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돈의 마력(魔力)
임병량
돈이 개입되면 인간관계망이 헝클어진다. 금융업에 종사했던 난, 돈거래를 많이 했다. 한 번도 좋았던 기억이 없다. 돈과 엮이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미묘한 감정 기류가 형성된다. 신뢰 관계가 무너지면서 갑을관계도 바뀐다. 그로 인해 내가 원하지 않아도 오해(誤解)의 씨앗이 싹튼다. 그게 바로 거짓말쟁이 돈이다.
친척이나 친구가 경제적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서 ‘한 달만 쓰고 주겠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야박하게 딱 잘라 거절할 수 없다. “매일 돈을 만지는 사람이 그것도 못 해주냐”는 원성이 들려올 땐, 일상이 힘들고 정나미가 떨어진다. 원하는 금액은 못 해줘도 마이너스 통장이나 카드론으로 그의 어려움을 도와줄 수 있다면 상생이지만, 상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돈거래를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정이 딱해서 빌려줘야 한다면 돌려받지 않아도 된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감당할 만큼의 범위를 벗어나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돈거래를 잘 못하면 ‘돈 잃고 사람 잃는다’는 말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상환 날짜를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이 반복되면 갈등과 오해가 마음 한쪽에 똬리를 튼다. 마음은 자갈밭으로 변해가고 사회가 사막처럼 느껴진다. 정서가 흔들리고 매사가 불편하다. 혼자 저지른 일이 한계를 견디지 못해 아내에게 보따리를 풀었다. 평온한 가정엔 파도가 출렁인다.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법성포를 찾아갔더니 도와줘야 할 형편이라 돈 이야기는 꺼내지 못하고 왔다는 아내의 목소리가 공허하다. 혼자 견뎌야 할 일을 아내까지 힘들게 하고 상처받게 했으니 미안하다.
성실한 직장 동료 K가 주식 투자로 퇴직금도 없이 옷을 벗었다. H 지점에서 독촉장이 날아와 그가 퇴직했다는 걸 알았다. 말없이 떠나버린 그가 섭섭했다. 춘천에서 근무할 때 대출 보증을 서준 일이 핵폭탄이 되어 돌아왔다. 연체이자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도록 상환하고 서류를 갖춰 지급명령을 했지만, 부질없는 일이다. 능력 없는 사람에게 채무명의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발신인 주소도 없이 미안하다는 짤막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온 게 전부다. 그 이후엔 소식이 감감하다. 감정이 흔들리고 거칠어진다. 분노를 붙잡고 놓아주지 못하면 피해는 결국 내 몫으로 남는다. 밥맛이 없고 기력이 떨어지니 일상이 힘들다.
토요일 오후 늦은 시간이다. 몇 년 동안 소식이 끊겼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집 앞에 왔으니 잠깐 만나자는 내용이다. “친구가 빚 갚으려고 왔나 보다.” “그 친구는 그럴 거라 믿었어?” 당당하게 아내에게 말하고 밖으로 나와 보니 친구 부부가 서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집으로 안내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근황을 묻고 또 물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매일 만나면서도 편지를 써서 집에 가서 읽어보라고 줄 정도로 가깝게 지냈던 친구였다. 그 친구를 보자, 학창 시절 옥과 교실과 설산으로 소풍 갔던 정경이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친구는 옥과 이야기에도 반응이 별로다. 뭔가 초조한 몰골이다. 옆에 있던 부인도 긴장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기대하던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먼저 물었다. “무슨 일로 왔냐?”고, “죽지 못해 살고 있다”는 그의 표정은 어둡고 목소리엔 힘이 없다. “미안하지만 한 번만 더 빌려 달라”는 애원의 목소리가 초라하게 들렸다. 빌려준 돈은 생에 첫 집 마련 계약을 하고 잔금 지급 기일이 두 달 여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잔금이라고 말해줬지만, 지급 기일에 연락도 없이 실망을 안겨준 친구가 5년 만에 나타나 다시 한번 도움을 요청했다. 이게 그와 나의 관계인가 싶어 안타까웠다.
