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15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 서예가들을 기술하려면 아무래도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으로 부터 출발하여야 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소전 손재형(1903~1981)은 1903년 전남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 향저에서 옥전(玉田) 손병익(孫秉翼)의 손(孫)이자 영환(寧煥)의 유복자로 출생하였는데, 추사 이래의 대가로 추앙받을 정도로 서예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겨 한자문화의 정수인 서예를 오늘날에 이어온 서예계의 거목이라고 해야겠다. 그는 1924년(당시 22세)부터 1931년까지 매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제 1회 조선서도전에서 특선하는 등 나이 30전후에 특선을 마치고 곧 이어 국내 규모의 심사위원을 맡아 국전이 시작되면서 계속해서 9회나 단 한번 심사에 참여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홉차례 심사위원을 지낸 뒤에는 두차례에 걸쳐 국전 고문을 지냈고 국전 심사위원장 한 번, 국전 운영위원장 두 번, 예총회장 두 번,대한민국예술원회원(’54~’81) 등을 지내 그가 활동하던 40년간 선전이나 국전에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때가 없었을 정도 화려한 경력을 과시하였다.
그가 한 공적 중 특기할만한 몇가지를 든다면 먼저 해방후 그동안 일본에서 통용되는 서도(書道)라는 용어 대신 서예(書藝)로 할 것을 제창하여 관철시켰고 그뒤로 국내에 통용하게 된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의 서법(書法), 일본의 서도에 비견하여 우리나라에는 서예라는 용어가 정착된 것이다. 또 한가지는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를 대동아전쟁으로 혼란한 기간 중 일본 동경으로 가서
소장자 후지츠카(藤塚) 전 경성대 교수를 3개월에 걸친 끈질긴 설득 끝에 '세한도'를 찾아온 공적이다. 물론 그는 나중에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정계에 진출하면서 더러 오점도 남겼지만 그의 문하에는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학남(鶴南) 정환섭(鄭桓燮), 경암(景岩) 김상필(金相筆),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 평보(平步) 서희환(徐喜煥), 금봉(金峰) 박행보(朴幸甫), 우죽(友竹) 양진니(楊鎭尼) 등 한국 서예계의 기둥이 된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길러낸 점도 특기할만하다고 하겠다.
자획과 구성에 무리가 없고 문기가 넘치는 그의 글씨는 보는 이의 저항감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데 특색이 있으며, 수차에 걸쳐 중국에 다녀와 전서(篆書)체를 토대로 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확립하여 이른바 '소전체(素筌體)'라 불리는 서체를 만들어 내었고,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畵)에도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여 문인화에도 걸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제자 중에는 원곡 김기승은 별반 나이 차이가 없었지만 학남(鶴南) 정환섭(鄭桓燮). 산정(山丁) 서세옥(徐世沃) 등은 당시 서울대 미대 재학생으로 나중에 학남 정환섭(1930~2010 ) 문하에서는 초민(艸民) 박용설(1947~ 서울대 사대 출신) 등의 서예가가 배출되었고, 서세옥(1929~ )은 수묵화법을 응용하여 동양화 추상 분야를 개척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소전 손재형과 함께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도 훌륭한 서예가였다. 소전이 예파(藝派) 서예가를 대표한다면 검여는 그 대칭 점에 섰던 법파(法派) 서예가의 대표격이라 하겠다. 법파도 예파와 마찬가지로 추사의 <법고창신>의 정신을 이어가려 하였으나, 창신에 앞서 보다 든든한 법고의 고전적 바탕과 기량을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검여 유희강은 1938년~1946년 중국에 머물며 베이징의 동방문화학회와 상해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와 서예, 금석학 등을 배웠다. 광복 후 그는 고향 인천으로 돌아와 서예가로 다시 태어난다. 검여는 1953년 제2회 국전에 서양화 <염念>과 서예 <고시古詩>를 처음으로 출품하여 양 부문에 입선하고, 이어 1954년 제3회 국전에도 서양화와 서예 작품을 동시에 출품하였으나, 서예 작품 <독서운생벽讀書雲生壁>만이 입선하였다. 이후 검여는 서예에만 매진한다. 1958년까지 계속 4회에 걸쳐 특선을 차지함으로써 1958년에는 추천 작가로 올라서게 되었고, 1959년에는 국전 심사위원으로 국전 초대 작가가 되었다.
