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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불교 토대를 닦으며 한국불교 국제화를 구상했던
법안스님
글/김형근(본지 발행인)
법안스님이 이끄는 원각사 활동은 초기 뉴욕불교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뉴욕불교의 중심지였던 원각사는 법안스님의 병환으로 약 15년 이상을 구심점을 잃고 방황하였다. 그리하여 뜻있는 불교인들의 안탑깝게 하던 원각사는 2004년 구룡사 정우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활기를 띄고 있다. 앞으로 원각사가 미동부 중심사찰로 부상하여 법안스님이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를 기대해본다. 이 글은 뉴욕 원각사에서의 법안스님의 활동을 중심으로 정리한 글이다.
공부하러 미국에 온 법안스님
법안스님은 1956년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이해 8월 직지사에서 전관응 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하였다. 이후 조계종단에서 역경위원, 교육위원, 조계종 교무부장, 중앙종회의원, 학교법인 동국학원 상무이사, 한국종교협의회 이사, 대법원사법연수원강사. 경찰대학강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1972년 3월부터 동국대학교 부총장을 1년 6개월간 역임하였다. 한국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법안스님은 1973년 3월 시라큐스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인 홀이라는 개신교 목사의 초청으로 왔다. 당시 이 학교에는 동국대학교 출신 박창조라는 사람이 공부하고 있어 이 사람의 주선으로 홀 교수가 법안스님을 초청한 것이다. 법안스님은 공부하러 미국에 왔지만 당시 미주한국불교계는 이러한 경력의 법안스님을 단순히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민바람이 불어 매일 같이 미국으로 이민 온 불교신자들은 절을 찾아가 미국생활 정착에 필요한 도움을 받고 싶었고 또 말이 통하는 한국사람들을 만나 불안한 마음을 달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뉴욕에는 이름있는 절도 상주하는 스님도 없었다. 이러한 여건은 당시 하바드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영어공부에 전념하던 법안스님을 뉴욕으로 오게 만든 것이다. 스님에 의하면 동국대학교 동문들의 환영회 모임과 그외 여러 초청모임 때문에 뉴욕에 다니다가 뉴욕지역 불교신자들과 접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는 하바드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스님을 찾아와 뉴욕 원각사로 와 달라고 사정을 하였다고 한다.
뉴욕 원각사에서 뉴욕불교 포교 시작
시라큐스대학교에서 몇 달 공부하던 법안스님은 학교를 하버드대학교로 옮기면서 이해 5월 20일 경에는 숭산스님이 자리 잡은 프로비덴스로 거처를 옮겼다. 가을학기 부터는 하바드대학교 신학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영어공부를 하였다. 이해 말부터 원각사 신도들의 부탁으로 보스톤에서 뉴욕으로 매달 2번씩 다니면서 설법을 하였다. 그리고 1975년 부처님 오신 날을 기하여 맨하탄 법당으로 옮기면서 법안스님도 이곳에서 원각사 부주지로 본격적인 뉴욕생활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법안스님은 뉴욕불교의 토대를 닦는 작업을 차근 차근 하면서 법안스님과 함께 뉴욕의 한국불교의 터전을 닦은 뉴욕주립대 박성배 교수, 당시 유학생이던 강건기교수(현 전북대학교 교수), 조일환(한미불교진흥재단 이사장), 원각사 초대회장 이순배, 김태석, 고광재, 곽종진, 우종묵, 박종성, 최무직, 윤호헌, 최종일, 송희상, 이경식, 현 원각사 회장 이태웅 거사 등과 하보살, 이대광명, 한국부인회 이강혜, 양미자, 뉴욕문단의 중심적인 인물인 이계향 보살 등, 뉴욕불교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스님은 또 이 해에 창립된 동국대학교동창회에 지도법사란 직책으로 뉴욕지역 동국대학교 동문들과 자주 만나면서 이들과 교분을 쌓고 이들의 지원도 받게 된다. 법안스님은 이 동문회를 통해 뉴욕지역 동문들 뿐만 아니라 디트로이트 이태근 거사등을 만나 이들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법안스님은 1976년 8월에는 원각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이해 부처님 오신날 행사가 끝나고 당시 주지 직책이던 숭산스님이 법안스님에게 주지직을 인계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당시 숭산스님은 프로비덴스, 시카고, L.A.등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원각사에 머무르는 시간은 많지 않아 실제로 1975년부터 원각사는 법안스님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주지 취임 전 부터 법안스님은 원각사 자체 법당 마련을 위해 모금운동을 가졌는데 1976년에는 법안스님이 직접 참가하지 못한 서울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1977년에는 뉴욕전시회를 가졌다. 이 전시회와 절에서 모금한 돈을 가지고 1978년 잭슨하이츠에 있는 건물을 구입하여 자체 건물을 소유하게 되었다. 법안스님은 이렇게 뉴욕에서 아무런 연고와 후원세력이 없는 과정에서 붓글씨에 의지하여 맨손으로 절 건립을 하였던 것이다. 이런 대작불사를 추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뉴욕대학교에 등록하여 공부를 하고 정신과 의학들의 주축인 한길회에서 매월 한번씩 3년간 선불교강좌를 하였다. 이외에도 요청이 있으면 한국인 청년들에게 반야심경등을 불교강좌를 하면서 불교의 보편성을 확대시키는 일로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보냈다.
