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억울함이 있다면 복지선진을 지향하는 오늘날, 좀 더 생을 누렸던들 억색(臆塞)했던 전반생의 한을 몇 반이라도 풀어보고 갈 수 있었을 1,500가까운 원우(院友)들을 구북리(화장장이 있는 곳)한줌 뼛가루로 전별(餞別)했던 일, 또 하나는 1,700되는 퇴원자들이 모두들 각기 처소(處所)하여 안거생업(安居生業)하고 있을까 한가닥 불안한 마음이 앞서기도 합니다.
- 신정식 원장의 고별사(告別辭)중에서 - |
제22대 신정식(申汀植)원장의 정년
경제학자인‘갤 브레이드’는 정년(停年)을 “평생을 사회와 직장에 봉사한 대가로 얻은 소중한 강제 휴식”이라 정의했다.
그러나 소록도에서 의무관으로 5년, 원장으로 12년, 나관리협회 10년 등, 27년 성상(星霜)을 한센병 퇴치에 헌신해온 신정식 원장의 정년은 너무나 아쉬웠다.
1985년 12월 31일 망년회 정황이 없는 가운데도 신임 원장에게 물려줄 2층 원장실은 깨끗이 정리정돈되어 있었고, 한 해 달력이 마지막 입새처럼 걸려 있는 한쪽 벽에는 소록오현(小廘五賢)으로 추앙해 온 오방 최흥종(五放 崔興琮)목사를 비롯, 우리나라 최초로 나병원을 설립한 선교사「포싸이테」(HW.Forsythe,광주나병원 1909년),「메켄지」(J.N.Mackenzie) 부산나병원 1911년),「프랜처」(A.G.Fletcher 대구나병원 1913년)가 작은 연결액자에 담겨 있고 맞은편에는 고일곡(高逸谷)의「視人堂女子,愛民知女像」이란 경구(警句)가 걸려 있다.
1층 강당에서는 제22대 신정식 원장의 정년퇴임식이 거행되고 있다. 신 원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고별사를 낭독하는 동안 장내는 엄숙했다.
신정식 원장의 고별사
"1985년을 마감 지우며 저 원장도 인생의 한 획(劃)을 그으면서 섬을 떠납니다. 섬도 좋고 섬 가족들도 또한 좋아서 좀더 같이 살았으면 하는 미련한 인정에 끌리기도 했지만, 불효했던 과거를 챙기고 인자(人子)로서의 도리를 해야 할 것이라는 명제를 안겨준 참뜻에 순종 할 뿐입니다.
가향(家鄕)에 돌아간다고 무슨 효(孝)를 하겠다고 뇌까리겠습니까. 오직 90당년 노부(老父)를 곁에 모시고 있는 것만이라도 선현(先賢)이 가르친 효의 만분의 일이라도 쫒는 것이 도리라고 외람되게 생각하기 까닭입니다.
소록도가 있는 고흥땅에 태어나서 병자를 다스려야 한다는 의학을 배우면서도 김상태(金常泰)원장의 권면을 받기까지 한번도 찾을 생각을 못했던 이사람이, 민족의 한이 서린 6.25가 인연을 맺어 주어서 아름다운 섬을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섬에 다시 발을 딛어서 11년하고 10개월 되지만 시일(是日)이 호호일(好好日)이라 한번도 마음 상해본 일이 없는 태평연월(太平烟月)이었던 것을 실감케 하는 결산표를 내고 보니 직장인으로서, 또한 자연인으로서 이에 더한 보람을 찾겠습니까.
오직 억울함이 있다면 복지선진을 향하는 오늘날 좀더 생을 누렸던들 억색(臆塞)했던 전반생의 한을 몇 번이라도 풀어보고 갈수 있었을 1,500명 가까운 원우(院宇)들을 구북리(화장장 있는 곳) 한줌 뼛가루로 전별 했던 일, 또 하나는 1,700명이 되는 퇴원자들이 모두들 각기 처소(處所)하여 안거생업(安居生業)하고 있을까한 불안한 마음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들의 퇴원명목이 두, 셋으로 나뉘지만 그래도 대다수가 병이 나아서 떠난 것이니 수(壽)가 다 되어 북망(北邙)을 재촉했으나 병 고쳐 사회에서 생을 다시 찾았던 3,000이상을 욕되게 민적(民籍)에서 지워 버렸으니 한센병을 없에는데 일조(一助) 했다고 자위(自慰)를 해야 할지 자소(自笑)를 해야 할지 자못 허허(噓噓)로울 뿐입니다.