검여 서예의 두드러진 특징은 <서예의 회화성>이다. 그는 육조풍의 행서를 중심으로 한 그의 글씨가 무르익어 가고 나름의 서체가 형성되어가자 그의 예술적 지향점과 목표를 추사체의 연구와 발전에 두게 된다. 그는 서법에 의한 필획니다 결구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한편 1967년부터 1년 여 월전 장우성 화백과 교유하면서 사군자를 비롯한 동양화 기법을 습득하는 한편 추사의 서화 양면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검여는 스스로 별호를 소완재(蘇阮齋)라 칭하고 고담(枯淡)하고 기준(奇峻)하며 둔중(鈍重)한 서풍으로 추사를 넘고자 하였다. 그는 추사와 마찬가지로 위비(魏碑)를 중심한 북비의 비학파의 글씨를 수용 발전시켰으며, 마지막으로 추사를 비롯한 중국 명가들의 글씨를 두루 공부하였다. 육조 해서의 강한 골기와 갈필의 금석기가 회화적 조형감각이 결부된 검여의 글씨는 그 맥에 있어 추사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추사가 사군자를 비롯 문인화에 빼어났던 점에 비추어 검여는 남종화와 서양화를 통하여 서예로 들어간 까닭에 그의 글씨도 장법과 포치의 조형성이 뛰어났다.
그러나 소전 이후 가장 빛나는 서예가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중은 어떤 면에서는 소전과 쌍벽을 이룰만한 서예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일본인과는 타협하지 않는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14세 될 때까지 학교를 들어가지 않았고 아버지의 지도 아래 한문과 서예 공부를 했다. 1938년 중동중학교 1학년 때(17세) 동아일보사 주최 전조선학생작품전에서 서예로 5개 부문을 통틀어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다음해 〈동아일보〉에 '궁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데뷔는 1941년경으로 본다. 1942년 일제의 눈을 피해〈우리 글씨 쓰는 법>이란 저서를 냈고, 그후 〈중등 글씨체〉·〈중학 서예〉·〈고등 서예〉 등을 출간하면서 서예활동을 전개했다. 애초부터 한글로부터 서체(書體)를 시작한 그는 고체(古體)를 현체(現體)로 쓰는 법의 개발에 몰두했는데 이는 서예가 비록 한자문화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에서였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추천작가로 추대되었고, 1954년 화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58년 동방연서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국전의 운영위원과 심사위원, 문교부 검인정 교과서 편찬위원을 지냈다. 그는 반세기에 걸쳐 주로 교육계와 저서를 통해 서예 교육에 전념해왔다. 1981년 회갑을 맞아 비문 등 모두 200여 점이 수록된 서집을 출간했다.