스님의 이러한 노력으로 뉴욕 원각사와 필라원각사를 건립 하였고 뉴욕 원각사가 미동부지역의 중심사찰로 자리잡게 되었다. 법안스님의 이러한 활동으로 원각사의 사세가 강했기 때문에 법안스님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미국에서 사찰 개원하던 스님들은 대부분 뉴욕 이외의 다른 지역을 택했다.
뉴욕불교 중심지 원각사 건립
원각사는 뉴욕지역에 일찍 이민온 최명심행 보살등이 중심이 되어 1969년부터 퀸즈에서 가정법회 형식으로 불교신앙을 이어오다가 숭산스님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숭산스님의 소개로 숭산스님의 제자 구윤각 스님을 일본에서 초청하여 1974년 8월 정식 사찰로 출범하였다. 구윤각 스님을 주지스님으로 모시고 맨하탄 42가 부근의 빌딩을 세를 내어 법회를 하다가 구윤각스님이 일본으로 돌아가자 숭산스님이 주지를 잠시 맡았다. 그러나 숭산스님은 미주 여러 지역을 다녀기 때문에 1975년 부처님 오산 날 이후 법안스님이 부주지를 거쳐 1976년부터 주지를 맡았던 것이다. 당시 원각사 법당은 자체 소유 건물이 아니고 매월 세를 내는 상태였다. 법안스님은 부주지 시절부터 원각사 자체 건물을 구입하기 위하여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붓글씨 공부를 하여 서예의 달인이라는 별명의 있는 법안스님의 서예실력은 원각사 법당마련에 큰 힘이 되었다. 법안스님은 원각사 불사를 위한 서예전을 1976년 서울과 1977년 뉴욕에서 가졌다. 서울전시회는 법안스님이 참석하지 못했지만 성공적으로 끝났다. 법안스님이 몸은 비롯 뉴욕에 있지만 서울에는 불교계의 황진경스님을 비롯한 많은 스님과 쌍용그룹의 김미희보살 등 여러 사람들이 법안스님과 돈독한 인연을 유지하고 있었다. 뉴욕에서도 물론 성공적이었다. 이후에도 법안스님은 뉴욕에서 몇 차례 전시회를 가졌고 시카고 불타사에서도 전시회를 가졌다. 법안스님은 뉴욕원각사 뿐만 아니라 필라델피아 원각사 건립을 위하여도 전시회를 가졌는데 필라델피아 인터네셜날 하우스에서 1980년 건립기금 서예전을 하여 비용을 제외한 15만 달러를 모금하였다. 필라 원각사에서는 이 돈으로 현 필라원각사 건물의 다운페이를 하였다.