오는 해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단숨에 5층 병동을 찾게 되어 목발로 달가닥 거리면서 휘청거리는 층계를 밟지 않게 되고, 자동문이 되어서 추운 바닷바람 맞으면서 외래진찰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 그래도 우리 살림이 조금은 나아 졌다고 할 것입니다.
육신으로나 정신으로나 조금은 덜 된 점이 어찌 그들이 원했던 바이거나, 아니면 주변의 책임이겠는가. 항차 한센병이 그들과 무슨 인연이란 말인가?
하지만 지극한 인색함을 경쟁적으로 뽐내고 있는 우리네 마음가짐이 가까운 장래에 싹쓸이로 청소되지 않는다면 우리섬 가족들의 살림살이가 언제나 펴질 것입니까?
맹인들이 걸거치지 않게 출입할 수 있은 집, 목발 짚는 사람, 손가락 달아 없어진 친구들이 더 이상 상처 안 받고 살 수 있는 집, 젊은 청년들이 ‘프라이버시’ 침습 받을 염려 없는 독방, 거실과 침소가 따로 마련된 가정사, 또 이들 생활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용할 용돈, 생각하면 일모도원(日暮途溒)이랄까 망망할 뿐입니다.
하지만 90년대에 가면 소록도를 징검다리로 하여 금산까지 다리가 놓이고 그 다리가 서게 되면 어찌 섬을 그냥 지나쳐 버리겠는가. 동참 동행하는 새 세상이 올 것을 화섬(花島)의 전깃불 보듯이 확신하기에 소망을 가지고 밝은 새날 새 아침을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가족 전체에게, 또 나와 우리 모두에게 사랑을 쏟아 주신 은인에게 감사드리고, 코높은 것 개의치 않고 오셔서 천고(千苦)를 아끼지 않은 눈빛파란 외국분들을 비롯하여 200명 동료직원과 2,000여 환우들의 앞날에 영광을 빌면서 한가닥 가냘픈 기대를 금송복지(金宋福祉)기금과 직원상조회의 발전에 걸어 봅니다. 만감을 안고 갑니다.
1985년12월 31일
신정식 경배(敬拜) "
고별사가 진행 중에도 분위기는 침울하기만 했다. 잠깐 눈시울을 적시듯 했던 원장은 가벼운 미소로 이별을 표시 했다.
신정식 원장의 갑작스러운 정년은 소록도 가족 모두에게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원생 모두 원장의 연장을 의심치 않았고, 동남아 순방에서 돌아온 원장 스스로도 “주위의 권고를 핑계 삼아 3년쯤 더 앉아 있거니 하고 여유작작한 마음으로 다녀왔더니...”하며 준비 안 된 속내를 가볍게 들어 내 보이기도 했다.
신 원장에게 “할렐루야! 목사님 감사합니다”
광주에서 안과의원을 개업하고 있었던 신정식 박사가 소록도 병원 제22대 원장으로 부임하게된 것은 1974년 3월 8일 이다.
그는 1924년 이 지방 고흥출신으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나왔다. 6.25가 일어나자 제3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였고 중위로 예편 후 낙향하여 지내던 중 당시 김상태 소록도갱생원장의 권유로 인연을 맺고 근무를 하게 된 것이 소록도 의무관으로 첫 인연이 된 셈이다.
1950년 소록도 갱생원 의사 봉급이 쌀 한말과 장작 100개가 전부였다. 때로는 의사도 산에 가서 나무를 나르고, 인분(人糞)통을 지고 밭을 일구어야 했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TV가 없던 그 시절, 초저녁에 모여 입담으로 보내다가도 생리적 볼일이 생기면 꾹 참았다가 스스로의 밭에 가서 처리했다는 것은 지나간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1950년대 전후의 자화상이 너나없이 끼니해결이 전부였던 시절이 아니던가!
