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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님의 노고에 박수과 감사를 드리며
여기 내놓는 책은,
진실Truth 자체의 핵심과 본질을 찾아내는 일에,
그리고 진실이 어떻게 인지되고, 표현되고, 정의될 수 있는지를 발견하는 일에 바쳐진
한 생의 결과입니다.
그러한 생의 귀결로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수단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함축하는 바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의 정수가 갖는 본성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그 기법을 시간이나 공간상으로 어디에 있는 무엇에 대해서든
무제한으로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인류는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나침반을 갖지 않고 바다에 나간 선원과 같았습니다. 괴로움이라는 면에서 치른 비용은 엄청났지요. 인간 조건에 대한 연민은, 인간 마음 자체의 내재적 한계가 낳은 엄청난 귀결에 대한 각성에서 우러납니다.
그러므로
여기 내놓는 이 책은,
거짓이 진실로 오인되도록 만든,
인간 마음의 심각한 결함을 극복하는 일에 바쳐집니다.
연구에 따르면,
진실은 사실상 절대 상수에 대한
상대적 변수입니다.
진실의 유효성 정도는,
전 역사에서 갖가지로 표현되는 모든 생명을 포함하는,
어떤 측정 가능한 척도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축적된 데이터는
그것이 드러내고 암시하는 바에 있어서
압도적이었지요.
이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는 연구자들은
난생 처음으로 현미경을 가진 아이들처럼 흥분해서
그 모든 인간 경험을 샅샅이 살펴보았습니다.
축적된 데이터 무더기는
상당히 놀라운 정보를 드러내 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외관은 본질과 일치하지는 않는 다는 것과,
마음은 기본적으로 순진하며 쉽게 속는다는 것이
명약관화해졌습니다.
따라서
어떤 정보는 독자들의 마음속에 고이 간직된 환상에 대해,
심란하고 대결적인 것이 될 수 있음을 미리 경고해 둡니다.
연구 작업은 책, 비디오, 워크숍, 음성 녹음, 청중이 참여하는 공개강좌의 순서로 점진적으로 제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번역되었고, 14개 국어로 전 세계에서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지요. 게다가, 책으로 출간되기 전에 세계 각지에서 활동 중인 수많은 스터디 그룹들에게 제출되었고, 전문가 심사를 받았습니다. 막대한 양의 데이터가, 정보의 폭넓은 스펙트럼 전체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기 위해, 순서대로 조직되어 제출되었습니다.
주제 또한,
의도에 대한 앎을 촉진하도록 맥락화되었지요.
표면적 모순은 성찰과 더불어 해소되고,
많은 정보가 그 자체만으로 변형력을 갖습니다.
『의식혁명』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 담긴 자료를 읽는 것은
독자 의식 수준의 향상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므로,
처음 접할 때는 대결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더욱 큰 앎과 확장된 식별 능력으로 해소되지요.
요즘 우리 사회는 삶의 거의 모든 측면에 대해 과도하게 정치적이라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때문에 저자는 가치와 중요성을, 임상적으로 도출된 측정 가능한 의식 수준들에 걸맞게,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 출현에 관해 묘사한 적이 있는 주관적으로 경험된 의식 상태(Hawkins, 1995, 2001, 2003)와 일치하도록 부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쓰는 데도 앞으로 설명하려는 연구 기법을 적용했습니다. 중요한 진술에 대해서는 그것의 측정 수준을 그때그때 언급했으며, 각 장의 진실 수준을 첨부했습니다. (부록 A를 볼 것)
머리말
이제 제출하려는 자료는,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새로운 연구 수단을 매개로
인간 경험과 생명 진화 전체를 개관한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그것은
객관적이라고 추정되는 보통의 세계(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찰 결과와 이해를 포함할 뿐 아니라,
독특하게도, 연구 분야에서는
최초로 관찰을 바로 관찰 자체의 수단과 동시에 상호 관련짓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것은 비이원성의 단일성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상당한 변형력을 갖는 과정을 수단으로 하여,
오류의 해묵은 주요 근원(이원성)을 우회하고 초월합니다.
진실의 수준들에 대한 측정은
엑스레이, 현미경, 망원경을 통한 발견처럼
놀랍기 짝이 없는 일이 많았으며,
이전에는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접근할 수 없었던,
놀랍게 광활한 조사 영역들을 활짝열었습니다.
