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곡(思母曲)
최봉호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
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어머니가 만들어주었을 음식, 목소리, 얼굴 등이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남들은 엄마에게 응석을 많이 부려도 받아주었다고 하는데, 나는 어떻게 부리는 게 응석인지 모른다. 단지,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 제사상에 차려진 붉은 사과를 남몰래 집어 먹으려고 했던 기억만이 남아 있다.
내가 태어난 집은 면소재지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있었다. 집 앞쪽은 버스차고지였는데 우리 집과는 나무판대기 담장으로 붙어 있었다. 버스차고지에 붙어있는 뒷집이라 바람이 불면 기름때에 젖은 콜타르 냄새가 들어왔고, 담벼락에선 지린내가 좀 났다. 집 옆쪽으론 조금 떨어져서 농협은행이 있었다. 우리 집은 목조건물의 은행 관사 같았다.
집 앞 지척에는 장터가 있어, 오일장이 서는 날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당시 백암 장은 소시장으로도 유명했다. 장이 서는 날이면 농민들이 쌀, 계란 등을 팔고 사기 위해 모여 들었다. 외할머니도 종종 쌀을 머리에 이고 오리 길을 걸어 장을 다니셨다. 혼기에 꽉 찬 딸을 가진 외할머니 마음에는 면소재지 사람들이 괜찮았게 보였나보다. 은행에 다닌다는 청년의 중매가 들어오자 결혼을 시켰다. 아버지 입장에서도 오십 마지기 논농사를 짓는 부자 집 큰 딸이 시집온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때 아버지는 스물두 살이었고, 어머니는 두 살 연상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곳 백암 버스차고지 뒷집에서 태어났다. 내 위로 누나가 있었는데, 태어나자마자 사망해 내가 명실상부하게 장남이 되었다.
나는 아버지 집에서 명절차례나 기제사 지낼 때 앨범을 뒤적거릴 때가 많았다. 앨범에서 아버지의 젊었을 때 사진, 나의 첫돌 사진도 발견했다. 그런데 어머니 사진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갈 때마다 혹시나 하고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한번은 내 돌 사진을 꺼내 보다가 누렇게 변하고 선명하지 않은 흑백 사진이 툭 튀어 나왔다. 사진을 본 순간 어머니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진이었다. 흰색 무명저고리와 검정색치마에다 등에는 빡빡머리를 한 아이를 업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렇게 생기신 분 이었구나’
사진속의 어머니는 서른 즈음의 화사한 옷을 입은 도시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시골 아낙네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얼굴에는 수심이 잔뜩 깃들어 있다. 당신은 이미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뱃속의 암 덩어리가 악화되어 죽을게 확실한데 아이들 세 명을 누가 보살펴 주지?’ 조그만 흑백사진 한 장이 그런 복잡한 내심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어머니는 결혼생활 십년에 어린 삼형제를 남기고, 서른네 살 나이에 위암으로 생을 달리 했다. 이때 아버지 나이 서른두 살. 어머니가 너무 젊은 나이에 생을 달리해 그런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머니의 유품들을 다 치워버린 것 같았는데 조그만 흑백사진 한 장이 내 돌 사진 뒤에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일부러 남겼을 것으로 짐작한다.
지금 나는 다섯 명의 동생들이 있다. 그 중 바로 밑의 동생 둘은 내색은 하지 않지만 어머니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 것 같다. 수년 전 셋째 동생이 용인의 어머니 묘지를 찾아가 목 놓아 울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사업하다가 하도 힘들어 그랬다고 했다.
나는 사주팔자 중 두 글자는 모른다. 연주(年柱), 월주, 일주는 아는데, 태어난 시(時)는 모른다. 아침에 태어났는지, 밤에 태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엄마한테 물어봤어야 했는데,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언제인가 아버지한테 슬쩍 물어보니 ‘아침인가? 잘 모르겠네!’ 그 정도로 대답해 준적이 있다.
어머니의 이른 죽음은 무의식적으로 나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주위 친인척들은 엄마의 부재에 대해 다들 쉬쉬하고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도 속으로는 엄마가 있는 다른 집들이 부러웠지만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나 사회에 나와서 힘든 일을 겪어도 집에 가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겉으로는 의연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소심한, 그런 성격이 형성되었다.
부모님이 모두 떠난 지금은 내가 이 세상에서 ‘고아가 되었구나!’ 하는 허탈감을 느낀다. 어떤 지인이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면서 “고아가 되었어요!” 라고 말했을 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는데, 지금은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알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뒤늦게 철이 드는 것 같다. 종종 공허하고 널따란 벌판을 홀로 마주하고 있는 심정이 든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오월이 되니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진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
(못 잊어, 김소월)
첫댓글 작품 잘 읽었습니다.
수필가님의 어린 사절이 잘 들어났군요.
사모곡을 읽으며 수필가님의 심정이 되어봅니다,
귀한 수필 감사합니다.
최수필가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