오전에 안과진료를 마친 후 병사 곳곳을 순회 방문하는 일이 일과였던 신 원장은 보행의 불구임에도 말 그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다 맹인 환자가 비켜서며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한다.
“나는 목사가 아니고 원장입니다”
신 원장이 차에서 내려 큰 소리로 확인 해 주어도 귀까지 어두운 환자는
“할렐루야! 목사님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의 반복이다.
교회 목사는 소록도 안에 있는 7개 교회를 목회해야 하는 바쁜 일정 때문에 노상 차를 타고 다녀야 했는데, 환우들은 신 원장이 차를 타고 매일 나타나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목사님으로 통할 정도로 깊은 신뢰감을 쌓았다.
환자들로써는 물질적 지주인 원장보다 정신적 구원이 되어주는 목사의 신뢰를 더 갖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돼지로 잃었던 명예, 돼지로 찾은 원생복지
신정식 원장은 연암축산학교를 방문 이 학교와 교섭하여 돼지 수종「랜드레이스」종돈 8마리를 직접 분양 받아와서, 이를 씨돼지 품종을 계속 계량하는 등 돼지축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장려했다.
이 무렵 귀향보고 차 내려온 신형식 국회의원이 목포삼호축산 오재영 사장에게 도움을 요청, 축산장려의 본격적인 괘도에 착수함으로 소록도 돼지축산은 날로 번창해 갔다.
계속 우수한 품종의 자돈(仔豚)을 구입하여 조합원들에게 무상으로 분양하는 등 양돈산업을 장려하자 원생들이 열심히 일했다.
그 결과 축산불황을 타계하여 많은 소득을 올렸고 이를 토대로 소록도에서 퇴원한 환우들에게도 자활정착을 조성 하는데 경제적으로 크게 기여했다.
돼지로 얻어지는 수익이 증대되고 날로 번창하여, 원장 전임자들의 '돼지사건'으로 불명예를 얻었다가 오히려 '복돼지'로 전화위복이 되었다.
‘양지회기념관’ 기공식
1974년 7월 15일과 동년 8월 15일은 소록도 역사로는 의미가 다른 한달 이었다.
7월 15일, 보사부 김원규 기획관리실장을 비롯한 관내 외 유관 관계기관장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양지회기념관(陽地會記念館) 신축기공식을 거행했다.
이 기념관은 육영수 여사가 재원환자 중 노령불구환자들의 생활이 걱정되어, 그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한 최신식건물이다.
양지회기념관 건축이 진행 중이던 동년 8월 15일, 환자들은 육영수 여사가 보내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광복 29주년 8.15경축식을 시청하고 있었다.
환자들 모두가 식장에 나온 육영수 여사를 보며 고마운 분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靑天霹靂)이란 말인가? 순식간의 아수라장이 되고 나서야 육영수 여사가 서거(逝去)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환자들은 교회와 성당에 모여 밤새도록 통성기도하며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양지회관이 준공되면 육 여사를 초청하여 성대한 기념식을 치를 것으로 기대했던 원생들이 살아생전 그 모습을 대할 길이 없어지자 아쉬움이 컸다.
11월 28일 준공식을 갖은 ‘양지회관’은 중앙운동장 옆에 위치하고 거금도가 훤히 바라보이는 양지쪽에 있다하여 명칭이 붙었다.
건물 앞에는 잔디밭을 일구고 그 곳에 공덕비를 세웠다. 이 공덕비는 원생들이 정성을 모아 건립한 것으로 원생 심전황이 지은 기념비문이 적혀있다.
“...이미 불구가 되어버린 고령자들을 위해 양지회기념관을 마련하여 안식처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 고마운 뜻과 은총을 깊이 간직 하고자 새겨 둡니다” 라는 문구를 동판에 새겼다.
공덕비 좌 ㆍ우에는 육 여사가 평소에 좋아했던 백목련 두 그루를 기념식수로 심었다. (최근에 박근혜 한나라당 전총재가 방문하여 눈물을 흘렸음은 모정의 발로가 아닐까)
최신식 시설로 된 양지회관 병동은 여러 에피소드가 많다. 화장실 수세식 좌변기가 설치되어 규격화장지가 공급되어야 함에도 배급 물품인지라 차질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지만 수세식화장실을 한번도 사용해 본 일이 없는 환자들은 신문지, 헝겁조각, 라면봉지 등 닥치는 대로 변기에 집어넣었으니 화장실 변기통이 수시로 막혔다.