이렇게 한인사회를 대상으로 하여 전시회를 통한 기금을 모으고 또 원각사에서도 기금을 모아 1978년 퀸즈의 잭슨핫이에 건물을 구입하여 이전하였다. 원각사가 자체 건물을 갖는 순간이었다. 이후 1981년, 1982년, 서예 전시회를 열어 모금한 돈과 사용하던 잭슨핫이 건물 매각 대금을 가지고 1982년 맨하탄 17가 (130W.17St)에 건물을 구입하였다. 이 맨하탄 17가 시기에 한국불교계의 종정을 역임한 고암스님, 서옹스님과 인환스님, 현호스님, 수안스님을 비롯한 미국을 방문한 많은 스님들과 불교계 인사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스님은 원각사를 방문하는 많은 스님들에게 설법을 하도록 하여 신도들에게 다양한 설법을 듣도록 하였다. 법안스님은 뉴욕을 방문하는 스님들 뿐만 아니라 불교와 기독교 학자, 그리고 뉴욕에서 활동중이거나 뉴욕을 방문중인 유명인사들을 계획적으로 초빙하여 정기적으로 외부초청강좌도 많이 열었다. 불교계에서는 당시 유학중인 강건기 교수, 스토니부룩대학교 박성배 교수등이 일찍부터 법안스님과 호흡을 맞추면서 원각사에서 오랜 동안 정기적으로 설법을 하였다. 박성배 교수의 경우에는 1986년 원각사가 업스테이트로 이전할 때 까지 무려 10년을 매월 한번씩 정기적으로 설법을 하였다. 외부초청강사로 온 사람들은 뉴욕시립대 김영근 교수를 비롯하여 기독교계의 변선환, 이재환, 서창원 교수등 많은 학자들이 원각사의 초청강좌로 원각사에서 강연을 하였다. 또 은사 전관응 스님도 1980년에 원각사에 와서 1년 6개월을 원각사에 주석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법안스님과 전북대학교시절 친구로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도 뉴욕에 올때마다 원각사를 방문하였다. 이러한 법안스님의 개방적인 활동은 미국에 오기 전에도 이미 서울에서 기독교계 강원룡목사와 함께 *****8888수유리 기독교 아카데미에서 함께 종교간의 대화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7가 맨하탄 원각사는 이 무렵 원각사에는 법안스님과 혜관스님을 비롯하여 본국에서 2년전 새만금공사를 중단을 요구하며 삼보일배로 유명한 수경스님, 관성스님, 진오스님 등 4-5명의 스님들이 있었다. 일요법회에도 법당이 비좁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왔다. 20여년전인 당시에 매주 법회에 평균 120여명이 참석하였고 부처님 오신 날은 물론이고 입춘, 백중, 동지때면 법당이 비좁았다. 부처님 오신 날은 평균 600내지 800 여명이 참석하여 매번 행사 때 마다 큰 문제였다. 이 숫자는 미주한국불교계의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행사였다. 이리하여 법안스님은 원각사 공간부족, 신도들의 주차문제, 부처님 오신 날 행사 때 마다 장소를 빌려야 하는 문제 등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해결하고 불교대학교 건립등을 추진하기 위해 현재의 원각사로 1986년 9월 이전을 단행하였다.
아래의 글은 1989년 12월호 본지와 인터뷰때 스님의 말을 옮긴 것이다.
“이곳 세리스버리밀즈〈Salisbury Mills〉로 옮기게 된 동기라면 첫째 1,400세대 5,000여명으로 늘어난 신도들의 편의를 위하고자 함이었지요. 일례를 들어 대도시 뉴욕이라지만 역시 좁은 맨해튼인지라 자동차 주차만 하더라도 상당한 불편을 겪어야 했고, 둘째 이유는 이제 2,000년대를 바라보면서 우리 미주한국불교도 정착과 포교의 시기를 지나서 자체의 내실과 한국불교의 국제화를 위한 기초를 닦아야 할 시기라고 믿기 때문이었어요. 나 개인의 소망일 뿐만 아니라 많은 미국의 불자들의 염원이기도 한데 국제규모의 불교대학과 자질 있는 불교인들을 양성할 수 있는 본격적인 수도장을 건립하여 한국불교를 세계화 할 수 있는 토대를 닦고자 230에이커에 이르는 이곳으로 사찰을 옮기게 된 것이지. 이는 참 원대한 불사가 될 터인데 원각사 주지인 나 자신의 일대에서 성취될 일만은 아니고 세대를 계속하여 추진되어야 할 모든 미주불자들의 종교적 과업이라 믿고 싶소.”
