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꺼번에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말을 건네며 전단을 돌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거절한다고 기죽지 말고 웃는 얼굴로 상대방과 눈을 맞추는 게 관건이다. 사진은 지난 23일 서울 도봉구 창동역 인근에서 치킨집 전단을 돌리는 모습. /김지호 객원기자
인터넷에서 아르바이트 모집 사이트를 찾아보니 마침 전단 돌릴 사람을 구하는 광고가 있었다. 시급(時給)은 6500원. 일단 두 시간을 해보기로 했다. 먼저 간단한 사전 교육을 받았다. 전단을 나눠줄 때 웃는 얼굴로 "안녕하세요. ○○○ 피트니스입니다"라고 말하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대하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길 가운데 서야 할지, 한쪽으로 비켜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했다. 그 당황한 와중에 웃기는커녕 밝은 표정 짓기도 어려웠다.
초반 결과는 참담했다. 30분 넘게 행인들에게 전단을 내밀었지만 받는 사람은 열 명 중 두세 명도 안 됐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내미는 전단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야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랴. 나 역시 거리에서 전단 나눠주는 사람을 보면 피해 가기 바빴는데.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가슴 상해
전단 돌리기는 나이·성별·학력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 누구나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아르바이트다. 젊은이들이 생애 첫 '알바'로 전단 돌리는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전단은 식당·학원·수퍼마켓·헬스클럽·미용실·부동산 등 일상생활 거의 전 분야의 광고를 망라한다. 요즘 전단 배포·부착 아르바이트는 대개 시급인데, 숙련도·난이도 등에 따라 대개 시간당 5500~8000원 수준이다.
사람들이 몰리는 지하철역 입구는 전단을 돌리는 데 최적의 장소다. 피트니스센터 전단을 돌린 교대역 인근은 마침 점심시간에 거리로 쏟아져나온 직장인으로 북적였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전단을 못 돌리랴 생각했지만 전단을 뭉치에서 한 장씩 빼서 행인에게 건네는 단순한 동작조차 쉬운 게 아니었다. 영 속도가 나지 않았다.
성과가 부진하니 시간도 더디게 흘렀다. 그래도 조금 익숙해지자 전단 받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유형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인간 군상(群像)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멀쩡히 걸어오다가 전단 주는 사람을 발견하면 갑자기 땅을 보거나 고개를 돌려 못 본 체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살짝 미소를 짓고 지나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 어금니를 꽉 문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미안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는 사람은 양반이었다.
가장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전단 돌리는 사람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옆 사람과 계속 얘기를 나누거나 혼자 제 갈 길을 가는 사람이다. 그럴 때면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혼자 길을 가는 남성은 나이를 불문하고 전단을 거의 받지 않았다. 인상을 쓰며 "됐어" 하고 뿌리치기도 했다. 광고 전단을 손에 들면 세상 사람은 금방 두 종류로 나뉜다. 전단을 받는 사람과 받지 않는 사람.
◇눈 맞추는 게 전단 받게 하는 비결
수많은 사람에게 빠른 속도로 같은 말을 반복하다 보니 혀가 꼬여 말이 헛나왔다. 짝을 이뤄 아르바이트에 나선 김모(21)씨가 보다 못해 한마디 한다. "먼저 눈을 맞추세요. 그리고 약간 달라붙듯 적극적으로 다가가 봐요." 그는 "많은 사람이 우르르 올 때 맨 앞 사람이 전단을 받으면 뒷사람도 호기심에 덩달아 받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노하우'도 알려줬다.
0.5초. 길 가는 사람이 광고 전단을 받을지 안 받을지 결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그 짧은 순간의 성패(成敗)는 길 가는 사람과 눈을 맞추는 데 달려 있다. 웃음 띤 얼굴로 눈 맞추며 인사를 건네면 절반은 성공이다.