병원에서는 분뇨차를 따로 배정하기도 했으나 소동은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변기사용방법을 몰라서 변기위에 쪼그리고 올라앉아서 불편한 모습으로 간신히 대변을 보다가 나뒹굴어져서 부상을 당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화장실에 가는 것이 두려워서 끼니를 굶는 ‘화장실 공포증’이 생기는 등, 원생 중에 더러는 마을로 복귀시켜 달라고 하소연을 하기까지 했다.
이런 문제들은 건강한 일반인들의 상식이 아닌, 그들의 입장에 서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을 잘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개원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기념식
철쭉과 등나무 꽃이 화사한 1976년 5월 17일, 개원 60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했다.
신현확 보사부장관을 비롯하여, 이 지역출신 신형식 무임소장관, 고건 전남지사 등, 전국각지 정착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정식 원장이 기념사를 낭독했다.
“공자는 일찍이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이라고 하였거니와 이제 소록도도 하늘에 순응하다는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었으며 60당년 노인답게 원숙한 개원기념 운동회를 준비하고...소록도를 찾는 각 정착촌의 많은 퇴원환자들이 마음껏 즐기고 정정당당히 싸워 좋은 결과를 얻기 바란다”고 격려했다.
기념식에 평소에 남의 이목이 두려워 오기 힘들었던 원생들의 가족과 친지들이 운동회 구경을 구실로 찾아와 한 맺힌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소록도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와 환자가족과 일반관광객이 뒤섞여 선창도선장에서 중앙운동장까지 도로는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어 오도 가도 못한 인파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날 KBS광주방송국 연예인단이 방문하여 원생위문공연을 베풀어 주었으며 저녁에는 중앙공회당에서 원생가요 콩쿠르대회와 장기자랑을 펼치며 즐거운 밤을 보냈다.
오랜만에 제2의 고향으로 찾아온 일부 정착촌환우들은 선유(船遊)에 올라<소록도의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산이 좋아 소록도냐, 물이 좋아 소록도냐/ 산도 물도 다 좋다만, 님 없으면 눈물이라/ 갯바람 조금바람, 비린 내 정든 고향, 내 고향 소록도를/ 나는 나는 정말 못잊겠네”
모든 행사가 끝나고 각처로 돌아간 방문객들은 섬에 남게 되는 원생들에게 무한한 연민의 정을 느끼며 각자의 터전으로 떠났고 소록도는 평상으로 돌아와 안정을 찾았다.
문학인들 신정식 원장과 간담회
동년 8월 28일 소록도는 특별한 손님들의 방문을 받는다.
문학을 통해 나환자들의 참모습을 알리고 나병을 계몽하기 위하여 창간된 월간「정착」의 신정하(申定夏) 발행인과 김영중(金英中) 편집장이 중견작가 정을병(鄭乙炳), 홍성원(洪盛原), 구혜영(具暳瑛)씨와 문학평론가 김우종(金宇鍾)씨 등을 대동하며 소록도를 돌아보고 원장실에 모여「나병과 문학을 말한다」라는 주제로 간담회를 열었다.
