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모든 것이 잠에서 깨어난다.
그 중에서도 맨 먼저 대지가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난다.
먼저 깨어난 대지는 아직도 잠자고 있는 나무와 풀을 흔들어댄다.
바위에 옹기종기 붙어 있던 얼음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한다.
얼음 밑으로 숨죽이며 흐르던 시냇물도 이젠 당당하게 행진을 시작한다.
이런 모습을 본 버들강아지가 시냇가에서 재롱을 피운다.
이쯤 되면 동물들도 잠에서 깨어난다.
곰이나 다람쥐는 물론 물 속 깊숙이 숨어 있던 개구리마저도 소리를 지르며 나온다.
사람들도 겨우내 움츠렸던 가슴을 활짝 편다.
그래서 봄날이면 사람들은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집을 나서는 일은 신나는 일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의 차창 너머로 보이는 들판이 사뭇 활기차다.
파릇파릇한 보리며,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매화꽃과 동백꽃이며, 나물 캐는 아낙의 모습이 그렇다.
산자락에 걸쳐 있는 안개의 품속에도 봄기운이 서려 있다.
중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를 거쳐 국도로 빠진 버스는 여주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남한강을 만난다.
잠시 남한강을 접한 버스는 북쪽으로 계속 달려 양평군 용문면 소재지에서
홍천 쪽으로 우회전하여 가다가 용문사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한다.
용문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봄나들이 나온 차량들이 빽빽하다.
매표소를 지나자 바이킹까지 동원되어 요란법석인 상가가 나온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고요한 골짜기를 소음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린다.
조용하고 아늑해야 할 산사까지 돈벌이에 희생되는 안타까운 현실이 여기에도 재연되고 있다.
그윽한 용문사 가는 길
'용문산 용문사' 라 쓰인 일주문을 지나자 고즈넉한 산길이 이어진다.
시끄럽던 음악소리도 어느새 멀어져 버렸다.
아스팔트 길이지만 차가 다니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장송(長松)과 아름드리 잡목들이 산사로 가는 우리를 맞는다.
울창한 숲과 티없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계곡이 나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이렇게 그윽한 길을 한참 동안 걸어가야 용문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용문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1,200살 나이에 높이 60여 미터, 줄기 둘레 14미터에 이르는 이 나무는 동양에서도 가장 큰 나무로 알려져 있다.
가을이면 은행을 열다섯 가마니 이상 수확한다고 하니 이 나무의 위세를 알 만하다.
이 은행나무를 두고 어떤 사람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세자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심었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놓은 것이 뿌리내려 성장한 것이라고도 한다.
나라에 변고가 일어날 조짐을 먼저 내다보고 울었다거나,
어느 심성 사나운 사람이 도끼를 댔다가 벼락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천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이미 신격화된 은행나무에 대한 사람들의 외경심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다.
그래서 이 은행나무는 사람도 받기 힘든 벼슬을 조선 세종 때 하사받았다.
정3품 이상의 벼슬에 해당하는 당상직첩이 바로 그것이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한 계단 내려와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등산로다.
계곡을 끼고 올라간다.
산이 높아야 골이 깊고, 골이 깊어야 계곡의 수량도 많은 법.
갈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용문산의 높이만큼이나 많은 양의 물이 흐른다.
용문사를 출발한 지 5분 정도 지나자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과 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갈린다.
계곡을 따라 오르면 두 개의 바위가 마주보고 서서 석문을 이루고 있는 용각바위와 마당바위에 이른다.
우리는 능선으로 오른다.
곧바로 가파른 오르막이다.
앞사람의 엉덩이만을 보고 오를 정도다.
아름드리 노송이 이 산의 무게를 더해 준다.
노송 밑에는 겨울을 넘기면서도 잎을 달고 있는 키 작은 단풍나무들이 이곳의 가을 풍경을 예고해주고 있다.
가파른 길을 오르다 조그마한 너럭바위 위에 선다.
아래쪽으로 계곡이 보인다.
멀리서 들어도 봄을 맞는 계곡의 물소리가 경쾌하다.
내려다보이는 용문사의 지붕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가파른 길을 올라오느라 흘린 땀을 시원한 바람이 씻어준다.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산은 봄이 빨리 오기를 재촉하거나 스스로 조급해 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봄은 와 있다.
계곡 건너 오른쪽 산비탈에는 희끗희끗한 바위들이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다.
푸른 빛을 띤 소나무와 봄을 맞았지만 아직은 나목(裸木)인 활엽수들이 바위와 뒤섞여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오르고 있는 곳은 아직까지는 포근한 육산이다.