적절한 주제의 범위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팽창했고,
결국 그러한 측정을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다는 각성이 일어났지요.
앞으로의 발견이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었던 반면,
이 경우에는 오히려 그것이 압도적으로 느껴져서
방향 재설정과 의사 결정에 수년이 걸렸습니다.
말하자면,
‘그 이해는 설명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리고 마지 막으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기원은,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급격하고 주관적인 의식 변화의 귀결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시작된 그 변화는,
1965년, 경험함의 핵심을 재맥락화시킨
완전히 새로운 양식의 인식을 드러냈지요.
전환은 기본적으로,
내용으로부터 앎의 중심 초점으로서의 맥락으로 옮겨간 것이었는데,
그런 다음 그 맥락으로부터 모든 의미가 변형되게 되었습니다.
(책 말미의 ‘저자에 대하여’를 볼 것)
목격함과 이해는,
‘사적인 자기’라는 사적이거나 한정된 자리에 서 나오는 대신
이제 전체(장)의 관점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연구 기법 또한 자연 발생적으로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경험적 정보 처리라는,
심지어 경험함 자체라는 기본적 도구는 선형적인 특수하고 한정된 것에서,
자율적 앎과 의식이라는
비선형적이고 비개인적인 성질로 이동했습니다.
그 전환과 그것이 암시하는 가능성들로 인해, 대형 정신과 병원을 그만두고 20년간 관상을 하며 지낼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995년에 출간된 『의식혁명』의 선구자격인 ‘인간 의식 수준의 양질 분석 및 측정’에서 보고한 기본적 연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뒤에, 관심과 조사와 영감의 완전히 새로운 문화로 묘사하는 것이 적절할 만한 것을 형성했지요. 그러한 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독립적 학습 모임의 자연 발생적 출현을 낳았습니다.
공적 영역에 관한
광범위한 자료 수집이 이루어졌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의 의식 수준을 측정하는 새로운 기법을 가지고
공적 영역에서 실험했습니다.
확증과 피드백의 광범위한 네트워크가 발달했는데,
그러한 발달은 공개 방청으로 진행된,
여러 차례의 정식 강연과 워크숍을 통한 정보의 공적 보급으로 가속되었습니다.
강연과 워크숍에는 청중들이 참여하는 정규 토론과 전통적인 질의응답 순서가 들어 있었고, 그것은 녹음되었습니다.
이 책에 담긴 내용에 대한 공개 설명회가, 동양(한국)과 유럽(옥스퍼드 유니언)에서는 물론 미국 전역에서 열렸습니다. 그것은 모두 녹음되고 녹화되었지요. 이렇게 해서, 정보는 현재 활동 중인 수준 높은 토론 모임들은 물론, 수천 명의 참관인에 의한 전문가 심사를 받았습니다.
일부 미가공 데이터는
개인적으로 기대하는 바들과는 어긋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예견되는 반응입니다.
진짜 의의가 있는 모든 새로운 정보의 발견은
항상 의심과 의혹을 불러일으켰지요.
그것은 예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 신념과 충돌하는 데이터를 가장 잘 처리하는 방법은,
그런 정보를 자동적으로 에고 항의나 분개까지 불러일으키는 ‘틀린 것’으로 보기보다는,
‘가능한 대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묘하게도, 항의는 정곡을 찔렀음을 확증해 주는 일이 많습니다.
인간 마음은,
그 자신을 ‘물론’ 진실에 바쳤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마음이 정말 구하는 것은,
자신이 이미 믿고 있는 바에 대한 확증입니다.
에고는
선천적으로 자부심이 강하며,
자신의 신념 대부분이 지각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게 드러나는 걸
반기지 않습니다.
연구 분석에 따르면,
진실 자체를 위해 정말 진실에 관심을 갖는 대중은
사실상 35퍼센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책을 통해 내놓는 발견들과 책 자체는
사적인 근원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인간 의식의 진보, 즉 전체적 분위기의 귀결입니다.
일반적으로, 측정된 숫자는
5를 기준으로 반올림한 것입니다.
즉, 63은 65로, 242는 240으로 표기하는 식이지요.
