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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마티네(cafe.daum.net/gymatinee)영상음악회
2014년 11월 27일 목 오후2~
태양의 서커스, 새로운 서커스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 <더 뮤지컬> 2007년 3월호
어렸을 적에 적어도 한·두 번씩은 보았을 서커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TV 프로그램이 바로 서커스다.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 경이로움, 감탄, 그리고 때로는 죽음의 공포를 수반하는 스릴까지 느끼게 해주었던 서커스다. 그렇다면 인간 내면의 미적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이것은 서커스와는 거리가 먼, 예술 감상에서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일 듯하다. 하지만 20세기 말 이래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새로운 경향의 서커스, 즉 뉴 서커스(New Circus)는 기존의 서커스가 주지 못했던 이러한 예술적 감흥마저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아트 서커스라는 이름으로 최근 여러 뉴 서커스들이 내한했다. 그리고 2007년 상반기에 공연계의 최고 이슈 중 하나는 바로 ‘태양의 서커스’의 내한공연일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 같지만 막상 다가가려고 하면 베일에 쌓여있는 서커스의 세계, 그 안으로 들어가 보자.
서커스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서커스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얼까? 원형무대에 고깔처럼 씌어진 천막, 유랑하는 서커스차, 공중을 날아다니는 곡예사, 배꼽을 잡게 만드는 피에로, 사자를 아기 고양이 다루듯 하는 조련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여드는 관객..... 이 모든 것은 서커스를 정의내릴 수 있는 특징들이기도 하다. 서커스는 전통적으로 링(Rings)이라는 원형무대에서 공연을 펼치며 옮겨 다니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서커스를 이루는 쇼(acts)는 다양한데, 줄타기나 그네타기 같은 공중 쇼, 재주넘기나 균형잡기 같은 지상 쇼, 풍자와 재치로 웃음을 선사하는 광대놀음, 각종 동물이 등장하는 동물 쇼, 그리고 칼던지기와 인간대포처럼 대담하고 위험한 쇼가 있다. 이러한 서커스는 본질적으로 대중적인 연예로서 일반대중과 매우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왔다. 그것은 실제적인 거리이며 또한 심리적인 거리이기도 하다. 서커스의 공연자들은 링을 둘러싸고 있는 관객들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감지해왔으며 재빠르게 그들의 요구에 부응해왔다. 그럼으로써 서커스는 계층이나 성별, 나이를 초월하여 광범위한 대중을 감싸 안을 수 있었다. 특히 서커스의 비언어적인 성향은 어린이는 물론 다양한 문화권을 아우를 수 있게 만들었다. 서커스의 유래는 멀리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적 의미의 ‘서커스’는 18세기 후반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필립 에스틀리이라는 사람이 1768년 말을 타고 원을 돌면서 말 등위에 서있는 묘기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이 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곡마술을 시작으로 갖가지 묘기들이 발전되어갔으며 유료관객을 수용하는 공연장 역시 고안되어 갔다. 아스레이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찰스 휴스는 영국의 왕립 서커스단을 설립함으로써 라틴어로 ‘Ring’이란 뜻의 ‘서커스(Circus)’의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된다. 곡마술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았던 서커스는 19세기 초에 극장의 공연양식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광대놀음, 팬터마임, 멜로드라마, 소희가극, 그리고 춤 등이 추가되어 갔다. 물론 기예도 발전해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문적인 서커스의 면모를 갖추어 갔던 것이다. 서커스의 전문적인 발전과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영국에서 출발한 서커스는 곧 유럽 전역과 북미로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20세기 초에 이르자 호주와 아시아, 남아프리가, 그리고 남미까지 뻗어나갔다. 우리나라에서도 20세기 초에 동춘 서커스를 비롯한 여러 개의 서커스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미국에서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서커스가 개별적인 발전양상을 보이면서 기업화되어갔다. 서커스의 묘기는 훨씬 더 과감해지고 특히 이국적이고 거친 동물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유럽의 서커스 역시 이러한 미국의 영향으로, 고전적인 곡마술이 대담한 쇼와 야생동물 쇼의 화려한 볼거리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세계 대전이나 대공황 등 이어지는 정치·사회적인 문제는 20세기 중엽에 서커스단의 대대적인 위축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영화와 텔레비전의 궁극적인 성장이나 컴퓨터 관련 산업의 폭발적인 증가는 서커스의 주 고객층이었던 가족단위의 관객들을 상당부분 잃게 만들었다. 이제 서커스는 순회공연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으며 사양 산업으로 분리될 정도로 침체를 면치 못했다. 시장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지 않은 공산권의 국립 서커스만이 두각을 나타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서커스는 부활의 날개를 힘차게 펴기 시작한다. 바로 뉴 서커스와 함께 말이다.