248에이커의 원각사는 야구장, 농구장, 정구장, 배구장 등의 시설과 수십개의 방갈로를 갖춘 캠프장이었다. 이곳은 유태인들이 어린이들의 여름 수련장으로 이용하던 곳을 법안스님의 한국불교의 미주전법 중심지로 생각하고 구입한 것이다. 법안스님은 실내농구장 겸 부엌을 개조하여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맨하탄에서 차로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의 원각사는 약 30만 평에 달하는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데 이는 미주한국불교계의 큰 자산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법안스님의 불교강좌와 서예지도
1960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국 이민으로 대부분의 미국에 이민 온 이미자들은 절에 다니는 불교신자들 조차도 불교교리에 대하여 잘 몰랐다. 이들은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불교는 미신’,‘불교는 우상숭배종교’라는 기독교계의 일방적인 공격과 비방만을 들을 수 있었다. 불교서적도 부족한 상태에서 법안스님은 불교교리강좌와 한국문화원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기고 등으로 불교의 대중성 확보에 나섰다. 법안스님은 1977년부터 롱아일랜드에서 의사들의 모임인 한길회에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매월 한차례씩 선불교에 관한 강좌를 하였다. 이외에도 일반인들을 위한 반야심경을 비롯한 불교경전 강의를 하였다. 그리고 1986년 현재의 원각사에 이전한 후에는 토요일에 ‘보조국사의 수심결’등을 강의하였다. 이러한 법안스님의 노력은 불교인들은 물론이고 불교와 동양사상에 목말라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단비같은 역할을 하였다. 스님은 이외에도 3.1절에는 뉴욕의 한인대학생들의 초청에 응하여 만해스님 사상 강연회도 종종 하였다. 이러한 강의에 힘입어 한문에 밝고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 등에도 깊은 이해가 있는 법안스님의 명성은 뉴욕한인사회에서 나날이 높아져 갔고 불교 포교에 큰 역할을 하였다. 스님의 이러한 불교강좌는 필라델피아로 확장되었다. 뉴욕에서 스님의 불교강좌를 듣던 치과의사 김종규씨 부부가 필라델피아로 이사하면서 스님을 초청하여 필라델피아 한인들을 상대로 불교강좌를 시작한 것이다. 매월 한번 혹은 두차례씩 기차로 방문하여 필라델피아 신도 집을 순회하면서 하다가 나중에는 인터내셜널 하우스에서 가진 법안 스님의 강좌는 필라델피아 불교인들의 불심을 움직여 1980년 사찰건립을 위한 전시회를 하였고 이어 1981년5월 12일 개원을 하였다.
법안스님은 불교강좌를 불교포교의 중심축으로 삼았지만 이외에도 서예 실력은 이미 뉴욕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스님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으로부터 서예지도를 받았다고 하는데 뉴욕에서는 매년 초에 각 신문사로부터 신년 휘호를 부탁을 받았다. 현 뉴욕한인회 간판도 법안스님의 글씨이다. 뉴욕주립대 스토니부룩 캠퍼스 한국학과 사무실을 비롯한 뉴욕 시내의 여러 변호사, 회계사 사무실등에 법안스님의 작품이 많이 걸려있다. 뉴욕뿐만 아니라 전미주의 불교신자들 가정이나 사찰등에서 스님의 글씨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스님은 이러한 탁월한 서예실력으로 서예지도를 하면서 뉴욕한인사회에 원각사의 문턱을 낮췄다. 스님은 잭슨하이츠로 법당을 옮기면서 매주 토요일 서예강좌를 열었다. 이 서예강좌에는 서예에 관심 있는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미국인들도 참가하여 스님으로부터 서예를 지도받았다.
법안스님의 학교공부와 대학에서 선불교 강의와 기타 활동
법안스님은 1975년도에 뉴욕으로 옮기면서 뉴욕대학교에 등록하여 계속 학업을 시작하였다. 1978년도에는 석사학위를 받고 이어 계속 박사과정에 등록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법안스님은 학업과 원각사 일을 동시에 하기가 버거워 원각사의 많은 일을 1979년 원각사에 온 사제 혜관스님이 총무로 있으면서 법안스님을 보좌하였다. 법안스님은 1988년 뉴욕대학교에서 ‘원효의 화쟁사상의 연구- Wonhyo's Theory of Harmonization'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님의 학업에는 한국의 김미희 보살등이 재정적인 도움을 많이 주었다고 한다.
