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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진본당과 북청본당. |
51. 함흥교구 북청본당
본당 설립 연도 : 1935년
소재지 옛 지명 :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읍 서리
현 지명 : 함경남도 북청군 서리
마지막 주임 : 알프레드 푹스 신부(1942∼19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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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청성당 캐리커쳐. |
함남 함흥에서 함북 청진으로 향하는 400㎞ 기찻길 주변에는 성당이 하나도 없었다. 가장 적당한 후보 지역이 인구 2만 명의 북청이었지만, 오랫동안 선교에 성공하지 못했다.
동쪽으로 영덕산이 둘러싸고 남서쪽 해안가를 따라 남대천과 보천천 주위에 좁은 평야가 펼쳐진 북청에 복음이 전해진 건 1930년 무렵. 서적을 통해 천주교를 접한 전하건, 전현 등이 함흥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게 계기가 됐다.
영흥본당 초대 주임 칼리스토 히머 신부가 1935년 초 북청을 찾았고, 이 소식을 접한 조선식산은행 지점장 박봉노(요셉)와 예비신자 방의석 등이 2만 8099㎡의 성당 대지를 마련하면서 그해 8월에 본당이 설립됐다.
2대 주임 비트마르 파렌코프 신부 재임 시절인 1936년 12월에 성당을 지으면서 복음화가 진전됐다. 벽돌조 성당의 종탑은 양파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본당 가구를 주로 제작하던 덕원 수도원 목공 수사들이 만든 목조 종탑으로, 뮌헨에서 알프스 방향으로 40여 ㎞ 떨어진 독일 바이에른 주 남동쪽 오버바이에른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종탑 형태였다.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 내에서 오틸리아 성녀에게 봉헌된 첫 성당으로, 북청성당 제대에는 다고베르토 엔크 신부가 한국에 올 때 가져온 성유물이 안치되기도 했다.
이어 1937년 8월 4년제 초등학교인 해성학교가 인가를 받으면서 선교에 가속도가 붙었다.
하지만 5대 주임 알프레드 푹스 신부가 1945년 3월 병사하면서 ‘목자 없는 본당’이 됐고, 광복 뒤 공산 정권의 박해를 받다가 1949년 5월 교구 내 다른 본당과 함께 폐쇄됐다.
52. 함흥교구 성진본당
본당 설립 연도 : 1941년
소재지 옛 지명 : 함경북도 성진시
현 지명 : 함경북도 김책시
마지막 주임 : 이재철 신부(1941.7∼19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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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9월 27일 성진본당 초대 주임 이재철 신부와 신자들이 본당 설립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역사적으로 함북 길주군의 일부였던 성진시는 1899년 개항장으로 지정돼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길주군과 합쳐졌다 나뉘기를 반복하다가 1941년 성진읍과 학성면이 합쳐져 성진부로 승격하던 시기에 성진본당이 설립됐다.
북청과 나남 사이 선교의 가교 구실을 한 본당으로, 그해 7월에 이재철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 150여 명의 공동체를 이끌게 됐다.
당시 성진본당 관할 구역의 주민 수는 35만 명으로 북쪽에서 손꼽힐 만한 도시였지만, 복음화의 길은 험난했다. 특히 공업지대여서 노동자와 일본인 사목에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교세는 그리 크게 늘지 않았다.
1945년 해방 직전, 일제의 패망이 임박하자 소련 공군기들이 청진까지 폭격, 함북 일대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고 성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폭격을 피해 월남하는 행렬과 만주에서 내려온 피란민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성진성당은 피란하는 선교사들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이 신부는 성당을 지켜야 했기에 성진을 떠날 수 없었지만, 성진성당과 사제관은 거의 비어 있다시피 했다. 최소한의 것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안전한 곳에 숨겨 둬야 했다.
덕원 수도원 루치우스 로트(Lucius Roth) 원장 신부가 1947년에 쓴 편지에 보면, 당시 성진본당 사정이 언급돼 있다. “성진의 이 베드로 신부는 본당에 자영 농장이 없어 우리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신자도 아주 조금밖에 없습니다.” 1949년 1월이 되면서 신자 수는 겨우 20여 명밖에 남지 않게 됐고, 주임인 이 신부도 청진본당으로 옮겨 가 ‘목자 없는 교회’가 됐다.
오세택 기자 (평화신문)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는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명동대성당에서 북녘땅 57개 본당 중 두 곳씩 지향에 두고 미사를 봉헌합니다. 6월 14일은 함흥교구 북청본당과 성진본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