아무리 그래도 전단을 받아주는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점점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래도 가끔은 위로도 받는다. "예~"라고 인사하며 전단을 받아주는 아주머니, "감사합니다"라며 고개 숙이는 중·고등학생을 만났을 땐 울컥할 정도로 감동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전단을 꼼꼼히 읽는 모습을 보면 쫓아가서 업어주고 싶었다. 거절하더라도 "괜찮습니다"라며 정중히 말하면 인격자처럼 보여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전체적으로 남자보다는 여자가, 나이 든 사람보다는 젊은 층이 잘 받아주는 편이었다.
한 중년 남자가 "그게 뭐요"라며 다가왔다. "새로 개장한 헬스센터인데, 시설도 좋고 지금 오시면 40%까지 팍팍 할인해 드려요." "그렇잖아도 찾고 있었는데, 다음에 들를게요."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누구는 바쁜데 길 막는다고 할지 모르지만, 전단도 어엿한 정보 전달 역할을 한다는 데 기꺼이 한 표! 기분이 좋아져 배포 범위를 조금 넓히려고 다른 쪽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근처 리어카에서 과일 파는 할아버지가 "저쪽에 가서 하라"며 역정을 내는 바람에 밀려났다.
현장 감독차 나온 피트니스센터 직원도 '한 수' 가르쳐주었다. "전단 가운데를 둥그스럽게 접은 후 부드러운 부분이 상대방 손에 잡히도록 건네보세요. 펴보기 좋게요. 관심을 보이면 '운동 안 하세요?'라고 말을 걸어보시고요."
1시간쯤 지나자 길 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사람은 잘 받고, 기분 나쁜 사람은 거의 받지 않는다는 '전단 ABC'도 체득했다. 점심 식사 후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직장인들이나, 손잡은 연인 등 기분 좋아 보이는 이들은 뿌리치는 법이 별로 없었다. 반면 화난 듯한 얼굴로 빠르게 걷는 사람이나 큰 소리로 전화하는 사람 곁에는 웬만하면 접근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도 알았다.
◇한번 돌려본 사람은 전단 무조건 받아
지난 23일 저녁에는 서울 도봉구 창동역 인근에서 치킨집 전단을 돌려보았다. 이번에는 나름 요령이 생기고 숙달된 덕분인지 똑같이 2시간을 돌렸는데 교대역 앞 피트니스센터(160여장)에 비해 3배 가까운 450여장을 나눠줬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창동역 근처에는 외식하러 나온 가족, 연인, 등산복 차림의 나들이객이 많았다. 출출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한 마리 가격에 2마리를?!'이란 문구가 잘 보이도록 전단을 내밀었다. 행인들의 행태나 표정을 재빨리 파악해 성공률이 높아 보이는 사람들을 쫓아다녔다. 스마트폰을 보거나 귀에 이어폰을 낀 젊은 사람들은 예상대로 뿌리치기 일쑤였다. 데이트하러 나온 듯한 화사한 정장 차림의 아가씨는 전단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추리닝 입고 집 앞 볼일 보러 나온 아가씨는 반갑게 받았다. 치킨집 오픈 할인이라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는지 일부러 다가와 달라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오늘은 지난번보다 성적이 좋다고 자부한 것도 잠시, 인근 쓰레기통에 버려진 자식 같은 전단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참담했다.
2시간 정도 길거리에서 왔다갔다하다가 근처 의자에 앉아 뻣뻣한 다리를 풀다 보니 허리도 아팠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전단 돌리는 일을 직접 해본 이후 기자는 전단 돌리는 사람을 보면 일부러 다가가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됐다.
김의경의 장편소설 '청춘 파산'에는 빚더미에 눌린 한 20대 여성이 상가 수첩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은 말한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상품 옆에 서서 손님에게 상품을 권하는 당신은 부모에게 받은 용돈으로 그 물건을 사는 사람보다 한 발짝 앞서 있다.' 공감! 전단 돌리기 아르바이트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