붙어 있던 세탁실 공간을 헐어 주방으로 들였고, 낡은 창호를 바꾸었다. 이렇게 고쳐 1년 남짓 살고 집을 세주고 나갔다가 올해 초 다시 이사를 왔다. 그사이 아이들도 자랐고 짐도 늘었기에 이번에는 앞으로 최소 10년을 살 계획으로 리모델링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구체적인 디자인 시안은 없었지만 너무 시골스럽거나 너무 모던한 집보다는 따뜻하고 편안한 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식물을 좋아해서 화초 가꿀 공간이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옛날 아파트라 안방이 유난히 작은 점과 아이들 책이 많아서 거실까지 책이 밀려나오는 것을 반드시 해결하고 싶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스타일리스트 헬렌 K는 거실 베란다 확장면에 다시 타일을 깔고 접이식 문을 달아 ‘실내 정원’을 마련했고, 현관 입구, 주방 등에도 화초를 둘 수 있는 행잉 코너를 만들었다. 안방 베란다는 확장해서 창밖이 바라보이는 간이 서재 겸 작업 코너를, 현관 입구의 방과 복도를 이용해 아이들이 놀기도 하고 책도 읽는 공간을 만들었다.
2 그린 톤과 나무로 내추럴하게 꾸민 6학년 아들 방. 중학생이 되면 방 양 에 있는 책장을 일부 정리하고 선반을 달아 인테리어할 수 있도록 패널 중간에 스페이스 월 레일을 심어두었다. 벽시계 뒤로 심어둔 레일이 보인다. 방문에 달린 시력검사판 모양의 후크, 칠판, 분필도 헬렌 K가 골라온 것.기획 이나래 | 포토그래퍼 김덕창 | 레몬트리
건강한 집, 로하스적인 리모델링
헬렌 K가 디자인하고 리모델링한 이 집은 소품이나 마감재도 남달랐지만 현란한 구조 변경이 없어 특이했다. 그녀는 생활의 편의만큼이나 안전하고 건강한 집을 만드는 것을 중시한다고 말한다. 특히나 아파트처럼 집합주택인 경우 무리한 구조 변경을 지양하는 편인데 생활의 편의를 위한 과도한 공사가 건물의 생명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방과 안방 화장실은 리폼을 하고 집주인이 가지고 있던 가구를 최대한 살려 쓴 점(심지어 리모델링 공사 후 안 어울리는 가구를 스타일리스트가 직접 핸드 페인팅하기도 했다), 아트 월이나 포인트 벽지 등 뭔가 덧붙여서 모양을 내기보다 선과 면을 이용해 스타일을 잡은 것도 로하스적인 맥락이다. 다용도실, 현관 등 바깥으로 나가는 문 위에는 창을 달아 햇살이 들어오도록 디자인하고, 벽체의 모서리는 각지지 않게 처리, 벽지나 페인팅 대신 회벽 작업을 했는데 손맛 나는 거친 느낌이 아니라 판판하고 매끈하게 마감해서 따뜻한 느낌이 나면서도 모던하다.
그녀는 합판에 래핑을 하기보다 나무를 그대로 살려 시공하고 친환경 페인트와 도료를 썼는데, 이런 선택이 초기 공사 비용은 들지만 길게 보면 합리적이고 건강한 소비라고 말한다. 오래 쓸수록 점점 아늑한 ‘내 집’이 되기 때문이다. 매끈한 회벽은 물걸레질을 마음껏 할 수 있고, 안방 화장실 한쪽 벽은 산호석을 붙여 습도 조절이 되고, 거실 테라스 한편에는 벽돌 기둥 장식장을 쌓았는데 무광으로 코팅해 돌가루가 날리지 않는다. 건강한 생활을 위해 신경 쓴 부분이다.
거실에 놓인 소파는 헬렌 K가 디자인한 것. 모듈형이라 배치를 달리할 수 있다. 거실 조명은 9개의 도시락 등을 조르르 배치하고 확장면에는 동그란 도르래가 달린 드롭 등을 걸어 재미를 주었다.기획 이나래 | 포토그래퍼 김덕창 | 레몬트리
생활 소품, 전등의 색감까지 신경 쓰는 라이프 스타일리스트
이 집에는 전등이나 벽에 걸린 후크, 창문 손잡이, 수도꼭지 등 마치 일본 빈티지 카페에서 본 듯한 물건들이 많았는데, 실제로 일본과 홍콩에서 공수(?)해 온 것이라고 한다. 알고 보니 헬렌 K는 일본과 런던에서도 인테리어 및 스타일링 작업을 해왔기에 해외 소품 구입도 수월했던 것.
재미있는 점은 완제품을 덜렁 들고 오기도 하지만 ‘갓은 국내에서, 도르래와 소켓은 일본에서, 부속품은 국산을 구입해 컬러 바꿔 열도장’ 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의 것들을 각각 사서 조합해 완성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촬영을 할 때도 “여기에 패브릭이 한 장 걸리면 좋지 않을까요?” 하는 식으로 이미지의 완성미를 위한 조언을 덧붙이곤 했는데, 집을 고친 후 마무리할 때도 벽에 걸 후크, 티포트, 행잉을 위한 S자 고리 등 아주 소소한 생활 소품까지 체크하고 구비해주곤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집의 안방, 아이방, 거실 등에 모두 같은 정사각형 등(일명 ‘도시락 등’)을 9개·4개씩으로 개수만 달리해 달았는데, 그 안에 들어가는 전구는 공간마다 분위기를 고려해 형광등 컬러와 백열등 컬러의 삼파장 등을 다른 비율로 섞어 끼웠다고 해서 다소 놀랐다.
2 3학년 딸아이 방의 벽은 ‘맑은 하늘’색이다. 플립 문과 격자창 너머로 아이 아지트가 숨어 있다.
3 거실 화장실. 건식 욕실이 아니지만 친환경 방수 처리를 한 덕분에 집 분위기에 어울리는 원목 수납장과 원목 프레임 거울을 둘 수 있었다. 수전, 수납함 등도 스타일리스트가 직접 골라온 물건.기획 이나래 | 포토그래퍼 김덕창 | 레몬트리
복도 공간을 살려서, 오픈 라이브러리
집주인이 이사 올 때 가장 큰 골칫거리가 아이들 책 수납이었다는데 기자가 이 집을 구경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공간이 그 문제를 해결한 오픈형 서재다. 현관 입구에 있던 방의 문을 떼어내고 방 옆의 벽장을 헐어낸 후 내력벽을 그대로 살렸다. 방과 기둥처럼 남은 내력벽, 중문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복도 공간 양옆으로 책을 수납했다. 사진에 보이는 날개벽 앞뒤로는 폭 10cm 정도의 ‘진열 책꽂이’를 시공해서 공간 활용도를 높이면서 아이들에게 책 보는 즐거움을 선물했다(실제로 아이들은 책의 표지가 보이도록 전시해두면 더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날개벽 뒤쪽에는 천장까지, 앞면은 책꽂이를 허리 높이까지만 시공해 복도 공간이 갑갑해 보이지 않는다. 이 진열 책꽂이는 전면에 철심을 한 줄 끼워 책을 수납하도록 디자인했는데 헬렌 K는 이 철심을 길이에 맞춰 자른 후 혹시나 빠져서 위험할 경우를 대비해 보이지 않는 부분인 잘라진 양끝 부분을 연마해서 시공했다고 한다.
2 현관 중문에서 복도까지 이어지는 서재는 오픈된 공간이라 그런지 남매의 단골 놀이터가 되곤 한다.기획 이나래 | 포토그래퍼 김덕창 | 레몬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