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에는 싱어(갑), 레건(을), 테일러(병)가 제시되어 있고, 문제가 되는 선지 ㄷ, ㄹ은 다음과 같습니다.
ㄷ. C: 인간에게는 생명 공동체에 대한 불간섭의 의무가 있다.(테일러만의 입장)
ㄹ. D: 개체는 쾌고 감수 능력을 지녀야만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싱어와 레건의 공통 입장)
우선, ㄱ 선지가 학생들은 헷갈렸을 텐데, 이것이 오답임을 알아챈 학생들은 ㄱ이 들어가는 것은 모두 소거했을 겁니다. 그럼 ③ ㄴ, ㄹ ⑤ ㄴ, ㄷ, ㄹ 만 남게 되고, 결국 ㄷ 선지를 가지고 정답 여부를 판단했을 겁니다. 저는 당연히 ㄷ, ㄹ 선지 모두 검토할 것입니다.
위 ㄷ 선지가 테일러만의 입장이 될 수 없는 건, 평가원 관계자들도 다들 알고 있는 “환경윤리”, 데자르댕, 김명식?김완구 옮김, 연암서가, 2017에 나옵니다. 소개합니다.
<싱어는…어느 정도 과거의 실패를 근거로 판단하여 가능한 한 야생생물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정책을 권장한다. 그는 “만약 우리가 다른 동물들에 대한 불필요한 도살과 학대를 없앤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리건(레건)은 분명 이와 유사한 자유방임적 태도를 찬성한다.…리건(레건)은 권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생지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정책은 정확하게 보존주의자들이 원하는 것, 즉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것이 될 것이다.…우리가 생명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체들의 권리를 적절하게 존중한다면 그 공동체는 보존되지 않겠는가?>(pp.249-250)
‘생명 공동체에 대한 불간섭’을 주장한 테일러도 개체주의자인 점에서는 레건, 싱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생명 공동체의 범위’뿐입니다. 생명 공동체의 범위를 제외하면, 테일러와 레건의 입장은 매우 흡사합니다. 자신들이 도덕적 지위를 인정하는 개체에 대한 ‘예외적 침해’를 인정하는 것도 같고, 불간섭의 대상에 ‘개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같은 책, p.296, “불간섭의 의무 또한 소극적 의무다. 이 의무에 따르면 우리는 개별적인 생물체들의 자유에, 혹은 일반적으로는 생태계나 생명 공동체에 간섭하지 말 것이 요구된다.”) 이 내용에 이어서 테일러는 ‘사냥 등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레건 역시 사냥을 반대하죠. 그렇다면 ‘생명 공동체에 대한 불간섭’을 주장하는 레건과 테일러의 주장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ㄷ 선지의 ‘생명 공동체에 대한 불간섭 의무’는 테일러뿐만이 아니라 레건 입장에도 정확하게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넓게는 싱어에게도).
그런데 ㄷ 선지보다 더 문제되는 게 ㄹ입니다. ‘쾌고감수능력’과 ‘도덕적 지위’의 관계에 대해서 싱어는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ㄹ 선지는 정확히 싱어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평가원에서는 이 내용이 레건에게도 해당된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가 다들 알고 있듯이, 레건은 ‘쾌고감수능력’을 삶의 주체가 갖는 ‘10여 개의 특성 중 하나’로 봅니다. 채소 주스에 비유해보면, 10여 가지 채소를 믹서로 갈아서 채소 주스를 만들어 컵에 담았다면, 그 컵(개체)이 삶의 주체가 되고, 10여 종류의 채소는 각각 컵(삶의 주체)의 요소가 됩니다. 10여 가지 채소 중 하나라도 빠지면 채소 주스가 안 될까요? 레건의 논리에 의하면 정상적인 인간은 삶의 주체가 됩니다. 그런데 삶의 주체인 인간 중에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 삶의 주체에서 탈락할까요? 레건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당연히 부정했으리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출제자는 삶의 주체들이 갖는 10여 가지의 특성 하나하나를 ‘절대 불가결한 요소’, 즉 하나라도 결여하면 안 되는 요소(하나라도 결여하면 삶의 주체로 인정할 수 없는 요소)로 파악한 것 같습니다. 레건은 단지 삶의 주체들은 그러한 요소들을 갖기 마련이라는 정도로 나열한 것이지, 나열된 하나하나의 요소가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가 ‘고유한 가치(intrinsic value)’와 ‘내재적 가치(inherent value)’를 구분한 데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레건에 따르면 10여 개 특성들은 고유한 가치이고, 삶의 주체가 되는 개체 자신은 내재적 가치를 갖습니다. 그리고 양자는 통약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T.Regan, The Case Animal Rights, pp.235-36.).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도덕적 지위(레건에 있어서는 ‘삶의 주체’) 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컵들은 내재적인 가치를 갖는데, 그것은 컵의 내용물이 갖는 고유한 가치와 개념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선지 ㄹ(개체는 쾌고 감수 능력을 지녀야만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은 결코 레건에게 해당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쾌고 감수 능력은 ‘고유한 가치’이고, 도덕적 지위는 내재적 가치를 갖는 삶의 주체에게 인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레건은 “우리가 개체들이 경험하는 고유한 가치들을 총합하는 것으로 개체적인 도덕적 행위자의 내재적 가치를 결정할 수 없다.”라고까지 말합니다. 10여 개 요소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요소들을 다 합해도 그 사실만으로 내재적 가치를 갖는지 여부(삶의 주체가 되는지 여부 또는 도덕적 지위를 갖는지 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논의의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는 뜻입니다.) 왜 이 선지가 오류인지 알 수 있겠죠?