법안스님은 박사과정에 있으면서 1981년 2월부터 1986년 6월까지 New School University에서 선학강좌를 하였다. 그리고 원각사가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면서 이 자리를 스리랑카 피아티샤 스님에게 인계하였다. 스님은 처음 강좌를 시작할 때에는 영어 때문에 아주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님의 강좌를 듣는 학생들의 숫자는 증가하였다.
법안스님은 이렇게 사찰운영과 공부 그리고 강의와 서예지도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한번도 서부지역을 방문한 적이 없다. L.A의 관음사와 고려사, 반야사 등 여러 사찰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법안스님을 초청하였지만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법안스님은 미주최대사찰을 운영하면서 박성배 교수가 주도하는 한국학과 설립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하였다. 글로서 한국학과 필요성을 역설하고 한국학과 설립을 위한 기금모금 행사에 법안스님 자신은 물론 신도들의 동참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십여년간 계속된 모금행사 티켓은 한 사람당 $100였는데 때로는 원각사에서 단체로 가는 사람들 때문에 버스가 이용되기도 하였다. 한번하고 끝난 것도 아니고 쉬을 것 같은 이러한 지원은 사실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박성배교수는 이러한 사실을 잘알기 때문에 법안스님의 이러한 지원을 두고 두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법안스님의 미완의 계획
법안스님은 현재의 원각사 부지로 이전하면서 한국 본사규모의 사찰건립과 대학을 설립할 계획이었다. 사찰 건립은 법안스님이 맡고 대학건립에 대하여는 일본에서 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일엽스님의 아들 김태신 화백(현 일당스님)과 많은 상의를 하였다고 일당스님은 자서전에다 적고 있다. 자서전에 의하면 법안스님은 김 화백에게 동양대학 건립을 권유했다고 한다. 대학건립은 당시로서는 너무 큰 프로젝트여서 원각사 신자들은 이에 소요되는 엄청난 재원조달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단지 법안스님이 추진하는 것을 어떻게 진행되나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미주한국불교계에서는 대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미국에 불교대학을 설립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한국불교의 국제적 위상을 논하고 불교대학 건립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20년전에 이 일에 착수하였던 법안스님의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는 티벳, 일본, 대만 불교계가 세운 불교대학들이 있고 이 대학들은 각국 나라의 포교와 인재양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김 화백은 이당 김은호 화백의 문하에 입문하였으며 동경제국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한 사람으로 일본 화단에서 이름이 높은 화가였다. 김 화백은 원각사 불사를 위해 지금은 없어진 원각사 청년회관에서 불사기금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법안스님은 일본의 전직 수상들과도 인연이 있는 김 화백과 동양대학 건립에 관해 만나 협의하면서 김화백에게 출가를 권했다. 이런 인연으로 김태신 화백은 70살 가까이 되어 법안스님의 권유로 1988년 7월에 관응큰스님으로 부터 뉴욕 원각사에서 일당이란 법명을 받고 늦은 나이에 출가를 했다. 일당스님은 80이 넘은 현재도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을 오가며 화가로서 스님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법안스님의 이러한 계획은 그러나 스님이 1988년 봄에 고혈압으로 쓰러지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법안스님의 와병은 뉴욕불교계와 미주불교계에 많은 변화를 몰고왔다. 뉴욕에는 1988년 불국사를 시작으로 상운사, 1989년 한마음선원 등 수 많은 절들이 생겨나 법안스님의 병환으로 생긴 공백을 메우면서 불교판도가 새롭게 재편되었다. 그리고 동부의 뉴욕과 서부의 L.A.로 평평한 균형을 이루던 한국불교의 중심 축이 급격히 L.A.로 기울어 이후 1991년 남북해외동포합동법회등 큰규모의 행사는 L.A.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법안스님은 주지시절 신도회장들과 갈등도 있었지만 뉴욕불교의 토대를 닦으면서 현재의 원각사 부지를 마련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또 비록 병으로 중단되었지만 대학의 건설과 인재양성, 한국불교의 국제화를 위한 스님의 큰 그림을 미주한국불교계는 힘을 모아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미주현대불교 200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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