새로운 서커스가 다가오다. 1970년대에 발생한 뉴 서커스라고 불리는 새로운 움직임은 기존의 서커스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엽까지 만연했던 현란하고 감각적인 볼거리, 위험을 불사하는 묘기는 더 이상 새로운 시대의 관객에게 매력을 주지 못했다. 어떤 면에서는 기예를 중요시했던 초기의 서커스의 형태로 회귀하려는 조짐도 있었다. 뉴 서커스는 더 나아갔다.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는 공연 미학에 근거를 둔 예술적인 서커스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이러한 뉴 서커스는 기존의 서커스와 차별화되는 몇 가지 뚜렷한 특성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곧 전 세계적인 성공의 키워드가 되고 있다. 우선, 많은 뉴 서커스는 동물 쇼에서 거리를 두었다. 한때 서커스에서 가장 인기를 모았던 동물 쇼는 동물에 대한 문화적 태도가 변함에 따라 더 이상 환영받지 못했다. 동물은 이제 인위적으로 통제됨으로써 인간의 우월감을 충족시키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오만에 의해 희생당해온 보호해야할 대상이라는 의식이 보편화된 것이다. 더욱이 동물을 구입하고 사육하고 훈련하는데 드는 고비용은 관객이 줄어든 상태에서 대단히 큰 경제적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많은 뉴 서커스는 동물로부터 멀어져 갔다. 서커스 학교가 성장함에 따라 뉴 서커스 공연자들은 보다 열린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가족이나 집단 단위로 전통적인 도제교육을 이어가는 서커스단이 존재하고 있긴 하지만, 서커스 학교의 성장은 서커스 훈련이 더 이상 견습생 형태의 교육으로 국한되지 않음을 의미했다. 체계적인 훈련방식을 추구하는 서커스 학교와 더불어, 국제 서커스 페스티벌이나 대회를 통해서 그리고 이와 연계된 쇼케이스, 워크샵 등을 통해서 공연자들과 단체들은 보다 열린 기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뉴 서커스는 극장공연예술의 특성을 도입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뉴 서커스는 물론 예전부터 있어왔던 곡예 기술에 중심을 두고 있지만, 주제와 내러티브를 탄탄히 하는 한편 공연예술의 장점들을 적극 수용해갔다. 스토리 라인을 형성하는 연기와 노래와 춤이 서커스와 어우러져 있으며 거기에 음악, 조명, 의상 등의 구성요소들이 공연의 집중력을 높여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뉴 서커스가 흡수하는 공연예술의 경계는 없어 보인다. 최근 연극, 무용 같은 공연예술이 난해한 미학을 표방함으로써 현대의 예술이란 뭔가 심오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반면에, 뉴 서커스는 그것이 아무리 아방가르드한 공연 미학을 수용하고 있다하더라도 중심을 이루는 기예가 철저하게 한 가지 방식으로 전문화되어 있고 근본적으로 신체의 극단을 넘어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경외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대중과 함께 해온 서커스는 문화나 성별, 나이를 넘어서 향유하기 좋은(편한) 장르인 것이다. 그것이 뉴 서커스의 가장 큰 장점이다.
꿈의 세계를 현실로-태양의 서커스(Crique du Soleil) 현존하는 서커스단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태양의 서커스, 그러나 시작은 캐나다의 퀘벡 주(州) 근처에 작은 마을에서부터였다. 갖가지 기예를 가진 길거리 곡예사들이 모여 하이힐 클럽이라는 것을 결성하였고 그 일원 중에는 태양의 서커스 창설자인 기 랄리베르도 있었다. 1984년 캐나다 발견 400주년 기념 축제에서 기 랄리베르는 하이힐클럽을 서커스단으로 조직하여 ‘태양의 서커스’라는 공연을 펼쳤다. 그 공연의 성공에 힘입은 기 랄리베르는 같은 이름으로 서커스단을 창단하기에 이른다. 태양의 서커스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고, 현재 미국의 라스베가스와 올란드에 6개의 상설공연 그리고 전 세계를 무대로 7개의 순회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번에 내한하는 <퀴담> 역시 순회공연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태양의 서커스는 창단 20년 만에 연매출 6천억 원, 기업가치 1조 2천억 원에 도달했으며, 이러한 액수는 서커스 산업의 대부 격인 링잉 브라더스(Ringing Brothers)나 바넘 앤 베일리(Barnum &Bailey)가 100년에 걸쳐 이루어온 매출 수준이라고 하니 태양의 서커스가 얼마만큼 큰 성공을 거둬왔는지 알 수 있다. 태양의 서커스의 성공신화를 논할 때, 경영가적 마인드와 예술가적 자존심을 동시에 지닌 창설자 기 랄리베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가 없다면 지금의 태양의 서커스도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기 랄리베르는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았던 창단 초기에 라스베가스의 미라지 리조트 그룹과의 계약을 따냈으며, 이후 라스베가스란 도시를 도박뿐만 아니라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아름다운 서커스로도 유명하게 만들어왔다. 또한 창단 때부터 수익의 대부분을 다음 작품에 재투자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현재에도 수익의 40%라는 막대한 자본을 신작에 쏟아 붇는다. 한 예로 2005년 첫 선을 보인 <Ka>에서는 보잉 747 여객기보다도 무거운 무대세트를 만들었고 그 무대를 360도 자유자재로 변형시키고 있다. 1998년에 시작한 <O>에서는 무대에 5600여 톤의 물을 채워놓고 수중과 수면 위를 넘다들며 공연을 펼치고 있다. 태양의 서커스는 인재발굴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스카우터들을 통해서 재능있는 공연자들을 찾기 위해서 분투하는데, 변방의 작은 서커스단을 찾아가는 가하면 체조와 수중발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까지 섭외한다. 무용수나 뮤지션 같은 예술가들조차 섭외대상의 예외는 아니다. 태양의 서커스는 다양한 영역에서 필요한 인재를 찾아내고 훈련시키는 수완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다. 바로 그들의 공연이 그것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태양의 서커스는 또한 공연에 대한 라이선스를 주지 않는다. 이를 테면 오리지널 팀에 의한 공연이 아니라면 관객 앞에 선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최상의 공연진으로서 고품질의 공연만을 보여준다는 예술적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말이 쉽지 이토록 대규모로 기업화된 단체로서는 현실적으로 쉽지만은 않은 경영 철학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태양의 서커스의 성격이 그들을 20년 이상 세계 최정상에 올려놓은 것이다. 태양의 서커스는 꿈의 세계를 현실로 바꾸어가고 있다. 그것은 서커스 그리고 서커스 경영 모두에 해당되고 있다.