매번 환경윤리에서 논란이 발생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공부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매번 어수룩한 선지들을 양산하는 것 같아요. 현재 위 문항에 대한 이의제기가 없는 것은, 첫째, ㄷ 선지(생명 공동체에 대한 불간섭 의무)를 테일러가 주장했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서술되어 있지만, 그 점에 대해서 싱어나 레건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소개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학원강사들이나 교사들은 그 내용이 오직 테일러에게만 해당되는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ㄹ 선지에 대해서는 학원강사들이나 교사들도 평가원 출제자처럼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레건이 그 점에 대해서 정확히 뭐라고 말했는지 알지 못하고 있고, 고유한 가치와 내재적 가치에 대한 레건의 주장 역시 알지 못하고 있거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작년에 많은 문제들의 오류를 지적했는데, 이번 6모에서는 제가 지적한 오류들을 모두 피했더군요. 그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작년만큼은 아니지만 새로운 오류들이 몇 개 눈에 띕니다. 시간 되는 대로 글 올리겠습니다.
윤리교육과의 학문적 발전을 기원합니다.
첫댓글 6평 이의제기 게시판에 올라온 글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와 같은 연구서를 가져와서 자신들이 출제한 ㄹ. 선지가 올바르다고 주장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데자르뎅의 책에서 말하는 부분은 레건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레건의 입장을 해석한 것이지,
실제로 레건이 명시적으로 저렇게 말한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이것은 출처가 확인 된 정확한 내용은 아닙니다.)
@현돌 데자르댕 책을 보더라도 평가원 선지는 오류입니다. 데자르댕 책 어디를 보더라도, 그리고 현돌 님이 인용한 대목을 보더라도, 레건이 '쾌고감수능력(고유한 가치 중 하나임)을 가진 개체는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고 말한 적이 없죠.
장담하지만, 평가원은 레건이 구분한 '고유한 가치'와 '내재적 가치'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구분한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을 겁니다.). 장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쾌고감수능력'을 '필요조건'으로 이해하고 저런 선지를 만든 거예요.
@힉스 네, 저도 레건의 원서(왜 번역이 안 되었을까요..?)의 도덕적 지위 관련 부분을 읽었습니다. (cup 비유가 나와있는 부분)
말씀하시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평가원은 철학적, 학문적으로 틀린 경우에도 엉뚱한 내용을 인용하여 정당화를 하곤 하더라구요.
(위 인용문을 지운 이유는 혹시나 평가원이 저 덧글을 보고 엉뚱하게 답변할까 싶어서 삭제했습니다.)
@힉스 선생님 혹시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레건이 '고유한 가치'와 '내재적 가치'를 구분한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데자르뎅 환경윤리 3판에서 번역자들이 용어의 번역어를 바꿨습니다. (데자르뎅 환경윤리 3판, 523p)
"용어가 수정된 것이 꽤 있다. 리건의 'inherent value'와 테일러의 'inherent worth'는 이전 판에서는 '내재적 가치'로 번역했으나 여기서는 '고유의 가치'로 번역했다. 'intrinsic value'는 '목적적 가치'로 번역하였으나, '본래적 가치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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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윤리 3판의 용어 변화 때문에, 평가원의 답변이 이상해질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네요.
@힉스 가령,
ex)
선생님께서 쓰신 부분: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도덕적 지위(레건에 있어서는 ‘삶의 주체’) 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 데자르뎅 환경윤리 3판의 바뀐 번역어를 대입하면, 내재적 가치를 고유의 가치로 번역어를 바꾸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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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원이 말장난을 하지 않고, 학문적으로 타당한 답변을 해주길 기대하고 싶습니다.