기대에 어긋난 섭섭한 마음이 잔금 지급 기일 때보다 더 아프다. 역지사지로 돌아가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아내에게 어떻게 이야기할까? 자신 있게 돈을 돌려받을 거라고 했던 말은 나의 소망에 그쳤다. 밖으로 나와 동네 한 바퀴를 걸었지만, 여전히 정신이 혼란스럽다. 그는 고향에서 공무원 생활로 평판이 좋았다. 그런데 공무원 길을 접고 힘겹게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들을수록 물음표만 그려졌다. 보증인과 구비서류를 갖춰 D 지점에 오면 대출해 주기로 했다. 단칼에 거절하고 싶은 생각과는 달리 나는 또 인정이라는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다.
미국 속담에 “처남에게 100달러를 빌려주면 두 번 다시 그를 볼 일이 없어진다.” 는 말이 있다. 이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돈거래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돈거래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다. 이게 바로 돈의 마력이자 환각제다. 돈거래 이후 소식이 끊긴 여덟 명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는 이유가 섭섭함 때문일까 아니면 그리움 때문일까? 그들은 선·후배, 직장동료, 친구, 친지, 동네 주민, 교인 등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다. 옛정이 그리워 안부를 전하고 싶어도 빚 독촉 때문에 연락하는 것 같아 주저하며 기다린 세월이 수십 년이다. “돈은 잃었어도 사람은 잃지 말자”고 말한 아내가 고맙다.
아직 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품었던 오해는 이미 공중으로 날려 보낸 지 오래다. 그들을 만나면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냐?’고 위로라도 해주고 싶다. 사람의 관계란 회복이 빠를수록 보약이 된다. 우리네 삶은 윤택해지는 데 비해 행복지수는 낮아지는 요즈음 ‘보약’이라는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와 돈거래를 했던 여덟 명 중 A는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슬픈 소식이 가슴을 울린다.
2.
인생은 지금부터
임병량
그날이 그날이지만, 해마다 연말이 되고 연초가 되면 지난해를 반성하고 올해의 계획을 세운다. 실천이 부족한 내용이 되풀이되지만, 그래도 목표를 세우는 게 낫다. 이루지 못한 내용은 장기계획으로 합리화하며 또 새해 첫날 어김없이 월별 할 일을 적는다. 삶은 이렇게 반복된 나날의 연속이 70년을 훌쩍 넘겼다. 살아온 인생을 반추하면서 행복한 여생으로 마감할 수 있도록 설계해 본다.
뒤돌아보니 70여 년의 세월이 순간이더라. 김형석(1920년) 철학자는 70대가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하면서 달걀의 노른자에 해당한 시기라고 했다. 60대 이전에는 모든 면에서 미숙했고 이후부터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에서 풀려난 시기며 인간적으로 성숙한 시기다. 내가 평생 하고 싶었던 공부나 의미 있는 일, 혹은 취미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103세 고령이지만, 아직도 글쓰기와 강사, 때로는 TV에 출연해서 강연한다. 그의 왕성한 활동은 이 시대 우리의 멘토다.
코로나 이전에는 김 박사 강연장에 열심히 참석해서 그의 삶을 배웠다. 나이가 들어 공부하면 치매 예방은 물론 정신건강을 위한 보약과도 같다. 책 읽기와 글쓰기는 뇌를 자극하고 노후가 화려해진다. 그의 삶은 건강과 품위, 연륜, 존경스러운 어르신, 이 시대의 자랑스러운 모범 인물이다. 옆에서 보고 들으며 김 박사처럼 살아야겠다고 굳게 주먹을 쥐고 삶의 의미를 가슴에 담았다. 그의 저서 『백 년을 살아보니』와 『행복 예습』은 삶의 지침서로 활용하고 있다. 행복이 있는 곳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며 옳은 일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같은 여건에서도 감사와 자족을 누릴 수 있다. 의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은 그 수고가 성장과 발전의 과정이기 때문에 남이 모르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 배움은 실천이 뒤따라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것이 실천해야 할 나의 숙제다.
성공한 사람은 계획을 실천하고 해야 할 일을 했다. 해마다 건강관리를 위해서 헬스장에 등록하지만, 결산해 보면 출석보다 결석이 더 많다. 이유를 물으면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처럼 사유가 많다. 건강관리보다 더 중요한 게 또 있는가? 반성해 본다. 내 몸 관리는 이론이 아니고, 실천이다.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병들고 나서 후회하면 이미 때가 늦지만, 당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마음의 건강은 부정의 감정을 피하고 긍정의 마음으로 감사와 칭찬하는 삶이 핵심 요소다.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미움으로 대한 적이 많았다. 아직도 그런 선입견은 나를 괴롭힌다. 마음이 건강해야 삶의 질이 한 차원 높아지고 생활이 즐겁다. 그런 줄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는다. 이것도 올해의 계획 속에 포함했다.