<퀴담(Quidam)>, 서커스와 공연예술의 만남 1996년 초연된 후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5천만 명 이상 관람한 <퀴담>은 태양의 서커스의 레퍼토리 중에서 예술성이 높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라틴어로 ‘익명의 행인’이라는 뜻의 <퀴담>은 서커스와 공연예술의 이상적인 접점을 실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 하다. 그렇다면 <퀴담>이 보는 이로 하여금 예술적인 심미감을 느끼게 하는 요인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우선, 극(劇)적인 스토리가 서커스의 통일성을 부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존의 서커스들이 다양한 묘기들을 아무런 구심점 없이 단순 나열해갔다고 한다면 태양의 서커스는 연기와 노래와 춤이 엮어가는 이야기 구조를 통해서 각각의 기예들을 에피소드처럼 묶어놓는데 성공했다. 예를 들어 <퀴담>은 단절된 현대 가족의 한 구성원인 소녀 조가 퀴담의 모자를 통해서 몽환적인 세계로 빠져드는, 마치 <오즈의 마법사>와 같은 구조를 띤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갖가지 기예들을 에피소드화(化)하여 하나의 완성된 공연 양식으로 확립시키는데 주요한 틀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음악 역시 서커스의 흥을 돋우고 긴장감을 고양시키는 등의 단순한 반주에서 벗어나서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는 하나의 독립된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실제로 태양의 서커스의 공연 음악은 CD로도 출시되고 있다. 이러한 음악은 에피소드를 이루고 있는 각 기예들의 성격에 따라 변주되고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를 끌어가는 힘에 있어서는 흔들림이 없다. 공연자들은 마치 무용수들과 같이 음악의 선율과 리듬에 일체감을 느끼며 움직인다는 점에서 공연의 통일된 심미감을 극대화한다. 조명은 뻔쩍거리는 스포트라이트와 임시응변식의 조작에서 벗어나서, 작품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무대 위의 행위에 집중도를 높이는 극장예술에서 쓸 법한 조명디자인을 도입하고 있다. 물론 순수예술보다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볼 수 있을 만한 감각적인 화려함도 잊지 않고 있다. 의상 역시 전체적으로 통일된 감각에 각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각 기예의 특성을 동시에 고려하여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양의 서커스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인간의 신체가 만들어내는 기예들이다. 그것은 인간 신체의 ‘극단을 넘어선 가능성의 탐구’와 같은 것인데, 보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공연자에 대한 순수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이번 <퀴담>에서도 붉은 천에 매달린 인간 새의 탐미적인 날개 짓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두 육체 간의 힘의 균형으로 창조되는 조형적 상(像)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많은 공연예술이 극의 활기를 돋우거나 전위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곡예적 움직임을 수용하는 것과는 반대로, 태양의 서커스는 서로 다른 개성의 기예들을 완성된 작품으로보여주기 위해서 또한 여러 기예들의 예술적 심미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여러 공연예술의 장점들을 적극 흡수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퀴담>은 여러 공연예술의 장점을 흡수한 ‘뮤지컬’을 ‘서커스’에 접목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태양의 서커스의 새로운 지향이 관객들에게 특별한 감흥을 주었음은 전 세계적인 성공으로 증명되고 있다. 태양의 서커스는 궁극적으로 서커스다. 단지 기존의 서커스들과 같지 않을 뿐이다. 사실, 태양의 서커스는 그 자체로 예술이라기보다는 여러 공연예술의 장점들을 끌어들여 서커스를 예술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떻든 간에 태양의 서커스는 그 이전에 누구도 실현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꿈의 세계를 차례차례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 경이로운 세계로 빠져들지 않을 자가 있을까. 태양의 서커스는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으며 보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면의 미적 감성까지 자극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태양의 서커스가 예술의 경지에 올랐건 혹은 예술 미학으로 포장된 연예이건 간에, 보는 이로 하여금 순수한 감흥을 이끌어내었다면 그것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이룬 셈이리라. 태양의 서커스, 새로운 서커스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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