올라갈수록 참나무, 서어나무, 산벚나무 등의 활엽수들이 포근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아, 저기 봐요. 저 바위 이상하게 생겼죠?"
앞서가던 사람의 말을 듣고 오른쪽을 쳐다본다.
용틀임하듯 서 있는 바위가 기묘하다.
생각하기에 따라 괴물 같기도 하고 큰 바위 얼굴 같기도 하다.
봉우리 빼어나고 골짜기 깊은 산
용문사에서 30분쯤 올랐을까?
갈림길이다.
여기에서 왼쪽(서쪽)으로 가면 상원암이, 계속 능선을 따라가면 정상에 도달한다.
정면으로 용문산 정상을 쳐다보면서 걷는다.
얼마 안 가서 가파른 바윗길이 시작된다.
왼쪽 산비탈에는 너덜도 보인다.
"용문산은 차돌 산이구먼."
이곳의 바위들은 모두가 희고 단단한 차돌이다.
오른쪽 산비탈에 하얗게 보이는 바위도, 내 머리 위에 불쑥 나타나는 바위도 모두 차돌이다.
암릉이 이어지면서 산세는 점점 험해진다.
왼쪽의 응달진 곳에는 가는 겨울이 못내 아쉬워 아직까지 녹지 않은 눈들이 하얗게 쌓여 있다.
상원암 갈림길에서 30여 분 만에 마당바위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아저씨, 어디서 오세요?"
"정상에서요."
"예? 정상까지 갈 수 있어요?"
"정상까지 갈 수 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당바위 위로는 출입할 수 없었는데 최근에야 통행이 가능하게 된 모양이다.
정상이 통제된 것으로 알고 있는 우리는 상원암 가는 갈림길에서
서쪽으로 절고개를 통하여 상원암, 윤필암 터를 거쳐 백운봉에 올랐다가 연수리로 하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계획된 코스와는 달리 정상 쪽으로 올라가고 있다.
정상을 가고 싶은 마음에 비록 정상은 못 가더라도 갈 수 있는 데까지라도 가보자는 모험심을 부추겨
원래 계획이 자연스럽게 수정된 셈이다.
상상도 하지 않았던 정상을 갈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가파른 차돌 암릉은 계속 된다.
두 발로 걷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바위를 붙잡고 네 발로 걸어가는 경우가 많아진다.
암릉이 험하면 험할수록 불쑥불쑥 솟구친 바위들의 모습은 점점 아름다워진다.
용문사기(龍門寺記)의 첫머리에 나온
'바탕 둘레가 100리로서 천만 겹으로 솟아 있으니, 봉우리는 빼어나고 골짜기는 깊고도 그윽하다' 는
용문산에 대한 설명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바윗길은 흙길로 바뀐다.
마지막 급경사를 통과하니 정상이다.
넓게 자리잡은 통신시설 때문에 산의 정수리에는 발을 디딜 수가 없다.
철조망에 기대어 정상에 오른 기쁨을 즐길 수 있을 뿐이다.
이 정도라도 얼마나 다행인가.
용문산은 경기도에서는 화악산(1,468m), 명지산(1,267m) 그리고 포천의 국망봉(1,168m)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용문산의 원래 이름은 미지산(彌智山)이다.
우리말 어원을 살펴보면 미지는 용을 가리킨다.
그래서 미지산은 용문산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정상에 올라와 보니 왜 용문산(龍門山)인가 알 수 있을 듯하다.
용이 승천(昇天)하듯 솟아오른 바위들로 하여금 이런 이름이 생겨나게 하지 않았을까?
철조망 앞에 서서 용문사 쪽을 내려다본다.
절은 보이지 않지만 은행나무만은 의젓하게 서 있다.
고개를 조금 들어 동쪽을 바라보니 눈앞에 중원산(800m)이 다가선다.
중원산은 용문산과 독립된 이름을 갖고 있지만 사실상 용문산권에 속한다.
시야를 중원산에서 조금만 북쪽으로 돌리면 도일봉(864m)이다.
정상 바로 밑에서 서쪽으로 희미하게 나 있는 산허리 길을 따라간다.
5분도 채 못 가 난관에 봉착한다.
길이 두 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가 문제다.
오른쪽 산허리 길을 돌아가 가협치 쪽으로 붙어 주능선을 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내려가는 길을 택할 것이냐.
그동안 출입금지 구역이었기 때문에 지도상에도 표시되지 않는 길들이다.
마침 왼쪽에서 한 사람이 올라온다.
"어디서 올라오시는 거에요?"