일중은 한글 서예를 쓰게 된 연유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내가 한글 글씨를 쓰게 된 것은 두 가지 연유가 있었다. 먼저 내 일은 내가 해야겠다는 것이고 그 다음엔 우리 집에 전해오는 궁체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말하기를, 글씨에 있어서 우리는 힘이 갑절 든다는 것이다. 중국 사람이라면 그들의 한문만 잘 쓰면 되지만은 우리는 그 외에 자국문자가 있으니 이것도 잘 쓰려면 두 글씨를 다 잘 써야 구비하여 쓴다고 보겠다. 그래서 이른바 국한병진주의(國漢倂進主義)를 내세우려고 한다. ……쓰다 보니 어떠한 체계를 세워야 공부하기에 편리한 것을 깨닫게 되어 약관의 나이로 모든 것이 미숙하지만 책을 하나 엮었다.『우리 글씨 쓰는 법』이란 책이었다."(『藝에 살다』)
"중국 사람이라면 그들의 한문만 잘 쓰면 되지만은 우리는 그 외에 자국문자가 있으니 이것도 잘 쓰려면 두 글씨를 다 잘 써야 구비하여 쓴다고 보겠다. 그래서 이른바 국한병진주의(國漢倂進主義)를 내세우려고 한다."(『藝에 살다』)
"서예의 근원과 필법의 정통이 한자에 있느니 만큼 이 글씨를 배우지 않고 서예를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국문은 우리의 고유문자이니 이 글씨를 우리가 배워 익히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藝에 살다』)
이렇게 일중은 궁체 작품활동과 더불어 국내 유명기념물의 글씨를 많이 써서 남기는 등 국내외에 그의 한글 궁체의 금석문이 많이 있다. 또 한편 한자 예서체 느낌의 판본체를 최초로 창안하여 보급하여 초중등 교과서의 모범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래에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학예사 이동국의 글을 인용한다.
"일중의 글씨는 한마디로 서예사에서 손꼽는 명서가들이 그래왔듯이 ‘옛 것에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가학(家學)을 바탕으로 현대 감각에 맞는 새로운 서체를 창안하고자 노력한 결과 안진경체로 필력을 얻고 장천비(張遷碑)와 예기비(禮器碑) 등의 한예(漢隸)를 조종으로 삼아 한글 고체의 필법인 전서체를 가미하여 소위 ‘일중체(一中體)’를 만들어 낸 것이 그 것이다. 이러한 일중의 예술은 그 형성 과정을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다섯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Ⅰ期 : 立志와 한글에의 관심(1934년 중동학교 입학 이후 1945년까지) Ⅱ期 : 축적(蓄積)과 개발(開發)(1945년에서 1962년까지) Ⅲ期 : 새로운 조형세계를 찾아서(1962년에서 1969년 일중묵연(一中墨緣) 설립까지) Ⅳ期 : 예서(隸書)와 행초서(行草書)의 융합(融合)(1969년에서 1980년까지) Ⅴ期 : 예술가로서 소요(逍遙)(1981년 이후 현재)
이 중에서 일중의 한글서예는 이미 Ⅰ기 때인 22세(1942년)부터 ‘우리 글씨 쓰는 법’을 저술한 것을 시작으로 일생을 두고 궁체 중심의 한글의 조형적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월인석보(月印釋譜) 등 한글 고판본의 글씨체를 토대로 하고, 한자의 전예 필법을 융합하여 ‘한글고체’를 제시하였다는 데에서 그 위대성이 있다. 그 대표작으로는 <枾葉山房八詠(시엽산방팔영, 1978년작)>, <月印千江之曲(월인천강지곡, 1988년작)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일중의 한자 서예는 전술한 바와 같이 중국의 역대 비 , 첩을 동시에 소화하여 가장 고전적인 입장에서 전 , 예 , 해 , 행 , 초는 물론 국 , 한문 혼용 등의 각 체를 구사하였다는데 특장이 있다. 특히 전예의 획법이나 결구가 해 , 행 , 초에 구사되면서 이들의 필법과 조형이 융합된 파서체(破書體)는 일중 예술의 득의처(得意處)라 자리매김할 수 있는데, 새로운 조형세계를 찾아 나선 일중 예술의 Ⅲ기와 Ⅳ기에 해당하는 60년대 말기에 시작되어 7, 80년대에 꽃을 피웠다. 이러한 파서체는 <淸陰群玉所記(청음군옥소기, 1979년작)>,<守素明德開物成務(수소명덕개물성무, 1980년작)>, <寸陰是競(촌음시경, 1980년작), <弘慶寺碑詩(홍경사비시, 1980년작)>, <歸舟(귀주, 1987년작)>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중 특유의 원만(圓滿)하고 둥글둥글한 원필(圓筆)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방필(方筆)의 혼용으로 예법(隸法)을 가지고 행초(行草)를 구사하거나 결구(結構)를 만드는(또는 그 반대) 쪽으로 진행되었다. "