계획은 머리로 하지만 실천은 몸으로 한다. 지난해 활동한 내용을 들여다보니 지금까지 살아온 삶 중에 가장 확실한 노른자였다. 글쓰기 공부와 자원봉사, 여행 등이 일상의 균형을 이뤄서 감사하다. 회사는 연간의 실적이 대차대조표에 나타나지만, 개인에게는 계량화할 지표가 없다. 그러나 활동한 분야에서 인정받은 상을 받았으니, 삶의 황금기다. 황금기를 걷고 있으니 갈고 닦아서 누리는 일만 남았다. 어제와 오늘을 비교해서 한 계단씩 올라가며 즐기자. 인생은 지금부터다.
코로나19가 3년 동안 온 나라가 뒤흔들렸지만, 우리 부부는 감염되지 않았다. 감사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다소 누그러졌다 해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국민 대부분이 감염 경험이 있다. 자녀와 손주들도 감염으로 힘들었다. 직장이나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재택근무나 줌으로 공부하면서 경계 구역의 일정 선을 지켜야 했다. 손주들이 할아버지 댁에 오고 싶다고 조르기를 반복했지만, 인내를 배우는 시간이였다. 우리 부부는 일상이 외출이지만, 코로나와 멀리했던 것은 면역력 효과라고 생각한다. 면역력은 육체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근력이 더 중요하다. 마음의 긍정은 건강한 면역력 출발이다. 사람은 기본 욕구가 충족되어야 웃을 수 있다. 행복감과 편안한 감정은 누구나 원하는 희망사항이다. 이유 없이 짜증이 나거나 화를 참지 못하면 면역력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우울하거나 체력이 바닥난 경우도 그렇다. 나이가 들면 건강한 사람도 체력이 떨어진다. 젊은이들도 과로하거나 수면과 휴식이 부족하면 힘이 떨어져서 우울과 불안, 분노조절장애 등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면역력 향상은 건강의 확실한 담보다. 설악산 이 박사에게 들은 강의 내용이다. 올해도 목표 제1순위에 올린다.
면역력 향상에 도움 된 여행지가 자연휴양림이다. 자연휴양림은 코로나19로 급부상한 휴식처다. 예약하기가 힘들어졌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공기가 맑다. 그 지역에서 가장 빼어난 풍광으로 소문난 곳이다. 사람은 아름다운 곳에 있으면 복잡한 마음이 저절로 단순해진다. 찬란한 저녁노을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시끄럽던 마음이 조용해진다. 낙조의 아름다움으로 거칠었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행복감에 젖어 든다. 청명한 하늘과 새소리, 생명력 가득한 풀벌레 소리, 시원하고 맑은 새벽공기,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취하면 걱정과 불안이 노을 사라지듯 옅어져 본연의 나를 발견하게 된다.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 휴양림에 가면 바로 회복된다. 그곳에 가면 가치와 아름다운 삶을 재발견할 수 있다. 사람이 청정한 자연이나 아름다운 공간에 있으면 마음도 깨끗해지고 자신도 소중하게 느낀다. 어쩌면 우리는 깨끗한 자연이나 아름다운 공간을 자주 경험하지 못해서 점점 각박해지고 사나워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휴양림을 선호한 모양이다.
휴양림에서 조용한 산책길을 걸으며 얻은 생각이 인생은 지금부터다. 남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생존경쟁의 무거운 짐, 가족부양과 삶의 굴곡진 버거움을 모두 벗어버리고 이름 모른 새소리와 동행 하는 숲길은 지상천국이다. 저절로 생기(生氣)가 솟아나고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다. 이것이 자연치유력이다. 이 치유력이 내 몸에서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 두는 일이 평생 건강관리다. 숲속에서 얻은 영감은 좋은 글감 자료 생산지다. 자연휴양림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기(生氣)가 넘쳐난 삶으로 장수를 누리며 잘 살고 싶은 게 나의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