- 필자 주(註), 상기 면면의 작가는 당시도 중견작가이었고 30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이 나라 문단의 원로임을 자타가 공인한 분들이기에 ‘소록도 80년사’에 기록한 내용을 인용한다 -
신정식 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글쓴 분들이 한센병 환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렇게 찾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난 5월 17일은 우리 병원의 60주년이 되는 환갑이라 무려 7~8만명이 다녀갔으나 글쓴이들의 방문은 별로 없었습니다. 간혹 작품의 소재를 얻기 위해 오신분도 있었지만 이렇게 단체로 오신적은 매우 드문 일로써 원장인 저로서는 영광스러운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원장의 인사말에 이어 자유롭게 문학좌담회가 진행되었으며 그 자리에서 작가들이 밝힌 견해를 정리했다. (발언의 뜻이 더러 모호한 점도 있으나 기록 그대로 기술한다)
“소록도를 제 나름대로는 뭔가 지구의 끝 같은, 나무도 별로 없고, 그저 황폐한 땅인 것 같이 느껴졌으나 나환자들의 천국으로써, 현재도 사회에 숨어 있거나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이 좋은 풍광 속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는 모습을 부각시켜 주는데 기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앞선다”(구혜영 작가)
“나(癩)문학과 연관하여 생각나는 것은 특히나 환자라는 사람들이 일반 사회와 격리되어, 이렇게 말 하면 그늘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 비참하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의 소재는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을 상대로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고 나환자들과 건강한 사람들과의 사이에 공통된 그 어떤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을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홍성원 작가)
“우리가 작가적인 양심을 가지고 나문학을 쓴다면 나환자 자신이 읽어 보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까지 깊이 알았느냐 우리도 놀랬다. 이런 정도의 작품을 써 놓고 나서야 나문학 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사실 그렇게 풀 자신이 없다”(정을병 작가)
“제 생각으로는 구약성서의「욥기」가 나문학의 효시(嚆矢)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욥이 시련당한 악창(惡瘡)이 곧 나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나문학의 효시라면「욥기」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신정하 발행인)
“끝으로 말하자면 나병문학이라는 정의가 무엇이냐, 나문학 이라는 장르가 있느냐 등 여러 가지 의견이 엇갈렸지만, 나병 또는 나환자를 소재로 한 작품은 환자가 썼거나 건강인이 썼거나 가리지 않고 나병을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 다시 말해 작품의 소재와 내용이 중요하지 누가 썼는가는 관여할 필요가 없겠지요, 따라서 나문학이라는 장르를 새로 만들었다고 해서 큰 잘못이 아니라는 결론을 집고 넘어 가겠습니다” (김우종 평론가)
문학좌담회는 이렇게 끝을 맺었지만, 기록만으로 보면 대가들의 문학좌담회 치고는 너무나 내실이 없었다는 필자의 느낌이다.
그 후 12년이 지난 1988년 3월호 월간「복지」「돌아오지 않는 섬」에서 신정식 전병원장은 ‘소록도는 고도(孤島)가 아니다’라는 독후감에서 “10년쯤 됐을까, 유행작가 몇 분이 찾아와서는 나문학이 어쩌고, 환자 복지를 외면하지 말자는 등의 말을 하면서 자기 문고본 몇 권을 선물로 남기고 이내 소식이 묘연했는데...”라고 여운을 남겼다.
그 내용 만으로는 당시의 작가들이 그 이후에도 나문학이나 나병계몽 등에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시각장애인 칼라텔레비전 설치 요구
1976년대를 넘기며 주거환경이 대폭 개선되고, 편익시설도 확충되어 환자들의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갔다.
새로 단장한 시각장애인 병동에는 각 병실마다 스피커를 설치하며 들을 수 있게 하였음에도 앞 못 보는 환자들이 통장실에 몰려와 텔레비전을 설치해 달라고 요구 해 왔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이 라디오 하고는 재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시각장애자 병동에도 텔레비전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후일 80년대 칼라텔레비전이 보급되자 이들은 또 칼라텔레비전을 설치해 달라고 요구 해 왔다.
내용인즉 생활을 도와주는 간병인이 있는데 이 간병인이 칼라테레비전을 보려고 자주 자리를 비운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붙잡아 두기 위하여 칼라테레비젼을 설치해 달라고 요구하자, 결국 칼라텔레비전으로 교체 해 주었다.
시각장애자들이 고추밭에서 정확히 붉은색 고추만 골라서 따는 것을 보면서 지나는 일반인이 신기해 물어보면 “그럼 풋고추를 따라고요?” 오히려 핀잔을 듣곤 했다.
흔히들 소록도를 특수사회라고 부른다. 물론 외적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더 많은 특수성을 갖고 있는 곳이 소록도다.
그런 소록도만의 내부특수성을 잘 파악해야 진실로 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줄 수가 있다.
- 신정식 원장 편은 다음호로 계속 이어 집니다 -
/ 이 송 형 작가
<아리랑신문> 9호(2007.7.16일자) 기획연재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