ㅡ2004. 11. (이동국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학예사)
일중은 소위 '일중체'라는 서쳬를 확립하였고 사회 일반의 인기를 얻어 70~80년대에는 삼성그룹을 비롯하여 유수의 대기업체의 사명을 쓰는 회사 로고로도 많이 쓰였다. 그는 교육자답게 후진 양성에도 힘을 기우려 문하에 초정 권창륜 (艸丁 權昌倫) (1943 ~ ) ,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1948~ )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여기서 잠시 본론에서 벗어나는 감이 있지만 역사를 통해 관찰하면 훌륭한 스승은 뛰어난 제자를 양성 배출하지만 반대로 훌륭한 제자들은 그의 스승을 빛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추사나 소전같은 분들은 그들의 제자가 스승의 위상을 높혔듯이 오늘 날에는 초정이나 소헌 같은 한창 잘 나가는 서예가가 있어 그들의 스승 일중을 빛나게 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여초(如初) 김응현(金應顯 ,1927~2008)의 경우는 일중과는 약간 다르게 느껴진다고 해야할 것 같다. 여초는 형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동생인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과 함께 서예가로 이름을 날리는 서예가 집안 출신이다. 그는 추사 김정희의 맥을 이은 소전 손재형(1903-1981), 검여 유희강(1911-1976) 이후 형 일중 선생과 함께 우리 서예계의 양대 산맥으로 불려왔다.
1927년생인 여초는 휘문고와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50-1960년 국회보 주간을 맡았고, 국회 도서관 1호 직원이 되기도 했으나 붓을 놓지 않아 1956년에는 동방연서회 설립회원으로 참여했고 1969년부터 이사장을 맡아 수천명의 제자들을 길러왔다. 한국전각학회 회장, 사단법인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도 지냈으며 저서로 '동방서예강좌', '동방서범', '서연기인' 을 내는 등 서법 연구에도 매진했다.
여초는 대전, 소전, 예서, 해서, 초서 등에 통달하고 전각에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만의 독특한 글씨체 즉 '여초체'라는 것을 내놓지는 못한 체 2008년 생을 마감했다.
오늘의 서예가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서예 주변 환경의 변화에 관해 언급해야 할 것 같다. 60년대 이후 놀라운 한국경제의 성장, 사회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서예 인구도 급속하게 증가했다. 정확한 통계는 알지못하나 한자, 한글 공히 서예수요가 큰 폭으로 늘어 났고 중국의 대외개방 이후
한문, 한자문화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요즈음은 서예 학원을 비롯하여 전문 서예가들의 서실이 동네 마다 들어와 있으며 서예를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더구나 1980년 국전이 폐지된 이후에는 이에 대채할만한 규모의 전시회도 3~4개 생겨 오히려 등용문도 넓어져 서예애호가의 수는 날로 늘어나고 서예가 계층도 두터워져 유명 서예가가 상당 수 포진하고 있어 옥석을 가리기도 힘들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사 계열의 소전, 검여 등과 일중, 여초 계열로 대별되는 양대 산맥의 맥을 잇는 몇 몇 서예가를 중심으로 지금의 한국 서예계를 대표하는 서예가를 뽑을 수는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첫번 째 인물이 초정(艸丁) 권창륜(權昌倫)이다. 초정 권창륜(1943- )은 1943년 경북 예천 출생으로 중앙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에 일중 김충현선생에게 사사하여 국전 입선 10회, 특선 4회의 기록을 세우고 국전 국무총리상을 수상했고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하고 한국서예가협회 회장직도 역임했다.