진짜 의의가 있는 것은,
어떤 의식 수준을 의식 척도 전체와 상대하여
위치시키는 일입니다.
보다 정확한 수치는, 상세한 연구에 들어갔을 때 한해 의의를 갖습니다.
구체적 수치는 조사자들과 모임들 간에 편차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러나 수치들에는 고유한 일관성이 있으며, 편차는 조사 기법의 개인차로 인한 것입니다. (부록 C에서 설명) 이는 기압계를 여러 다른 고도에 적용하는 일에 비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 접근법의 주된 취지는, 진실을 거짓과, 즉 진실의 부재와 구별하는 법을 아는 것이지요.
신뢰도는
일차적으로 질문자의 온전성 및 질문하는 의도에 달려 있습니다.
진실 자체에 대한 헌신이 진실의 발견에 이르는 빠른 길입니다.
극복해야 할 첫 번째 의심의 장벽은,
어떤 것에 관해서든 묻기만 하면
몇 초 만에 쉽사리 진실을 알아낼 수 있다는,
놀라운 발견에 관한 것입니다.
이 발견에 대한 정상적 반응은 불신이고,
뒤따라 패러다임 충격이 일어나는데,
하지만 그 다음에는 호기심이 득세합니다.
전 우주는
새로운 이해 수준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러한 이해에서 연민과 지혜가 일어납니다.
이 책의 목적은
장기적이고, 이 속의 정보는 성찰을 통해
동화하는 것이 가장 낫습니다.
성찰은
이해를 불러내지요.
일어나는 숱한 의심과 질문에 대해서는
이미 폭넓게 고찰, 분류, 토론한 바 있고,
그리고 그것들은 집단적 의도로 말미암아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가 정말로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면,
진실을 발견하는 수단이 부상하여,
인간 발견의 레이더망에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문
요즘 들어 신뢰성과 온전성의 만연한 위기가
모든 수준의 사회조직을
갈가리 찢고 있습니다.
사회가 오랜 세월 의지해 온,
온전하고 신뢰할 만한 기관과 유서 깊은 보루들이 정
치적으로 공격받고 있으며,
어떤 것들은 거의 매일 같이 불명예와 스캔들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정부와 세계 지도자들뿐 아니라, 지배적 정치 이데올로기 전체, 덩치 큰 종교 조직, 정부 기관, 연방 관료, 대학, 학교 제도, 거대 기업, 금융기관, 주요 신문, 뉴스 채널, 일반 대중매체도 있습니다.
사법제도조차 논쟁적인 정치 곡예가 되었는데,
배심원들이 ‘성명서 발표’를 위해
거액의 배상금을 물리는 동안,
법관들은 법관석에서 입법 활동을 합니다.
시민권을 보호하기 위해 건립된 기관들이
이제는 시민권에 대한 최악의 적으로 보이고,
과거에 자유를 상징했던 기관들이 이제는
자유를 파괴하는 일에 골몰하는 듯이 보입니다.
형사 법원에서는, 조심스럽게 선정된 배심원들이 고의적인 그릇된 주장으로 오도당하고, 본질과 무관한 허구와 연기에 의해 조작됩니다. 비록 역사적으로 진실의 왜곡이 정치 영역의 일부이긴 했지만, 정치는 합리적 토론과 논쟁에서 개인에 대한 비방, 노골적 허위, 철저한 기만, 발뺌으로 퇴보했습니다.
근현대사회 이전에, 국가와 문화는 물론이고 모든 문명의 운명을 일차적으로 결정한 것은, 오직 야만적인 낮은 힘force에만 의존하는 적들의 정복이었습니다. 종교 조직조차도 낮은 힘에 대한 똑같은 의존을 채택했는데(현재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그러고 있듯이), 흔히 피정복자들에게는 전향을 할 것인지 아니면 즉결 처분을 당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졌습니다. 낮은 힘은 그 당시에 사회를 다스리는 우세한 지배 원리였으며, 신정으로서의 종교는 무시무시한 협박으로 뒷받침되는, 강압과 낮은 힘에 대한 의존을 영속시켰지요.