"예, 연수리 쪽에서 출발해 오던 참이에요."
연수리 쪽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 정상에 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던 길로 하산하기 때문인지 길은 희미하다.
그렇다고 길을 잃고 헤맬 정도는 아니다.
가파른 너덜 길이 이어진다.
너덜을 이루고 있는 돌들도 모두 차돌투성이다.
차돌 하면 생각나는 것은 단단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단함을 얘기할 때 '차돌 같다' 고 표현한다.
햇볕이 잘 안 드는 곳에는 어김없이 잔설이 널려 있다.
숲 속에서 들려오는 '봄의 교향곡'
너덜지대를 지나자 전형적인 잡목 숲길이다.
수십 년 전에 숯을 굽던 가마터가 가끔 눈에 띈다.
가파른 길인 데다가 너덜지대가 꽤 많아 신경이 쓰인다.
이렇게 1시간 가까이 내려가 조그마한 실개천을 만난다.
땅 속에서 흐르던 물이 드디어 땅 위로 솟구친 것이다.
"아이쿠, 이런 보약이 없네."
일행 모두가 컵으로 물을 떠서 꿀꺽꿀꺽 마신다.
간장까지 서늘해진다.
그리고는 주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
졸졸졸 흘러가는 실개천의 물소리에서 시원함을 느낀다.
숲 속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도 경쾌하다.
이러한 물소리, 새소리는 들릴 듯 말 듯 배경음으로 깔린 바람 소리와 함께 봄을 알리는 한 편의 교향곡이다.
마치 비발디의 <사계(四季)> 중 '봄' 이나 하이든의 '종달새' 를 듣고 있는 것 같다.
내려갈수록 길은 훤해지고 계곡의 물소리가 내는 소리도 점점 커진다.
이윽고 상원암과 윤필암터로 이어지는 길과 만난다.
혹시 상원암 근처가 아닐까 하고 생각도 해보지만 지도와 지금까지 내려왔던 방향을 고려해 볼 때
여기는 절고개임이 분명하다.
절고개에서 상원암까지는 완만한 내리막으로 25분 정도 소요된다.
상원암을 거쳐 내려가도 절고개에서 곧바로 내려가는 길과 만나게 된다.
암자로 돌아서 내려갈까 하다가 다른 사람들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마음먹는다.
상원암은 조선시대 세조와 관련된 일화를 가지고 있다.
세조 8년(1462년) 10월, 왕이 중전과 세자를 데리고 상원암 근처에서 사냥을 즐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면서 우박까지 섞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때 별안간 상공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그러자 모두 관세음보살을 향해 경배를 올렸다.
어린 조카 단종과 그를 따르던 신하들(사육신)을 죽이고 많은 사람들을
옥에 가두어 백성들의 소리 없는 원성이 자자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일부 신하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는
하옥된 모반죄인들을 모두 풀어줄 것을 왕에게 간청하였다.
이 간청을 들은 세조는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던지 그들을 모두 풀어주라고 하였다.
결국 부처님이 원한의 감정을 자비심으로 녹여낸 것이다.
산 전체가 활엽수로만 이루어진 이곳 나무들은 옷을 벗어버린 나목이기는 하지만 한겨울의 나목은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새싹을 틔울 준비를 하느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런 나목이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줄기나 가지도 한겨울에 비하여 활력이 넘쳐흐른다.
절고개에서 15분쯤 내려가 상원암에서 내려오는 도로와 만난다.
계곡도 역시 상원암에서 내려오는 물길과 합쳐진다.
비포장 도로는 10분 후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바뀐다.
포장은 되어 있지만 지나는 차량은 가뭄에 콩 나듯하다.
상원계곡이라 불리는 개울가에는 어느새 핀 버들강아지가 춤을 추고 있다.
기지개를 켠 개구리도 개굴개굴 노래를 부른다.
오른쪽으로는 백운봉이 우뚝 솟아 있다.
뾰족하게 솟아 있는 암봉이다.
연수리 가까이 와서 백운봉에서 내려오는 길과 계곡(수득골)을 만난다.
상원계곡도 어느새 제법 큰 계곡이 되어 있다.
연수리(연안)에 도착하여 막걸리로 목을 축인다.
산행의 기쁨에다 약간의 취기까지 보태지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마을 참 좋네요. 이런 곳에서 조용히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건 우리같이 가끔 들르는 사람이나 가질 수 있는 생각이지
실제로 여기서 산다면 오히려 갑갑해서 못살 거요."
옆사람의 말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린다.
아직도 나는 속세의 때를 벗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마을을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