이상의 화려한 경력에서 보듯 그는 여초 타계 이후에 한국을 대표할만한 서예가로 평가 받는듯 하다. 그는 5서(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를 다 섭렵하고 사군자, 문인화, 전각 등 다양한 분야에 능한 것으로 정평이 나 그의 이름은 중국, 일본 등 동남아 서예계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는 중국 북경에서 개인전을 열어 한중 문화교류의 장을 마련했고 고향인 예천군 용문면 능천리에
대규모 서예체험관을 건립하여 세인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서예를 계승 발전시키고 관광자원화하기 위해 건립된 전통서예체험관에는 대규모의 작품전시실,
유물전시실, 이론 강의실, 실기체험실, 교육시설을 갖추었다고 한다.
초정 다음으로 관심을 끄는 서예가는 초민(艸民) 박용설(朴龍卨)이다.
초민 박용설(1947~ )은 대구 계성중학교, 서울의 경동고등학교를 거쳐서울대 사대 체육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시절 그는 앞에 서술한 바와 같이 학남 정환섭의 문하에 들어가 서예수업을 했다. 학남 정환섭은 소전 손재형의 제자이므로 계보로 본다면 박용설은 소전의 계보를 잇는 셈이다. 초민은 미술대전에서 8번의 입선과 2번의 특선을 거친 뒤 1986년 초대작가로 선정되었다. 그는 이화여고에서 15년간 교편을 잡았고 1990년 9월부터 예술의 전당 서예아카데미에서 지금까지 지도교수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그는 5체에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습(博習)에 대한 신념을 지금까지 견지해 오고 있고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수되고 있다. 예컨대 제자들이 고윤서회(古胤書會)를 결성하여, 매년 60여명이 작품전을 개최할 때마다 중국의 최신 자료를 입수, 제공하며 각 서체별로 연찬해 나가도록 지도하고 있다. 고윤서회의 회원 중의 한사람인 시헌(是軒) 남두기(南斗基, 1953~ )는 예술의 전당 서예아카데미에서 지도교사로 활약하고 있다.
다음으로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을 들어야 하겠다. 1948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정도준은 10살 때 처음 붓을 잡았다. 그의 부친은 해인총림 현판을 쓴 유당(惟堂) 정현복(1909~1973) 선생이다. 그는 상경하여 건국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부친의 소개로 일중 김충현 선생에게서 본격적인 서예수업을 받으며 대학 공부보다 서예 공부에 전념했다.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작품 `조춘(早春)`으로 대상을 차지했고, 9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전을 시작으로 한국 서예의 깊고 은은한 멋을 유럽에 알려왔다. 2000년 독일 KIST 유럽 초대전, 2001년 프랑스 파리 미로갤러리 초대전, 2002년 프랑스 레임 초대전 등 지금껏 25차례 해외전을 여는 등 해외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2001년에는 경복궁의 흥례문 현판 휘호를 비롯해유화문 현판과 창덕궁의 진선문 숙장문 현판, 규장각 그리고 덕수궁의 덕홍전 중수기 등 숱한 문화재를 복원하며 그의 글씨를 남겼다. 그는 한글서예에도 독창적인 필치를 구사하여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으며 90년 9월부터 초민 박용설과 함께 예술의 전당 서예아카데미에서 지도교수를 맡고 있다. 그의 제자 한얼 이종선도 서예아카데미에서 한글부문 서예 지도교수로 활동 중이다.
네번째로 한사람을 더 뽑는다면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학정 이돈흥은 1947년 담양 출신으로 약관의 나이에 송곡 안규동 선생을 사사하고,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등 한국서예의 전통을 계승한 호남계열의 서예가로 알려져 있다. 나름대로 독창적 서체인 鶴亭體를 이뤄내는 등 한국 서단에서 활약중이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부이사장 등을 지냈다. 광주시립미술관 초대 ‘학정 이돈흥 서예술 40년전’을 열었다.
이외에도 동년배격으로 하석(何石 박원규), 취묵헌(醉墨軒 인영선) 등 많은 서예가들이 한국 서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