요즘의 테러리즘과 열광적으로 선전되는 세계 평화에 대한 협박으로 인해, 종교 자체는 이 시대의 대중적 관심과 담론의 초점으로 표면화되었습니다. 호전적 세계 종교의 눈에 매우 잘 띄고 불붙기 쉬운 헌신자들은, 나머지 세계에 대해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협소한 신념 체계를 따르지 않는 이들을 모두 없애려고 합니다. 그러한 극단적 위치들의 에고 중심성과 과대망상증은 지금 평화로운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주된 위협입니다. 그러한 폭력적 이데올로기의 궤변은, 서구 세계에서 순진한 변증자와 동조자의 출현을 야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또한 우상숭배자이며, 똑같이 근절돼야 마땅한 불신자(‘무쉬리쿤’), 바보, ‘쓸모 있는 멍청이(레닌의 용어)’로 비칠 뿐임을 알지 못합니다. (Forsyth, 2004; Charon, 2003)
요즘 인간 사회의 혼란을 증명하는 것은,
신뢰성과 신빙성의 입증의 확인,
해명을 요하는 근본적 쟁점들에 대한, 명료함
혹은 이해의 결핍입니다.
지금 주된 결함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인간 마음이 원천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상속받은 모든 결함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그 하나의 결함이,
인간의 모든 고뇌와 재앙의 뿌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운용상으로,
마음은 이원적입니다.
그리하여 마음은
고유한 실상이 없는, 임의적이고 가설적인 위치성에 기초한,
분리주의적 정신 작용을 형성합니다.
이렇듯 설계상으로, 마음은 데카르트가 지적한 것처럼 레스 코기탄스(또한 코기탄스)와 레스 엑스테르나(즉, 세계의 표면적 외관에 대한 정신 작용 대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구별하지 못하는 기본 결함을 안고 있습니다. 마음은 이렇듯 자신이 투사한 것을 혼동하여, 그것이 외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를 갖는다고 그릇되게 추정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상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 마음의 설계는 또한 컴퓨터에 비할 만한데,
두뇌는 그 속에 설치된 어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라도 구동할 수 있는
하드웨어입니다.
하드웨어는 설계상으로
스스로를 그릇된 정보로부터 보호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마음은
사회가 자신을 프로그래밍하는 데 이용한
그 어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라도 믿을 터인데,
이는 무구하게도 마음에는 어떠한 안전장치나 보호책도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상의 모든 위대한 영적 지도자는
이구동성으로, 인류의 기본적 결함은
상대적으로 정복하기 어려운 무지이며,
그러한 무지로부터의 회복은
영적 스승의 도움 없이는 운용상으로 불가능하다고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인간 마음은
그 타고난 구조로 말미암아 순진하고, 자신의 한계를 보지 못하며,
무구하게 잘 속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 에고의 무지와 한계의 희생자입니다.
평균적 마음은 그 내용이 대부분 오류일 뿐 아니라
(예를 들면 인터넷상의 정보를 테스트해 보면, 절반이 ‘거짓’으로 나옵니다.),
또한 자기혐오, 우울, 죄책감, 낮은 자존감, 시기, 탐욕, 갈등,
끝없는 비참함으로 스스로를 공격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이런 결함들은
그 다음에 증오, 전쟁, 폭력, 대량 학살로
세계를 향해 투사되지요.
에고는
오만한 부정으로 자신의 한계를 방어하고,
이렇게 해서 자기 자신의 희생자가 됩니다.
인간 마음은 그 자체의 타고난 구조와 설계로 인해 도움받지 않고서는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은, 놀랍기 짝이 없는 발견입니다. 이것은 16세기경에 문화적 충격을 야기한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에 견줄 만합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평균적인 마음에는 대결적이기 때문에, 궤변과 그것의 환상에서 이득을 취하는 이들은 필경, 이러한 발견을 환영하거나 반기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세계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법을 찾아내는 일에 초점을 맞추는 이들이
영적 진실을 찾는 구도자만은 아닙니다.
일반 대중은, 요즘의 공적 담화에서 어떠한 종류든 의지할 만한 신빙성을 희망하는 일의 불확실성과 무익함으로 인해, 반쯤 마비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대중의 관심은 조사단 앞에서 나오는 증언에 쏠려 있지요. 마드리드의 폭도들은 입을 모아 “우리는 진실을 원한다”고 외칩니다. 배심원들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증거를 샅샅이 살피고, 항의 집단들은 사회의 모든 면에 요란스럽게 도전합니다.