비판 작업을 진행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응원합니다 ^^
@현돌 'inherent value'와 'intrinsic value'(테일러는 value 대신에 worth)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그리고 관련 환경윤리학자들은 그 용어들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나 하는 점은 서로 조금씩 다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레건은 고유한 가치와 내재적 가치를 구분하면서, 전자를 가지고 후자를 규정할 수 없다고 했다는 겁니다(예컨대, '쾌고감수능력'을 가지고 '도덕적 지위' 여부를 논할 수 없다). 여기서 데자르댕 번역자가 설령 번역어로서 '고유한 가치'와 '본래적(내재적) 가치'를 뒤바꾸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문제는 안 될 것 같네요. 다만, 혹시 평가원에서 이 문항에 대한 해설을 제시할 때, 님이 지적한 것처럼
@현돌 데자르댕 번역자가 번역어를 뒤바꾸어 놓은 것을 가지고 장난칠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근데, 평가원은 답변하지 않을 겁니다. 평가원에서 답변을 내놓는 경우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이의제기로 게시판이 난리 났을 때, 다른 하나는, 이의제기가 만만할 때. 그 어떤 경우든 자신들의 입장이 곤란해지는 이의제기에 대해서는 답변 안 하고 넘어갑니다. 아마 평가원은 이 문항에 대한 답변을 안 할 것 같네요.^^
@힉스 네 레간과 테일러는 유사하지만, 롤스톤 등 생태주의 철학자들은 (레간과 테일러와 달리) 'inherent value'와 'intrinsic value'를 반대로 사용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평가원이 이런 논의를 이해하는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고, 그에 따라서 정직하게 답변을 해주면 좋겠네요. (물론 답변을 안 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ㅠㅠ -> 뭔가 바뀌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금으로 운영하는 기관에서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지 않다니...)
@힉스 이의제기에 대한 여론 형성을 위하여 블로그에 위 글을 퍼가도 될까요?
평가원이 꼭 답변을 해주었으면 좋겠네요.
@현돌 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힉스 학생들도 배우는 바가 많을 글이라서 꼭 소개해주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편안한 저녁 보내세요. 선생님!
그러면 선생님 혹시 이 문항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비상에듀 생활과 윤리 교과서 122p의 "의무론의 입장에서 동물도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성장한 포유동물도 도덕적 주체로서 권리가 있기 떄문에 사냥감이나 놀이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레건에 따르면~'
이라는 문구에 대해서 선생님의 견해를 여쭈어보아도 될까요?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공부를 했던 내용에 따르면, '도덕적 주체'는 주로 도덕적 행위자를 의미하고, 도덕적 무능력자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과서는 도덕적 무능력자까지 포함하여 '도덕적 주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레건이 '삶의 주체'에 도덕적 무능력자가 포함된다고 말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레건의 입장에서 '도덕적 주체'에 도덕적 무능력자가 포함된다는 말은 금시초문입니다.
혹시 선생님께서는 교과서의 서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공부가 부족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면, 가르침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현돌 비상교육 교과서에 그런 표현이 있었나요? 그럼 그것도 오류네요. 현돌 님 지적이 타당합니다. 현돌 님 공부가 부족한 게 아니라, 제가 님을 평가하는 게 미안할 만큼 훌륭하게만 보입니다.^^
@힉스 네 수능특강 94p에 레건 "에 따르면 성장한 포유 동물은 도덕적 주체로서의 권리가 있기 때문에 사냥감이나 놀이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서술되어있어서, 수특이 무슨 이유로 저런 서술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여 교과서를 찾아보던 중 비상에듀 122p에서 해당 서술을 발견하였습니다.
아마, 수특 저자가 교과서를 무비판적으로 복사해온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EBS에 문의를 넣었었는데요(저 이외에도 다양한 분들께서 문의를 많이 해주셨더라구요.), EBS가 정오표를 발표했습니다. (도덕적 주체->삶의 주체)
@힉스 그런데 비상에듀 교과서 집필진은 이에 대하여 레건은 도덕적 무능력자까지 도덕적 주체로 본다고 하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시니, 확실히 교과서에 문제가 있음이 분명해지는 군요.
(비상에듀 교과서를 보는 학생들이 걱정되네요.)
귀한 답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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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저는 10년 정도 후에는 윤리학을 심층적으로 공부해볼 생각입니다만, 현재는 취미이자 교육 봉사적 목적으로 윤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 날 때 틈틈히 관련 논문과 원전, 연구서를 읽고 있습니다.
@힉스 그런데 책을 읽을 때 마다 제가 이전에 알던 지식이 잘못되었거나 부족했음을 깨닫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하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선생님께서 올려주시는 글들과 덧글들도 공부에 큰 참고가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