이 시대에는,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하고 명백한 질문들에 대해서조차
공통된 합의는 없습니다.
무엇을 할까요?
공공연한 적이 수천 명의 무고한 시민을 도살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범죄자를 ‘감금’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들을 그저 사회의 희생자로 보고 강박적 포식자로 거리를 활보하게 놔둬야 할까요?
명백한 테러 단체 용의자를 엄중 조사하는 것을 단순하고 상식적인 경찰 업무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그것을 시민권의 이름으로 금지해야 할까요?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습니다.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누구, 혹은 무엇일까요?
여러 세기 동안,
역사상의 가장 위대한 정신들은,
진실을 정의하는 문제와 씨름했으며,
진실이라고 소문난 표현들의 신뢰성을 결정적으로 비준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에 맞서 싸웠습니다.
『서양의 위대한 책들The Great Books of the Western World』 전집은 다 합쳐서, 지적 범위 내의 의식 수준 460으로 측정됩니다.
과학 자체(측정 수준 400대)는
진실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고
비교적 멀쩡하게 살아남았지만,
과학에는 그 자체의 내부적 의견 대립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갖는 철학적 함의는 지난 수십 년간 관심의 초점이었지요. 이는 차례로, 과학의 큰 발전은 의식 자체의 본성에 대한 더한 이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는 앎으로 이어졌습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인류 의식 수준이 점진적으로 진화하고 발전한 결과,
1970년대 후반,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진실과 거짓을 실제로 구별하는 법에 관한
결정적 발견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요.
비록 그것의 바탕에 있는 근본적인 생리적 도구는
기만적으로 단순화되어 있는 것 같아도,
그것은 망원경의 출현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새로운 발견의 우주를 활짝 열었습니다.
테스트는
보편적 의식 에너지 장의 반응을 이용하기 때문에,
시간이나 공간상으로 어디에 있는 무엇에 대해 서든,
그에 관한 진술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즉각 알아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진실에는 측정 가능한 수준들이 있다는 것과,
각각의 수준은 차례로 인간 의식을 지배한 에너지 수준들을 확인해 준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확인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는 의식의 매 수준은,
한계의 범위를 규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택지와 가능성의 범위를 규정합니다.
인간 지식의 신기원은 시작되었으며,
인류에게 큰 중요성을 갖는 결정적이고 의미심장한 정보가
이미 대량으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발견은,
갖가지로 표현되는 인간 경험의 본성을 재맥락화하는 결과를 낳았지요.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것이 갖는 함의는 심원합니다.
현대 세계는,
급속히 발전하는 과학 기술과 문화적 그리고 사회적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을,
도덕, 윤리, 종교, 영성이라는 애매모호한 것들과 통합시키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일에 직면했는데,
이는 생존, 전쟁, 경제적 변화에 대한 요구들과도
통합되어야 합니다.
이에 더해 그 자체가 논쟁의 초점이며,
온갖 곳에 침투하는 대중매체를 매개로 하는
증폭이 있습니다.
현대 세계는 물론이고 전 역사를 통틀어 빠진 요소는, 인류에게는 진실과 거짓을 참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식별하는 수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회 자체는, 자신의 수많은 표현 속에서 검증 가능한 유효성에 의해 지지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실뿐 아니라 진실의 상대적 정도를 식별하는 수단이 개발된 것은,
상당히 흥미로우며 잠재적으로 유익합니다.
이 새로운, 임상적인 ‘진실의 과학’의 제출은 따라서 인류의 진보와 괴로움의 구제에 봉헌됩니다. 이는 보통의 삶과 삶의 부침浮沈 동안에는 물론이고, 의식의 물들지 않은 순수한 표현에서, 의식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발전한 귀결입니다.
첫댓글 이 새로운, 임상적인 ‘진실의 과학’의 제출은 따라서 인류의 진보와 괴로움의 구제에 봉헌됩니다. 이는 보통의 삶과 삶의 부침浮沈 동안에는 물론이고, 의식의 물들지 않은 순수한 표현에서, 의식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발전한 귀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